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te |
2003/11/13 16:53:46 |
Name |
미남불패 |
Subject |
[회고]사랑의 짝대기 |
언젠가 제가 썼던 글의 짜투리에 짧게 말했던 일입니다. 늦가을 빼빼로데이의 후유증때문인지는 몰라도 기분이 '거시기'한 와중에 문득 그때 일이 생각나 끄적여 봅니다..^^
하늘은 높푸르고 햇살은 따사로운데 바람까지 서늘한 요즘같은 날에는 여자친구 없는게 더욱 서러워지곤 한다. 솔로가 외로운게 어찌 가을 한철이겠는가 마는 잊고 지냈던 외로움이 더욱 사무치리만큼 좋은 날씨임에는 틀림없다.
친구라고 있는 이들도 나랑 별반 차이 없는 양반이라 누구하나 있어야 가지를 칠텐데 외롭긴 마찬가지다. 그저 동병상련의 정을 나누며 외로움을 잊으려 서로 부대낄 뿐, 동성친구로는 해결안되는 허전함은 깊어갈 뿐이다.
그렇게 친구들과 부대끼던 중... 솔로에게 잔인하기만한 축제때 있었던 일이다. '황기'라는 우리가 술먹고도 못할 만행을 맨정신으로 해내는 친구가 있는데, 그 친구와 몇몇 친구들과 더불어 주막에 '술'을 먹으러 갔다. 자리를 잡고나서 우리는 누가 먼저랄거 없이 주위를 둘러봤다. 주위의 테이블은 남녀서로 정다운데 외로울사 이내몸은 뉘와 함께 술마실꼬...
이래저래 술이 당겼고 묵묵히 술잔을 기울이다 보니 깊은 밤의 서정적인 분위기를 음미할새도 없이 몇병의 막걸리는 금새 바닥을 드러냈다. 막거리를 추가하고 나서 언제나 그렇듯 걸쭉한 음담패설과 험난했던 군대얘기를 안주삼아 술을 비우다 보니 또 바닥나는건 순간이었다. 재차 막걸리를 추가시키던 그때... 보통때도 제정신이 아닌 우리의 호프 '황기' 술이 거나하게 취해서 우리주문을 받으러 온 이쁘장한 아가씨에게 수작을 건다. 그때의 황기에게는 주막에서 잠시 일하는 여대생과 단란주점에서 웃음파는 아가씨의 차이점을 구별해낼 능력이 없었다. 그리고... 우리에겐 말릴 정신이 있었지만 아무도 나서서 적극적으로 말리지는 않았다.
"아따... 우리가 술도 많이 시키고 안주도 많이 시키고 했는디 이대로 가믄 섭섭하지요이..."
"뭐... 필요하신거 있으세요?"
"아니뭐 꼭 필요한게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고..."
"저.. 그럼 가볼께요."
그 아가씨는 그냥 웃음으로 자리를 회피하려고 하는데 황기는... 집요했다.
"거 성질급하기는... 잠만 기다려 보시쇼. 그..랑께 거시기 뭐시냐..."
그러면서 우리 눈치를 살핀다. 노래 한곡 부르게 하려나? 우리가 눈빛으로는 계속 하라고 하면서 입으로는 성의없이 말리는 시늉만 하자 황기는 거칠것이 없었다. 그가 뭘하든 우리가 반대하지 않을거라는 확신이 들었던 것이다.
"사랑의 짝대기!!"
"네?"
"여기 우리들이 어렵게 모였는디 다들 꽃미남이라... 그래도 그중에 쪼까 더 잘생긴 넘이 있지 않것소? 걍 솔직히! 객관적으로! 함 찍어주고 갔으믄 하는디..."
아가씨는 몹시 난처해 했다. 위에선 달빛이 아래선 촛불빛이 써라운드로 감싸주는데 그걸 바라보는 남자들은 적당히 술에 취한 상태였던지라... 그녀의 난처해하는 자태는 몹시도 아름다웠다.
"저 가볼께요."
환하게 웃음지으며 그녀는 우리 곁을 떠나려 하고 있었다. 그러나 웃음만으론 우리의 아쉬움을 달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그때... 나보다 먼저 다른 친구가 입을 열었다.
"이 친구가 술이 좀 많이 취해서 실례했습니다..."
저 친구 술 그만 먹였어야 되는데.. 하고 생각하는데 그 친구는 말을 이어갔다.
"그래도 기왕 오셨는데 그냥 사심없이 한명 찍어주고 가세요. 아가씨한테 찍혔다고 스토킹할 사람도, 안찍혔다고 자살할 사람도 여기 없으니까요."
무서운 친구... 그 친구와 한통속이 된게 그리 든든할 수 없었다. 그녀는 어쩔 수 없이 우리들을 찬찬히 훑어보기 시작했다.
내가 아침에 세수는 했던가... 안했던 것 같다. 눈꼽은 떼었었던가. 지금 확인해 보는건 자살행위다. 좀처럼 거울을 안보고 사는 나로서는 그때 내 모습이 어떻게 비춰질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수줍음 많은 아가씨를 느끼한 눈빛으로 뚫어지게 쳐다보는건 결코 득이 되지 못한다... 아가씨를 살짝 쳐다봐 주고 먼 산 바라보며 가당치도 않은 카리스마를 조성하려 애쓰다가... 문득 친구들을 둘러보니 발칙하게도 나와 같은 설정을 진행중이었다. 짧고도 긴 정적이 지나고...
"이쪽..."
하며 그녀가 가리킨 사람은... 나였다. 다름아닌 나였던 것이다. 하늘은 풍진세상에 날 내보내시어 고행을 강요했지만 가끔 희망도 던져주는 자상한 존재였던 것이다.
당연히 친구들은 난리가 났고 그 소란스러운 틈을 타서 그녀는 잽싸게 빠져 나갔다.
"이건 말도 안돼."
"촛불이 가까이 있었어. 조명발이야.
"니가 돈이 많아 보여서 그런것이여. 너무 좋아하지마."
"아가씨가 부끄러워서 그냥 아무나 찍고 갔구만."
"우쒸. 내 등뒤에 있어서 날 못본것이여."
친구들의 시샘어린 말들은 내 좋아진 기분을 원상태로 돌리기엔 부족했다. 아니... 기분은 더 좋아지는 것 같았다. 난 애써 담담한척 대꾸해 주었다.
"허허... 그려그려... 아가씨가 부끄러워서 그냥 찍기 편한 날 찍었는갑따. 다들 잘생겨서 난 생각도 안하고 있었는디 의외네."
승자의 여유는 이런것이었구나... 그렇게 기분 좋은 추억을 간직한채 축제는 끝이 났다.
난 정신없어 못봤는데 그 아가씨 손가락에 커플링이 끼워져 있었다고 한다. 그 인물이면 임자 없는게 이상하니 놀랄일도 실망할 일도 아니다. 그녀가 그러했듯이 나도 사심없이 기뻐했으니까...
그 일 있고 나서 그리 많은 시간이 지난것도 아닌진데 날 지목했던 그 아가씨의 얼굴도 생각이 안난다. 하지만 내가 지목당했었다는 그 사실은 내 평생 술자리에서 자랑거리로 남을 듯 싶다.
"나가 예전에 대학교 다닐 때 축제가 있었는디 말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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