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수능이 끝난 날.
해방감에 휩싸여 교실을 나서려는데, 처음보는 인상의 소녀가 나타나 자기 수험표를 건넸다.
얼떨결에 받아들고 내용을 보니 그냥 평범한 수험표였다. 다만, 붙어있는 사진이 좀 달랐다. 단정하게 땋은 머리와 뿔테안경이 돋보이는 사진과는 달리, 눈앞의 소녀는 은색 머리칼을 풀어내린 상태였다.
뭐냐고 물었건만, 일단 자기가 건네 준 수험표를 뒤집어 보라고 닦달하는 통에 일단 시키는대로 해보았다.
그곳엔 아기자기한 글씨로 써내려간 묘한 문구들이 있었다.
2.
[ 안내 ]
3학년 2반 한유란입니다.
거두절미하고 이야기하겠습니다. 저는 오늘 11월 14일을 무한히 반복하고 있는 중입니다.
모종의 이유로 계속해서 시간이 되돌아가는 통에, 이젠 몇 번째인지 세지도 못하고 계속해서 오늘 하루를 반복 중에 있습니다.
대체 이게 무슨 소리인지, 제정신이 맞는 건지 하는 의문이 드는 게 당연합니다. 충분히 이해합니다. 다만, 그런 의문은 잠시 뒤로 미뤄주시고 잠깐 협조해주셨으면 합니다.
제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나름대로의 방법으로 잘 증명하겠습니다. 우선 제 말을 믿고 따라주세요.
3.
“다 읽었니?”
“응? 뭐, 이거?”
“다 읽었구나. 일단 나 따라와봐. 뛰어야 돼.”
“아니, 너.. 뭐야, 넌 대체 누군데...”
수험표를 다시 뺏어든 소녀는 주머니 속에 그걸 우겨놓고 얼른 내 손을 잡아끌었다. 갑작스러운 상황이 너무 당황스러웠다.
“20초 후에 2반 교실에서 감독쌤이 나와서 시험은 잘 치렀냐고 물어볼거야. 그 다음에는 시험 종료 방송이 나올 건데, 방송 상태가 안 좋아서 몇 번 지직댈거야. 금일.. 부분에서 두 번 지직대고 귀가... 어쩌고 하는 부분에서 두 번 지직 댈거야. 그 다음에 화장실에서 네 단짝친구 민우가 나와서 죽을상을 하면서 한탄하려 할 거고, 손을 잡고 있는 우리를 묘한 눈으로 쳐다볼 건데 무시해, 그리고 서편 계단을 뛰어서 내려갈 건데 감독쌤 하나가 아직 제 2외국어 시험 보는 애들 있으니까 조용히 퇴실하라고 경고를 줄거야. 신경 쓸 필요 없어 무시하고 뛰어.”
“아니, 뭔 소리를... 설명 좀 천천히 해!”
“시간이 별로 없어.”
자기를 한유란이라고 소개했었다. 3년씩이나 다녔던 학교인만큼 같은 학년 누구인지는 대충 알고 있었다. 별로 친한 사이는 아니였는데.... 내가 알기로는 이렇게 말 많고 당찬 성격이 아니라 조용하고 내성적인 애였다.
허나 지금 내 손을 잡아끌며 빠르게 복도를 가로지르는 소녀는 완전히 정반대 인상이였다. 애초에 허리 언저리까지 오는 긴 머리칼은 지금 같은 새하얀 백금색이 아니라 다른 학생들이 그렇듯 흑발이었다. 애시당초 이렇게 눈에 튀는 스타일도 아니었다고.
“그렇게 1층 현관으로 나오고 나면 귀가 방송이 중단될 거야. 원인 확인중이라고 웅성거리는 선생들 사이를 빠져나와서 별관 쪽으로 갈건데, 정문 잠겨있으니까 뒤편 담장쪽으로 가서 창문 깨고 들어갈거야. 괜시리 선생들 눈에 띄면 시간 끌리니까 은밀히 행동해야 돼. 그리고 뒤쪽 창문 통해서 별관으로 들어가면 특별실인데, 수능 날이지만 특별 수업 받고 있는 2학년 애들 있을 거야. 걔네들이 쳐다보면서 뭐라 할텐데 신경 쓰지 말고 교실 가로질러 지나가서....”
그 순간 2반 교실 문이 열리더니 인상 좋아보이는 감독 선생 한명이 수거한 OMR 카드를 정리해서 나오고 있었다. 바쁘게 복도를 가로지르는 우리를 보고 부드럽게 미소지으며 인사를 건넸다.
“학생들... 시험은 잘 치렀...”
“넷!”
한유란은 빠르게 단답하고 반쯤 뛰는 듯한 모습으로 얼른 복도를 가로질렀다. 나도 엉겁결에 휩쓸려서 복도를 뛰다보니 교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 금일...치직...치직... 대학수학능력시험을 치르신 수험생 여러분들 수고하셨습니다. 제 2 외국어 영역을 치르는 수험생들은 지정받은 교실에서 대기해주시면 되겠습니다. 아직 시험이 남은 학생들을 위해 빠르고 정숙하게 귀가...치직...치직... 해주시길 바라며... ]
“그래서 별관 복도로 가면 발자국 같은 것들이 복도따라 쭉 이어져 있을거야. 그걸 쫓아서 별관 옥상까지 올라갈 거야. 올라가는데는 별 문제 없을거야. 옥상 문은 잠겨 있을 건데 가는 길에 경비원 숙직실에 들러서 공구함 뒤져서 쇠지렛대 하나를 챙길 거거든? 내가 힘이 부족하니까 네가 그 쇠지렛대로 옥상 문을 부숴줘야 해. 그리고 옥상으로 나오면 묘한 인간 하나가 본관 쪽을 보면서 서있을 거야. 걔를 제압해야 되는데, 품속에 커터칼을 감추고 있으니까 조심해야 돼. 일단 내가 측면에서 걔 시선을 끌건데...”
