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로 글을 써 봅니다. 평어체 이해바랍니다.
나의 면심(麵心) - 막국수 이야기
한때 기간직 국가 공무원 생활을 한 적이 있다. 굳이 언제라고 못 박을 필요는 없다. 봉급은 매달 주었지만 얼마 되지 않았고, 대신에 먹여주고 입혀주고 재워주는 기간제 임시직 공무원 이였다. 그땐 시중에는 유통되지도 않던 아주 진귀한 담배도 그냥 주었다. 그 담배 브랜드는 오래된 국가 기밀이다.
항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던 피 끓는 젊은 청년이던 내가, 기간직 공무원이 되고나니 모든 일에 대한 관심이 없어지고 무사와 안일해져, 시간적으론 오랜만에 땡을 잡은 일이 되었다. 다만 그 기간직 공무원 시절의 단점은 농땡이를 쳐도 시간이 잘 안 간다는 것과 꼭 졸려울 땐 깨운다는 것이 몹시 불편했다.
내가 속해 근무하던 곳은 길을 닦고 토목건설을 주로 하는 한 4백여명 정도가 일을 하는 국가 건설조직의 강원도 어느 "공OO" 지부였다. 근무처 내에 불도저, 그레이더, 덤프트럭 등이 많이 있었다. 내 고향 서울서 한참이나 떨어진 청정지역 강원도 인제군. 지금은 구도로가 된 한계령 도입에서 그리 멀지않은 어디쯤 이였다.
공기 좋고 물 맑은 그곳에 봄이 오고 여름이 인제 지나고 원통하게도 가을 없이 바로 그냥 겨울이 오더니 그해 눈은 왜 그리 많이 오는지.
그런데 눈이 많이 내리고 쌓여 길이 막히면, 여기의 400여명 모두 밥을 굶는다. 그 바람에 눈이 내리는 날이면 그레이더는 맨날 길 닦으러 나가야 했다. 그곳의 산에는 나무가 울창하여 하늘이 서너 평 만하게 보였다. 숙소 앞에는 소양강의 지천이 있었는데, 오뉴월 뙤약 빛 잠시 먼저 쬐고 왔다는 윗 공무원들이 심기가 불편하다며 초겨울 살얼음 낀 그곳에 맨 팬티로 강제 입수를 당하기도 한 기억이 있다.
내가 속해 있던 부서의 업무는 창고관리인데 나는 이의 수불(In and Out) 담당이었다. 그 곳에는 먹는 것, 입는 것, 유류 및 건설자재 등이 그득히 채워져 있었다. 그들의 전문용어로 여기를 “S-4”라고 한다.
이 창고들은 수시로 재고파악을 하는 것이 아주 routine한 일이다. 당연히 장부상 숫자와 현장의 재고와 일치해야 한다. 물론 우리 조직에 물류관리사나 공인회계사는 물론 상고출신 조차도 한명이 있을 리가 없다. 그럼에도 항시 기민한 촉각으로 그들이 채워 넣은 그 숫자들이 조사할 때마다 서류와 일치함에 나는 물리학의 질량 불변의 법칙이나 열역학의 에너지 보존의 법칙을 넘어선 그들의 수학적 능력을 초짜가 가진 경탄의 눈으로 바라보지 않을 수 없었다.
처음에 내게 맡겨진 것은 유류창고 열쇠였다. 창고에는 개스(휘발유), 디젤, 그리스 및 공드럼 등이 있었다. 이 유류는 조직운영이나 사업의 근간이며, 외풍이 무척이나 많이 부는 자리이다. 이 열쇠에는 책임과 권한이 부여되어 있었으며 저간의 생태계가 이미 꾸려진 상황에서의 인수인계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경험도 없고 두뇌도 2% 부족한 최말단인 내가, 나보다 벼슬이 좀 높다고 나를 마구 흔들어 대는 그들로부터 별 탈 없이 잘 대처해냈다는 것은 정말로 불가사이 한 일이라고 아직도 혼자 놀라곤 한다.
그러다가 공무계약의 기간을 절반쯤 채웠을 때쯤에는 하는 일에도 익숙해지고, 날 갈구던 윗 공무원 놈들도 가고, 내 일을 지원해주며 말 잘 듣는 비숙련의 신규 노동력을 지원해주는 바람에 개당 200 키로나 되는 디젤 드럼을 하루에 수백개씩 굴리는 일에서 아쉽게도 미련 없이 떠날 수 있었다.
