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으로부터 반의 반만년전 C국의 대현자 공자 선생님은 논어 위정편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 했습니다. 오십유오이지우학(吾十有五而志于學), 삼십이립(三十而立), 사십이불혹(四十而不惑), 오십이지천명(五十而知天命), 육십이이순(六十而耳順), 칠십이종심소욕불유구(七十而從心所欲不踰矩)
이를 해석하자면
오십유오이지우학(吾十有五而志于學) - 열다섯살에 학문에 뜻을 두어
삼십이립(三十而立) - 서른에 이르러 신념을 세웠으며
사십이불혹(四十而不惑) -마흔살에 미혹하지 아니하고
오십이지천명(五十而知天命)- 쉰살에 하늘의 뜻을 알았으며
육십이이순(六十而耳順) -예순살에 귀가 순해지고
칠십이종심소욕불유구(七十而從心所欲 不踰矩)-일흔살에 이르러 마음에 내키는 대로 하여도 법도에 어긋남이 없었다
라는 뜻입니다.
현재에 와서는 불혹을 비롯해서 각각 그 나잇대를 지칭하는 용도로도 사용되는 단어들이지만 실제로 이 단어들은 공자님이 70년이라는 세월이 지난 후에 자신의 삶에 대하여 술회를 하시면서 말씀하신 내용입니다. 그러므로 '무릇 이 정도의 나잇대라면 응당 그정도의 나이에 걸맞는 이러한 품성을 갖추어야 한다' 라는건 아니란 뜻입니다. 공자님이 누구입니까? 4대성인의 일원으로 불세출의 현인, 2500년이라는 세월이 지난 후에도 이웃 나라에서 자기를 죽여야 나라가 사네 마네 하면서 서로를 싸우게 만드는 그야말로 시대의 사상가 아니겠습니까? 우리같은 범인(김전일 아님,호랑이띠도 아님)이 이정도 경지에 이르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겠지요. 혹자는 '뭐 나도 10살에 곰 정도는 잡았는데 저 정도도 못하겠어?' 라고 반박할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이것들 하나하나가 이루기 얼마나 힘든 것인지는 지우학(지금 우리학교는 아님)은 동네 피시방을 이립은 노량진을 불혹은 논현동 오피스텔을 지천명은 안아키 까페를 이순은 극우 유튜브를 종심소욕불유구는 지하철 1호선을 가면 각각 이것이 얼마나 이루기 힘든 위업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사실 제가 이 고사를 처음 접하게 된것은 윤리 시험을 준비하면서 였는데 시험을 위해 암기하면서 가장 어려웠던 부분은 순서였습니다. 특히나 이순이 뒤에 배치되어 있는게 잘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뜻을 세운후 유혹을 견뎌내는 힘을 얻고 마침내는 하늘의 뜻까지 알아내는 경지에 이르고 나서도 십년이 지난 후에야 어떤 말이든 편하게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이 크게 와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본다면 남의 말을 편하게 받아들인다는것은 인간으로서 정말 어려운 일이고 도달하기 힘든 경지란 걸 깨닫게 될겁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최근 게임 게시판에서 여러가지 논란에 뛰어들어 이전투구를 해보신 분이라면 남의 말을 유연하게 받아들이는 것, 또 유연하게 받아들이게 만드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능히 짐작하시리라 믿습니다. 그래서 제가 롤을 할때마다 공허하게 느끼는 말이 있습니다. "아니 좀 쳐 못하면 말 좀 들으셈" 그러나 이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주문입니다. 말 좀 듣는건 잘하는것보다 훨씬 더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지요. 차라리 "못하면 좀 쳐 잘하셈" 이 더 가능성 있는 주문일지도 모릅니다.
계기는 한통의 전화였습니다. 아마 그건 제가 이를 닦으며 핸드폰으로는 침튜뷰를 PC로는 트위치 무굴 방송을 틀어놓고 포모스 야짤을 보며 오우야를 남발하는 그러니까 코인찾아 떠난 코씨 뺨치는 멀티태스킹을 선보이고 있었던 때로 기억합니다. 친구 B의 전화가 저에게 걸려왔습니다.
B: "야 D가 이따가 롤 좀 들어올수 있냐는데? 자기 일행 한명 있는데 너랑 나랑 C해가지고 다섯이서 팀랭 몇판만 하자고 전화오더라"
팀랭? 뜬금없이? 마치 만두 창시자 승상님처럼 촉 빼면 시체인 저는 바로 한번에 촉이 와버렸습니다. 아 D의 일행이란게 여자구나
A(본인) : "야 그럼 C네집 근처 피시방이나 갈까? 내가 전화할게, 간만에 개노답 삼형제 뭉치자 우리집으로 차 갖고 와"
B: "병 형신이야? 내가 무슨 탈것이야? 버튼 누르면 나와야 돼?"
A: "끝나고 내가 닭갈비 삼"
B: "금방 가연"
어찌어찌 채비를 마치고 C에게도 전화를 걸어 소환술을 마치고는 B의 차에 올라타 천천히 생각해 보았습니다.
'도시테(어째서) D는 그냥 듀오를 하지 않고 굳이 우릴 부른 것일까?'