“아니, 진짜! 뭔 소린지 중간부터 하나도 모르겠잖아, 설명 좀 천천히 하라고!”
“일단 끝까지 들어.”
한유란의 손에 이끌려 복도를 뛰다보니 화장실 쪽에서 내 중학교 동창이자 오랜 친구 민우가 손을 씻고 나오는 참이었다.
“야, 박율! 나 진짜 탐구 시간 때 똥 마려워서 죽을 뻔... 어.. 어... 야 뭐냐..? 걔 누구냐?”
내가 채 대답하기도 전에 화장실을 스쳐지나가자 음흉한 눈으로 쳐다보는 민우가 조금씩 멀어져갔다. 뭔가 단단히 오해하고 있는 거 같은데..
그대로 서편 계단으로 뛰어간 우리는 휩쓸리듯이 계단을 따라 빠르게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래서 내가 걔 측면에서 시선을 끌면 네가 쇠지렛대로 머리를 가격해.”
“아니, 대체 뭔 소리야? 살인을 하라고? 나보고?”
“어차피 안 먹힐거야. 피하고 커터칼을 네 쇄골 근처에 가져다 박을텐데, 피할 수 있으면 피해. 못 피해도 괜찮아. 그 틈을 타서 내가 알아서 처리할테니까.”
“무슨 말을 그렇게 해?”
“아마 못 피할 건데, 미리 알려줬으니까 피할 수 있으면 피해 봐. 어차피 안죽을거야. 그렇게 해서 걜 제압하면 크게 지진 비스무리한 흔들림이 있을 건데 너무 당황하진 말고. 그 틈을 타서 걔가 도망가려 할텐데 네가 한 번 더 제압해 줘야 돼. 할 수 있지? 그래서 걔가 도망가는 걸 포기하고 나면 옥상 입구에서 경비원이 나타날건데...”
“아니, 진짜 천천히 좀 해! 뭐? 지진 비스무리한 흔들림? 그건 뭐야?”
“폭발로 인한 진동이야.”
“뭐?”
“본관에 운석이 떨어져서 다 죽을거야.”
내 귀를 의심했다.
헛숨이 확 삼켜지고 소름이 올랐다. 대체 얘가 뭔 소리를 하는거지?
팔을 뿌리쳤다. 그리고 잠시 멈춰섰다.
“대체 무슨 말을 하는...”
말을 끝까지 이어가지 못한 건 다시 소름이 올랐기 때문이다. 이 애, 내가 손을 뿌리치려는 걸 알고 미리 힘을 풀었다.
꽉 들어간 힘을 주체하지 못하고 허공에 하릴없이 푸닥거린 내 팔뚝이 그 증거였다.
“너...”
“시간 없다 했어.”
“지금 나보고 그런 어이없는 말들을 믿으라는거야?”
뭐라 반응이 나오기도 전에 다시 손을 움켜쥐고선 내달렸다. 아무 말도 나오질 않았다.
“별관은 대체 왜 가는데? 아니 그전에 운석이 뭐? 아니 그것도 그런데.. 애초에 너 머리색은 어쩌다... 아니 이건 그렇다 치더라도 하루를 반복한다니 대체 무슨 소리야? 그걸 믿으라고? 애시당초 어떻게.... 아니 뭐 이거고 저거고 간에 제대로 설명이 되는게 하나도 없...”
“잘 들어. 마저 말하자면... 별관 옥상에 있는 ‘그 애’를 제압하고 나면 경비원이 나타날거야. 우리한테 빨리 대피하라고 말하면서 달려들건데 그 때 아마...”
“설명은 이따 좀 천천히 하고! 내가 묻는 말에 대답을 좀 해달라고! 애초에 네 말을 어떻게 믿어? 하루를 무한히 반복? 그런 드라마 같은 일이 현실에...”
“그래. 못 믿겠지. 당연히 못 믿을거야. 누가 이런 말을 한 번에 믿겠어.”
정신 없이 뛰는 와중에도 한유란의 입은 멈추질 않았다. 1분 1초가 아깝다는 듯이, 그리고 이게 나를 납득시키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라는 걸 알고 있다는 듯이 군더더기 없는 말투로 계속해서 설명을 이어갔다.
“네 이름은 박율이고, 꿈은 돌아가신 어머니처럼 훌륭한 소아과 의사가 되는 거지? 취미는 독서, 영화감상, 프라모델 조립, 매사에 적극적이고 활달해 보이지만 그건 내성적인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거꾸로 행동하는 일종의 자기방어기제고. 사실은 몇 마디 뒷담화에 쉽게 상처받고 인간관계에 회의도 하곤 하는 평범한 사람이잖아. 어렸을 때 야구하다가 다친 뒤로 크게 몸을 쓰는 일은 되도록 안하려고 하지? 최근 읽었던 책들 중에 가장 인상 깊었던 건 밀란 쿤데라 소설들이고, 가장 최근 고민은 수능 끝나고 첫 해외 배낭여행을 훗카이도로 갈지 고베로 갈지 못 정하겠다는 거고. 이상형은 긴 생머리, 청조해 보이지만 알 건 다 아는 사람. 필요할 때는 당차고, 아닐 때는 타인을 배려할 줄도 아는 사람. 몸매는 무작정 가슴이 큰 것보단 골반과의 조화가 중요하댔나. 좋아하는 음식은 카레, 딸기, 돈까스. 해산물은 비린 냄새가 나는 것들은 잘 안먹는 스타일이지. 뒷목 아래 교복 카라에 가려지는 쪽에 있는 점이 특이하게도 삼각형 모양이고, 오른쪽 허벅지 아래쪽에는 어렸을 적에 다쳐서 수술한 자국이 남아있지. 크게 일곱 바늘. 나름 콤플렉스라서 반바지는 안 입는다고 했어.”
이윽고 다시 온몸에 소름이 내달렸다. 무슨 랩하는 것처럼 쏟아져 나오는 정보의 홍수.... 그러나 그 중에서 틀린 것은 단 하나도 없었다.
