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넌 그래도 네가 하고 싶은 일 하면서 돈 벌어 먹고 살잖냐."
사흘 연속 철야-오전 근무 후 퇴근한 뒤 눈 좀 붙이고 술자리에 나갔을 때 친구에게 들은 한 마디.
그때 부터 였을 것이다.
정말 저렇게 생각하고 사는 게 맞긴 한데, 왜 현실은 다를까나...
문서노가다로 연명하는 게임기획자 생활을 한 지도 어언 16년째.
간혹 옛날 생각이 나긴 하는데, 흐릿하게 스쳐 지나가는 듯한 이야기들 뿐인 것만 같아서
뭔가 한 번 정리를 해 볼까? 하는 심정으로 가볍게 자판을 두드려 보게 됐다.
1. 게임 업계에 어떻게 들어오게 됐지?
난 전형적인 문돌이였다. 고등학교 문과였고, 학교 성적도 국외사 몰빵 스탯. 심지어 수포자 과락자.
수능 초창기였던 시절이라 난이도가 널뛰던 시기에, 나는 국외사에선 높은 점수를 맞았으나 수학은 낙제에 가깝고...
블라블라
각설하고 그렇게 문과 계열 대학을 택했고, 제대 후 졸업 시즌이 다가왔지만
갈 만한 회사가 없었다.
연봉 천 오백이 보편적이었던 시절, 어정쩡한 문돌이들에게 남은 것은 공무원 준비가 대세였던 시기
우연히 보게 된 대학생을 대상으로 한 게임 기획 공모전이 눈에 들어왔다.
상금에 혹했고 게임이라는 것에 근자감이 생겨서 끄적끄적 기획서랍시고 쓴 게
제일 꼬래비이긴 해도 덜컥 입상을 하게 됐다.
이렇게 하는 게 게임 기획인가? 싶어서, 그 기획서를 포폴 삼아 게임회사에 던져 보았는데
생각보다 입질이 왔다. (신입 연봉도 낮고 막 굴리기 좋을 테니. 입사 첫 날 회사 입장에서는 좋아하는 게 눈에 보였...)
그렇게 첫 회사에 들어가게 됐다.
2. 어렵지는 않았던 업계 입성, 그런데...
처음 입사한 회사는 모바일 피쳐폰 게임 제작 회사였다.
한창 '영웅X기' 같은 류의 RPG 게임과 '미니게X천국' 같은 캐쥬얼 게임들로
PC게임 시장과는 다른, 작지만 갈수록 커질만한 시장을 키워 나가던 시기.
내가 들어간 회사는 '용눈X'이라는 속칭으로 불렀던 RPG 게임을 주력으로 잡다한 게임을 만들던, 직원 9명 규모의 작은 회사였다.
아홉 명이면 그렇게 작은 스튜디오만은 아니라는 느낌인데
문제는 그 중 두 명이 대표와 와이프라는 사실이었다.
더 문제는 와이프가 겜알못, 제작알못인데 회계 경리 외의 제작에 영향을 준다는 점이었고
더 큰 문제는 대표가 심각한 마이크로 컨트롤러이자 내로남불에 분노조절장애를 가진 사람이었다는 것이었다.
난 시나리오와 레벨 기획, 그와 관련된 설정이나 데이터를 담당하는 역할이었다.
같이 입사한 입사동기이자 형 동생하게 된 녀석은 도트 그래픽 디자이너.
동기가 있어서 그래도 다행이라고 생각한 것도 잠깐,
입사 첫 날 오전 기획회의에서부터 난리가 났다.
당시 고참 기획자였던 여자 기획자와 사장이 회의 자리에서 다투기 시작한 것이다.
"아니, 그러니까 이걸 바꿔야 한다니까?"
"지금 바꾸면 나머지 다 뜯어 고쳐야 하는데, 언제 바꿔요? 일정 늘려 줄 거예요?"
"일정은 못 늘리지."
"이럴 거면 기획서는 왜 쓰라고 하는 거예요? 그냥 사장님이 앉아서 코딩하고 말지?"
"기획서를 제대로 썼으면 이런 일이 안 벌어졌잖아!"
"기획서를 제대로 읽고 컨펌했으면, 리뷰할 때 잘 들었으면 이런 일이 안 벌어졌죠!"
기억 보정이 가미된 내용이지만 대화의 내용은 대강 저러했다.
사유는 흔하디 흔한 것이었고 과정도 그러했지만
결과는 어메이징했다.
여자 기획자가 '샤앙'을 씨게 날리고 일어서자, 사장이 기획자 면전에 기획서 뭉탱이를 집어 던졌고
이에 격분한 여자 기획자가 뛰쳐 나갔던 것.
그리고 그 길로 바로 퇴사해 버린 것이다.
황망하게 바라보던 나는,
그때는 몰랐었다.
6개월 뒤 내 미래를 미리 경험했었다는 사실을.
재택 중에 멘탈이 좀 나가서 대충 끄적여 본 똥글이라 언제 쓰다가 퍼지거나 지울 지 모르겠네유. 크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