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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06/01/09 11:46:35
Name 윤여광
Subject [yoRR의 토막수필.#12]To Pgr21.com!

-BGM-
-Serial Experiments Lain OP Theme-
-Duvet By BoA-


  날카로운 바람이 스치며 살점을 베어나가는 듯 한 어느 겨울 날 외로운 도시의 중심 시가지의 사거리. 그 한 가운데 낡은 벤치. 그 곳에 한 남자가 앉아 있다. 남자의 행색은 매우 초라하다. 차려입은 남색 정장은 여기 저기 주름이 잡혀 그 품위를 잃었고 셔츠 또한 그랬다. 얌전히 묶여 있어야 할 넥타이는 그가 거칠게 풀어 제친 마냥 손에 쥐여진 채 바람에 나풀거린다. 스프레이 따위로 멋지게 뒤로 넘긴 머리카락은 한 바탕 수난을 겪은 듯 괴상한 모양새로 흐트러져 잇다. 이 외로운 도시의 시가지 가운데 큰 사거리의 벤치에 앉은 젊은 그는 마치 방금 직장을 잃은 듯 한 행색을 하고 또 한 그의 얼굴엔 아직 사그러 들지 않은 분에 넘친 불꽃이 이글거리고 있었다.

  한 남자가 많은 인파 사이로 힘 없이 걷고 있다. 아직은 그 품위를 잃지 않은 말끔한 검은색 정장과 흰 셔츠. 그러나 왠지 모르게 축 쳐져 있는 어깨는 그 역시 다분히 소모적인 논쟁에 힘이 빠져 스스로 일터에서 빠져나왔다는 짐작을 가능케했다. 그가 향하는 곳은 사거리의 그 낡은 벤치. 위험천만하게 도로의 한 가운데 놓은 그 벤치는 메마른 도시에 머물며 목이 마른 이들이 찾는 샘터 같은 곳. 적어도 그에겐 그랬다. 등 뒤로 그리고 눈 앞으로 쉴 대 없이 지나가는 자동차들 사이로 보이는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혹은 그 아래 그 위에 있을 이들을 보며 그래도 한 번만 더 힘을 내보자며 위안을 얻는, 비록 몸은 위험하되 비슷한 처지의 수많은 아픔을 보며 합리화 또는 자기 위안에 편리한 장소가 그 벤치였다. 그는 며칠 전 찾았던 벤치로 오늘도 하염없이 걷고 있었다.

  품위를 잃은 머리칼이 친절한 겨울 바람 덕에 그나마 보기 좋게 정돈이 됐을 즘, 벤치에 앉아 있는 그의 눈에 한 남자가 들어왔다. 나이는 자신보다 더 많아 보이며 그래도 잘 정리되어 있는 그의 옷차림이 같은 직장은 아니지만 직급을 따지자면 그보다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임을 깨달았다. 순간 삼켰던 분이 치밀었다. 그에게 이 벤치를 허락할 수 없었다. 어느 누구도 소유권을 갖고 있지 않았지만 적어도 먼저 와서 앉은 자의 치졸한 권리 만큼은 행사하고 싶었다. 느린 걸음의 중년이 먼저 앉아 있는 그를 보고 잠시 머뭇거리다 자신과 조금 거리를 두고 앉자 그는 입을 열었다.

“안녕하십니까?”

  살을 벨 듯이 춥다가도 머리칼을 정도해 주는 친절함을 보이는 바람 마냥 그의 인사는 변덕을 담고 있었다. 언제 변할지 모른다는 일종의 경계가 중년의 주변을 휘감았다.

“담배 태우시겠소?”

  중년은 인사 대신 담배를 권했다. 갖은 스트레스로부터 잠시 떠나있게 해주는 일종의 마약으로 그 벤치에 앉아 있는 이들을 위한 작은 선물임은 청년과 중년 사이에 맴도는 초라한 불문율이었다.