마치 몇 번이고 외워봤던 노래가사라도 되는 듯이 기계적으로 읊어대는 모습엔 위화감마저 샘솟았다.
“뭐, 뭐야.. 너.... 스토커냐...? 그런 걸 대체 어떻게...”
“방금 쳤던 수능 과학 탐구 영역, 물리 14번 문제에서 진자 운동을 하는 운동체의 질량 값을 헷갈려서 답을 잘못 적었나 하고 뒤늦게 찜찜해 하고 있던 참이고.”
“너... 그건... 어떻게...”
다른 정보는 그렇다 치자. 정말 현실성 없는 이야기지만 한유란이라는 이 소녀가 내게 끔찍이 집착하는 스토커여서 나도 모르는 새 나에 대한 개인사를 수집했을 수도 있으니까,
그러나 이제 막 수능이 끝난 참이고, 아무와도 대화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내가 물리 시험에 대해 가졌던 감상을 정확하게 알고 있는거지? 독심술? 아니면...
“전부 박율 네가 나한테 직접 해준 이야기야.”
나는 그대로 말문이 막혔다.
“아, 학생들! 뛰지 마세요! 제 2외국어 시험 안 본 학생들 있으니까 조용히 퇴실하세요!”
1층 시험 본부에서 막 나온 감독 선생이 우리에게 외치는 말만이.. 공허하게 울려퍼졌다.
3.
1층 현관을 빠져나와서 운동장을 향할 때 쯤에 귀가 방송이 뚝 끊어졌다. 방송 시설에 문제가 생긴 것 같다는 감독 선생들의 웅성거림을 뒤로 하고 빠르게 빠져나왔다. 시험이 끝나자마자 가장 먼저 뛰어나와서 그런지, 아직 귀가하는 학생들은 없는 것 같았다.
하긴, 이제 막 수능이 끝났으니... 천천히 가방을 챙기면서 그 여운에 빠져있을 때지. 나도 이제 막 그 여운에 잠기려는 순간이었는데, 느닷없이 운동장을 가로지르며 전력질주를 하고 있으니... 기가 찰 노릇이다.
본관이랑 운동장 하나와 분리용 외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떨어져있는 별관 쪽에는 별다른 인기척이 없었다. 겉으로는 아무도 없어 보이지만 사실은 시험 시간 동안만 외부 문을 잠그고 2학년들이 특별 수업을 하고 있다. 수능에 방해가 가지 않는 선에서 수험에 최적화된 커리큘럼을 짜다보니 이런 식이 된 것이다.
수능 날까지 수업을 하는 혹독함에 혀를 내두르기엔, 나도 겪어왔던 과정이다.
“뒷쪽으로 돌아서 들어갈거라고?”
한유란은 고개를 끄덕이고 내 손을 잡은 채 별관 뒤로 뛰었다. 본관 4층부터 뛰어서 운동장 가로질러 별관까지 전력질주로 왔건만, 지치지도 않는지 얼른 자기 머리만한 돌을 주워가는 것도 잊지 않았다.
마치 수백번은 해온 것처럼 부드러운 동작으로 1층 영어 특별실의 창문에 돌을 집어 던졌다. 쨍그랑 소리와 함께 깨진 창문 너머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안에서 특별 수업을 하고 있는 2학년 학생들이 눈을 휘둥그렇게 뜬 채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내 표정도 그와 마찬가지였다. 깨진 창문과 한유란을 번갈아 보고 있었는데, 한유란은 아랑곳 하지 않고 깨진틈으로 뛰어들어갔다. 그리고는 온갖 시선을 한 눈에 받으며 내게 얼른 따라 들어오라고 손짓하고 있었다.
내가 낑낑대며 올라갈 때 쯤 되자 수업중이던 강사가 말을 더듬으며 우리에게로 다가왔다. 뭐라고 이야기가 시작되기도 전에 한유란이 외쳤다.
“불이야! 2층 과학실에서 불났어요! 지금 뛰어 나가세요!”
“뭐, 뭣?”
그렇게 말을 해두고 다시 내 손을 끌어서 복도로 뛰쳐나갔다.
“야, 야! 그걸 미, 믿겠냐!”
빠른 속도에 당황하면서 말하자 한유란은 별 반응도 없이 복도에 있던 소화전의 비상 버튼을 주먹으로 박살낼 기세로 눌렀다. 별관 전체에 띠리링 거리는 비상음이 울려 퍼졌다.
과연. 일단 급박한 어조로 불이야 라고 외친 뒤 비상벨을 울리는건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단 대피하고 볼 것이다. 정확한 사태 파악이나 창문으로 뛰어 들어온 두 학생에 대한 신원 파악은 뒷전으로 밀리겠지. 진짜 화재가 났을 수도 있으니까.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닌데?
별관 중앙까지 오자 1층 로비 옆에 단촐하게 붙어있는 경비원의 숙직실이 보였다. 수능날이라 다른 쪽 관리실에서 대기 중이던 경비원이 허겁지겁 뛰쳐나왔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인가 싶을텐데, 뭐라 묻기도 전에 한유란이 선수를 쳤다.
“불 났어요! 대피해야 돼요! 중앙 현관 문 좀 열어주세요!”
“뭐라고? 불? 어디? 불 날만한데가 어디!”
“지금 로비 문 안 열면 대피할 수가 없어요! 수능 날이라고 외부 문 다 잠가놨잖아요! 문부터 열어줘야 돼요! 안 그러면 큰 인명 피해가 날지도 몰라요! 그럼 경비 아저씨가 책임 다 뒤집어 써야 할지도 몰라요!”
순식간에 요점만 팍팍 꽂아넣는 말투. 심지어 책임 소재의 전가라는... 어른들이 가장 끔직하게 싫어하는 부분을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그 말이 끝나자 경비원은 깜짝 놀라서 관리실에 열쇠를 가지러 뛰어갔다.
“숙직실로 들어가, 빨리!”
