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놈이랑 오징어 게임에 대해 이야기 하다가
친구놈이 묻더군요
주최자란 이유로 집정관 빙의해서 압도적인 힘을 치고 게임하진 않았는가? 하면서요
저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면서 몇가지 이야기를 하다가 글로 써보면 좋을거 같아서 한번 써봅니다.
감독은 데스 게임에서 항상 '게임'에 집중하는 장르적 특성을 개인의 서사에 집중하는 방식으로 표현 했다고 하는데
이를 표현하는 방식은 뛰어나지만 성기훈이란 캐릭터 조형에 대해서는 물음표가 붙기 때문에
제 생각이 들어서 글로 표현해 보고자 합니다.
데스 게임에서 복잡한 게임이나 그 게임을 천재적이거나 기발한 방법으로 풀어가는 먼치킨이 빠진다면 무엇이 남을까요?
능력은 평범하거나 그 이하인 인간적인 소시민 그리고 '데스' 즉 죽음이 남습니다.
사람과 사람 그리고 죽음에 대한 서사는 게임과 게임 사이에 특히 강조되고 6화는 게임보다도 이런 사람들의 서사에만 집중합니다. 이런 연출은 의도적으로 게임과 그 사이의 인간을 집중하기 위한 방법으로 사용되곤 합니다.
1번 오일남과 456번 성기훈
즉 처음과 마지막인 번호는 은유적으로 가장 대립적인 사람임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죽음의 게임에 참가 하였지만 다른 사람의 죽음에 유일하게 반응하는 성기훈
"사람이 죽었다구요"
자신의 죽음이 임박한 상황속에서도 또 다른 게임을 제안하는 오일남
"자네는 아직도 사람을 믿나?"
드라마 내내 성기훈은 사람들에게 만원을 빌리기도 하고 주기도 합니다.
경마에서 성공했을 때 마권 판매 하는 아가씨에게 준 만원.
새벽에 소매치기당하고 사채업자들에게 맞은 다음에 다시 돌려받는 만원
상우의 어머니에게 고등어를 사고 드리는 만원
마지막 은행에서 빌리는 만원
꽃을 파는 아주머니에게 드리는 만원
만원은 오일남의 사람값. 1억과 큰 대비를 이룹니다.
오일남에게 1억은 이정재의 만원과 다르지만 같습니다. 이정재가 만원을 다른 사람에게 선심 쓰듯 주고 사람들에게 부탁해서 받는 것처럼 마음을 표현하고 받는 최소한의 관계성을 가지는 금액일 것입니다. 오일남이 참가자 목숨값 1억은 이정재의 만원과 같은 것입니다.
이러한 연출을 잘 보여주는 것이 탈락자의 관의 모양입니다. 탈락자의 관 모양이 선물상자이지요. 즉 죽음의 게임에서 경쟁 할 수 있었던 것 자체가 오일남이 준 선물이고 선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게임의 결과인 죽음조차 일남에게 받은 기회이며 선물 이라는 의도를 알 수 있습니다. 자본주의에서 공평하게 돈을 벌 수 있는 기회는 그자들의 목숨보다 값비싼 것이라는 비정한 면모를 보여줍니다.
그래서 게임 내내 프론트맨과 주최 측은 게임의 공평에 대해 이야기 합니다. 일반적인 공평과는 다르지만 큰 궤에서 보면 밖에서 벌어지는 자본주의 보다 매 게임마다 사람이 우수수 죽어가는 상황이 낫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그리고 사람의 목숨 값 1억 조차 오일남의 선심이며 이는 '선심'이기 때문에 그들의 목숨 값보다 후한 처사라는 뜻도 됩니다. 즉 오일남이 선심으로 쓰는 돈보다 값싼 죽음에 대한 이야기가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사람이 아닌 경주마가 되는 것입니다.
자본주의에서 패배한 사람들의 목숨값 1억과 성기훈의 주고받는 1만 원의 대비를 극적으로 이루는 것이 6화 깐부라고 볼 수 있습니다.
6화의 구슬치기까지 오일남 입장에서는 성기훈은 눈에 거슬리면서도 신기하고 재미있는 존재입니다. 게임 밖으로 나갔음에도 다시 제 발로 게임에 참가한 경주마 주제에 '게임'에 집중하지 않고 '사람'의 '죽음'에 집중하는 유일한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팀을 맺는 장면부터 시작하여 오일남이 이름을 밝히기 싫을 때 하는 배려, 번외 게임에서의 태도, 오일남의 치매 증상에 대한 배려 등등 인간적인 면모가 계속 나타나며 사이다와 계란 사건 때 유일하게 사람의 죽음에 대해 계속 이야기합니다. 거기다가 짝을 찾아야 하는 상황에서는 다른 사람들은 모두 여자와 노인을 피합니다. 반면에 기훈은 조기축구도 하고 나름 똑똑하다는 남성의 제안을 거절하고 오일남과 파트너를 맺습니다. 이런 극한의 상황에서 휴머니즘을 잃지 않는 기훈을 보며 일남은 아귀에 빙의라도 했는지 게임속 게임을 시작합니다.
