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GR21.com


Date 2002/09/03 03:21:14
Name 식용오이
Subject [긴 잡담] 삶과 죽음, 혹은 태풍과 일상.
태풍이 제 고향 제주를 강타하고 중부로 향하던,
지난 토요일 저녁 일곱시.

회사에서 나와, 교보문고 부근의 오래된 메밀국수집에서 혼자서 요기를 하고
서점에서 새로나온 책들을 이것저것 훑어보고 있을 때였습니다.

고교생 쯤으로 보이는 여학생이 저에게
"아저씨, 핸드폰이 계속 울리는데요"라고 말하더군요.
'보기 드물게 친절한 학생이군'이라고 생각하며 휴대전화를 꺼내 봤더니

'부재중 10통'이라고 찍혀있더군요.-_-

부재착신목록을 보니 모두 집, 삼사분 사이에 온 전화들이었어요.
집사람과 만나서, 결혼해서 지금까지 꽤 오랜 세월,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었기 때문에...
집으로 전화를 걸면서도 뭔가 불길한 예감을 떨칠 길이 없었죠.

'아이가 어디 아픈가'
'퇴근해서 청소하면서... 꼭꼭 숨겨뒀던 옛 편지랑 사진들 우연히 발견했나'-_-
이런저런 생각이 안들래야 안들 수 없었습니다.
전화벨이 한 번 울리고 전화가 연결되더군요.

"지빈아빠 큰일났어요."
(그건 아니군)
"지빈이 아파?"
"그게 아니고.... 집안에 각목이랑 쇠붙이가 날아들어와 유리창 깨지고..."
"다친데는?"
"다친데는 없는데 온 집안에 유리조각이랑... 바람은 계속 불고 각목이랑 쇠붙이는 계속 하늘을 날아다니고"

저는 경기도 수원의 모 아파트 18층에 삽니다. -_-

도저히 실감이 안 났지만, 황급히 서점을 나가 집으로 향했지요.
그때 광화문엔 비만 조금 내렸을 뿐, 바람은 별로 불지 않았어요.

9시쯤, 경기일보 앞 버스정류장에 내려보니,
못 박힌 각목들과 가건물 지붕으로 추정되는 구겨진 강화양철 더미들이 널려있더군요.
우산을 펼 수 없을 정도로 부는 바람과 불은 켜져 있어도 셔터는 내린 가게들...
상황은 별로 좋아 보이지 않았습니다.

내가 든 생명보험으로는 십여년 후 아들넘 대학등록금도 힘들텐데...
이런 후회 아닌 후회를 하면서... 어두운 밤 하늘,
안경을 부여잡고, 사주경계를 늦추지 않으며 집으로 향했습니다.

평소에 가득 차 있던 야외주차장엔 딱 한 대만 덩그러니 서 있더군요.
앞유리는 깨져 있고, 왼쪽 측면은 찌끄러져서.
'장난 아니군. 우리 차가 아닌 게 다행일세-_-'

집은, 더 큰 피해를 입으신 분들, 그리고 인명사고를 당하신 분들이 겪은 악몽에 비해선 아무 것도 아니겠지만,
나름대로 상상한 것 보다는 상황이 안좋더군요.
베란다쪽 다용도실 2중 유리문 두 짝 모두 완전히 깨져나갔고, 샤시는 뒤틀려있었고...
1미터는 족히 되어보이는 양철판은 깨진 유리와 디펜스철망 사이에 끼어있었고...
유리문 앞 디XX 냉장고는 폭탄맞은 외양을 하고 있고...
다용도실과 부엌을 나누는 2중 유리문은 완전히 금이 가서 깨지기 직전이더군요.
부엌 바닥에는 대못이 여러개 박힌, 2미터 가까운 투바이투 각목 세 개가 나란히 놓여있구요.

피해상황을 보아 하니....
각목 하나는 좌측 유리문을 뚫고 들어오려다 냉장고의 디펜스에 막혀
냉장고 측면만 파손한 후 꽂혀 있었던 것 같고
양철판이 선방을 쳐 우측 방충망과 유리문을 해체시킨 직후
두 번째 각목이 우측 유리문 하단부를 파고 들어와 부엌 바닥 옥장판에...
결코 지워지지 않을 30센티미터 규모의 생채기를 내 놓았고,
세 번째 각목은 우측 유리문 상단부를 통해 날아와, 부엌과 거실을 구분하는 진열장의 뒤편을 강타하여
주먹만한 구멍을 내 놓으며.... 아껴서 먹던 서양술 몇 병과 와인잔 몇 개를 날려버렸더군요.