나는 어어어 하면서 얼른 숙직실 쪽으로 발을 돌렸다. 그러나 문고리가 찰칵거리며 열리질 않았다. 내가 잠겨있다 말하려고 한유란에게 고개를 돌린 순간, 이미 한유란은 숙직실 옆에 있던 커다란 난초 화분을 발로 차서 넘어뜨리고 있었다. 화분 밑에 깔려있는 숙직실 열쇠로 얼른 문을 열고 들어갔다. 반 평 남짓한 공간... 바닥에 깔린 전기장판, 낡은 브라운관 티비, 허름한 나무 옷장 같은 것이 들어차 있었다.
“진짜 지금 내가 뭐 하는지를 모르겠네...!”
이미 정신줄이 반쯤 혼미해져있었다. 대체 지금 내가 뭘 겪고 있는거지?
“아니 그러니까 숙직실을 왜...”
이미 그 말이 끝날 때 쯤엔 한유란이 숙직실 옷장에서 공구함을 꺼낸 참이었다. 내게 쇠지렛대를 건네니 얼떨결에 받아들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는 공구함에서 뭔가를 하나 더 꺼내더니 자기 품속에 집어넣고 다시 내 손을 얼른 잡아 끌었다.
“야... 옥상에 올라갈 거면 차라리 관리실에서 옥상 열쇠를 챙겨가는 게 더 확실하...”
“내가 ‘이미’ 해봤어..! 열쇠 없어 거기에!”
칼 같이 내 의견을 쳐내고 별관 중앙 계단을 뛰쳐 올라갔다. 중앙 계단을 따라서 자그마한 발자국들이 이어져있었다. 실내화를 신지 않고 신발채 들어온 건가. 흙이 잔뜩 묻은 발자취에선 묘한 낌새가 났다.
“옥상에 있는 애를 제압하고 나면 아까 본 경비원이 옥상으로 쫓아올라올거야. 거기서 시간 끌리면 안돼. 우리한테 얼른 도망가라고 외칠텐데, 그 순간 건물이 무너지기 시작할거야. 우리는 제압해둔 아이를 데리고 무너져가는 건물의 옥상 바로 아래층에서 화재 대피용 완강기를 탈거야. 그 과정에서 그 아이가 마구 발버둥을 칠 건데, 네가 계속 잡아두고 있어야 해. 만약 네가 다친 상태라면 내가 잡아둘테니까 네가 완강기를 세팅해야 하고. 사용법은 어렵지 않으니까 금방 가능할 거야. 그리고....”
그 순간이었다.
중앙계단 외벽에 붙어있는 커다란 창문. 본관이 바로 보이는 그 풍경이 순간적으로 사라졌다.
아니, 사라졌다고 인식했을 뿐이었다. 사실은 거대한 섬광에 휩싸여 바깥의 풍경이 아예 눈에 들어오질 않은 것이었다. 뭐라 반응하기도 전에, 굉음이 빛을 뒤따라왔다. 거대한 폭발음. 그게 고막을 덮치기 전에 마지막으로 들었던 소리는...
“아. 이번엔 조금 빨랐네.” 라고 말하는.... 한유란의 한탄 섞인 말이었다.
별관이 통째로 떠내려가는 것은 아닐까 싶을 정도로 막대한 굉음. 그리고 소름끼치는 섬광. 금이 가기 시작하는 거대한 외벽 유리 창문. 큰 충격에 나와 한유란은 그대로 바닥을 굴렀다.
그 모든 것이 지나가고 난 뒤,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완전히 박살나버린 본관의 모습이 차지하고 있었다.
발끝부터 등허리를 타고 목 언저리까지 한줄기 소름이 내달렸다. 내가 본 광경이 믿기질 않았다.
바닥을 구르면서 온몸을 부딪힌 충격. 그 고통만이 스물스물 기어올라와, 이 모든 게 꿈이 아님을 방증해주고 있었다.
“말도.... 안..돼...”
슬슬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박살나있는 본관의 모습을 눈앞에 두고도 더 이상 부정할 수는 없겠지.
뭐가 어찌됐든, 모든게 다 한유란이 말하는대로 되어버렸다.
“저...저건...”
“스무 번에 한 번 꼴로 유성이 좀 일찍 떨어지더라고. 대체 어떤 변수가 어떻게 작용했는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네. 운이 나쁜 상황이야. 그래도 별관 사람들은 미리 대피시켜 놓았으니까 아직 살릴 수 있을지도 몰라. 빨리 달리자.”
저게 뭐 어떻냐는 듯이, 일상의 일부처럼 눈앞의 재앙을 대하는 모습. 그 모습에는 일말의 위화감조차 없었다.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터는 한유란은... 이젠 사람으로 보이지 않을 지경이었다.
중앙 현관으로 대피하던 학생들이 비명을 지르는 소리가 4층 계단까지 올라왔다. 쩌적대며 갈라지는 본관 쪽 지반의 소리, 아직 남아있는 잔해가 무너지는 소리 같은 것도 덩달아 울려퍼졌다.
“이게 다... 어떻게 된 일이야...”
심장이 미칠 듯이 뛰기 시작했다.
“내가 말했잖아. 빨리 가자. 설명할 시간이 모자라니까, 가면서 빠르게 할게.”
“천천히... 천천히 좀 설명해줘...”
“안돼. 다 설명할 순 없어. 세상이 나의 죽음을 거부하는 저주에 대한 이야기? 인과율을 엎어대는 고대 요괴에 대한 이야기? 아니면 타고난 피를 저주하며 살아온 내 과거사에 대한 이야기? 이 하루를 끊임없이 반복하며 너와 겪었던 이야기? 그런 걸 일일이 다 설명하고 있다간 오늘 하루도 또 아무 의미없이 흘러가고 나는 고통속에 불타죽겠지. 그러니까 협조해 줘. 비어있는 부분은 너가 알아서 생각해서 채워 넣어주고,”
“뭘 어떻게 알아서 채워 넣어! 너무 장황하고 거대하잖아! 난 오늘 이제 막 수능 끝나고 나온 수험생인데... 어떻게...!”
