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보는 자(字)가 덕모(德謀)이며 생몰연도는 확실치 않습니다. 고향은 유주 우북평군으로 북동쪽 변방 출신이죠. 그런 그가 어째서 양주 오군에서 대대손손 살아온 손견의 부하가 되었는지는 전혀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상당히 의아합니다. 손견은 황건적의 난이 일어나기 십여 년 전부터 일찌감치 벼슬을 시작했지만 임지는 줄곧 양주와 서주 일대였거든요. 유주 사람이 내려오기에는 너무나 먼 곳이죠.
굳이 상상의 나래를 펴 보자면, 아마도 황건적의 난이 일어났을 때 손견과 합류한 게 아닌가 추측됩니다. 황건적의 난 당시 토벌군의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한 우중랑장 주준이 표를 올려 손견을 자신의 좌군사마로 삼았기에, 손견은 공식적으로 병력을 모집할 수 있었습니다. 이때 본래 다른 지역에 있었던 정보도 손견 휘하에 속하게 된 게 아닌가 싶습니다. 우북평군의 바로 이웃에 위치한 요서군 출신인 한당 역시 마찬가지였던 걸로 여겨지고요.
여하튼 이렇게 손견의 휘하에 든 정보는 이후 손견의 오른팔이 되어 함께 전장을 누빕니다. 완현과 등현에서 황건적을 토벌하는 데 종군했고, 이후 동탁을 공격하는 데도 함께했습니다. 특히 양인이라는 곳에서 손견이 동탁의 부하인 서영과 맞붙은 전투는 결국 손견이 적의 도독 화웅을 참수하는 대승으로 끝났는데 정보 또한 이 싸움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 과정에서 여러 번 다치기도 했지요. 기록에 따르면 몸에 수많은 상처가 있었다고 합니다.
191년, 손견이 유표와 싸우던 중 갑작스레 전사했을 때 정보는 인생의 기로에 놓였습니다. 앞서 설명하였다시피 정보는 손견이 활약하던 곳에 연고라고는 일절 없었습니다. 그저 주군 한 사람만 보고 따라다닌 것이었죠. 그런 상황에서 갑자기 손견이 죽었고, 그 큰아들 손책은 기껏해야 열여섯 된 소년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당시 양주 일대에서 가장 강성했던 이는 원술이었습니다. 손견은 원술의 부하라고 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완전한 독립 세력으로 간주하기도 어려운 애매한 상하 관계에 있었습니다. 실제로도 손견 사후에 원술이 손견의 부곡(部曲. 사병집단)을 흡수하기도 했지요. 그러니만큼 정보의 입장에서는 차라리 사세삼공 명문가의 후예이자 강성한 군웅이었던 원술의 부하가 되는 길을 선택하는 게 사리에 맞을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어린 주인 손책을 따랐지요.
194년에 손책은 직접 원술을 찾아가 그 휘하에 들었습니다. 자신의 세력을 구축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지요. 이때 정보는 손책을 수행하여 경현이라는 곳으로 병력을 모집하러 갔는데, 그곳에서 조랑이라는 자와 싸우던 중 패색이 짙어지는 바람에 적에게 포위당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이때 정보는 또다른 기병 한 명과 함께 모 한 자루를 꼬나 쥐고 말을 박차 적을 향해 돌격함으로써 혈로를 열었습니다. 그리하여 손책은 간신히 살아남을 수 있었지요. 그야말로 생명의 은인인 셈입니다.
물론 손책 또한 정보의 공훈에 보답했습니다. 강동 일대에서 세력을 구축한 후 처음에는 여러 군(郡)의 도위(都尉)로 삼아 군사 관련 업무를 돌보도록 했다가, 이후 다시 병력을 내주고 사방의 적들을 토벌하게 했지요. 정보는 탕구중랑장(盪寇中郎將)으로 임명되었고 다시 영릉태수를 겸하게 되었며, 이후 유훈을 공격하고 황조를 토벌하는 데도 종군하였습니다. 그런 정보의 활약은 손책 휘하의 여러 장수들 가운데서도 ‘거의’ 으뜸가는 수준이었다고 하겠습니다.
단 한 사람, 주유만을 제외하고요.