오해하지 마라, 유류의 재고파악 업무가 타인에게 이전됐다고 그 창고의 관리권 까지 내 손을 떠난 것은 아니다. 여기에서 관리 권한의 유지란, 완벽한 자생적 생태계를 이룬 그 특수조직의 유기적 지휘체계에 있어서, 명령계통의 실행력이 낮과 밤을 달리하는 특수한 곳이라, 지배권이 조석으로 바뀌는 그 동네의 전관예우 텃세가 원래 그렇다. 지금은 몰라도 당시 그 동네의 전관예우는 금과옥조로 “까라면 까”이다.
담당 영역이 달라져서 이곳의 전달체계 내에서 직접적 책임은 면했지만, 아직 “S-4”의 선임이라는 강력한 결재권과 함께 남은 기간 외풍 방어의 힘든 병풍 의무를 아직은 지고 있는 중이였다.
더욱이 새로 맡은 Job이 식량과 부식이라 유류의 접근방식과는 달리 재고 관리를 엄숙히 안 해도 되는 꿀빠는 일을 선택할 수 있는 권한을 쟁취할 수 있었다.
내가 하는 일은 아침에 운전 담당자와 같이 40 키로나 되는 먼 길을 달려 지정 보급소에서 400명분 먹거리를 트럭에 싣고 돌아오는 일이다. 그 당시 전문용어로 부식이라는 것은 두부, 콩나물, 된장, 굵은 멸치 가끔은 꽁꽁 얼은 꽁치덩어리 그리고 꽁꽁 얼은 누드 닭... 등등 요즘과는 편성이 좀 다르다. 그런데 이것들은 조달 후 그날 모두 먹고 나면 현장에서 바로 없어지니, 재고를 정리해 수를 세어 창고의 선반위에 올려놓기 보다는 다음날이면 해우소에서 발견될 뿐이라 재고 관리에 긴장안하고 세월 보내기에는 딱이다.
아침에 나가서 적당한 시간에 돌아와 식당에 넘겨주면 하루의 일과가 끝난다. 아침에 나가는 시간은 정해져 있지만 들어오는 시간은 내 맘이다. 이 일은 잘하나 못하나, 성실함과 불성실의 평가에 차이가 없으며 월급액수 조차 증감은 없다. 야근이나 특근수당 그런 건 없지만, 자고 있는 아이 깨워 추운겨울 오밤중에 온몸을 꽁꽁 싸매고 밖에 나가 언 발 구르며 별을 몇 시간씩 멀거니 세어보고 들어오는 일들은 열외 되었다.
지금도 그렇겠지만 그 시대 그 조직에 소속된 동년배 청년들의 가장 큰 기쁨과 희망은 오로지 기대에 찬 3식이다. 그러니 하루도 한 끼니도 그들의 즐거움을 충족시켜야만하기 때문에 쉴 틈이 없다. 따라서 이 일은 누군가는 꼭 해야 할 매우 거룩하며 남들이 선망하며 폼나는 매우 중요한 일이다. 이들의 기쁨을 채워주는 일이 내 일인데, 이 어찌 보람된 일이 아닐 수 있으랴.
또 한 가지 토요일도 일요일도 먹어야 산다. 그 청년 공무원들도 먹어야 살고 살아 있어서 먹는다. 나(사실은 my job)는 모든 일에서 열외였으며 어떠한 국내외 정치적 간섭에서도 배제되었다. 그래서 나는 비록 명절 보너스가 없어도 소양강의 시원한 바람이 있어 행복했다.
여기에서 매우 중요한 문제 하나는 아침에 나가서 저녁에 들어오는 나의 점심식사이다. 한일관이나 우래옥은 너무 멀고 그 동네에 짜장면은 물론 24시간 편의점도 없어서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전혀 없었다. 물론 그 물류 공무원에게 줄 출장비는 예산에 없다. 방법은 단하나 창고에 있는 나의 정량 라면을 가지고 나가는 것인데, 그것과의 물물교환 경제가 그 지역에 통하기 시작했다.