“박율, 그게 네 주특기잖아. 작은 단서에서 큰 사건의 흐름을 읽고, 내막을 추론하고, 해답을 유추하고. 그러면서도 결단력있고 행동력도 있는데다가.... 날 몇 번씩이나 구해줬어.”
한유란이 넘어진 나를 잡아서 일으켰다. 그렇게 아랑곳하지 않는 모습도 나에게는 끊임없는 의문만을 남겼다.
“수십 수백 수천 번의 죽음 속에서 내게 항상 해답을 제시해주던 건 너였어. 아무것도 모르고, 그저 처음 겪어본 일임에도 계속해서 네 나름대로 나를 이해하려 했고, 도우려 했고, 구해주려 했어. 그런 네가 있으니까 지금의 내가 있었어. 나에게 넌 수백 번의 죽음 동안 계속해서 함께해 온 사람이지만, 너에게 있어서 난 수백 번을 초면으로 만난 낯선 인간에 불과했었겠지. 그래도 넌 날 구했어. 날 이해했어. 날 도왔어. 그래서 나는 너를 몇 번이고 찾아왔어.”
대체 뭐 어떤 일을 겪어왔길래 날 이렇게까지 신용하는지 알 수가 없다. 수백 수천번의 죽음 속에서 매번 처음 만난 내가 뭐 얼마나 대단한 일을 했는지도 잘 모르겠다.
“처음에는 말야, 나 그냥 죽기만 했어. 분명 수능 시험장에 들어섰는데, 정신을 차려보니까 수능은 다 끝나있었어. 마지막 탐구영역 시험이 끝나고 OMR 카드를 걷어가고 있었어. 그래서 무슨 상황인지도 모르고 멍하니 있다가 운석에 맞고 죽었어. 그렇게 몇 번 죽으면서 도망도 가보고 발버둥도 쳐봤지만, 결국 오늘이 끝나는 순간 심장에서부터 불이 솟아올라 죽었어. 그런 고통스런 죽음을 미친 듯이 반복하는 건 정말 정신이 나갈 노릇이었어. 너무나 힘들어서 다 내려놓고 싶었지만 그렇게 할 수도 없었어. 극심한 스트레스에 머리도 하얗게 새어버리고, 팔다리는 내 것처럼 느껴지지도 않았어.”
한유란의 설명은 끝나지 않는다. 속도도, 줄어들지 않는다.
“아무것도 모르고 죽음만을 열 번 넘게 반복하던 나에게 탈출의 방법론을 제시해준 건 너였어. 별관 옥상이 수상하다는 사실을 네가 떠올린 건 서른번 쯤 죽었을 때 였고, 비상벨을 울려서 일단 별관 사람들을 전부 대피시키는 아이디어를 제공한 건 마흔번쯤 죽었을 때였지.. 평소 경비원의 행동패턴을 떠올려 난초 화분 밑에 비상키를 숨겨놨을거라 생각해낸 것도 너였고, 쇠지렛대를 써서 문을 부수는 아이디어를 떠올린 것도 너였어. 뿐만 아니라, 이 이후에 일어날 일에 대한 해법을 떠올린 것도 거의 대부분은 너였어.”
천천히 설명하라는 말조차도, 더 이상 올라오지 않았다.
“때로는 네가 떠올린 해법이 맞아들지 않을 때도 많았어. 하지만, 최종적으로 마지막 답을 제시한 건 언제나 너였어. 그러니까, 넌 할 수 있어. ‘이번엔’ 못해도 돼. 실패해도 돼. 그 실패의 대가는... 내가 대신해서 불타죽으면 될 일이니까.”
나는 입을 열고 벙쪄있을 수밖에 없었다. 머리가 이야기의 흐름을 따라가지 못하는 것은 당연했다.
계단 윗편 구석진 곳에 옥상으로 향하는 문이 눈에 들어왔다.
한유란이 내게 다시 쇠지렛대를 내밀었다.
눈빛은 굳건했다. 몇 번의 시련과 몇 번의 감내를 반복해야 저런 강인한 눈동자를 가질 수 있는 것인가.
숟한 좌절을 몇 번이나 경험해봐야 이런 상황에서 저런 얼굴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옥상 문을 열어줘.”
나는 이를 악물고 쇠지렛대를 받아들었다.
그대로 문 손잡이를 미친놈처럼 가격하자, 손잡이가 뜯겨나가며 문이 열렸다.
드디어 들어오는 옥상의 풍경.
초토화된 본관을 바라보고 서있는 것은....
검은 머리를 하고 있는 한유란이었다.
4.
20분.
수능 시험을 끝내고 나와서 한유란을 만나 묘한 설명을 들으며 별관 옥상까지 도달하는데 걸린 시간이다.
단 20분만에 감당할 수 없는 정보의 홍수가 몰아쳤고, 상황은 급변했고, 뇌는 판단을 거부했다. 당연한 일이다. 평화로운 삶을 영위하던 일반인이 단시간 안에 몰아친 이런 이변에 어떻게 매끄럽고 완벽히 대응할 수 있겠는가.
별관 옥상에서 내가 기억하던 그대로의 한유란을 마주친 순간, 내 뇌는 완전히 정지하려고 했다.
세상의 소리가 잦아들고, 고요 속에서 모든 풍경이 그저 느리게 느리게 느껴졌다.
저기 검은 머리의 한유란이 서있다. 그럼 내 옆에 서있는 은발의 한유란은 대체 뭔가. 세상이 한유란의 죽음을 거부한다는 건 뭐고 인과율을 뒤집어 엎는 요괴라느니 하루를 계속 반복한다느니, 현실성이라고는 쥐뿔도 없는 이야기들이 몰아치는 와중에 나보고 뭘 어쩌라는 거냐.
옆에 서있던 은발의 한유란이 옥상 쪽으로 뛰어들었다. 내게 뭐라 말하는 것 같았지만 귀에 들려오진 않았다. 그저 달려나가는 한유란의 한 걸음 한 걸음이 억겁의 시간처럼 길게 느껴졌다.
