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려한 색깔을 자랑하는 일부 조류의 깃털에서 발현되는 구조색 (structural color)은 전형적인 광결정 (Natural photonic crystal)에 의한 색이다. 그림 1에서 보이는 것 같은 이러한 구조색은 가시광선 대역에서의 자체 발광 (i.e., 반딧불이의 루시페린에 의한 화학발광)이나 꽃잎처럼 색소에 의해 특정 가시광선을 선택적으로 흡광함으로써 발현되는 색과는 전혀 다르다. 새의 깃털을 자세히 확대해 보면 수백 나노미터 수준의 규칙적인 나노 구조물에 의해 특정 파장 범위의 가시광선만 통과되거나 흡수되는 간섭이 생겨날 수 있다. 그리고 관찰하는 각도나 구조의 복잡도에 따라 그 색깔이 달라질 수 있다.
그림 1. 수컷 공작새 깃털을 확대한 이미지
공작새의 깃털은 그것을 펼쳤을 때 나타나는 아름다운 패턴으로도 유명하지만, 사실 깃털을 하나하나 확대해서 관찰해 보면 그 안에는 나노미터 수준에서의 구조물들이 촘촘하게 배치되어 있다. 익히 잘 알려진 커다란 눈동자 같은 동심원 패턴과는 별개로, 깃털 하나하나 속에 내재된 아주 미세한 패턴이 또 하나의 색깔 패턴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수컷 공작새는 왜 이렇게 화려한 색깔을 만들어내야만 했을까? 수많은 깃털은 공기역학적으로 딱히 최적화된 설계와는 거리가 있어 보인다. 즉, 탈출이나 이동에 유리할 수 있는 이점을 포기해서라도 이렇게 복잡한 구조의 깃털을 만들어내야만 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물론 그 답은 진화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라도 해야 암컷의 눈길을 한 번이라도 더 사로잡을 기회를 얻을 것이니, 오랜 세월 수컷 공작새들은 시행착오를 거듭하며 깃털을 다듬고 패턴을 만들며 특별한 색을 구현해 온 것 같다. 특히 색소처럼 자외선에 블리칭 (bleaching)되지도 않고, 반딧불이처럼 자체 발광하기 위해 화학반응을 위한 에너지를 사용해가면서 만들어 낼 필요도 없는 색을 만들어야 한다면, 남은 옵션은 구조색 밖에 없다. 즉, 오로지 깃털의 정밀한 구조를 무수한 세대를 거듭하여 오랜 기간 공들여 다듬어 옴으로써 (물론 비유적 표현) 만들어낸 이 색을 이용하여 수컷 공작새들은 자손을 하나라도 더 많이 남길 가능성을 높였을 것이다.
일견 이렇게 화려한 구조색과 패턴은 천적의 눈에 띌 가능성을 더 높이니, 오히려 생존과 진화에 더 불리한 것이 아닐까 생각할 수 있다. 진화론의 아버지는 찰스 다윈 역시 처음 진화론 (1859년 당시엔 자연선택이론)에 대한 아이디어를 떠올렸을 때, 이것의 명확한 반례가 있다면 그것은 수컷 공작새의 화려한 깃털일 것이라고 생각했을 정도다. (즉, 공작새의 화려한 깃털은 자연선택이론의 근거를 찾고 있던 다윈에게는 짜증 나는 반례였던 셈.) 1975년 이스라엘의 동물생태학자인 아모츠 자하비는 이른바 '과시적 소비 이론'에 입각한 것으로도 볼 수 있는 '장애 이론 (handicap theory)'을 내놓기도 했다. 즉, 천적에게 잡아먹힐 확률이 높아짐에도 불구하고, 더 적극적으로 구애를 할 수 있는 수컷은 그만큼 능력이 출중한 배우자라는 의미가 내포되므로, 암컷에게 더 매력적인 상대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가설이었다.
