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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22/08/24 00:37:39
Name 구텐베르크
Subject 무지의 합리성 (수정됨)
지식 예찬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섣불리 지식을 긍정하고 무지를 부정하지만 사실 무지에도 "유용함"이나 "합리성"은 있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무지가 유용하고 무지가 합리적일 '때'가 있으며, 지식이 무용하다 못해 유해하고 지식이 비합리적일 '때'가 있습니다.

가령 아래 글에서 어느 논자께서 비트코인의 장래에 대해 전망해 주셨습니다. 그 글을 평가할 지식으로 별반 내세울 것이 제게는 없습니다. 하지만 그건 압니다. 비트코인이 초기에 알려지지 않았을 때 누군가에게 그에 대한 '지식'이 있었고, 그 지식에 근거해 투자를 했었다면 그건 그에게 매우 유용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비트코인이 고점에 있었을 그 때에서야 비트코인에 대한 '지식'이 생겼다면, 그 지식은 썩 유용한 역할을 하지 못했을 거고, 오히려 누군가에게는 패가망신의 계기가 되었을 겁니다. (존버를 하면 무조건 좋다고 하실지 모르겠는데, 세상에는 존버를 할 수 없을 수 밖에 없는 이유를 가진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래서 지식이란 야누스의 얼굴이고 양날의 칼이며 선 뿐 아니라 악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입니다. 제 때 찾아온 지식은 약이 되고, 제 때가 아닌 때 찾아 온 지식은 독이 됩니다.

내가 가진 지식들을 살펴 보면, '그 때 그걸 미리 알았더라면' 이라는 생각이 드는 지식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정반대의 관점에서 찬찬히 생각해 보면, '그 때 그걸 차라리 몰랐더라면' 이라는 생각이 들게 만드는 지식들도 있습니다. '그런 건 좀 늦게 알았어도 좋았는데', '그런 건 좀 늦게 눈을 떴어도 좋았는데', '몰랐더라면 차라리 나았을 걸' 하는 지식들도 있습니다. 모든 지식이 언제나 가치 있고, 언제나 유용한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때로는 무지가, 무지를 선택하는 것이, 무관심이 합리적인 선택이기도 합니다. 언제나 지식이, 앎이, 앎을 선택하는 것이, 호기심과 관심을 갖는 것이 합리적인 것은 아닙니다. 어떤 정보는, 그 정보를 갖는 것이 오히려 실이 되기도 하고, 그 정보를 갖는 것은 득이 되지만 그 정보를 갖고 있다는 정보가 알려지는 것은 득이 아니라 실이 되기도 합니다. 무지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무지가 득이 되고, 무지가 유리하고, 무지가 선이 되는 때가 있습니다.

내가 가진 어설픈 지식, 불완전한 지식을 신뢰하기보다, 차라리 무지 상태가 나은 경우가 있습니다. (그 무지가 겸손을 수반한다는 전제에서 그렇습니다.)

부동산에 대해 아무 것도 몰랐던 어느 사회초년생이 작년까지의 폭등장이 되어서야 비로소 부동산에 눈을 뜨고 부동산 투자를 했다고 생각하면 아찔합니다. 차라리 모르는 것이 약입니다. 모르는 것이 언제까지나 약일 수는 없겠지요. 그러나 모르는 것이 약일 시기가 있기도 있는 것입니다.

가끔 어렵고 가난한 집안 사정 때문에 공부를 포기하려 한다, 어떤 진로를 포기하려 한다, 어떤 선택을 포기하려 한다, 하는 안타까운 글들을 발견합니다. 그 어렵고 가난한 사정에 대한 "이해", 그것 역시 지식입니다. 그 가난이 가족을 비롯한 주변인들에게 가져다 주는 어떤 예상되는 고통들에 대한 이해가 있기에, 당장 내가 이런 저런 것들을 포기하고 돈을 벌어야 겠다는 생각이지요. 그것 역시 그것 대로 합리적이고, 그런 사정들에 대해 무지하다면 그건 그거대로 무지하고 철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때로는 바로 그 무지와 그 철없음에 힘입어 포기하는 것이 합리적인 것으로 보이는 어떤 것들을 포기하지 않는 것이 결과적으로는 더 합리적인 경우들도 있습니다. 돌이켜 보니 그렇습니다. 때로는 무지가, 몰이해가, 식견없음이, 철없음이, 차라리 만용이라고 해야 할 용기, 무책임이라고 해야 할 무위를 낳고, 그리고 때로는 그것이 더 좋은 결과를 가져다 주기도 합니다. 그 반대가 되기도 하구요.