보급소를 오가는 길 이름은 “RT453”, 지금은 잘 가꾸어진 453번 관광 지방도이다. 그 도로 중간에 허름한 용씨네 막국수집이 있었다. 당시 간판은 없었지만 모두들 용씨네 국수집이라고 불렀다. 강원도는 메밀의 주산지이다. 그런데 그 당시 그곳에선 라면을 주면 용씨는 막국수 두 그릇을 말아주었다.
막국수 말아주기를 기다리고 있으면 빼꼼이 보이는 무쇠 솥에 얹혀있는 국수틀에 달린 기다란 장대에 용씨 내외 두 사람이 매달린다. 그러면 메밀반죽이 버티다 마지못해 조금씩 메밀국수가 삐져나와 솥으로 내려온다. 그렇게 삶은 국수에 동치미 국물에 배추김치를 얹어주는 단촐한 국수말이라서 지금과 같은 럭셔리한 편육 꾸미는 없다. 그럼에도 그 국물의 시원함은 아직도 물리지 않는 오래 기억되는 맛이다.
강원도라서 밀가루만큼이나 구하기 쉬운 메밀을 치대 면을 만들어 동치미 국물에 말아주는, 지금의 김치말이 메밀국수정도로 가볍고 쉽게 생각될 국수일 뿐이었다. 가끔은 산을 잘 타는 주인이 송이 절임을 찢어서 장조림처럼 얹어 내어주곤 했다. 그들이 보는 송이나, 더덕이나 표고나 모두 산에서 나기는 같다. 그땐 그 동네 사람들이 그 비싼 송이를 캐다가 그냥 고추장항아리에 묻어 뒀다가 무심히 꺼내먹고는 했다.
그렇게 날짜를 꽉 채워 열심히 내 몫의 일을 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지난했던 우리 삶에 깊숙이 뿌리내린 먹거리가 있다. 그런 음식들을 우리는 ‘소울 푸드’라고 한다. 전쟁 등 격동의 시대를 이겨낸 소울 푸드엔 지난 역사의 생존성 DNA가 섞여 있기 마련이다. 그런 먹거리의 특성은 골수팬 없이는 유지되기 어렵다. 지금의 소울 푸드는 무엇일까? 평양이나 함흥냉면 또는 부대찌게를 꼽는 이가 있을 게다.
나는 막국수도 이 ‘소울 푸드’ 중의 하나라고 본다. 막걸리, 막둥이, 막내, 막무가내, 막말, 막노동, 막국수 등 우리말에 “막”이 들어가면 본래의 값이 눙쳐진다. "막"에는 거칠다 하는 Crude와 꼬래비라는 의미가 들어 있다. 그렇다고 당시 그 유니폼을 입고 강원도를 쏘다니던 후줄그레 했던 내가 막국수 보다 분명 세련되어 보이지는 않았을 것은 분명하다. 본디 그들은 우리 유니폼 족을 연민의 눈으로 막내 동생 같이 봄을 우리는 안다.
그렇게 막국수는 태어난 곳도 도시화 되지 않은 자연발생적인 곳이며, 이름조차도 세련되지 않아 막 불러도 되는 막국수이며, 그 흔한 동치미 국물에 배추김치를 고명으로 얹은 찝찔한 맛의 배불림 수단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하찮게 막 보이던 놈이 그렇게 정(情) 깊게 오래 동안 날 쫓아다니는 질긴 놈인 것인지는 그땐 몰랐다.
이쯤 되면 경춘선 이야기를 안 할 수 없다. 공무원 생활을 끝내고 서울로 돌아왔다. 그 당시 서울 근교의 유원지는 경춘선을 타고 내 또래들이 접근할 수 있는 강촌이라는 곳이 꽤나 번창하며 날리던 시절이었다. 이 강촌에서 조금 더 가면 춘천이다.
그때 경춘선을 타고 널리 꽃피우던 춘천 막국수를 거기서 다시 만날 수 있었다. 그때의 내 한 팔은 나중에 우리 애들 엄마가 될 그녀가 잡고 있었다. 그녀가 나중에 내게 털어 논 이야기가 막국수는 맛이 있었지만, 그때 하던 군대 이야기는 듣느라 지겨웠었다고 했다.
그 커플에게 소양댐 부근의 샘밭막국수, 춘천시내의 남부막국수 등에 더하여 춘천 닭갈비는 주머니 가벼워 허기진 고기 주린이의 덤 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