제가 집에 있어서, 자주 그러는 것 처럼,
배넷에서 치열한 전투를 한 판 끝내고 부엌 정수기에서 물을 뽑아먹으려던 순간에 그 일이 발생했더라면,
아마 끝이 그리도 날카로웠던 세 번째 각목은 제 왼쪽 정수리를 통과했을 것이고
진열장을 뚫지는 못했겠죠. 딱 그 높이였습니다.

삶이란, 그리고 죽음이란 참......

그날 밤, 집안 구석구석의 유리조각과 가루들을 치우며, 참 많은 곳에 전화했습니다.

태풍은 올라온다는데.... 바람을 막는 것은 금가서 깨지기 직전인 부엌유리문 뿐인데다가
물은 차오르고 냉장고가 계속 비를 맞고 있어서 들여놓아야 하는데, 워낙 덩치가 커서 남자 셋은 필요했기 때문이죠.

관리사무소에 전화하면 "설비과로 전화하세요"
설비과에 전화하면 "사람이 없으니 경비실 아저씨들께 말씀하세요"
경비실 인터폰이 안되서 내려가보니
나이 지긋한 경비아저씨는 졸고 계시더군요,
폭탄맞은 그 자동차 옆 경비실에서.

속으로 뭔가가 욱, 치밀어 올랐지만, 사정을 말씀드렸더니
"아 옷(경비원 제복) 오늘 빨아서 다렸는데" <- 믿기 힘드시겠지만 실홥니다.

그래도 어쩌겠어요.
"아랫집 아저씨께 말씀드려서 셋이 하면 될겁니다. 부탁해요... 비싼-_- 냉장고에요"
거의 끌다시피 이끌어 올라와, 아랫집 벨을 눌렀더니
초등학교 6학년 작은 딸이 나오더군요.
"아빠 안계시니?"
"아빠는 아침에 낚시 가셨구요, 엄마는 교회가서 아직 안오셨어요. 무서워요, 아저씨"

마지못해 들어오신 경비아저씨는 집안 꼴을 보시더니 대뜸 이러시데요.
"아유~ 딴집도 다 이래. 냉장고는 보험처리하고, 지금은 다들 바쁘니 별 수 없을거야"
졸고 계시던 바로 그 아저씨, 새로 다린 옷이 젖을까 걱정하던 그 아저씨가요.
"한 분만 더 모셔오세요. 살릴 건 살리자구요"
"이건 내 소관이 아니니까 가서 연락은 해 줄게. 기다려"

물론 그 후 몇 시간동안 아무도 오지 않았습니다.

오지 않는 사람들을 기다리며, 칭얼대는 애를 재우며 가만히 생각해보니
저 흉물들의 정체가 궁금해지더군요.
'오늘 밤에 진짜 태풍이 오면 또 이런 일이 생기지 말라는 보장은?'
유리창이 없는 방은 화장실 뿐인 집에 살다가 그런 꼴을 당하면 당연히 드는 의문이겠죠.
다치지는 않았지만 굉장히 화나기도 해서.... 무척 알고싶어졌습니다.

경기일보 당직실에 전화를 걸었지만 졸린 목소리의 늙은 아저씨가 받길래 끊어버렸고
수원한국방송 당직실엔 아무도 전화를 받지 않고...
모 행정관서 재해대책반에 전화했더니 공무원 아저씨가 받더군요.
사정얘기를 했더니 처음 듣는 이야기라며, 경찰이나 구청에 한 번 전화를 해 보라더군요.
1번 국도 큰 길까지 떨어진 흉물들을 보고 왔는데...

그러면서 친절하게도, 작은 법률상식까지 가르쳐 주시데요.
"태풍에 날린 간판 같은 거 맞아도 별로 책임을 물을 방법이 없어요"
저로선 저 흉물의 관리자(소유자)에게 중과실이 있어도 과연 그럴지 궁금했고
그런 건물을 관리감독하는 행정관청의 감독상 책임문제는 어떠냐고도 묻고 싶었지만
'니가 뭘 잘 모르나본데', '바쁜데 괜한' 이라는 뉘앙스를 너무도 진하게 풍기시는 분께
예의가 아닐 것 같아 참고는 전화를 끊었어요.

모 구청의 민원실에서 전화를 받으시던 분은 조금 상태가 나았지만
"알아봐서 전화를 드릴테니 기다려주세요. 먼저 피해접수부터 하시죠"
물론 전화는 없었죠.
피해접수를 받던 젊은 여성공무원께, 비슷한 접수 없었냐고 여쭤봤습니다.
건조한 목소리가 돌아오더군요. "더 큰 사고들이 많네요." -_-
23층 높이에서 쇠뭉치들과 각목들이 춤을 추고, 멀쩡한 집안에 뚫고 들어오는 일 보다
더 큰 일들도 물론 많겠고, 누구에게나, 특히 그런 분들께는 힘든 밤이란 사실도 인정했지만
원인규명과 재발방지에 대한 의지, 문제 해결에 대한 책임있는 자세를 느낄 수는 없었습니다.

