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있는 성경 이야기.
오늘은 18번째 이야기가 아니고 17.5번째 이야기 정도가 되겠습니다.
17번째 이야기의 보충 이야기라고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이것은 성경을 주제로 적는 “소설”입니다.
역사적으로나 과학적으로나 말이 안 될수도 있지만 너무 그런 것에 신경 쓰지 말고
성경 세계관 속에서 등장인물들의 심리 상태에 동감을 하는 재밌는 이야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지난 시간에는 이집트에 정착하게 된 야곱의 후손들 = 즉 이스라엘 백성들과
새로운 바로왕의 관계가 어떻게 어긋나게 되었는지 살펴보았습니다.
오늘은 이 새로운 바로왕과 당시 이집트 백성들에 대해 조금 더 심도 있게 살펴봤으면 합니다.
저는 성경을 읽으며 이 악인들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것을 즐겨합니다.
편의상 요셉 시대의 바로왕을 1대 바로왕 이라 지칭 하겠습니다.
그리고 요셉이 죽고 나서 요셉을 몰랐고 이스라엘 민족을 핍박하던 바로왕을 [2대 바로왕] 이라고 지칭하겠습니다.
1대 바로왕은 무능력한 파라오였습니다.
그는 자신보다 요셉의 능력을 더 인정했고, 그 요셉과 함께하는 하나님의 능력을 인정했습니다.
이집트의 파라오를 = 신 (GOD)이라고 인정하는 문화로 생각해 볼 때 이것은 상당히 파격적인 행동입니다.
그리고 그런 겸손했던 1대 바로왕에게 성경 세계관 최고 존엄인 여호와 하나님은 복을 내려주셨습니다.
1대 바로왕의 치세에 이집트는 7년 흉년 이벤트를 극복함으로써 강력한 왕권 + 가나안 지역까지 이집트의 지배하에 두는 진정한 제국으로 발돋움 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2대 바로왕이 등장합니다.
1대 바로왕에 비하면 그는 냉정했고, 현명했고 야망 있는 군주였습니다.
1대 바로왕은 사람이 그저 좋기만 했습니다.
그래서 아무 생각 없이 그냥 요셉의 가족을 받아들입니다.
거기에 자국민들의 의중은 생각하지도 않고 요셉 가족에게 이집트의 가장 좋은 땅이었던 고센 땅을 줍니다.
근데 여기서 우리가 이집트 사람의 입장이 되어봅시다.
물론 요셉은 이집트를 위기에서 구한 영웅 중에 영웅입니다.
하지만 당시의 이집트 백성이라면 이런 생각이 들지 않을까요?
1. 아니 아무리 영웅의 가족들이라고 해도 그렇게까지 퍼줄 필요가 있나?
기존에 거기 살고 있던 사람은 어떡하라고? 이대로 쫓겨나라고??
---> 1대 바로왕 왈 [응 상관없어. 어차피 다 국가 땅이야. 너네 양식 구입한다고 있는 돈이랑 토지 다 나라에 팔았던 것 기억 안남? 그거 어차피 국가 땅이니까 국가에서 저 야곱 가족들에게 줄거야. 기존에 거기 살던 이집트 사람은 어차피 니들 땅 아니니까 빨리 나가!]
2. 아니 흉년으로부터 우리 목숨 구해준 것은 진짜 평생 은혜 갚을 정도로 고마운 것은 맞는데..
애초에 국가가 국민의 목숨을 책임 지는건 생각해보면 당연한 것 아냐?
가만 생각해보니 그 양식 산다고 우리 재산 다 그 총리한테 털린 것이 억울하네...
---> 바로왕 왈 [물에 빠진 놈 구해줬더니 뭔 딴 소리야? 니들 중 누구 한명이라고 흉년 예측했어? 억울하면 니들도 흉년 예측해서 양식 저장했으면 됐잖아. 니들이 양식 대비 안하다가 재산 털린 것을 누구한테 하소연해.]
