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가 운영하는 카페가 근 한 달째 휴업 중이다.
처음에는 여름휴가 3일 다녀온다기에 3일 뒤 갔더니 2일을 연장한다 하고, 지나고 또 갔더니 일주일을 개인 사정으로 쉰다 했다. 이제는 하겠지 하며 정해둔 날짜에 가봤더니 가게 문에다 A4지에 개인 사정으로 원두 주문만 받겠다는 문구와 전화번호를 매직으로 쓱쓱 적어 두었다.
친구 가게에서 미리 사다 두고 조금씩 아껴먹던 더치(콜 드 브루) 커피 원액은 벌써부터 바닥이었다. 그래서 내 동선에 있는 개인 카페 모두 가서 더치커피를 사 먹어봤지만 만족이 안 되었다. 우선 더치커피가 있는 프랜차이즈 카페는 딱 제품 맛이고, 개인 카페에는 아예 취급하는 곳이 잘 없었다. 두 번째로 더치커피를 취급하는 개인 카페가 있다 하더라도 그 맛이 마치 산봉우리를 돌아가는 도로변 트럭에서 파는 칡즙 맛이기 일쑤였다.
커피가 파고들다 보면 수많은 미식 요소들이 많다지만 나는 그 정도는 절대 아니고 친구가 판매하는 더치커피의 맛이 너무나 내 취향이었다. 퇴근길에 들려 친구와 쉰 소리 한 두마디 나눈 뒤 커피를 받아 들고 여전히 친구를 보며 쉰 소리하며 등으로 문을 밀어 열고 나와 한모금 빨면 첫맛으로 입안 가득 쌉싸래하지만 부드러운 초코향 이후 꼴깍 삼키고 나면 달짝지근하고 시원한 맛이 났다. 이 커피를 집으로 가는 차안에서 그렇게 한모금, 한모금씩 음미하며 아껴먹는 것이 내 퇴근길의 낙이었다.
집에 가서 다 먹은 커피 용기를 식탁에 올려두면 큰놈이 그렇게 그걸 씻어서 먹는다. 냉장고에 얼음 내어 먹으라니까 그게 맛있다네. 그게 아버지의 눈물의 결정이여 이놈아하면 와이프는 그거 또 먹냐며 큰놈 등을 두들겨 싱크대에 뱉게 한다. 그러곤 아한테 이상한 소리 한다며 손바닥을 오무려 내 입을 타격하려 하지만 나는 혀를 할짝여 방어하곤 했다.
퇴근길 커피 한잔이 나에게 낙이듯 큰놈에겐 아빠의 다 먹은 커피 얼음이 오늘 숙제와 도요새 잉글리쉬를 끝내고 시원한 맛에 먹는 낙일 수도 있는 것인데. 사실은 와이프가 먹고 싶은 걸 수도 있겠다 싶어 큰놈 몰래 자기 주는 거야 하며 수줍게 내밀었다가 그게 아닌 것을 매서운 두 눈동자와 그 위에 위치한 두 눈썹 사이 내천자를 보고 알 수 있었다.
친구가 문을 닫은 지 제법 시일이 지난 어느 퇴근길. 빨대가 그리워 편의점에 들러 0칼로리 마테차를 하나 사서 빨다 보니 초코향이 그리워졌다. 아씨 카카오닙스 살껄. 이 후회의 원인을 나에게서 찾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내 퇴근길의 낙을 망치고 있는 친구가 괜시리 미워져 전화를 했다.
- 여보세요.
= 어, XX가.
- 그래, 낸데, 딴기 에이고 니 요새 와 점빵 문을 안 여노. 무슨 일 있나. 코로나 때문에 글나.
= 그거도 그긴데, 내 요새 몸이 좀 안 좋다.
- 만나. 그래가 또 우야노. 어디가 그른데.
= 뭐, 좀 글타. 몸이 영 멜롱이네.
- 만나. 몸조리 잘해라.
= 그래. 고맙데이. 이라다 똥껄비 될따.
- 아이고, 좋은 기술 있는데 와 굼는다 말이고. 우야든동 단디 암싸받게 몸조리나.. 뭐고, 매매 잘해라.
= 그래 고맙다. 문 열머 전화하께.
몸이 아프다는 친구에게 내 진심을 전하지 못했다. 커피 만들어서 팔아라는 이야기가 하고 싶었는데 위선자처럼 마음에도 없는 친구의 건강을 걱정하는 말을 했다. 수첩에 적고 두고두고 반성할 일이라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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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출근해서 일하다 오후께 더치커피가 마려워 구글에다 더치커피를 검색했다. 나무위키도 읽으며 점적식과 침출식에 대해 익혔다. 또 이런거 저런거 읽다가 집에서 더치커피를 만드는 방법에 대한 링크를 누르니 네이버 블로그로 연결이 되었고 보통 그렇하듯 본인 경험인척하면서 광고하는 더치커피 만드는 기구에 대한 광고였다.