“감사합니다.”

  청년은 그의 호의가 그것도 윗 사람이 부릴 수 있는 썩은 여유라 생각했다. 얼굴은 작게 미소 지으면서 담배를 건네는 손가락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중년의 준에는 그것이 옆에 앉아 있는 그가 벤치에 너무 오래 앉아 있었다고 판단하게 만들었다.

“많이 힘드시지요?”

  그는 중년과 천천히 말문을 트기 위해 상냥한 목소리로 말했다. 듣지도 않는 이에게 막연히 분을 터트리기 보다는 자신의 말에 귀를 기울이게 하고 그 뒤에 자신의 논리로 상대를 무너트리는 것이 스스로에게 더 큰 위안을 줄 것임을 알기에 청년은 웃고 있었다.

“그렇지. 여기 있는 사람 중 편한 사람 어디 있겠나만... 그래도 내 심지가 약해 이리 힘든 것은 어쩔 수 없구만.”

  중년의 회한 섞인 말투가 청년의 귓가를 스치자 웃고 있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그는 틀린 사람이다. 나이가 많다 하여 초면인 나에게 바로 말을 낮춰 사용함은 윗 사람의 오만함에서 흘러나오는 웃기는 권위이다. 그는 틀렸다. 청년은 다시 입을 열었다.

“선생께서는 왜 이 곳에 오셨습니까?”

  중년이 대답을 꺼내자마자 가는 상대를 무너트리려 준비하고 있었다. 그 짜릿한 쾌감의 설렘에 다리가 떨리기 까지 했다.

“일 때문이지. 다른 게 뭐 있겠나.”
“괜찮으시다면 자세한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재미없는 사람 얘기 들어서 뭐 하겠나.”
“그래도 어린놈한테 나마 이야기 하시면 좀 편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아들이라 생각하시고 말씀해 보십시오.”

  그는 중년의 대답을 재촉했다. 그의 계획의 시작은 중년의 대답이 끝나야만 성립하기에.

“내 손 아래 사람과 심하게 싸웠지. 그렇게 큰 일이 아니었는데. 나도 모르게 큰 소리를 냈어. 칠칠치 못하게 시리.”
“무슨 일로....”
“그가 가져온 결제안이 문제였다네. 회사에서 새롭게 추진하는 사업안이 아닌 매년 정기적으로 치르는 사안이기에 갓 취직한 그 보다는 그래도 몇 년 더 오래 일한 나니까, 어떻게 처리하는 것이 제일 무난한 것인지 알고 있었지. 그런데 그가 전혀 새로운 방향을 제시해왔어. 그 태도가 너무도 당당했기에 묵살 시킬 수가 없었네. 또 세상에 틀린 말이란 없다는게 내 지론이기에 일단은 검토했지.”

  청년은 중년의 말 중 틀린 것은 없다 라는 말에 잠시 어깨를 떨었다. 지루한 푸념이 아닌 뭔가 주목해야할 필요가 있다고 느낀 것은 그 때부터였다.

“결과적으로 그것은 몇 군데 미숙한 면이 보이긴 했지만 훌륭한 사안이었네. 같은 방식으로 몇 년 씩 우려먹은 정책보다는 훨씬 좋았지. 그러나 수정해야 할 문제점을 그대로 안고 가기엔 회사에 돌아오는 위험 부담을 간과할 수 없었어. 나는 그에게 몇 가지 사항을 지적해 주었지. 그랬더니 그는 나에게 대뜸 그러더군. 내가 틀린 것이 뭡니까....라고.”

  청년의 손에 땀이 고이기 시작했다. 똑같다. 그가 이 벤치로 오기 전 상황과. 비록 직장이 달랐고 그가 마주한 상사가 다르긴 했으나 적어도 중년에게 이의를 제기한 신입은 그의 모습과 같았다.