그래서 저는 지식이 무엇에 대한 것이건 언제나 좋은 것이라는 명제에 동의하지 못합니다. 베이컨의 말대로 지식은 힘입니다. 그러나 때로는 해롭게 쓰일 수 있고, 해로운 결과를 가져다 줄 수 있고, 그 지식을 가진 자 자신에게 해로운 결과를 가져다 줄 수도 있는 위험천만한 힘입니다. 그러니 지식을 언제나 예찬할 일은 아닙니다. 지식을 주겠다고 하는 이들, 지식을 주었다고 하는 이들에게 언제나 감사할 일도 아닙니다. 때에 알맞은 무지는 때에 어긋난 지식보다 오히려 낫습니다. 적절한 무지, 심지어 적절히 선택되고 의도된 무지는 지식보다도 그 결과에 있어 합리적이기도 합니다. 어쩌면 우리가 지식을 필요로 하는 것은 적절한 순간에 적절하게 무지하기 위해서입니다.

p. s. 오해를 피하기 위해 첨언하면 저도 비트코인 있기는 있습니다.

* 손금불산입님에 의해서 자유 게시판으로부터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24-04-16 0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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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ax_Aria
22/08/24 00:41
수정 아이콘
책 한권만 읽은 사람이 제일 무섭다는 이경규옹의 명언이 떠오릅니다.
구텐베르크
22/08/24 00:43
수정 아이콘
얕은 지식은 깊은 지식과 달리 무지에 대한 지식을 결여하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세인츠
22/08/24 00:45
수정 아이콘
(수정됨) '내가 어떤 현상에 대해 모른다' 는 것을 아는 것도 일종의 지식이 아닐까요.
지식은 내가 무엇에 대해 아는지를 아는 것, 내가 무엇에 대해 모르는지를 아는 것, 내가 가진 지식으로 언제, 어디서, 어떤 것을 할 수 있는지 아는 것 - 이 세가지 요소를 모두 포함한다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우리가 쓸모없다고 치부하는 무지도 다르게 생각하면 쓸모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장자 해설서를 참 열심히 읽었는데, 장자에서 나온 일화 하나 소개해드립니다.

"목수 장석匠石이 제나라로 가다가 사당 앞에 있는 큰 도토리나무를 보았다. 그 크기는 수천마리의 소를 덮을 만하였고, 그 둘레는 백 아름이나 되었으며, 그 높이는 산을 위에서 내려다볼 만하였다. …… 구경꾼들이 장터를 이루었지만 장석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지나가버렸다.
그의 제자가 장석에게 달려가 말했다.
"제가 도끼를 들고 선생님을 따라다닌 이래로 이처럼 훌륭한 재목은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선생님께서는 거들떠보지도 않으시니 어찌된 일입니까?”

장석이 말했다.
“그런 말 말아라. 쓸데없는 나무다. 그것으로 배를 만들면 가라앉고, 관을 만들면 빨리 썩어버리고, 그릇을 만들면 쉬이 깨져버리고, 문짝을 만들면 나무진이 흘러내리고, 기둥을 만들면 곧 좀이 먹는다. 그것은 재목이 못 될 나무야. 쓸모가 없어서 그토록 오래 살고 있는 것이야.”