그런데 그날은 그것이 광고로 보이지가 않았다. 그 순간만큼은 24인치 모니터 이외의 시야는 모두 검게 변했으며, 그 순간만큼은 내 두 귀에 원두가 들어간 것처럼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그 순간만큼은 이것만이 앞으로 내가 더치커피를 마실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 생각되었다. 소비자는 부자가 되지 못한다. 생산자가 되어야 부자가 된다는 엠제이 드마코의 말처럼 나도 이제는 생산자가 되어 더치커피 부자가 되어야 한다고 결심하였다. 이제는 나도 추월 차선으로 갈 것이야.
그렇게 한 시간 정도 네이버를 뒤졌고 가정용 1,500ml 용량의 더치커피 메이커를 구매했다. 나의 아름다운 이 천사의 눈물 제조기는 멋진 모양의 나무 받침대가 있었고, 넉넉한 크기의 워터 볼, 향기로운 원두를 담는 용기에다 마법사 고깔 모자를 덮어 쓰고 취급해야 할 것처럼 생긴 더치 원액을 받는 용기로 이루어진 멋진 기구였다. 거기다 물 조절 밸브가 2개다. 비겁한 판매자 양반이 노출 된 판매 금액만큼의 금액을 내가 구매할 옵션에 더 해두었지만 어림없지, 추가 구성품 같이 구매하기로 혼내줬다.
금요일에 구매한 내가 원망스러웠다. 내 택배 언제 오나 기다리는 시간은 고통이었다. 오늘은 오려나 하는 기대로 그득한 오후, 와이프에게 전화가 왔다.
- 여보세~
+ 이거 뭔데.
- 어, 밥은 묵었나. 뭐 묵었노? 큰놈은 태권도 댕기 왔나?
+ 엉뚱소리하지 말고 이거 뭔데. 뭔데 내 키만 하노?
- 그거..내가 말안했쩨. 니 놀라지 마래이. 나는 인자 더치커피 부자가 될끼다.
+ ......
- 여보세요. 들었닝교?? 내말 들...
+ 이거 살라고 얼마나 인터넷 얼마나 뒤졌노.
- 한 한시간...
+ 오빠 니도 집에 오면 뒤졌다. (딸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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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실히 고순도의 카페인을 거의 매일 섭취해오면 사바사로 다르겠지만 내 경우에는 뇌가 제대로 된 사고를 하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 와이프에 대한 공포보다 내 멋드러진 더치커피 기구에 대한 기대가 더 커서 집에 가는 길이 무섭지 않았다. 최대한 자연스럽게 넘어지는 척하면서 언박싱을 할 방법에 대해 생각하며 엘리베이터에 내리니 집 현관앞에 택배가 그대로 있었다. 택배를 들고 들어가니 평소라면 아빠를 부르며 뒷꿈치를 들고 뛰어오던 큰놈과 재빠르게 중문쪽으로 기어오던 적은놈이 오지 않았다. 대신 큰놈이 천천히 걸어와 나에게 꾸벅 인사를 하고 덜그럭 소리가 나는 부엌쪽을 슬쩍 보고 나를 다시 보며 양 검지로 뿔을 만들더니 택배 박스와 나를 번갈아 본 뒤 시선을 아래로 떨어 뜨리고 고개를 절래절래 저었다.
큰놈의 경고를 본 나는 비록 중문 너머가 겁이 나는 공간이지만 모든 성공한 이가 그러하듯 주변의 비난과 만류, 때로는 고통과 역경을 이겨낼 용기와 굳은 다짐을 큰 숨과 함께 들이마시며 택배를 들고 중문을 넘어섰다. 그 순간
+ 오빠
이 소리가 들리자 크게 들이마셨던 숨이 피시식 다시 새어 나왔고, 현관문을 열고 다시 나갈까, 왼쪽 현관 팬트리에 숨을까 고민하던 찰나 와이프가 나를 다시 불렀다.
+ 오빠, 일단 뭔지 뜯어나 보자. 요새 집에서도 마이 한다 하드라.