결국, 그 밤, 더 이상 사람과 통화하지는 않았답니다.

다 포기하고, 멍~ 하게 태풍소식을 전하는 티비앞 소파에 혼자 앉아....

'태풍 속에서도 일상은 계속되고,
일상의 모습은 태풍 속에서도 여일하다'고.....
몇 번이고 되뇌고 있던 저에게
속에서 끓어오르는, 뭔지 모를 울컥함에 가슴앓이를 하고 있던 저에게
갑자기 화면 한 구석 전화번호 하나가 눈에 확 들어오데요.

그 번호로 전화를 연달아 몇 통 하고 나서야, 나름대로 길었던 하루가 흘러갔구나,
뭐 그런 안도감에 몸을 눕혔답니다. 물론 잠은 못 들었구요......


사족 하나. 그 흉물의 정체는 다음날 아침에 알았답니다.
멋 부릴려고 '꾸며놓은' 아파트 옥상이 뜯겨서 날아다닌 거였습니다.-_-
하지만 돌아다녀보니 저희 집 처럼 왕창 폭탄맞은 집은 별로 없어 보이더군요.

사족 둘. 모아파트 시설 및 관리부실이나, 공무원의 근무해태를 지적하려고 쓴 글이 아니오니,
'참 재수없는, 아니면 재수좋은 PgR21 식구 야그구나' 하고 넘어가 주시길.
잡담으로 여기에만 쓰는 글이고, 그날 고생했던 수많은 분들께 누를 끼치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사족 셋. 태풍피해와 수해를 입으신 분들께, 진심으로 위로의 말씀을 드립니다.



