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사자는 삼국지 전체를 통틀어서도 이름이 멋있기로 유명한 인물입니다. 그리고 이름만큼이나 행적도 인상 깊지요. 자는 자의(子義)라고 하며, 청주의 동쪽 끄트머리에 있는 동래군 황현 출신입니다. 젊어서 동래군의 관리가 되었지요. 그는 젊어서부터 재기가 넘치는 인물이었는데 이러한 일화가 남아 있습니다.
청주와 동래군 사이에 뭔가 문제가 생겼는데, 일단 중앙정부에 먼저 보고를 하는 쪽이 유리해지는 상황이었지요. 그래서 청주에서 먼저 공문을 띄웠습니다. 동래군에서도 공문을 띄웠지만 이미 한발 늦은 상황이었는데, 사자로 선발된 태사자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질주하여 수도인 낙양에 이르러서 가까스로 먼저 출발했던 청주의 관리를 따라잡는 데 성공합니다. 이때 태사자는 자신이 어디서 왔는지 감추고 마치 중앙 관리인 양 행세하며 말했습니다.
"당신이 공문을 제출하러 온 사람이오? 공문의 제목에 문제가 있더군. 제출하기 전에 내게 보여주시오."
청주의 관리는 별 생각 없이 태사자에게 공문을 가져다주었지요. 그 순간 태사자는 대뜸 칼을 꺼내어 공문을 잘라버렸습니다. 관리는 대경실색했습니다. 당시 공문 훼손은 크게 처벌받을 잘못이었으니까요. 얼굴이 새하얗게 변한 관리에게 태사자는 은밀히 제안합니다.
"당초 내가 받은 명령은 그저 공문이 제출되었는가 확인하라는 것이었는데, 내가 그만 의욕이 앞서서 큰일을 벌이고 말았구려. 어쨌거나 이제는 우리 둘 다 별 수 없게 되었소. 그대는 내게 공문을 내준 잘못이 있고, 난 공문을 훼손한 잘못이 있으니 둘 다 크게 처벌받을 거요. 그러니 차라리 같이 도망갑시다."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 관리는 태사자의 말을 따라 함께 낙양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며칠 후, 태사자는 그 관리를 버려두고 도망쳐서 다시 낙양으로 되돌아온 후 비로소 자신이 품고 있었던 동래군의 공문을 제출하였지요. 이로 인해 태사자의 이름이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곧 닥쳐올 청주의 질책이 두려웠던 태사자는 멀리 피신합니다. 무려 요동으로, 아주 머나먼 동북부의 변방으로 말입니다. 몇 년 후 태사자는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지만, 귀향길에도 그냥 오지 않고 당시 요동의 권력자였던 공손도에게 밉보였던 유정이라는 인물을 탈출시키는 데 일조하지요.
이러한 일화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꽤나 흥미로운 인물이었습니다. 과감하고 용기가 있었죠. 청주 북해국의 상(相)으로 있었던 공융이 그의 이야기를 전해듣고는 태사자의 모친에게 종종 사람을 보내어 문안하고 때로는 선물을 주기도 했습니다. 이후 태사자가 요동에서 돌아왔을 때, 공융은 마침 황건적의 잔당인 관해에게 포위당해 매우 위급한 상황이었습니다. 태사자가 수천 리 여정을 거쳐 마침내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모친이 대뜸 말했지요.
"공북해(북해상北海相 공융)는 너와 친분이 없었지만 네가 없는 동안 나를 여러 모로 돌보아 주셨다. 이제 역적들에게 포위당하여 위급하다 하니 네가 응당 도와야 하지 않겠느냐."
수년간 집을 떠나 있다가 간신히 돌아온 태사자였건만 어머니의 말씀은 하늘과도 같았지요. 그는 딱 사흘 동안 집에서 쉰 후에 바로 공융에게로 출발합니다. 이때 말을 타지 않고 걸었으며 동행한 부하도 없었다는 기록으로 봐서, 일각의 추측과는 달리 태사자가 딱히 세력 있는 호족 출신은 아니었던 걸로 보입니다.
그렇게 공융이 포위된 도창성에 도착한 태사자는 야음을 틈타 은밀하게 성 안으로 잠입하는 데 성공합니다. 그리고 공융을 만나지요. 그 자리에서 태사자는 출병하여 적을 공격하자고 주장했지만 공융은 주저했습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는 동안 적의 포위망은 점점 더 견고해졌지요. 마침내 공융은 평원상으로 있었던 유비에게 구원을 청하기로 하고, 태사자는 자신이 전령 역할을 맡겠다고 자청했습니다. 적의 포위망에 빈틈이 없다는 점을 들어 여러 사람들이 반대했지만 태사자는 자신감 있게 말했습니다.