처음에는 지영과 새벽 이야기와 더불어 6화에 감정선을 자극하며 오일남의 희생으로 끝나는 이야기로 보입니다. 하지만 오일남의 호스트인 게 밝혀지고 마지막에 노숙자를 두고 하는 게임을 하는 반전 이후에 다시 본다면 6화에서 일남의 행동들이 무언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일남은 이름처럼 오직 일등만 하는 남자인지 구슬을 가지고 노는 게임에서 기훈을 번번이 이깁니다. 기훈을 벼랑 끝 까지 몰아붙인 일남은 슬슬 그와 즐기기 시작합니다.
첫 번째로 홀짝 게임을 하면서 기훈에게 속일 기회를 줍니다. 죽을 위기에 몰린 기훈은 일남을 속여서 구슬을 따기 시작하죠. 이때 대사를 자세히 보면 오일남의 의도적으로 기훈에게 질문을 던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홀짝을 다르게 말한 기훈에게 내가 '또' 졌다고 말하지요. 거기다가 아예 대놓고 3개를 잡는 것을 보여주면서 너 공정하지 않게 게임 할 거야? 라고 묻습니다. 그리고 떨리는 목소리로 홀이라고 말하는 기훈을 보면서 살짝 미소를 짓습니다. 오징어 게임에서 일남은 이기고 지는 것까지 속이지 않죠. 달고나를 제대로 뽑은 사람을 죽이지 않으며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를 할 때도 에서 움직이지 않은 사람을 탈락시키지는 않습니다. 반면에 기훈은 진 게임을 속여서 이긴 일남의 구슬을 뺏습니다.
두 번째로는 게임을 더 하고 싶어 하는 일남이 자신은 게임을 더 하고 싶다고 더 놀고 싶다고 에게 구슬을 하나 빌릴 수 있냐고 묻습니다. 구슬을 모두 다 잃은 일남에게 기훈은 기회를 줄 수 있냐는 뜻입니다. 그러면서 기훈을 다시 한번 시험합니다. 자본주의에서 패배한 쓰레기들은 빛에 쫓겨서 다시 자본주의라는 경쟁에 참여하지 못합니다. 이처럼 경쟁의 기회조차 없는 사람들을 모아서 다시 오징어 게임이라는 구슬 하나를 던져주는 일남의 행위를 은유합니다.
세 번째로 구슬 1개와 구슬 19개를 각각 다 걸고 게임 하나 하자는 말을 합니다. 서로 전부를 걸어야 공평하지 않냐고 묻죠. 구슬 1개는 오징어 게임이고 19개는 참가자의 목숨입니다. 오징어게임의 VIP와 호스트는 그들이 가진 아주 작은 부분으로 게임을 진행하죠. 7화에서 VIP들이 내기하는 금액을 보면 사실 상금과 개개인의 목숨 값인 1억이 얼마나 그들에게 작은 부분인지 바로 확인시켜 줍니다. 반면에 참가자는 모든 걸 걸어야 합니다. 그들은 매 번 목숨을 걸고 게임을 해야 하니까요.
즉 이 질문은 오징어 게임에서 호스트와 vip는 모든 걸 걸지 않고 참가자인 기훈은 모든 걸 걸어야 하는 게 얼마나 불공평 하냐 라는 질문을 대신 해준 겁니다. 그때 기훈은 격분하며 말합니다. "그런 억지가 어디 있어요. 말이 안 되는 거잖아!!!!!!" 구슬치기라는 게임에서조차 더 많이 가지고 있는 기훈은 더 적은 일남과 모든 것을 걸고 게임을 하는 것이 억지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부자와 거지, 호스트와 참가자가 똑같이 모든 걸 걸고 게임을 하는 것도 억지가 되겠죠. 참가자인 기훈을 통해 호스트인 일남의 행위가 긍정되는 순간입니다.
일남은 답합니다. "그럼 자네가 속이고 내 구슬 가져간 건 말이 되고?"
일남은 한발 짝 더 갑니다. 속여서 구슬을 가져간 주제에 그걸 다 걸고 게임을 하는 것도 억지라고 생각하면서 자본주의에서 승리한 자신이 모든 것을 걸지 않더라도 오징어 게임을 주최하는 것을 비판 할 수 있냐는 것입니다.
이 대사를 들은 기훈은 고개를 숙입니다.
그 모습을 보며 일남은 한마디를 합니다.