정보는 손책 휘하의 여러 장수 가운데서도 가장 나이가 많은 맏형이여서 주위 사람들이 그를 높여 정공(程公)이라 부를 정도였습니다. 또 선대 손견 시절부터 손씨를 섬겨 온 공훈 또한 드높았습니다. 그러나 주유 역시 손책의 휘하에서 정보 못지않게 많은 군사적 활약을 했습니다. 더군다나 주유는 동갑내기인 손책과의 개인적인 교분도 깊었으며, 손책이 어렵던 시절에 물심양면으로 많은 지원을 해준 호족이기도 했습니다. 그렇기에 손책은 정보보다 주유를 더 아꼈던 것 같습니다. 그건 동생인 손권 또한 마찬가지였습니다.
손책은 200년에 갑작스레 요절하였습니다. 당시 나이가 고작 스물여섯이었지요. 손책은 동생인 손권에게 뒷일을 맡겼고, 정보는 이제 열아홉 살 난 손권의 부하가 되었습니다. 이후 주유와 장소 두 사람이 문무(文武)의 일을 나누어 관장하게 되면서 정보는 은근슬쩍 군부의 일인자 자리에서 밀려나게 됩니다.
아마도 기분이 안 좋았을 겁니다. 그것도 상당히요.
손견부터 손책을 거쳐 손권까지 삼 대를 섬겨온 숙장인 정보입니다. 경력으로든 손씨에 대한 충성심으로든 그에 비할 수 있는 자는 없었습니다. 그러니만큼 자신보다 한참이나 주유가 자신과 어깨를 나란히 하다 못해 오히려 앞서가려 하는 상황은 도저히 견디기 힘들었겠지요. 그래서 언젠가부터 정보는 주유와 척을 지기 시작합니다. 두 사람 모두 성격이 너그럽고 베풀기를 좋아했지만 서로에 대해서는 견원지간이 되었지요.
그런 상황에서 동오에 큰 위기가 닥칩니다. 209년, 형주까지 차지한 조조가 마침내 동오를 침공해 왔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손권은 유비와 손잡고 그에게 맞서기로 결의합니다.
이때 조조와 맞서는 병력을 지휘하는 역할은 누구에게 주어져야 했을까요? 물론 주전파의 선두에 서 있었을 뿐만 아니라 중호군(中護軍)으로서 중앙군을 관장하는 역할을 맡은 주유가 적임이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러나 정보의 경력이나 지위 또한 만만치 않았습니다. 그렇기에 손권으로서는 무작정 어느 한쪽 편만 들기에는 어려움이 큰 상황이었습니다. 또 본격적인 전쟁을 치르려면 오래된 장수들의 경험 또한 반드시 필요했습니다. 결국 손권은 타협안을 내놓습니다. 주유와 정보를 각기 좌독(左督)과 우독(右督)으로 삼아 병력을 이끌게 한 겁니다.
하지만 실질적인 지휘관은 아무래도 주유였고 정보는 그저 보조적인 역할에 그쳤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 또한 정보의 입장에서는 내키지 않는 결과였겠지요. 동오의 명운을 건 대전쟁을 앞두고도 두 사람의 다툼은 꽤나 심했던 걸로 보입니다. 훗날 여몽이 이렇게 말할 정도였지요.
[“예전에 주유와 정보 두 사람이 좌독과 우독이 되어 함께 강릉을 공격했을 때, 비록 중요한 일을 결정하는 사람은 주유였지만 정보 역시 오래된 장수여서 스스로를 주유와 동급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함께 일했음에도 화목하지는 못하여 하마터면 나라의 큰일을 그르칠 뻔 했습니다. (昔周瑜程普為左右部督 共攻江陵 雖事決於瑜 普自恃乆將 且俱是督 遂共不睦 幾敗國事)”]
두 사람 사이가 얼마나 나빴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벽대전은 손권과 유비 연합군의 대승으로 끝났고, 이 과정에서 주유의 공훈은 그야말로 지대했습니다. 조조는 북쪽으로 돌아갔고, 일 년에 가까운 공성전 끝에 요충지 강릉 또한 손권의 손아귀에 떨어졌습니다.
이후 주유는 편장군(偏將軍) 남군태수에 임명되었습니다. 정보는 비장군(裨將軍)에 배수되어 강하태수가 되었지요. 편장군과 비장군은 둘 다 비슷한 반열이지요. 두 사람에게 지급된 녹읍도 4개 현으로 동일했습니다. 손권 입장에서는 최대한 두 사람을 대등하게 대해준 셈이었지요. 그러나 굳이 따지자면 편장군이 약간이나마 더 높기도 했고, 부임지도 남군이 좀 더 중요한 곳이었습니다. 동오의 군부 전체를 통틀어 정보는 확실히 이인자였습니다. 분명 남들보다 높지만, 결코 일인자보다 높을 수는 없는.