3. 아니 그 양식은 요셉이 혼자 다 준비했냐?
다 우리 이집트 국민들의 7년간의 피와 땀으로 준비한 양식 아니었냐? 매출의 20%나 나라에서 강탈했잖아!!
누가 하늘에서 내려준 양식이 아니고 원래 다 우리 국민들의 세금이었어!!
---> 바로왕 왈 [아 몰라. 어쨌든 난 그 가족들에게 저 땅 다 줬다. 앞으로 다들 사이좋게 지내라!]
4. 그래. 그래도 영웅의 가족들이고 저들은 사람이 적으니 우리가 포용하면서 살아보자.
이제부터 大이집트 국민의 일원으로서 함께 태평성대를 살면 되는거지~
---> 야곱 가족들 왈 [응? 뭔 소리야? 난 너희들하고 사이좋게 안 지낼건데? 우리는 여호와를 믿는 믿음의 가족들이고 너네는 이방인이잖아. 우리랑 사이좋게 지내려면 우리 여호와 믿고 할례나 받어. 너희랑 우리 모두 이집트에 속한 사람이지만 너네는 너네. 우리는 우리. 우리는 이집트의 문화 보다는 우리의 문화대로 살거야. 즉 우리는 원래 문화대로 목축하면서 산다. 서로 선은 지키면서 살자]
5. 와 저것들 보자보자 하니까 어쩌다가 영웅 총리 한명 나왔다고 가족들이 너무 거만하네..
됐다 그냥 무시하고 살자.
6. 헐... 저 이스라엘 민족들... 뭔 애를 저렇게 많이 낳아? 이미 우리랑 인구가 거의 비슷하잖아?
어라 곧 있으면 우리 인구 추월하겠다.
이놈들아. 양심 있으면 이제 생산적인 일을 하면서 나라에 보탬이 되라.
언제까지 목축이나 하면서 살거야? 목축 따위로 너네 200만명 인구를 누가 먹여 살려?
결국 우리 이집트인이 열심히 나일강 삼각주에서 농사해서 너네한테 양식 바치는거 아냐 모르냐?
너네도 양심 있으면 이제 농사 좀 해라!
그 농사짓기 좋은 고센땅에서 200만명이 전부 목축이나 하고 있는 게 뭔 낭비야... 차라리 애나 적게 낳던가...
책임 질 수 없으면 아예 지르지를 말어!!!!!
---> 나라 권력자 왈 [우리는 이제 가나안 까지 세력을 넓혔다. 이제 동방 메소포타미아 문명을 쳐들어 갈거다. 그러면 더욱 더 많은 양식이 필요하다. 이스라엘 민족들은 목축을 해야하니 농사를 못한다. 이집트 사람들이 이스라엘 민족들이 먹을 것 + 전쟁용 군량까지 확보해야하니 더 열심히 농사를 지어 식량을 비축해라]
!!!!!!!
이런 상황에서 이집트 사람들이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성경에서는 단순히 요셉을 모르는 새로운 2대 바로왕이 권력을 잡았다고 설명합니다.
하지만 저는 민심이 곧 천심이라는 말을 믿습니다.
이스라엘을 핍박하는 2대 바로왕이 탄생한 것은 단순히 그 왕 개인적인 문제가 아닙니다.
온 이집트 국민들이 이스라엘 민족들을 미워했기 때문에 그런 왕이 탄생한 겁니다. [그런데 솔직히 내가 이집트 국민이라도 저런 생각이 들지 않았을까요? 1대 바로왕이 싼 똥은 너무 거대해졌고 나라를 위해 누군가는 저걸 치워야 했습니다]
그리고 이집트 민족들과 파워 싸움에서 패배한 이스라엘 민족들은 이제부터 강제노역에 시달립니다.
그런데 딱히 그 강제노역이... 솔직히 생각하면 그런 핍박 받는 강제노역일까 싶습니다.
최소 히틀러의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나 북한의 강제 수용소와는 차원이 다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하는 일들은 군량 창고 짓는 것을 위한 [벽돌 제작], 그리고 군량 확보를 위한 [농사]였습니다.