"예전에 부군께서 저의 노모를 돌보아주셨고, 이제 노모께서 저를 부군께 보내셨으니 이는 반드시 제가 부군께 도움되는 일을 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셨기 때문입니다. 비록 뭇 사람들이 불가능한 일이라 하지만 저도 그렇게 말한다면 어찌 어머니께서 저를 보내신 뜻에 맞겠습니까? 지금 상황이 실로 위급하니 부군께서는 의심치 말고 제게 맡겨 주십시오."
내가 은혜를 입었으니 반드시 갚겠다는 뜻이죠. 하지만 적의 대군이 성을 겹겹이 포위하고 있는 상황이어서 강행돌파는 불가능한 상황이었습니다. 여기서 태사자는 꾀를 생각해 냈습니다.
다음날 아침. 새벽에 태사자는 활을 차고 기병 두 기를 거느린 채 성문을 열고 나왔습니다. 뜻밖의 움직임에 깜짝 놀란 관해의 군사들은 싸울 준비를 하느라 잔뜩 소란을 피웠습니다. 그런데 태사자는 태연자약하게 해자 근처에다 과녁을 설치한 후 활쏘기 연습을 했습니다. 그리고 연습을 마친 후 도로 성 안으로 들어가버렸지요.
다음날에도 태사자는 똑같은 행동을 반복합니다. 이미 전날 한번 속았던 적군들은 의심의 눈초리로 태사자를 쳐다보았습니다. 하지만 태사자는 이번에도 활쏘기 연습을 마친 후 도로 들어가 버렸습니다.
그 다음날에도 태사자는 같은 행동을 되풀이했습니다. 이번에는 적의 군사들도 별다른 움직임 없이 그저 멀거니 태사자를 구경하기만 했습니다. 이 순간, 태사자는 급히 말에 채찍질을 가해 질풍처럼 달려 적진을 돌파합니다. 크게 당황한 관해의 군사들이 뒤늦게 그를 뒤쫓았지만, 태사자가 활솜씨를 발휘해 몇 명을 쏘아죽이자 감히 끝까지 뒤쫓는 자가 없었습니다. 이렇게 하여 기지로 포위망을 돌파한 태사자는 유비의 구원병을 데려와 공융을 구출해냅니다. 나이든 어머니의 말씀을 지켜 마침내 은혜를 갚은 셈이었지요. 그것도 오롯이 혼자만의 힘과 지혜로.
하지만 태사자는 청주에서 계속 벼슬살이를 하지 않고, 공융의 휘하에 들지도 않습니다. 아마도 공융은 자신이 섬길 만한 그릇이 못 된다고 생각한 게 아닐까 싶네요. 아마도 원했더라면 유비의 휘하에 들 수도 있었겠지만 그렇게 하지도 않았습니다. 대신 그는 양주로 내려가 자신과 동향 출신인 양주자사 유요에게 의탁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막상 유요는 그를 마뜩찮아했지요. 어떤 자가 태사자를 가히 대장으로 삼을 만하다 했지만, 유요는 고개를 저으면서 단지 적군의 동태를 살피는 임무를 맡겼을 뿐이었습니다.
이때는 바야흐로 손책이 강동의 여러 주를 공략하던 때였습니다. 정찰에 나선 태사자는 뜻밖에도 손책과 마주쳤지요. 이때 태사자를 따르는 병사는 고작 한 명뿐이었고 손책은 부하장수 열 세 명을 거느리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태사자는 대뜸 돌격하여 손책과 맞붙습니다. 이때 두 사람의 싸움이 얼마나 격렬했던지, 손책이 태사자가 차고 있던 수극을 빼앗고 태사자는 손책의 투구를 빼앗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다 마침 양쪽 군사들이 뒤늦게 달려와서 그들의 격투는 끝을 보지 못한 채 끝났지요.
이후 유요가 손책에게 패하자 태사자는 유요와 함께 달아나다 강동의 산월족들을 규합하여 손책에게 끝까지 맞섰습니다. 당초 유요에게 받은 푸대접을 감안하면 뜻밖이지요. 그러나 직접 군사들을 이끌고 쳐들어온 손책에게 중과부적으로 결국 사로잡히고 말았죠. 손책은 사로잡은 태사자의 포박을 풀어주고 손을 잡으면서 그를 자신의 부하로 삼았습니다. 이때 손책은 오늘날 큰일을 하려면 마땅히 그대와 함께해야 한다며 태사자를 높이 대우해 주지요.
훗날 유요가 예장에서 병으로 사망하자 그가 거느리던 군사들은 갈 곳을 잃게 되었습니다. 손책은 태사자를 보내 그들을 위무하고 자신에게 끌어들이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주위 사람들은 모두 반대했습니다. 태사자를 풀어주면 반드시 도망칠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말이지요. 그러나 손책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러분의 말은 모두 틀렸소. 그는 용맹하고 담력이 있으면서도 결코 제멋대로 행동하는 인물이 아니요. 선비의 면모를 지녔고 올바른 도의를 따르는 사람이니 반드시 약속을 지킬 것이오. 또한 한 번 사귐을 허락하면 죽을지언정 배신하지는 않을 사람이니 여러분은 결코 걱정하지 마시오."