결론부터 말하면 두 사람은 결국 화해했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정보가 자신의 나이를 앞세워서 자주 떽떽거린 반면, 주유는 끝까지 겸양하면서 깍듯하게 예의를 차렸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결국 정보는 주유에게 진심으로 승복하며 이렇게 말했다고 전해집니다.
[“주공근과 더불어 사귐은 마치 좋은 술을 마시는 것 같아서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스스로 취하는구나! (與周公瑾交 若飲醇醪 不覺自醉)”]
이후 주유가 죽자 정보가 후임으로 남군태수가 되었다가 유비에게 강릉을 내준 후 또다시 강하로 돌아가 그곳에 주둔했습니다. 그리고 죽을 때까지 자신의 소임을 다했습니다.
위촉오 삼국 가운데서도 가장 존재감이 없는 오나라. 정보 역시 마찬가지로 존재감이 별로 없습니다. 기껏해야 황개, 한당과 함께 세트메뉴로 취급되는 수준이며 개중에서도 적벽에서 엄청난 활약상을 선보인 황개에 비하면 한참이나 처지는 느낌입니다.
그러나 정보는 생각보다 훨씬 중요한 인물입니다. 앞서 누차 언급하였다시피 그는 손견이 처음 풍운의 꿈을 품고 몸을 일으켰을 때부터 그를 따라다닌 가장 오래된 장수 중 하나였습니다. 손견과 손책을 따라 전장을 누비며 중요한 전투에는 대부분 참전하였고, 손권 시절에도 크고 작은 공훈을 여럿 쌓았습니다.
그보다 더욱 가치 있는 것은 그의 충성심입니다. 정보는 손씨 삼대를 섬기면서 단 한 번도 주인을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수장의 때 이른 죽음으로 세력 전체가 위기에 봉착했을 때도 묵묵히 자리를 지켰고, 항상 주군의 칼이 되어 전장에서 활약했습니다.
그런 정보가 주유와 불화했던 일화는 당시 동오 세력 내부의 대립구도를 짐작할 수 있게 해줍니다.
적벽대전 직전 시점에서 동오 상층부의 인적 구성은 그야말로 복잡했습니다. 정보를 위시하여 손견 시절부터 지속적으로 손씨를 섬겨 온 정보나 황개 같은 노장들, 손책 시절에 새로이 등용된 주유나 태사자 같은 이들, 그리고 손권이 자신의 친위세력을 구축하기 위해 중히 쓴 제갈근이나 노숙 같은 외부 출신 인사들, 손권이 의도적으로 힘을 실어준 정황이 역력한 손유나 손교 같은 일가붙이들, 그리고 예전부터 지역에 뿌리박고 살아온 육손과 고옹 같은 호족들까지 참으로 다양했지요. 여기다가 손권 자신의 애매한 정통성 문제, 즉 손책의 아들이 아니라 동생인 자신이 뒤를 이었다는 점까지 감안한다면 이 복잡다단한 정치적 역학 관계는 대체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조차 알 수 없는 수준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정보가 주유와 부딪힌 일은 단순히 실세에서 밀려난 노장의 분풀이일 수도 있겠지만, 어쩌면 그러한 세력들 간의 충돌이 마침내 공개적으로 표출된 결과물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 견지에서 본다면 두 사람이 마침내 화해한 것이 더욱 의미심장하지요. 그간 대립해 왔던 세력 일부가 마침내 손권의 영도 아래 힘을 합쳤다는 뜻이니까요. 물론 제 추측일 뿐입니다만.
여하튼 결과적으로 정보는 주유와 불화했을망정 그 문제로 나라의 큰일을 망치지는 않았습니다. 두 사람은 함께 적벽대전이라는 큰 위기를 극복해냈지요. 어쩌면 이렇게 생각해볼 수도 있습니다. 손권이 주유와 함께 정보를 기용했기에, 여러 갈래로 나누어져 있던 동오의 인사들이 그나마 힘을 하나로 합칠 수 있었다고요. 경력으로 볼 때 정보는 분명 그럴 만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니만큼 저는 이렇게 말하겠습니다. 정보는, 비록 겉으로 크게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분명 손씨 가문을 지탱하는 가장 튼튼하고 오래된 기둥이었다고 말입니다.
* 손금불산입님에 의해서 자유 게시판으로부터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23-08-18 1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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