미칠듯이 뛰어대는 심장이 혈류를 가속시켰다. 초토화된 본관의 풍경과 노을진 하늘로 피어오르는 연기들은 현실감을 마모시켰다. 그 속에서도 나는 멈추지 않고 뇌에 채찍질을 해댔다. 생각해, 판단해, 움직여, 무언가를 해. 정신을 놓지마. 정답을 도출해 내. 수능 시험장에 앉아 머리를 싸매고 고민했던 것처럼, 산개된 단서를 취합해 정답을 추론해서 제시해. 늘 그래왔듯이. 비루한 삶, 행복보다는 고통과 시련이 더 많았던 인생.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결책을 강구하며 발버둥 쳐왔던 역사. 최적의 활로를 모색해서 그 삶이 헛되지 않았음을 증명해. 할 수 있어. 가능해. 사고를 멈추지 마. 생각해, 생각해, 생각해.
“──!”
“──────!”
검은 머리의 한유란과 은발의 한유란이 뭐라뭐라 하며 소리를 질렀다. 나를 향해 무언가를 외쳤다. 천천히 천천히 은발의 한유란은 품속에서 십자 드라이버 하나를 꺼내들었다. 숙직실 공구함에서 꺼내왔던 모양이다.
대전제 : 은발의 한유란이 하는 말은 모두 진실이다.
이야기의 기반을 깔게 될 전제를 설정했다.
한유란이 수능 시험이 끝나고 이 별관에 도달하기 전까지 읊어댔던 모든 예언은 그대로 실행됐다. 감독 선생이 말을 걸어왔고, 민우가 투덜댔고, 방송은 정지되었으며, 급기야는 본관에 운석이 때려박혔다.
한유란은 본인의 말대로 일이 진행되리란 것을 보란 듯이 입증해보였다. 거기다가 한유란은 내 개인신상을 마구 읊어댔다. 그야말로 본인이 아니면 모를만한 신상까지도 마구 읊어댔다.
그것은, 한유란과 함께했던 수많은 ‘과거의 나’가 해준 이야기였을테다. 처음에는 한유란도 이렇게 무작정 복잡한 설명을 때려박아 가면서 나를 별관 옥상으로 이끌진 않았을테지.
상상해보았다.
느닷없이 끝없는 죽음의 행렬에 납치되어버린 한 소녀의 일대기.
죽음조차도 활로가 되지 못한채 무한히 고통을 반복하며,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하려 했을 것이다.
한유란이 건네준 수험표.
정중하게 존댓말로 쓰여져 내려간 안내문이 쓰여있었다. 그 말투에서 나는 추론해냈다. 수험표의 그 글귀는... 나를 상대로 쓴 게 아니다. 만약 나 박율에게 건네줄 것이라 전제를 깔고 써내려간 글귀라면... 그리 정중하게 존댓말로 쓰여있을 리가 없었다. 본인은 나를 상대로 아무렇지 않게 반말을 해대는데, 거기다 동갑인데, 그런 어조는 좀 이상했다.
그렇다면. 한유란이 겪었던 시련에 대해 어느정도의 추론이 가능해진다.
처음에는 정직하게 도움을 청했을 것이다. 친구, 선생, 경찰. 누가되었든 간에 계속 찾아다니며 도움을 요청했겠지. 도와주세요. 하루를 반복하고 있어요. 그러다가 운석을 맞고 죽고, 심장이 불타 죽고, 뭐 어찌되었든 고통스러운 죽음을 반복했겠지. 아무리 도움을 청한들 누가 제대로 믿어주지도 않았을 것이다. 누가 믿겠나? 수험 스트레스로 드디어 정신이 나갔구나 하고 불쌍한 눈으로 쳐다보지나 않으면 다행이다.
정중히 상황을 설명하며 시간을 투자해 설득해봤자 누구도 제대로 믿어주질 않는다. 천천히 설명할 시간 따위는 없는데, 설명 좀 천천히 하라는 이야기나 계속 들었겠지. 수험표 뒤에 쓰여진 안내문은 그녀 나름대로의 시간 절약 수단이었던 셈이다.
그 수험표 뒤에 쓰여진 안내문은 그녀 나름대로 수십번을 반복해가며 도출해낸 최적 효율의 구원요청이었던 것이다. 그런 짓을 반복하면서 죽고 또 죽고를 반복한다. 끊임없이 고통스러운 죽음을 반복하면서 도움을 요청했을 것이다. 정말 어이없을 노릇이다. 그런 바보같은 요청에 손을 내밀어줄 사람이 세상에 얼마나 있겠나.
그러나, 그런 도움 요청에 응한 바보 같은 인간이 하나 있었던 모양이다. 박율이라는 놈이다.
내가 모르는 그 과거의 박율은 한유란으로부터 이야기의 전말을 다 들었을지도 모른다. 세상이 한유란의 죽음을 용인하지 않는다느니, 인과율을 뒤집어 엎는 요괴라느니 하는... 삼류 장르소설에서나 나오는 판타스틱한 이야기들을 전해들었거나, 혹은 직접 알아냈을 지도 모른다. 그리고 나선 한유란에게 동정을 품었을지도 모른다.
한유란 나름대로 나를 이해시키기 위해 천천히 설명해 나갔을지도 모를 일이지. 지금처럼 미래를 예측한다거나 해서 말이다. 일의 전말을 파악한 과거의 박율이 얼마나 한유란을 위해 노력했을지, 어떤 시련들을 겪어 나갔을지도 가늠이 가진 않는다.
생존의 베테랑이 되어버린 지금의 한유란이 나지막이 증명하고 있을 뿐이다. 걸어온 길은 꽃길이라기 보단 가시밭길이었을거다.
어쨌든 나는 모르는 그 과거의 박율이라는 놈이 얼마나 저 한유란에게 큰 정을 품었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가장 친한 친구인 민우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내 마음의 약점이나 콤플렉스, 심지어는 이상형이나 몸매 취향 같은 것도 죄다 꾀고 있는 것을 보면.... 꽤나 진솔한 관계까지도 진행되어 본 적이 있었나보다.