단순 삽질이 아닌 모두 나라 경제에 보탬이 되는 반드시 해야 하는 노동입니다. [그동안 목축이나 하면서 이집트 식량 축냈으면 이 정도의 생산적인 일들은 당연히 해야 한다는 것이 일반적인 이집트 국민들의 생각 아닐까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센 땅에서 그동안 편하게 살 동안 반대로 노예처럼 식량을 바친 것인 이집트 사람들이었습니다. 인과응보입니다.]
더군다나 이스라엘 민족들은 밥도 제대로 먹으면서 노동을 했습니다.
나중에 광야에서 진정한 배고픔을 겪는 이스라엘 민족들은 이집트에서 풍족히 먹던 시절을 그리워합니다.
이집트 사람들은 최소 밥은 제대로 주면서 일을 시킨 겁니다.
그리고 벽돌을 만들기 위한 재료도 충분히 줬습니다.
당시 벽돌을 만들기 위해서는 진흙 + 짚을 배합해야 했습니다.
이집트 사람들은 최대한 빠르게 식량 창고를 짓기 위해 짚을 풍족히 제공해줬습니다.
진흙이야 나일강에 넘치는 것이 진흙이니 문제 없었고요.
즉 이러한 이집트 사람들의 이스라엘 민족에 대한 핍박은 어느 정도 이해가 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때문에 이스라엘 민족들도 아직은 살만한지 하나님께 도움을 요청하지 않고 그냥 살아갑니다.
성경의 하나님께서도 생각보다 이런 [세상적인 갈등]에는 크게 관여를 안하십니다.
애초에 세상적인 갈등은 누가 선이고 누가 악이라고 분명히 말하기가 힘들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들이 이집트에서 종살이 하는 것을 허락하신 분이기도 합니다.
그럼 어디서부터 이집트 백성들과 2대 바로왕이 어긋나기 시작했던 것일까요?
그들의 억울함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억울함이 절대로 [질투의 보복]으로 결론이 나면 안됩니다.
1. 열심히 농사짓는 이집트 사람들보다 목축하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인구가 훨씬 폭발적으로 증가합니다.
이건 기적입니다. 경제 논리상 말이 안됩니다.
이런 기적이 억울했으면 이들은 [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만 축복이 있는건가? 우리도 저 하나님을 믿어보자] 라는 결론이 나왔어야 했습니다.
성경 세계관이 그렇습니다.
성경 세계관에서 복을 주는 이유는 주변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하나님의 복 주심을 증거하는 의미도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이 복을 시기하여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강제 노역을 시킴으로써 이들의 인구를 줄이려고 합니다.]
단순 노역이 아니라 한 민족을 멸절 시키려고 하는 악한 목적이 있었습니다.
이것이 그들의 첫 번째 잘못 이었습니다.
그래도 아직은 이집트 사람들에게 기회가 있었습니다.
2. 1차 기회에도 이집트 사람들은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더 큰 기적을 보여주십니다.
엄청난 강제노역으로 예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힘든 삶을 살게 되는 이스라엘 민족들이,
오히려 앞전보다 더 인구가 많아지고 있던 겁니다.
이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기적적인 상황을 보면서 이집트 사람들은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깨달았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2대 바로왕은 오히려 산부인과 의사들(산파들)을 비공식적으로 동원해 이스라엘 민족에서 새로 태어나는 남자 아이들을 의료사로 죽이려고 계획합니다.
이것이 2대 바로왕과 이집트 사람들의 두 번째 잘못 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아직 이집트 사람들에게 기회가 있었습니다.
3. 바로왕의 의료사로 이스라엘 신생아의 인구를 줄이려고 했던 계획은 어처구니없이 의사들의 거부로 실패합니다.
감히 의사(산파) 따위가 바로왕의 명령을 무시해? 그런데 그것이 일어났습니다.
