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GR21.com
다시봐도 좋은 양질의 글들을 모아놓는 게시판입니다.
Date 2022/03/17 15:43:43
Name 숨결
Subject 그 봉투 속에 든 만원은 쓰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오늘 아침 출근을 준비하면서 두꺼운 겨울 양복을 벗고, 봄 양복을 꺼내 입었습니다. 오랜만에 꺼낸 봄 양복의 안주머니에는 만원짜리 한 장이 들어 있는 흰 봉투가 꽂혀 있었습니다. 그 봉투를 보면서, 후배를 떠나보낸 지 벌써 6개월이 지났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후배는 시한부 판정을 받은 후 그 시간을 훌쩍 넘겨 3년 동안 힘겹게 투병생활을 이어가다 결국 작년 가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함께 근무하며 옆에서 지켜본 그 후배는 지나치게 순수하였고 사람들에게 조건없이 호의적이었습니다. 그런 성격으로 인해 회사생활을 하면서 마음에 많은 상처가 날 수 있겠다는 걱정을 했습니다. 하지만 그 후배의 마음에 상처가 생기기도 전에 시한부 판정을 받았고, 그 후로는 회사를 떠나 수술과 입원을 반복하면서 병원에서 힘든 시간을 보냈습니다.

정승 개가 죽으면 문전성시를 이루지만, 정승이 죽으면 개 한 마리 없다고 했던가요. 지인들의 부친상이나 모친상에는 시간을 쪼개가면서 어떻게든 참석하려고 했던 동료들은, 코로나 상황, 포항이라는 먼 거리, 1년 중 가장 바쁜 시기라는 합리적인 이유 뒤에 숨어 후배의 장례식장에 발길을 많이 주지 않았습니다. 사실 저도 후배의 장례식장에 가야 하는지 고민했습니다. 장례식장을 지키고 있는 후배의 가족들과 아는 사이도 아니었고, 포항까지 왕복하는 교통비 부담에 대한 치졸한 계산도 머리 속에 떠올랐습니다.

하지만 당시 저는 꽤 한가한 상황이었고, 장례식장에 가지 않으면 그 후배의 순수한 웃음을 배신하는 것 같은 죄책감이 들어 홀로 서울에서 포항으로 향했습니다. 포항의 장례식장은 조용했습니다. 초라했다는 것이 더 솔직한 표현이겠네요. 몇 개 없는 화환, 손님없이 텅 비어 있는 좁은 장례식장 때문에 애잔함이 더해졌습니다.

시한부라는 사실을 알게 된 지 3년이 넘었고, 몇 번의 병문안을 통해 제 마음도 정리했었기에 눈물이 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텅 빈 장례식장에서 혼자 국밥을 먹으면서 후배 생각을 하니 저도 모르게 눈시울이 붉어졌습니다. 후배와 오랜 시간 근무한 것도 아닌데 함께 했던 여러 추억들이 생각났습니다.

아버님께서는 조문을 마친 제 손을 꽉 잡으시면서, “멀리서 와줘서 고맙습니다. 할 말이 없네요”라고 하시면서 교통비에 보태라고 허름한 흰 색 봉투를 주셨습니다. 저도 아버님께 드릴 말씀이 없었습니다. 아들을 먼저 보낸 아버님께 섣부른 위로를 건넬 수도 없었고, 저와 평생 만날 기회가 없겠다는 생각에 더욱 입을 떼기 어려웠습니다.

거듭 교통비를 사양하였으나 아버님은 억지로 주머니에 봉투를 넣어주셨고, 6개월이 지난 후 남은 허름한 흰 색 봉투가 후배를 다시 떠올리게 합니다. 그 봉투 속에 든 만원은 쓰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 손금불산입님에 의해서 자유 게시판으로부터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23-12-01 01:45)
* 관리사유 : 추천게시판 게시글로 선정되셨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달랭이
22/03/17 15:47
수정 아이콘
아이고...
글쓴이님 마음이 느껴지는 글이네요...
뜨거운눈물
22/03/17 15:50
수정 아이콘
아.. 참 그때 장례식 가신건 진짜 잘 하신 일입니다.
글쓴이님의 감정이 느껴져서 먹먹합니다.
HighlandPark
22/03/17 15:55
수정 아이콘
울컥하네요.. 조용히 추천 누르고 갑니다.
진산월(陳山月)
22/03/17 16:00
수정 아이콘
아......글쓴이의 심정이 가슴으로 느껴지네요.
오클랜드에이스
22/03/17 16:09
수정 아이콘
후배는 아니고 친할머니 장례식이었지만 그때 부조금이 좀 많이 들어와 장례식장비 정산하고 남은 현금을 어른들이 손자대에 조금씩 주셨는데 그게 마치 할머니가 주신 마지막 용돈처럼 느껴져서 4년이 지난 아직도 못 쓰고 있습니다.

무슨 마음인지 알 것 같아 간만에 할머니 생각 좀 했네요.