그래서.
‘지금의 나’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데?
“───쪽을──해! 지금──”
한유란의 외침. 천천히... 청각이 돌아오는 느낌이다. 그러나 미칠 듯이 올라가는 심박수는 여전했다.
흑발의 한유란이 뒤를 돌아보더니 휘둘러진 드라이버를 얼른 막아냈다. 반쯤은 반사신경으로 막아낸 모양새였다.
그래, 다 그렇다 쳐.
그럼 저 흑발의 한유란은 대체 무엇인가.
오늘 하루를 무한히 반복하고 있던 한유란이 진짜 한유란이라 쳐도, 저 한유란... 내가 기억하고 있던 그대로의 모습을 하고 있던 한유란은 대체 뭔가.
다시 한 번 뇌가 멈추려고 했다. 그러나 몸은 나아갔다.
들고 있던 쇠 지렛대를 휘둘러 저 흑발의 한유란을 제압한다. 그것이 죽음을 반복해왔던 한유란이 제시한 정답이었다. 그렇다면, 일단 일차적으로는 그렇게 하는 것이 옳은 일일터다.
의문을 표하기 이전에 행동해라, 조금씩 조금씩 몸이 앞으로 나아갔다. 여전히 세상은 느릿느릿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한계까지 몰린 뇌는 가장 중요한 일을 하나 처리하지 못했다. 흑발의 한유란이 들고 있는 커터칼에 대해 미리 경고를 받았지만, 미처 생각하지 못하고 그녀가 몸을 꺾으며 내지른 칼날에 쇄골 언저리를 찔렸다.
치명상은 아니다. 그러나 큰 고통을 느끼며 바닥을 굴렀다. 손에서 빠져나간 쇠지렛대가 바닥을 튕겨댔다.
“으, 크컥!”
계속해서 뇌가 파업을 하려했다. 그래도 생각을 멈추지 않는다. 다시 한 번 이를 악물고, 고통을 버텨내며, 바닥을 구르면서도, 생각을 계속했다.
그래.
같은 시간을 계속 반복하고 있다고 하면, 한유란이 둘이 된다고 한들 그리 신기한 일은 아닐거다.
흑발의 한유란은 계속해서 과거를 반복하지 않은, ‘지금’의 한유란이고... 은발의 한유란은 계속 죽음을 반복해온 한유란이다. 그렇게 둘을 이분해서 생각해보자.
너무나도 현실성 없는 전제다. 그러나 지금 눈앞에 펼쳐져 있는 상황이 그렇지 않은가.
온몸의 피를 끌어다가 머리에 집중한 느낌이었다.
생각과 추론은 끝나지 않았다.
계속해서 나아가라. 주어진 정보와 상황을 취합해, 내가 해야할 행동을 이끌어내라.
“너, 너희는 대체 뭐...!”
흑발의 한유란이 외치는 목소리가 이제는 꽤나 또렷이 들려왔다.
“저 운석은 대체 뭐야..! 너, 너, 날 닮은... 은발 머리를 한 너는 대체 뭐야?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저 운석... 설마.. 내가 한 거야...? 나 때문이야?”
흑발의 한유란이 혼란에 빠진 틈을 타, 은발의 한유란이 달려들었다. 커터칼을 쳐내고 바닥에 깔아 뭉개자 컥 소리를 내며 흑발의 한유란이 바닥에 쓰러졌다.
“아흑! 너, 너는...!”
- 콰앙!
흑발의 한유란이 말을 끝내기 전에 또 다시 세상이 뒤집혔다.
완파된 본관 위로 운석이 하나 더 떨어졌다. 귀를 찢는 폭발음과 폭풍이 별관 옥상을 덮쳤다. 고통에 휩싸여있던 나와, 두 한유란은 나가 떨어졌다.
이젠 더 놀랍지도 않았다. 다만, 그 틈을 타 흑발의 한유란이 몸을 추스르고 일어섰다. 얼른 옥상 출구 쪽으로 달려나가려고 했다.
“걔 잡아! 빨리!”
은발의 한유란이 외쳤다. 생각보다 몸이 먼저 나갔다. 치솟아 오르는 격통을 이를 악물고 참아내며 도망가려는 한유란을 다시 몸으로 찍어눌렀다. 꺄악대며 바닥에 쓰러진 한유란에게 양 발을 억지로 올리고 무게를 실었다. 그에 따라서 쇄골 언저리에서 다시 고통이 올라왔다. 다시 이를 악물고 버텨냈다.
내려다본 한유란은... 울먹거리고 있었다.
“왜 그래. 대체 왜..! 나를 가만히 놔두질 않는거야! 나는 세상이 싫어! 이젠 더 이상 희망이 없어! 그만... 날 놔줘... 제발.. 부탁이야... 이젠... 죽는 것도 내 마음대로 안돼? 대체 나한테 바라는 게 뭐야?! 이 세상은 대체 나한테 뭘 바라는 거냐고!”
미안. 그렇게 외쳐본들 나도 아는 게 없다.
천천히 설명해줄 시간적 여유 따위도 없는 모양이고.
-쾅!
그 순간, 옥상 입구의 문이 다시 거세게 열렸다. 우리가 속여먹었던 경비원이 서있었다. 두 번의 운석 때문에 아직도 어안이 벙벙한 얼굴이지만, 어른의 책임감이라는 무거운 지지대가 그 몸을 이 옥상까지 이끈 모양이었다.
“학생들, 어디로 도망가나 했는데 여기서 뭐해! 빨리 도망쳐야지! 지금 사태 파악 중이니까 얼른 중앙 현관으로...!”
쿠궁 대는 소리와 함께 건물이 반으로 갈라졌다. 말로 해놓고서도 어이가 없다.
쩌적대는 소리와 함께 별관 아래의 지반이 아가리를 벌렸다. 콘크리트 사이로 철근들이 푹푹 비져나왔다. 흔들림에 못이긴 경비는 그대로 갈라진 틈 사이로 비명과 함께 사라졌다.