식용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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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헐....그런 일이..저도 집이 강원도 동해라는 곳이라서..
일요일날 뉴스보고 전화연락이 안되 발만 동동 굴렀다는..-_-;;;
물론 아무일 없었습니다..^^;;
마요네즈
02/09/03 03:35
수정 아이콘
부인분께서 많이 놀라셨겠네요.. 그리고 식용오이님께서는 열 좀 많이 받으셨을듯..
다시는 이런 악몽같은 일이 벌어지지 않기만을 바랍니다..
그리고 저역시 태풍피해와 수해를 입으신 분들께, 진심으로 위로의 말씀을 드립니다...
응삼이
02/09/03 03:58
수정 아이콘
긴 악몽을 꾸셨네요.-_-;
상상만으로도 끔찍합니다. 사람 안 다친걸로 위안을 삼으세요.
김희제
02/09/03 04:22
수정 아이콘
저도 삼년인가 사년전 쯤에 태풍에 피해를 입었었더랍니다 -_-;; 의정부 회룡역 근처에 살았는데 바로 옆 개천이 넘쳤다는 -_- 하필 일층에 살아서 집에 물이 스며들기까지 했었죠. 그날밤은 진짜 멋진 밤이 었었죠 ^^;; 정문중간까지 물이 차서 나갈 수도 없고 무엇이 터졌는지 쉭쉭대는 소리와 함께 형수와 조카는 12층으로 피신시켜 놓고 형이랑 둘이서 죽을각오 하고 라이터를 켜봤더랍니다 ^^;; 다행히 가스가 아니어서 죽지는 않았는데 참 미친짓이었었죠 -_-;; 다음날 아파트앞 가득한 진흙과 자동차 청소에 하루를 보내고 일주일 동안 물은 급수해서 먹었다는 -_-;; 수재물품이라고 나오는데 라면 5개 퐁퐁하나 자질구레한거 몇개 나오더군요. 아 참 물난리 날때 경비아저씨는 보지도 못했다는 ^^;; 물 넘친것도 사람들이 소리쳐서 알았다는 -_-;; 경비아저씨는 왜그리 도움이 안되는지 -_-;; 어쨌든 나중에는 그것도 추억거리가 되더군요 ^^;; 가끔 형이랑 그 얘기를 하면서 웃고 한답니다.
Dark당~
02/09/03 09:50
수정 아이콘
집에 계셨던 분들 정말 놀라셨겠습니다..(똑같다.. 영선님이랑.. -_-..)
전 더 높은 24층에 살고 있는데.. 작년인가.. 그 때도 태풍이었던거 같은데.. 옆동의 샤시 창문이 통채로 떨어진 적이 있었더랬슴다.. 물론 다행히 아래 화단으로만 떨어지고 주변으로 크게 튀지 않아서 아무런 피해가 없었던 것으로 기억나지만.. 그날 전 집에서 왠 종일 떨었었는데...
이제는 다 정리가 되셨기를.. 그리고 이번엔 역대 사상 최고의 피해라는데... 피해 입으신 분들.. 모두 얼른 복구되시길..
Dr. Lecter
02/09/03 10:00
수정 아이콘
일요일에 뉴스를 안봐서 몰랐었는데 월요일에 출근해서 시골친구랑 채팅하다보니
뉴스에서 시골에 물이 많이 넘쳤다고 했답니다..
제 고향이 충북 영동이거든요.
하천이 넘쳐서 주택가가 침수됐다던데.. 암튼 부랴부랴 전화를 해봤더니
부모님이 우리동네는 괜찮다고 하시더군요.
ㅠ.ㅜ 부모님 죄송합니다. 그것도 모르고 하루종일 탱자탱자 지냈는데..
02/09/03 10:34
수정 아이콘
수해가 발생할 때 마다 물의 무서움과 소중함을 다시 느끼게 됩니다..TV에서 처참하게 뭉개진 마을들을 보니 할 말이 없더군요...게다가 물이 너무 많이 와 피해를 본 지역에서 이번에는 상수도 기능 마비로 물이 없어 고생이라니... 저희집이 한 일주일 정도 전기, 전화, 수도 다 끊겨 봐서 아는데 (100% 인재로요...-_-;) 수도 끊기는 건 나머지 것들과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불편하더군요...
목마른땅
02/09/03 11:41
수정 아이콘
그래도,, 가끔 공무원들의 태도를 보면 화가 나지 않을 수 없더군요. 저희 친척집에서도 비슷한 난리가 나서 전화가 왔는데, 더 심한 사고가 있으니 참아달라는 식의 말투로 침통한 수재민들의 마음을 더더욱 무겁게 만들고 있다는, 따뜻한 위로의 한마디가 필요한 상황에서 그들은 왜그리 건조한지 잘 모르겠네요. 식용오이님 힘내시고 피해복구 잘하시길 바랍니다. 그럼..
02/09/03 19:30
수정 아이콘
반가운 식용오이님의 글이 있길래 얼른 클릭 했더니... 불안하게 보이던 제목처럼 엄청난 재난이 있었군요. ㅠㅠ;;;
그나마 가족분들이 다치지 않으신것 같아서... 불행중 다행입니다. 정말 생각만 해도 끔찍하군요.
정말 힘든 하룻밤이었겠습니다. 악몽도 아니고... 악몽이라면 깨고나면 그만이지만, 이건... 심심한 위로의 말씀을 드립니다.
근데, 아파트 옥상의 가건물이 원인이라면 아파트 운영위원회에서 보상 받을수 없는건가요? 뒷처리에 제법 돈이 들텐데... -_-;;;
02/09/04 00:10
수정 아이콘
가족분들이 많이 놀라셨겠네요. 요 며칠은 뉴스도 제대로 못 봤습니다.
너무 안타까운 일들이 많더군요. 땡볕에 고생해서 키운 농작물들 다 날려버리고
허탈하게 바라보고 서있던 농민들, 책을 다 잃어버려 발을 동동 구르던 고3 수험생...
집이 그 지경이 되었으니 몸도 그렇지만 마음 고생도 심하시겠네요.
덧붙이자면, 모든 공무원이 그런건 아니랍니다. 며칠동아 철야하고 여기저기서
걸려오는 전화 다 받아주고 복구불능에 발 동동 구르며 안타까워하는 공무원들도 많거든요.
식용오이
02/09/04 01:54
수정 아이콘
걱정과 위로를 주신 분들께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_ _)
하숙방과 반지하방을 전전하던 대학시절을 제외하곤 주로 고층아파트에 살다보니, 솔직히 자연재해를 '남의 일'로만 생각해왔는데, 작은 일이지만 이런 일을 겪고서 참 많이 반성하게 되더군요. 그리고 글을 써 놓고도 아자님 말씀처럼 많은 분들께 누가 되는 이야기가 아닌가, 소심한 저에겐 걱정스럽기도 했답니다.
그리고 p.p.님. 오늘에야-_- 관리사무소에서 연락이 왔는데 자기들 돈으로 고치면 '적당한 범위' 안에서 보조해 준다는군요. 솔직히 조금 괘씸해서... 디XX를 지X로 바꿔버릴까, 하는 나쁜 생각도 했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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