가끔 이렇게 기억하면서 그 분들 몫까지 행복하게 잘 사는게 남은 사람들이 할 일 아닌가 싶습니다.
이러다가는다죽어
22/03/17 16:11
수정 아이콘
나...이런거 슬퍼하네...
Cafe_Seokguram
22/03/17 16:19
수정 아이콘
이런 글 보러 PGR 오고 있습니다...좋은 글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마사루.
22/03/17 16:23
수정 아이콘
가슴이 찡해지네요.. 갈까말까 고민하는 자리는 꼭 가자는 마음으로 살지만 글을 보고 다시금 그렇게 해야겠다고 다짐합니다.
22/03/17 16:36
수정 아이콘
자식 먼저 보낸 부모라는 게...
그 만원은 좋은 일에 쓰시는 게 어떨까 싶습니다
Old Moon
22/03/17 16:40
수정 아이콘
예상하지 못한 이른 이별은 마음 한구석에서는 왜 떠나지 못하고 오래 남아 있는지...
1절만해야지
22/03/17 17:13
수정 아이콘
그저 먹먹하네요 ㅜㅜ
바람기억
22/03/17 17:21
수정 아이콘
찡하네요..
시나브로
22/03/17 17:32
수정 아이콘
글 잘 읽었습니다.

이 글 보니 세월호 사건 지금도 이름 기억나는 현탁이 얘기가 생각나네요. 사고 전 날 수학여행 출발일이 생일, 집안 형편 넉넉지 않아 용돈 2만 원만 줌, 사고 남, 실종됐고 늦게 찾음, 지갑에 2만 원 그대로 있었음...

현탁이 부모님 세탁소 하셨는데 좋은 사람들이 쪽지, 선물로 위로 말씀 전해드림.. (https://news.naver.com/main/read.naver?mode=LSD&mid=sec&sid1=102&oid=052&aid=0000522239)

모두를 위해 기도합니다..
무명헌터
22/03/17 17:40
수정 아이콘
글에서 감정이 느껴져서 잠시 눈시울이 붉어졌습니다.
저도 이제 40대 초반으로 이제는 누군갈 떠나보낼 일이 많이 남아서 그런지
읽으면서 참으로 먹먹하네요.
서린언니
22/03/17 20:11
수정 아이콘
한달전에 암으로 세상을 떠난 친구가 생각납니다.
외국에 있어서 가지도 못하고...
마지막으로 본게 6년 전이었는데 ...그저 먹먹하네요
22/03/17 23:48
수정 아이콘
가슴이 찡해지는 글입니다.
과수원옆집
22/03/18 10:38
수정 아이콘
고생하셨습니다.
22/03/18 11:02
수정 아이콘
이 글 보고 3년 전에 아버지가 마지막으로 주신 용돈 만원 지폐 한장을 꺼내 보았습니다. 보고싶습니다... 숨결님 감사합니다.
초록물고기
23/12/04 12:55
수정 아이콘
본인상에 가는게 참 쉽지 않죠. 막상 갔을때 사람이 없으면 그 쓸쓸한 기분은 말로 전하기가 어렵습니다
목록 삭게로! 맨위로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3484 코로나19 음압 병동 간호사의 소소한 이야기 [68] 청보랏빛 영혼 s3264 22/04/16 3264
3483 [기타] 잊혀지지 않는 철권 재능러 꼬마에 대한 기억 [27] 암드맨3840 22/04/15 3840
3482 [일상글] 게임을 못해도 괜찮아. 육아가 있으니까. [50] Hammuzzi2865 22/04/14 2865
3481 새벽녘의 어느 편의점 [15] 초모완2842 22/04/13 2842
3480 Hyena는 왜 혜나가 아니고 하이에나일까요? - 영어 y와 반모음 /j/ 이야기 [30] 계층방정2768 22/04/05 2768
3479 [LOL] 이순(耳順) [38] 쎌라비3998 22/04/11 3998
3478 [테크 히스토리] 기괴한 세탁기의 세계.. [56] Fig.13562 22/04/11 3562
3477 음식 사진과 전하는 최근의 안부 [37] 비싼치킨2798 22/04/07 2798
3476 꿈을 꾸었다. [21] 마이바흐2682 22/04/02 2682
3475 왜 미국에서 '류'는 '라이유', '리우', '루'가 될까요? - 음소배열론과 j [26] 계층방정3412 22/04/01 3412
3474 망글로 써 보는 게임회사 경험담(1) [34] 공염불3501 22/03/29 3501
3473 소소한 학부시절 미팅 이야기 [45] 피우피우2990 22/03/30 2990
3472 [테크 히스토리] 결국 애플이 다 이기는 이어폰의 역사 [42] Fig.12805 22/03/29 2805
3471 만두 [10] 녹용젤리1959 22/03/29 1959
3470 당신이 불러주는 나의 이름 [35] 사랑해 Ji1939 22/03/28 1939
3469 코로나시대 배달도시락 창업 알아보셨나요? [64] 소시3707 22/03/22 3707
3468 톰켓을 만들어 봅시다. [25] 한국화약주식회사2614 22/03/19 2614
3467 밀알못이 파악한 ' 전차 무용론 ' 의 무용함 . [62] 아스라이3655 22/03/17 3655
3466 그 봉투 속에 든 만원은 쓰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19] 숨결2600 22/03/17 2600
3465 철권 하는 남규리를 보자 예전 기억이 떠올랐다. [38] 초모완3516 22/03/16 3516
3464 우리네 아버지를 닮은 복서... [12] 우주전쟁2704 22/03/15 2704
3463 콘텐츠의 홍수를 살아가고 있는 요즘 아이들의 생활 [52] 설탕가루인형형3631 22/03/14 3631
3462 서울-부산 7일 도보 이슈 관련 간단 체험 [141] 지나가는사람2330 22/03/14 2330
목록 이전 다음
댓글

+ : 최근 6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12시간내에 달린 댓글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