그림 2. 미국의 풍경화가 Abbot Handerson Thayer 작, 'Peacock in the Woods (1907)'
그렇지만 최근 연구 결과 (
https://www.biorxiv.org/content/10.1101/514240v1)에 따르면 꼭 그런 것 같지는 않다. 수컷 공작새의 깃털에서 발현되는 구조색은 대개 파란색-녹색 사이에서 분포한다. 공작새가 울창한 삼림이 우거진 숲 속에 살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러한 색은 주변과도 잘 어우러진다 (그림 2 참조). 즉, 자연스러운 위장색이 될 수도 있다는 뜻이다. 여기서 흥미로운 부분은 공작새의 천적인 고양이과 동물 (주로 표범이나 퓨마 등)은 RGB를 잘 구분하지 못하고 오로지 흑백 이미지, 즉, 그레이 스케일 이미지만 구분할 수 있는 시력을 갖는다는 사실이다. 이 때문에 공작의 깃털에서 발현되는 구조색의 화려함은 천적들에게는 별달리 특별한 정보를 주지 못한다. 색을 구분할 수 없기 때문에, 공작 깃털 패턴의 모양도 구분하기 어렵고, 주변의 수풀과도 공작 깃털 색을 구별하기 어려운 것이다. 반면, 공작새 암컷은 공작새 수컷이 펼친 깃털들의 패턴과 색을 멀리서도 명확히 구분할 수 있고, 특히 수컷 공작새 깃털의 구조색 덕분에 다른 각도에서 반사되는 색이 변하는 정보까지 추가로 얻을 수 있다. 이는 수컷 공작새의 전유물이므로 일종의 표지가 될 수 있다. 이 때문에 수컷 공작새가 활짝 펼친 꼬리 깃털의 패턴과 색깔은 암컷의 눈에 더 잘 띌 가능성이 훨씬 높아진다. 즉, 수컷 공작새는 천적은 피하고, 주변 환경과 위장이 잘 되는 색을 취하되, 암컷 공작새에게는 선택적으로 자신의 존재를 알릴 수 있는 패턴과 색깔을 오랜 기간 조합해 온 셈이다.
만약 공작새의 천적이 공작새만 먹고살 수 있는 동물이었다면, 오랜 세월 동안 이들이 살아남기 위해 천적의 원추세포도 흑백에서 RGB를 인식할 수 있는 세포로 진화했을 가능성도 있다. 그렇지만 공작새의 개체수는 그리 많지도 않을뿐더러, 공작새를 검지하기 위해 필요한 RGB 시각 정보의 처리에는 흑백 시각 정보 처리보다 훨씬 더 높은 비용이 요구된다. 왜냐하면 컬러로 된 이미지 정보를 처리하려면 흑백에 비해 차원이 한 개 더 필요하기 때문이다. 500*500 해상도 이미지를 생각한다면, 그레이 스케일 이미지는 500*500 행렬만 있으면 된다. 그러나 RGB 이미지는 500*500*3 행렬이 있어야 한다. 정보량이 3배로 늘어날뿐더러, R, G, B에 대응하는 원추세포의 빛 감지 파장 범위가 서로 오버랩이 되므로, 이를 분리하는 후처리도 필요하다. 퓨마 같은 포식자들은 먹잇감을 추적하기 위해 단거리를 폭발적으로 달릴 수 있게끔 언제든지 고속으로 몸을 기동 할 수 있어야 한다. 따라서 오로지 먹잇감의 역학 (위치와 운동량, 그리고 그것을 실시간 추적하여 다음 위치와 방향을 예측)을 추적-계산해야 하는 고로, 이미 그 기능 제어만 해도 뇌의 정보 처리 용량이 많이 소모될 텐데, 추가적으로 RGB 이미지 정보까지 실시간으로 처리하려면 뇌가 사용하는 에너지가 너무 많아진다. 에너지 효율이 극도로 낮은 퓨마 같은 포식자 입장에서는 이는 굉장히 비싼 비용에 해당한다. 그래서 오랜 세월이 지난 와중에도, 퓨마의 입장에서는 굳이 값비싼 RGB 원추세포와 뇌 용량을 높이지 않더라도, 그레이 스케일 이미지 처리만으로도 잡을 수 있는 먹잇감 포획 방향으로 전략이 고도화되었을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시각이 생물에게 있어 가장 유용한 정보의 통로라고는 하지만, 이렇게 각 생물마다 그것을 이용하는 전략은 참 다양하다. 그리고 환경이 변하고 서로의 전략이 계속 변하면서 자연이 만들어내는 다양한 패턴과 현상은 상상력의 범위를 넓혀준다. 인류 역시 아주 오랜 세월이 지나면 태양의 광도 변화 같은 거시적 환경 변화를 포함한 다양한 변화에 적응하기 위해 지금처럼 가시광만 보는 것이 아니라 NIR이나 UV를 볼 수도 있을 것이고, 피부로는 테라파를 감지하는 방향으로 진화할는지 누가 알겠는가 (물론 바이오닉 아이 (bionic eyes)를 갖게 되면 완전히 다른 이야기가 될 테지만...). 그때쯤 되면 인간이 정의하는 전자기파 감지에 의한 '시각' 예술적 체험의 정의도 지금과는 굉장히 많이 달라져 있을 것이다.
* 손금불산입님에 의해서 자유 게시판으로부터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23-10-13 0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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