장석이 집에 돌아와 잠을 자는데 그 큰 나무가 꿈에 나타나 말했다.
“그대는 나를 어디에다 견주려는 것인가? 그대는 나를 좋은 재목에 견주려는 것인가? 아니면 돌배, 배, 귤, 유자 등 과일나무에 견주려는 것인가? 과일나무는 과일이 열리면 따게 되고, 딸 적에는 욕을 당하게 된다. 큰 가지는 꺾이고 작은 가지는 찢어진다. 이들은 자기의 재능으로 말미암아 고통을 당하는 것이지. 그래서 천수를 누리지 못하고 일찍 죽는 것이다. 스스로 화를 자초한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세상 만물이 이와 같지 않은 것이 없다. 나는 쓸모없기를 바란지가 오래다. 몇 번이고 죽을 고비를 넘기고 이제야 뜻대로 되어 쓸모없음이 나의 큰 쓸모가 된 것이다. 만약 내가 쓸모가 있었다면 어찌 이렇게 커질 수 있었겠는가? 그대와 나는 다 같이 하찮은 물건에 지나지 않는다. 어찌하여 서로를 하찮은 것이라고 헐뜯을 수 있겠는가? 그대처럼 죽을 날이 멀지 않은 쓸모없는 사람이 어찌 쓸모없는 나무를 알 수가 있겠는가?”"
구텐베르크
22/08/24 00:47
수정 아이콘
[나는 쓸모없기를 바란지가 오래다.] [쓸모없음이 나의 큰 쓸모가 된 것이다.] 는 말에 정신이 번쩍 드네요.
소환사의협곡
22/08/24 02:07
수정 아이콘
도널드 럼스펠드의 표현을 빌리자면 알려지지 않은 미지(unknown unknowns), 우리가 모른다는 사실조차 모른다는 것을 진정 우리가 경계해야 하는 것 같습니다.
Regentag
22/08/24 08:32
수정 아이콘
이렇게 인용되니 느낌이 또 다르군요 크크크
이게 [이라크와 테러리스트가 관계가 있다는 증거를 찾았냐]는 질문에 대한 답이 아니었다면 명언의 반열에 들어갈 수도 있었지 않았을까 합니다.
실제상황입니다
22/08/24 11:36
수정 아이콘
그래서 더 명언인 거죠. 다른 의미로다가..
썬업주세요
22/08/24 10:33
수정 아이콘
신입사원일 때 선배들이 궁금한거 없냐고 물어보면
"뭘 모르는지 몰라서 질문을 못하겠다." 라고 답했었던게 기억이 나네요 크크
SAS Tony Parker
22/08/24 00:49
수정 아이콘
님 글을 읽다보면 교회에 계신 후임목사님이 떠오르는 말투입니다 좋은 의미로요 크크
아마 종교인이 되셨다면 수석으로 입학 졸업을 하셨을듯

공감하는게...
겉핧기로 아는 지식이 분야 불문 제일 무섭습니다
PGR에 글을 남겨주시는 몇몇 인상깊은 회원님들도 자기 분야 아니면 안건드리죠 같은 계열이라도 오류를 범할수 있습니다 정보전달만큼 중요한게 정확성이니까요
22/08/24 00:58
수정 아이콘
무지의 합리성이라기보단 [무지의 도박]이라고 표현하는 게 더 적절하겠죠. 즉 무지의 경우와 아닐 때 제일 큰 차이점은 내가 [주체적으로 선택]할 수 있냐는 것입니다. 모를 땐 이유가 없으니 어떤 선택을 하더라도 그 과정이 합리적이지 않아요. 그것이 설사 '비트코인을 모르기 때문에 투자를 하지 않는다'는 선택이라 할지라도요.