그것도 그 이유가 의사들이 바로왕보다 하나님을 더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그럼 바로왕이 그 반항한 의사들을 공식적으로든 비공식적으로든 벌을 줘야 하지 않을까요?
근데 성경에서는 어떤 방법인지는 모르지만 그 의사들이 오히려 해를 입지 않고 더 큰 복을 받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의 인구는 계속 늘어납니다]
이쯤 되면 2대 바로왕과 이집트 백성들은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깨달았어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3번이나 기회를 주셨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끝까지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는 결국 돌이킬 수 없는 최악의 선택 - 이스라엘 민족의 모든 새로 태어나는 남자 아이를 죽이는 결정을 하게 됩니다.]
의사들을 동원해 아이들을 의료사로 죽이는 것 까지는 어느 정도 이성적인 판단이었습니다.
증거는 없으니까요.
인간적으로 생각해본다면 이집트의 왕으로서 어떻게든 이스라엘 세력을 약화시켜서 나라를 지키고 싶다는 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왕이나 신이라고 할지라도 모든 태어나는 남자 아이를 공식적으로 죽인다는 생각은 정상적이지 않습니다. [왜 바로왕은 자신이 함부로 남의 아이를 죽으면 자신의 아이도 죽을 수 있다는 사실을 몰랐을까요? 결국 후대 바로왕이 마지막 10번째 재앙 때 장자를 잃은 것은 이런 정책의 인과응보입니다]
2대 바로왕이 안타깝습니다.
1대 바로왕은 무능했지만 하나님을 인정함으로써 최강국 이집트를 만들었습니다.
2대 바로왕은 자신의 세상적인 방법으로 이집트를 안정화 하려고 했지만 결국 살인마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아직 2대 바로왕에게는 기회가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직도 바로왕에게 기회를 주시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모세의 탄생이었습니다.]
잠깐 모세 탄생의 이야기를 살펴보겠습니다.
모세 탄생에는 2명의 어머니가 등장합니다.
바로 모세의 친어머니 - 요게벳, 그리고 모세의 양어머니 - 2대 바로왕의 딸입니다.
어느 어머니가 자신의 친 자녀를 죽이고 싶어 할까요?
저도 어렵게 결혼해서 몇 번의 유산을 겪은 후 지금 매우 어렵게 첫 아기 - 임신 22주차가 되었습니다.
한 아이의 탄생이 얼마나 행복한 것인데...
어머니 요게벳은 새로 태어난 남자 아이를 포기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3개월간 나름 숨겨 키웠으나 아이가 너무 크게 더 이상 숨길수가 없었습니다.
이제는 어쩔 수 없이 아이를 나일강에 버려야 합니다.
바로왕의 공식적인 명령은 [아이를 죽이라가 아니고 아이를 나일강에 던지라]입니다.
(뭐 그게 그거지요...)
이때 요게벳이 한 행동을 보면 어미의 사랑을 느낄 수 있습니다.
요게벳은 눈물을 흘리며 아들을 보냅니다.
갈대 상자를 가져와서 그 안에 아이를 넣고 물 위에 뛰웁니다.
근데 이러다가 혹시라도 상자 안에 물이 들어와서 새면 상자가 강에 가라앉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어미 요게벳은 갈대 상자에 역청(아스팔트 비슷한거)과 나무 진을 칠해서 물이 잘 새지 않게 합니다.
그래봤자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어차피 언젠가는 갈대 상자에 물은 샐 것이고,
물이 안 샌다고 해도 나일강의 야생 동물(악어 같은거)들에게 잡아먹힐 수도 있고,
그걸 다 극복한다고 해도 결국 물 위에 떠 있다가는 점점 고통스럽게 굶어 죽을 겁니다.
이래나 저래나 죽는 것은 정해져 있는데 요게벳은 뭐 하러 그런 정성을 들일까요?
어차피 죽더라도 1분 1초라도 더 살았으면 하는 것이 어미 요게벳의 마음이 아니었을까요?