더군다나 손책은 부하를 몇 명이나 데려갈지도 태사자가 알아서 정하도록 했습니다. 태사자는 수십 명만 있으면 충분하다고 답했고, 육십 일 안에 돌아오겠다고 약조했습니다. 그리고 기한 안에 돌아왔지요. 더군다나 그가 가져온 예장에 대한 정보는 손책이 예장을 평정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태사자는 손책의 믿음에 보답했습니다.
아쉽게도 태사자가 손책의 수하가 된 이후의 기록은 그다지 남아 있지 않습니다. 다만 유표의 조카 유반의 침입을 막기 위해 여섯 개의 현을 맡겨 남쪽 일대에 주둔하도록 했으며, 손권이 형의 뒤를 이은 후에도 태사자에게 여전히 그 임무를 맡겼다는 서술 정도가 전부입니다. 물론 당시 유표는 손책의 숙적이자 호적수라 할 수 있었으니만큼 태사자가 맡은 역할이 결코 작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또한 당시 강동의 호족 연합체에 가까웠던 손씨 세력의 특성상, 태사자는 독자적으로 군을 이끌고 외지에 주둔해 있을 만큼 믿음을 얻었다고 볼 수 있겠지요. 아마도 태사자가 좀 더 오래 살았더라면 그의 활약상이 사서에 더 많이 기록되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태사자는 안타깝게도 마흔한 살의 나이로 요절하고 말았습니다. 때는 206년이었지요. 죽음에 이르러 이렇게 탄식했다고 전합니다.
"대장부가 이 세상에 났으면 마땅히 7척 칼을 차고 천자의 섬돌에 올라야 한다. 지금 나는 아직 뜻을 이루지 못했는데 어찌하여 죽어야 한다는 말인가!"
태사자는 활을 잘 쏘는 것으로 유명했습니다. 앞서 언급했다시피 공융을 포위한 적을 뚫고 탈출했을 때 기막힌 활솜씨를 자랑했었지요. 또 손책의 휘하에 들어 도적떼를 토벌할 때, 적의 장수 하나가 누각에 올라 손으로 기둥을 짚고 욕설을 퍼붓자 화살을 쏘아 그 손을 꿰뚫어버리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 활솜씨보다 훨씬 대단한 것은 바로 태사자의 담대함, 그리고 일단 맡은 일을 반드시 해내고야 마는 집요함이었습니다. 태수가 맡긴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 공문을 훼손하는 범죄도 서슴지 않았고, 어머니의 말에 따라 혈혈단신으로 공융을 도우러 갔습니다. 공융을 위해 목숨을 걸고 적진을 돌파하여 구원을 청했으며, 유요를 위해서는 압도적으로 불리한 상황에서도 손책에게 덤벼들었을 뿐만 아니라 끝까지 손책에게 맞섰습니다. 이런 태사자의 행동거지는 사마천이 사기를 통해 기록한 이른바 '협(俠)'과 일맥상통합니다. 주인을 위해 목숨마저 초개처럼 내버리는 그런 협객들 말입니다. 이는 흔히 말하는 '충성'보다는 '의리'에 가깝지요.
유요는 그러한 태사자를 받아들이기에는 지나치게 그릇이 작은 인물이었습니다. 반면 손책은 태사자를 알아보았고, 그를 포용하여 결국 자신의 수하로 삼았지요. 훗날 태사자의 명성을 들은 조조가 그를 회유하려 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하지만 태사자는 끝까지 손씨의 휘하에 있기를 선택했습니다. 자신을 알아주는 주인을 배신할 태사자가 아니었으니 말입니다.
그렇기에 저는 태사자가 손책에게 있어 관우나 장비 같은 인물이 아니었나 하고 생각합니다. 절대 자신을 배신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는, 그래서 중요한 임무나 병력을 믿고 맡길 수 있는 그런 심복 중의 심복 말입니다. 앞서 말했다시피 기록이 얼마 남아 있지 않은 데다 태사자 본인도 일찍 죽은 터라 그런 추측을 뒷받침할 증거는 없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지금까지 남아 있는 몇 가지 일화만으로도 태사자라는 인물의 사람됨을 알아보기에는 부족함이 없지요. 그는 분명 재기 넘치면서도 용감하고 의리 있는 그런 인물이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때이른 죽음이 더욱더 안타깝습니다.
* 손금불산입님에 의해서 자유 게시판으로부터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23-07-14 0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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