글은 무지의 경우 가만히 있을 것(겸손을 수반?)과 지식이 있는 경우 활발한 활동이 있는 것을 전제로 한 것 같은데, 경험칙상 무지할 때도 소위 주제를 모르고 날뛰는 경우를 많이 목격하기에 그러한 전제를 바탕으로 한 전개에 동의하기 힘듭니다. 단순히 결과만을 사후적으로 분석하여 무지가 합리적일 수 있다고 표현하기 보단, 무지가 (우연히) 이득이 될 때도 많다고 표현하는 게 더 맞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구텐베르크
22/08/24 01:04
수정 아이콘
말씀하신 경우가 맞는 경우도 있고, 많습니다. 하지만 주체적 선택 역시 언제나 절대적으로 유익한 것은 아닙니다. 마약을 맛보고 맛을 알고서 마약 복용을 주체적으로 선택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하는 상태보다는 마약에 대해 무지한 상태가 더 유익하겠지요. 말씀하신 것처럼 무지가 우연히 이득이 되는 때도 많고, 무지가 필연적으로 이득이 되는 때도 적지만 간혹 있는 것 같습니다.
깻잎튀김
22/08/24 01:21
수정 아이콘
(수정됨) 일반론을 부정하진 않습니다만 비트코인이라는 예시에 적용하기에는 무리가 아닐까 합니다. 비트코인은 현재에도 초기 개발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죠. 당시 비트코인의 개념을 공부해보았던 적지 않은 수는 이건 될게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으며, 저를 비롯한 전산학과 동기 및 선후배중에서도 당시에 비트코인이 성공할 것이란 생각을 했던 사람은 물론 투자를 했던 사람도 거의 없었습니다... 심지어 2017년 초반까지도 말이죠.
오히려 주변에서 투자했던 사람들은 막연한 판타지를 믿고 들어간 사람들이었고, 지식을 기반으로 투자를 한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막연한 판타지를 믿고 들어가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라는 합리적 추론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합니다.
도라지
22/08/24 07:16
수정 아이콘
머 주식공부 열심히 한다고 투자에 성공하는건 아니니, 공부하신 분야와 비트코인으로 돈을 번 것은 다른 분야가 아닐까 싶어요.
22/08/24 01:45
수정 아이콘
직장 생활 짧게 했습니다만, 가장 믿음이 가는 상사는
"나도 잘 모른다."라는 말을 할 줄 아시는 분이었습니다. 본문과 같이 겸손하게 인정하시는 분이셨죠.

반면 "니가 더 잘 알아?"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분과는 일하기 힘들더군요.
소환사의협곡
22/08/24 02:08
수정 아이콘
저도 그렇지만 온-오프라인을 막론하고 어떤 사안에 대해 아는 척 하는 사람이 너무 많다고 생각해요. 정보가 부족한 사건에도 의견을 보태고 쉽게 분노하니 어이없는 마녀사냥 사태가 발생합니다.

무지를 인정하고 의사 결정을 지연할 용기, 즉 [무지의 용기]가 되려 사람 됨됨이가 더 있어 보입니다.
기다리다
22/08/24 02:11
수정 아이콘
이것 저것 조금 안다 싶으면 남들한테 아는척 하기 좋아하는 저에게는 뜨끔한 글이네요. 흐흐. 잘읽었습니다
22/08/24 05:16
수정 아이콘
인터넷이라는 공간이 글을 기반으로 소통하기 때문에 글을 쓴다는 행위 자체가 자신의 지식을 알고 있다는 내러티브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무지를 공공연하게 드러내기를 꺼리는 경향이 많은것 같습니다. 그래서 오프라인보다 더 자주 충돌이 일어나는것 같기도 하구요.
레드빠돌이
22/08/24 09:11
수정 아이콘
맛있는 요리를 먹어도 일반인들보다 쉐프들은 그 맛을 온전히 느끼지 못하겠죠.
아는것이 힘이 될수도 있지만 모르는게 약일때도 있는 법이죠.
은때까치
22/08/24 09:23
수정 아이콘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사실 백해무익한 것은 무지나 지식 그 자체가 아니라, 모르면서 안다고 생각하는것이겠죠.
닉네임을정하라니
22/08/24 10:10
수정 아이콘
그래서 '모르는게 약이다' '아는게 힘이다' 라는 상반되는 속담이 있다 봅니다
-안군-
22/08/24 10:16
수정 아이콘
이런게 통찰이죠. 좋은 글 잘 보고 갑니다.
벌점받는사람바보
22/08/24 11:48
수정 아이콘
주제 파악이라는게 참 어렵죠
0에 가까우면 그나마 주제파악을 쉽게 할수 있는 상태가 아닐가 싶습니다.
일월마가
24/04/19 18:56
수정 아이콘
좋은 글 감사합니다. 이래 보면 저의 무지와 무식함에 대해 약간의 안도감(?)을 가지는 부작용도 있네요 크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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