CCM 중에 요게벳의 노래라고 어머니의 마음을 잘 표현한 노래가 있습니다.
마침 제 와이프가 해당 노래를 부른 것이 있는데 올려볼까 합니다.
그런데 아시다시피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요게벳 말고 또 다른 어머니가 있었습니다.
그녀는 이름은 현재 2대 바로왕의 딸이었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친아버지가 하는 이런 비인륜적인 정책에 실망했던 상황 이었습니다.
그녀는 물에 떠있는 갈대 상자를 발견하고 거기에 아이가 있는 것을 보고 이스라엘 아이임을 눈치 챘습니다.
무엇보다 촘촘하게 역청과 나무 진을 칠하며 최대한 물에 가라앉지 않도록 애를 쓴 그 갈대상자를 보며 이 아이의 친어미의 사랑을 생각했을 겁니다.
바로왕의 딸은 이 아이의 이름을 모세 (물에서 건져내다는 뜻)라고 지으며 자신의 양자로 삼습니다.
그리고 모세는 이렇게 자신을 죽이려고 했던 2대 바로왕의 손자가 됩니다.
기적은 모세가 죽을 위기에서 구해진 것이 기적이 아닙니다. [기적은 2대 바로왕이 어떻게든 인간적인 방법으로 민족을 멸절시키려고 해도 끝까지 살아나 결국에는 자신의 딸마저 자신의 정책에 배신을 하고, 원수가 자신의 손자까지 되어버리는 이 상황이 기적입니다.]
물론 이것은 이스라엘 민족의 해방을 위한 기적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것을 하나님께서 2대 바로왕에게 보여주는 마지막 기적이자 기회라고 여깁니다.
2대 바로왕은 이제라도 느껴야하지 않을까요?
자신은 신(GOD)이 아닌 인간에 불과하고, 인간적인 지혜와 방법은 결국 하나님의 역사 앞에는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요.
하나님께서는 2대 바로왕과 이집트 국민들도 분명히 사랑했으며 이토록 많은 기적과 기회를 주셨습니다.
그 기적과 기회는 이집트 사람들에게 해가 가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이스라엘 민족들만 해를 받는 그야말로 [복에 겨운 기회]였습니다.
하지만 2대 바로왕은 끝까지 인정을 하지 않습니다.
2대 바로왕에게 있어 손자 모세는 자신의 이스라엘 말살 정책 실패의 증거입니다.
손자 모세가 2대 바로왕과 계속 함께 있다는 것이 하나님 역사의 힘이 자신의 힘보다 강하다는 증거입니다.
2대 바로왕은 그 사실을 절대 인정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이 지금 이집트 민족들과의 파워 싸움에서 진 것은 결코 숫자가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바로 12지파를 이끌 뛰어난 지도자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상황에서 왕궁 일부세력의 지지를 받는 똑똑한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반란이라도 일으킨다면?
2대 바로왕은 이 모세를 죽이는 것만이 자신의 나라를 지키는 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어찌되었든 신(GOD)인 자신의 딸이 입양한 아이니 아무 이유없이 죽일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모세를 죽일 트집을 찾던 중 적당한 건수를 하나 발견해서 그를 모함해 죽이려고 합니다.
모세는 운 좋게도 광야로 도망갔지만 어쨌든 이 사건으로 모세는 이집트에서 세력을 잃었습니다.
2대 바로왕은 이제는 모세가 이집트에 아무런 해가 되지 않을 것이라 [인간적인 생각으로 판단을 합니다.]
하지만 그는 상상조차 못했습니다.
차라리 모세가 반란을 일으켜서 독립해서 떠났으면 자신의 나라를 일부 타격만 받았을 것을..
괜히 광야로 갔다가 모세는 성장해서 이집트 최악의 재앙을 가지고 옵니다.
그에게 있어 모세의 성장은 자신의 고집을 버릴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습니다.