“화가 났겠지. 애써서 만들어 올린 결제안을 몇 분 스윽 보더니 이것 저것 고치라고 하는게. 하지만 나로서는 그것은 전체를 부정한 것이 아닌 몇 가지를 수정해 절충안을 만들어 보자 제의한 것 분이야. 그가 또 한 번 나의 어디가 틀린 것이냐고 물었을 때, 아마 몇 번이나마 더 경험했다는 어줍잖은 우월감 때문이었을거야. 소리를 질렀어. 틀린 것은 없어. 다만 자네와 난 달라!!...라고.”
“그래서 결국 결제안은 어찌 하셨습니까?”
“다행히 그의 입사 동기가 그를 설득해서 절충안을 제출했네. 위에서도 꽤 긍정적으로 보더군. 고인 물이 트인 것 같다며.”

  청년은 그를 무너트리려던 계획이 사그러짐을 느꼈다. 힘 없는 중년의 목소리에 설득 당한 듯 했다.

“제 얘길 해드려도 되겠습니까?”
“그러시게.”
“부끄럽지만 전 당신에게 대들었던 이와 같은 이유로 이 곳에 왔습니다. 하지만 제 상관은 당신과 달랐습니다. 무조건 내 얘기가 틀렸다고 우길 뿐. 받아들이려 하지 않더군요. 나는 화가 났습니다. 내가 무엇이 틀렸는가. 그것이 틀린 것이 아니라 다른 것 일수는 없는 지. 조금 다르다고 하여 틀린 것이라 치부하기엔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제가 만든 결제안이 아까웠습니다. 그렇다고 나를 무조건 틀리다 배척하는 상사와 타협하기는 더더욱 싫었고요. 혹시 선생님과 같은 분을....”
“허허허허!!”

  갑작스러운 중년의 웃음에 그는 적잖히 당황했다. 그 웃음이 비웃음이 아님을 알았지만 연유를 알 수 없었기에 잠자코 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이보게 젊은 친구. 세상에 틀린 것이 없듯이 같은 것도 없다네. 대신 다른 것이 있듯이 비슷한 것이 있다네. 난 그렇게 생각하이.”

  청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신과 한 바탕 논쟁을 벌인 상사를 설득시킬 자신이 생겼다.

“틀리다고 하여 버리면 그것은 영원히 묻혀버리고 같다고 하여 곁에 두면 물이 고이면서 썩게 되지. 내가 몇 년씩이나 같은 방식으로 일을 처리할 때 회사의 발전이 없었듯 말일세. 반대로 다른 것을 마주하면 그 차이점을 찾아내 절충안이라는 발전을 만들 수 있고 비슷한 것을 보면 어울리는 색 속에 그렇지 못하고 겉도는 색을 볼 수 있지. 그럼 계속해서 그것을 고쳐나가게 된다네. 틀린 것과 같은 것은 있을 수 있네만 다른 것과 비슷한 것을 가슴에 두는 게 나나 자네에게 좋을 게야. 뭐 이건 순전히 내 생각이니 자네는 또 나와 다른 생각을 할 수 있겠지. 날씨가 춥구만. 난 이만 가봐야겠네. 자네도 어서 들어가게나. 찬 바람을 오래 쐬는 건 건강에 좋지 않아.”

  자신의 말만 끝내고 돌아가는 중년이 얄밉긴 했으나 청년은 오히려 그에게 고마운 마음을 지울 수 없었다. 그의 뒷모습이 사라질 때 까지 벤치 옆에 서서 인차 속으로 사라져 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당신과 나는, 다른 사람이었군요. 담배 고마웠습니다.”

  청년마저 자리를 비운 벤치는 이제 또 다시 외롭다. 지금 앉아있다 떠나는 저 두 사내와는 다른 이들을 위한 자리를 위해. 벤치는 오늘도 외로워도 눈물을 흘릴 수 없다.