결론을 내리는 데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는 않았습니다. 그것은 다름아닌 우리 무리에 포함된 B의 존재 때문일겁니다. 사실 매일 저와 욕을 주고받는 B는 나름대로 대단한 존재입니다. 극한의 EFSP 성향, 내츄럴 본 윙어, 나팔을 쉴새없이 불어대는 나팔수, 학급의 확고부동한 오락부장, 파티 내의 영원한 바드로 분위기를 띄우는데는 그만한 친구가 없기 때문이죠. D와 그 여자아이는 필시 아직은 데면데면한 상태일것이고 그를 위한 윤활제로 B를 선택한거라고 저는 결론지었습니다. A(본인)와 C는 그냥 묶음 상품으로 판매된게 틀림 없었습니다.
PC방에 도착해 모자란 두놈들 마이크 헤드셋 셋팅을 해주고 나서 디스코드에 접속하니 D와 E(역시 여자애였음,대학원 후배)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 둘은 다른 피시방이었기 때문에 저희 셋은 상체를 그 둘은 봇듀오를 맡기로 하고 게임을 시작했습니다. 부른 보람이 있게 쉴새없이 돌아가는 B의 아가리 모터 사이사이로 A(저)와 C의 맞장구 정도가 들어가고 마침내 디코 분위기도 제법 따끈따끈해졌습니다. 그 상태로 첫게임도 재밌게 졌고 이제 두번째 게임을 기다리고 있던 차에 E가 입을 열었습니다.
E: "저기 오빠 그 솔라리 한번만 가주시면 안돼요?"
D: "아...... 나 그거 잘 못쓰는데....."
E: "아 한번만요 한번만 가주세요"
순간 같은 피시방에 있던 저희 A, B, C트리오는 몸이 굳어지고 말았습니다. D는 저희들이 쵀(최+최)씨고집이라고 부르는 그야말로 고집의 결정체 같은 놈이었기 떄문이죠. 카오스 6생명의 구슬, 태양불꽃망토(방패) 서포터, 4도란 원딜등 본인이 고집하는 템트리가 있어서 저희가 아무리 통계를 들고 효용성을 설명하며 어르고 달래거나 욕을 해도 꿈쩍도 않는 친구였기 때문입니다. 그 고집은 그냥 게임뿐만이 아닙니다. 부모님 말씀 안듣고 고집부려서 이과가기, 선생님 말씀 안듣고 3상향 지원해서 재수하기, 친구들 말 안듣고 상근 나온거 안가고 현역으로 입대하기 등 그 고집이 가져온 후폭풍이 이루 말 할 수가 없습니다. 남의 말을 정말 너무너무너무 안듣는 친구라서 그 친구가 군대 있을때 가장 많이 들은 욕은 아마 "귀에 X박았냐?" 일거라고 제 멋대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10분 같은 10초정도의 정적이 흐른 후 저희는 배신감을 느꼈습니다.
D: "알았어 한번 가볼게"
전판을 져서 쉬운 큐가 잡힌건지 아니면 사랑의 솔라리의 힘인건지 다음판은 어렵지 않게 이길 수 있었습니다. 두번째 게임을 마치고 화장실을 다녀오려는데 B도 따라 나섰습니다. 그런 저희 둘을 보고 C의 입이 참을리가 없었습니다
C: "게이특 - 남자끼리 화장실 같이 감"
여느때처럼 C를 무시하고 화장실에 가 일을 마치고 손을 씻고 있는중에 B가 입을 열었습니다.
B: 10련;;; 내가 그렇~~~게 솔라리 쳐가라고 할땐 귓등으로도 안듣더만... D말투 들었냐? 옆에 있었으면 진짜 명치 한대 후렸다 '와 오빠 솔라리 진짜 잘쓰네요','어? 진짱?' 등치는 우주비행사 노틸러스만한 새기가 진짱은 무슨 니퍼로 혓바닥 끄집어내가지고 발음교정해주고 싶네 진짱
A: 아니 니는 진짜 그런거 따라하지좀 마라 점심 안먹고 나오길 잘했네 게워낼거 없어서 다행이다
이렇게 킥킥거리고 있는데 게이라고 우릴 힐난하던 C가 갑자기 화장실에 들어왔습니다.
C: 게이 하나 추가열, 야 D가 와줘서 고맙다고 나중에 복지리 사준다는데?
B: 뭐해 준비 안하고?
A(본인): 뭔 준비?
B: 봇 갱갈 준비, 이번판은 우리라인 오지말고 봇갱만 가라
C: 복지리는 못참지
미친놈들...... 저희는 그렇게 서너게임을 더 하고나서 헤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또 시간이 좀 지나 B에게서 D와 E가 잘 만나고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됐습니다 뭐 사실 복지리 같은 얘기야 흐지부지 됐고 복지리는 커녕 오뎅탕 하나 못얻어먹었지만 하나도 서운하지 않고 질투같은것도 하지 않습니다. 그저 그게 결혼까지 이어져서 아들 셋을 낳아 나라 발전에 기여하고 행복하게 살았으면 하고 축복을 빌어 줄 뿐입니다
저는 그 사건이 있는 후로 그 친구가 어째서 고집을 꺾었는지 한번 생각해 보게 됐습니다. 조금은 낯 간지러운 말일지도 모르지만 '나그네의 옷을 벗긴것이 세찬 북풍이 아닌 따사로운 햇볕이였듯이 고집쟁이의 귀에 딱딱하게 쌓인 떼를 벗겨내는것은 권위적인 명령이나 설득력 있는 통계가 아니라 마음을 움직이는 좋아하는 사람의 달콤한 사탕같은 한마디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 손금불산입님에 의해서 게임 게시판으로부터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23-12-08 01:16)
* 관리사유 : 추천게시판 게시글로 선정되셨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