하지만 마지막까지 기회를 살리지 못한 2대 바로왕은 이렇게 인생을 마치고 3대 바로왕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고통 없는 행복한 회개의 기회만 맛봤던 2대 바로왕과 달리 3대 바로왕은 지옥 고통을 회개 기회를 맛봅니다.
과연 2대 바로왕과 달리 3대 바로왕은 고통을 맛봤으니 회개를 할까요?
뒷이야기는 다음 시간에 계속해 보겠습니다.
* 손금불산입님에 의해서 자유 게시판으로부터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23-11-07 09:15)
* 관리사유 : 추천게시판 게시글로 선정되셨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규율은 없습니다만 성경은 묘하게 목축을 선한 산업으로 여기고 농사를 별로 안좋아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유는 아무래도
목축 : 생활이 불안정합니다. 양들이 계속 풀을 뜯어먹어야 하는데 풀을 다 먹으면 다른 곳으로 이동해야하니 떠돌이 나그네 생활입니다.
수입도 불안정하고 양들은 더럽게 말을 안듣습니다.
새로 가는 장소에 풀이 많을지 없을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만 믿고 살아야 한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여기에 + 성질 더러운 양들을 치면서 하나님께서 인간을 다스리는 고통도 느껴면서 하나님께 감사함의 마음을 가져라의 의미도 있고요.
성경의 기본 원리가 무언가의 희생으로 죄를 사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희생물로 양을 자주 죽여야 합니다.
따라서 목축이 필수이고, 성경의 대표적인 인물 아브라함, 다윗은 모두 목자 출신이고, 예수님도 어린양으로 표현됩니다.
농사 : 목축과 정 반대입니다. 문명의 시작이고 한곳에 정착하고 생활이 윤택해지고 안정적이게 됩니다.
미신적 신앙을 가지고 떠돌이 생활을 하는 목축과는 다르게 농사는 기술이 있어야하고, 강과 홍수를 지배하려면 수학&과학도 필요하고,
단체생활의 협동심이 있어야 하기 때문에 지도자도 필요합니다.
이 모든 것이 결국 미개한 목축과는 다르고 때문에 절대적인 주권자 여호와 하나님 신앙보다는 돈과 풍요를 바라는 기복신앙 = 바알신 신앙이 발달합니다.
이스라엘 민족들도 결국은 가나안 땅에서 먹고 살기위해 농사를 짓는데 여기서 만난 농사의 신 = 바알신이 결국 이스라엘 발목을 잡습니다.
근데 그렇다고 농사가 만악의 근원은 아니고... 모든 것은 어떻게 활용하냐가 문제이긴 합니다.
실제로 신약에서 예수님은 대놓고 하나님은 농부고, 자기는 포도나무도, 너네 가지라서 열매를 잘 맺어야 한다 비유를 하기도 하고요.
다만 성향은 아무래도 목축 > 농사 인거는 어느정도 분명합니다.
야곱 가족들 왈 [응? 뭔 소리야? 난 너희들하고 사이좋게 안 지낼건데? 우리는 여호와를 믿는 믿음의 가족들이고 너네는 이방인이잖아. 우리랑 사이좋게 지내려면 우리 여호와 믿고 할례나 받어. 너희랑 우리 모두 이집트에 속한 사람이지만 너네는 너네. 우리는 우리. 우리는 이집트의 문화 보다는 우리의 문화대로 살거야. 즉 우리는 원래 문화대로 목축하면서 산다. 서로 선은 지키면서 살자]
저만 그런지 모르겠지만,
본문 이 부분에서 최근 붉어졌던 이슬람 난민 문제가 생각나서
이집트원주민들의 입장에 순간 몰입이 됐네요..
'신마저도 들 수 없는 무거운 돌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신' 대신 이 정도의 인간적인 신이 하나님 이어야만 성경이 신정론의 시비에 빠지지 않을 수 있죠.
성경을 이렇게 재미있게 편집하시다니 대단한 능력이십니다.
더군다나, 아내분을 위해 이렇게 엄청난 사역을 감당하시니 분명 하나님의 축복이 님께 내릴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