그 말에 용기를 얻은 나는 열어서 보여주며 이래 저래 신나게 설명을 해주었다. 점적식, 침출식에 대해 설명하던 중 와이프가 이상한 소리 그만하고 씻어서 일단 커피나 내리라기에 암요, 암요하며 더치 기구를 세척하고 미끼 사은품으로 보내준 원두를 갈아서 더치 기구에 넣어 커피를 내리기 시작했다. 그걸 본 와이프는 얼마나 묵고 싶었으면 그랬겠노, 이해한다고 말하며 정말 궁금한 것을 묻기 하기 시작했다.
+ 놔두이까 보기 괴안네. 하루에 한잔씩 묵띠 몬 묵으니까 안되겠는 갑지를.
- 니도 더치커피 원액 사오면 좋아했다 아이가. 인자 헐케 묵으니까 장기적으로 보면 이기 절약인기다. 용량도 큰거라서 자주 안내라도 된다.
1,500
+ 맞나, 그래 잘했다. 근데 얼마 줬노.
잘했다에서 근데로 넘어 갈 때 눈빛이 매서워졌다. 이건 가평비로 가야한다. 그래서 내가 구매한 옵션가의 반값인 판매자 노출 가격을 담담하게 말했다.
+ 그래. 이게 큰놈 키만한 박슨데 그만큼은 안하겠나. 잘 샀다마. 마이 뽑아가 실컷 묵고 좀 나눠 주고 그라자.
그말은 들은 나는 젖은 손이 애처러워 살며시 노래를 부르며 두손을 모아 내미니 와이프가 챠라~며 작은놈 이유식을 먹이러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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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의 시간이 지난 뒤 방울방울 똑똑 떨어지는 커피 원액을 멍하게 보고 있으니 와이프가 그렇게 좋냐며 핀잔을 줬다. 잔잔한 미소를 띄우며 고개를 한번 끄덕여 주었다. 내 맞은편에 앉아 와이프도 내심 좋은지 기구 한번 보고 휴대폰 한번 보고, 기구 한번 보고 휴대폰 한번 보고 하는 것이었다. 그저 멍하니 천사의 눈물을 감상하고 있다가 자꾸 반복해서 기구와 휴대폰을 번갈아 보는 와이프의 모습이 이상해 슬쩍 보니 와이프가 이 기구를 인터넷에서 찾고 있었다. 그거는 만다 찾는데 하며 손을 잡아 끌려는 순간 와이프가 이거네하면서 내가 구입한 판매 페이지를 나에게 보여주었다.
+ 한 5천원 정도 헐케 말했네. 그 칼수 있다 본다.
며 웃는 와이프를 보니 안심이 되면서도 양심의 가책이 느껴졌다. 황급히 가정의 평화를 위해서야 마누라, 먼 훗날 언젠가 이 나의 진심을 이야기 할때가 있을게요 라고 속으로 생각하며 화장실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때
+ 근데 아까 이거 용량이 1,500이라 안켓나? 근데 이 가격은 800 가격인데?
제자리에 얼어붙은 나는 뒤돌아 설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러는 짧은 순간 드디어 와이프는 용량 선택 옵션 버튼을 누르고 모든 진실을 알아버렸다. 가평비, 가평비를 외쳐야 한다 생각했으나 입 또한 이미 얼어붙은 발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바로 그 직후 와이프는 매서운 두 눈동자와 그 위에 위치한 두 눈썹 사이 내천자를 그리며 나에게 다가와 렛풀 다운 최대 수축 자세를 취하고 있는 내 등짝을 내리쳤다.
나는 등에 와이프의 수타격으로 인한 아픔이 느껴졌다. 의미없는 회피로 서너걸음을 옮겨 가니 그 모습을 엄마 아빠가 신나는 놀이를 하는 중이라고 착각해 신이 나서 기어오는 작은놈을 피해가며, 1초 한대씩 신중하게 힘을 실은 타격을 온 등으로 받던 그때.
유독 한곳이 바늘로 찌르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그 통증은 가평비로 위장해 스스로 거짓임을 양지하면서도 인생의 동반자를 기만하고, 얄팍하고 교활한 거짓의 결과인 옵션까지 추가한 가산탕진에 대한 바늘 크기만큼의 양심의 가책이었을까?
"더치커피는 틀렸다, 콜드브루라 부르는 것이 옳다."
얼마 전 인터넷으로 배운 짧막한 지식으로 카페 알바생이 보기에도 하찮은 잘난체를 하며, 시원한 커피를 벌컥 들이키고 싶은.
아직은 더위가 가시지 않은.
그 열기보다 더한 열정의 등짝짝짝짝짝짝짝(생략)이 있었던 8월의 어느 저녁.
여드름이었다.
* 손금불산입님에 의해서 자유 게시판으로부터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23-09-12 1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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