To pgr21.com
많이 모자라지만. 이것이 pgr21.com에 드리고 싶은 제 이야기입니다. 언제나 논쟁이 떠나지 않고 다소 소모적인 싸움이 가슴 앓이 하는 것이 한 두 번이 아닌 곳이지만. 그래도 비슷하고도 다른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기에. 모자란 제 생각 계속해서 남겨두려 합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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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ss the tears
06/01/09 12:24
수정 아이콘
아고~~!!

좋습니다...좋아요!!
화염투척사
06/01/09 12:38
수정 아이콘
틀린게 아니고 다른것이지요. 글 잘 읽었습니다.
아케미
06/01/09 14:28
수정 아이콘
와아…… 감탄밖에 나오지 않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06/01/09 18:01
수정 아이콘
윤여광님 글을 읽으면 감탄이 먼저 나오네요. 교지 작업을 해서인지 '이건 작품인데' 하는 글만 보면 교정할 부분도 보입니다^^ PGR의 다른 분들도 이 글을 읽어봤으면 하는데, 논쟁적인 글에만 관심이 있어 아쉽네요. 처음 시작부분에서는 아름다운 수필인 듯, 중간에는 단편 소설인가, 마지막에는 우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음 작품 기대하겠습니다.
06/01/09 19:09
수정 아이콘
이글을 읽으신 분 숫자 만큼만 피지알을 피지알 답게라는 말을 사용하실 자격이 있으시다고 생각합니다.

피지알을 이용하여 자기 이속을 차리고 싶어 하는 사람들.....

이곳의 조회수만 이용하려고 하지 다른 사람에 대한 배려는 없는 논쟁꾼들...

다음 사람을 위해 벤치를 넘어 뜨리지는 말아 줬으면 하는데.. 어려울듯. ^^
06/01/09 19:46
수정 아이콘
뭔가를 생각하게끔 해주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이런 글 리플이 한자리수라니..조금은 씁쓸하네요.
06/01/09 20:21
수정 아이콘
연초부터 눈썹 휘날리게 바쁜거 보니, 올 한해도 정신없을 것 같습니다.그래서인지 자게 글도 다 못챙겨보네요. 그래도 토막수필을 빼놓을 수 없죠.^^
여광님, 감사드립니다. 감기 조심하시고 다음에도 좋은 글 기대하겠습니다.^^
You.Sin.Young.
06/01/09 20:29
수정 아이콘
다른만큼 비슷한 것이 있겠죠.. 그렇게 믿고 싶습니다만..
06/01/09 20:30
수정 아이콘
추게감인데 읽는 분이 별로 없네요.
알맹이 없는 피싱글들의 조회수와는 너무나 대조적인..
눈에 딱 들어오는 포장이 아니면 버려지는 듯해 씁쓸합니다.
문근영
06/01/10 00:29
수정 아이콘
이분의 글은 예전부터 꾸준히 읽었죠
06/01/10 14:11
수정 아이콘
얼라. 블로그에서 내용만 읽고
여기선 제목만 읽고.... 갑니다.

제목이 이것이였는줄은, 생각 못 했어요... 랄까.

오랫만에 "정독해서 읽은" 글이였습니다 ^^; 화이팅. 추게 고고고고고!
06/01/13 09:34
수정 아이콘
^^ 160뷰..
이글에 리플 다신 분들의 건의 사항은 항상 수용할수 있도록 하게겠습니다.
06/01/24 21:08
수정 아이콘
호미님이 이렇게 편파적일 수가!!

저도 잘 부탁드려요 .(__).
사탕군
06/09/03 20:05
수정 아이콘
흠...
예전에 읽었는데 왜 댓글이 없는지를 생각해보니 그때는 댓글을 달고싶어도 그럴수 없는 눈팅 유저신세였군요. ^^*
이 글에 댓글이 많지 않음은 자신의 속내를 한번 돌아보게 한 글의 영향력이 큼으로인한 침묵이 아닐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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