"우리는 깐부잖아"
6화 이전까지 게임보다 사람에 집중하고 죽음에 민감하던 기훈은 종료 직전에 일남이 구슬을 하나 더 가지고 있는 것을 보고나서는 엄청나게 다급해집니다. 일남이 자기 집을 본 뜬 골목길의 집 앞에서 하는 인간적인 이야기에 하나도 집중을 하지 못합니다. 자기 때문에 곧 죽을 수도 있는 사람이지만 마지막 한 개의 구슬을 얻기 위해서 그의 마누라와 아들의 이야기, 마당의 작은 연못 이야기, 아들이 놀던 이야기, 그런 아들을 몰래 지켜보던 일남의 과거 애틋한 이야기 등 인간적인 사람이라면 무시할 수 없는 이야기 들 모두 그에게는 중요하지 않아 집니다. 일남은 그렇기 때문에 게임을 해주지 않고 자기의 진짜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반복해서 기훈과 자기 가치관의 게임을 하는 겁니다. 그 때 기훈은 게임을 해야 한다고 붙잡고 정신 차리라고 합니다. 그의 멱살을 잡으면서 정신 차리고 게임 하자며 자기 이야기를 들으라고 격분 하지요. 인간적이던 그가 극한의 상황에 몰리자 일남의 인간적인 이야기는 무시하고 게임에만 집중하는 거죠. 인간 성기훈은 오일남과의 게임에서 완전히 패배하고 오징어게임의 경주마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결국, 처음에 감동적으로 보였던 "깐부"는 한마디로
참가자중 가장 인간적인 기훈이 조차 일남을 긍정하는 사람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러면서 일남은 기훈에게 구슬을 하나 줍니다. 마지막 구슬이자 오징어 게임에서 사람과 죽음에 집중하지 말고 지금처럼 게임에만 집중하란 뜻이기도 합니다.
그게 깐부 이니까요.
그리고 그러므로 진지하게 게임에 임하던 일남이 구슬치기에서 죽지 않은 것도 당연해집니다.
왜냐하면, 일남은 게임에서 이겼거든요.
물론 기훈은 한번 넘어졌다고 사람이길 포기하지 않습니다.
바로 다음게임 에서 일남이 준 구슬은 유리기술자에게 전달된 이후 바닥으로 떨어집니다.
그리고 유리기술자의 죽음에 대해 상우와 대립합니다.
처음 공유에게 예수 안 믿는다고 말한 거처럼
기훈은 예수처럼 처음부터 완벽한 사람일 수 없고, 패배하지 않는 먼치킨일 수도 없습니다.
하지만 결국 꺾였던 인간성을 회복하고 마지막에 상금을 희생하려 합니다.
상우에게 한 손이 뚫려 성흔이 생긴 상태로요
그는 예수로 태어나지 않았지만 빗속에서 다시 인간성에 대한 긍정을 깨우칩니다.
그래서 두 손과 얼굴의 완벽한 성흔은 아니지만
한쪽 손의 불완전한 성흔과 함께 자기희생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1년 뒤 그와 닮은 얼굴로 일남을 다시 만나고
인간성과 휴머니즘을 긍정하며
최후의 게임에서 이기게 됩니다.
'사람이 죽었다고요'로 대표되는 성기훈의 발언과 묘하게 계속 다른 사람을 생각하고 최소한의 휴머니즘, 최소한의 선을 지키는 인간쓰레기인 기훈을 잘 나타냅니다. 중간에 상우의 말로 나오는 엄마 등골 뜯어먹고 오지랖만 부리는 쓰레기죠. 이런 연출은 종종 영화에서 잘 나오는 조형이긴 합니다. 그런데 조금은 아쉬운 부분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영화 추격자에서 주인공을 포주로 일반적인 사람보다 못한 쓰레기 직업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영화를 진행하면서 이러한 쓰레기보다 못한 무능한 경찰을 나타내는 장치로 사용합니다. 하지만 소위 각성 기훈을 대놓고 연출하기 힘듭니다.
성기훈을 연기한 이정재 배우님도 사람들이 성기훈을 쓰레기로만 취급해서 주인공의 서사를 잘못 읽을까 봐 고양이에게 고등어를 주는 장면이라던지 새벽에게 소매치기를 당하는 순간에도 커피에 빨대를 꽂아주는 장면이라든지 많은 노력을 하였다고 밝혔지만 그런데도 직관적이지 못한 부분이 분명 있습니다.
오징어 게임의 성공에 대해 말이 나오면 항상 다른 데스게임 장르에 비해 서사와 사람에게 집중한 것과 복잡한 게임을 천재적인 주인공의 기지, 재치, 능력으로 돌파하는 장르적 특성과 대비되는 단순한 게임을 모자란 주인공의 운과 사람들과의 관계로 돌파하는 부분을 항상 주목합니다.
그런 면에서 오징어 게임이라는 드라마 자체를 물화한 주인공인 성기훈은 이러한 특성을 두드러지게 보여주지 못한다는 게 아이러니하게 느껴졌고 그래서 이렇게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6화 깐부에서 기훈과 일남의 대립은 정말 완벽한 연출이라고 느꼈는데 기훈이 서사는 그러지 못한 거 같아서 아쉽습니다.
* 손금불산입님에 의해서 자유 게시판으로부터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23-09-19 00:40)
* 관리사유 : 추천게시판 게시글로 선정되셨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