쿠궁대며 기울어져가는 건물은 무너지기 직전이 되어서야 멈췄다.
“곧 있으면 무너져.”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발의 한유란은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 나지막한 목소리로, 무덤덤하게 현실을 읊기만 했다.
“거의 다 끝났어. 빨리 움직이자.”
5.
비죽비죽 튀어나오는 철근 사이로 아래층이 보였다. 건물 자체가 대각선으로 기울여져 있는 상황, 과학 실험실의 온갖 집기들은 이미 제 자리를 지키고 있지 않았다.
그 와중에도 흑발의 한유란은 그만 놓으라며 발버둥을 쳐대는 통에, 나는 격통을 참으며 계속해서 제압하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가뿐하게 과학실 쪽으로 뛰어내린 은발의 한유란이 창문을 향해 손가락질을 했다. 그곳엔 화재 대피용 완강기가 설치되어있었다. 저걸 타고 내려가면 곧바로 운동장 쪽에 안착할 수 있다. 당장에라도 건물이 무너져서, 지반 틈으로 먹혀버릴 것만 같은 상황. 1분 1초가 아까운 지금 나도 얼른 달려서 완강기 쪽으로 넘어갔다.
“내가 걔 잡고 있을게, 완강기 설치해 줘.”
“아니, 이거 써 본 적 없는데..”
“너, 할 줄 알아.”
묘한 확신조차 느껴지는 어조. 그러고보면 화재 대피 훈련때 사용법을 배우긴 했다. 잘 기억이 안 나서 문제지.
창밖으로는 미리 대피해있던 별관 학생들이 보였다. 순식간에 일어난 재난에 다들 혼란스러워 하는 모습이었다.
얼른 완강기 박스를 열어서 지지대에 고리를 걸었다. 하다보니 순식간에 기억이 떠올랐다. 로프가 달린 릴을 창문 밖으로 집어 던지고, 안전띠를 꺼내들었다. 이걸 몸에 뒤집어 쓰고 창밖으로 몸을 던지기만 하면 천천히 운동장 쪽으로 내려갈 수 있다.
문제는 순서다.
“내가 먼저 내려가서 기다리고 있을게. 그 다음 얘 내려보내고, 마지막으로 박율 네가 내려오면 돼.”
순서에도 의미가 있겠지. 나는 얼른 고개를 끄덕이고 안전띠를 은발의 한유란에게 내밀었다. 익숙한 자세로 한유란이 창밖으로 뛰어내렸다.
“으, 크흑.”
이젠 눈물로 범벅이 된 흑발의 한유란과 나만이 반파된 별관에 남아있었다.
저항을 끝낸 한유란은 계속해서 흐느끼고만 있었다.
“이제 그만... 그만해... 제발...”
이 소녀의 속사정 따위는 모른다. 세상의 어떤 부조리에 짓눌려서 고통 받고 있는지도 잘 모른다. 앞으로 어떤 과정을 거쳐서 무한히 죽음을 반복하는 윤회의 굴레 속에 말려들게 되는지도, 지금의 나는 전혀 알 수 없다.
나는 눈을 감았다.
내게 주어진 정보는 많지 않다. 할 수 있는 건 오로지 추측과 추론, 즉 때려맞추기 뿐이다. 그렇기에 이 소녀를 어줍잖게 이해하려 하는 건 실례다.
그러나,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순 없었다. 그렇기에, 내가 할 수 있는 걸 한다. 추론과 추측이다.
몇 없는 단서를 그러모아 이 소녀가 겪어왔던 시련을 이해해보고자 노력하는 것 뿐이다. 그게 정답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다. 그게 이 소녀에게 어떠한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해볼 수도 없다. 그러나, 가만히 있을 수는 없다.
완강기가 다시 올라오는 그 순간 까지도, 내 머리는 쉬지 않았다.
한유란.
그리 친하지는 않은 사이였다. 같은 반이었던 적도 한 번도 없다.
그러니 최소한의 신상만 안다. 땋아 내린 흑발, 뿔테안경. 항상 성실하고 모범적이던 아이. 교내 모의고사 상위권 순위가 복도 벽에 붙으면, 항상 상위 10등 안에는 보이던 녀석이다.
이번 수능에서도 좋은 성적을 내겠지.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새로운 의문이 머리를 내밀었다. 나는 수능 시험이 끝나자마자 누구보다도 빨리 본관에서 나와 별관으로 달려왔다. 그리고 이 별관 옥상에서 저 흑발의 한유란을 만났다.
말이 되나?
수능 끝나자마자 누구보다 빨리 이 별관 옥상으로 달려왔는데, 같이 수능을 봤을 이 한유란이 옥상에 먼저 도착해 있다는게?
결론은 하나다. 이 애, 탐구영역 시험을 치르지 않았다. 내가 탐구영역 시험을 치르고 있을 때, 시험장에서 결석하고 이 별관 옥상에 올라와 있었던 것이다. 점심시간 중에는 별관 정문의 문도 열리니까 그 때를 틈타 들어온 것이다. 아마 관리실의 옥상 열쇠를 훔쳐서 올라왔겠지. 그래서 아까 관리실 열쇠를 챙기지 않고 쇠지렛대로 문을 부순 것이다. 열쇠는 얘한테 있으니까.
학업에 열중하던 모범생 한유란이 수능날 모든 시험을 제대로 치르지도 않고 이 별관 옥상으로 올라와 땡땡이를 치고 있다? 합당한 이유로 제시할만한 건 몇 개 없다.
포기한 것이다. 수능을.
“야, 너...”
흑발의 한유란을 쳐다보았다. 비참한 얼굴로 벽에 기대어서 몸을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나는 이를 악물었다.
종종 신문기사 같은 데에서 수능이 끝나는 날 자살하는 수험생들의 소식이 들린다. 이젠 매년 수능날마다 최초의 자살자는 언제 나오나 하는 얘기가 돌 정도였다. 인생의 한 관문에 불과한 수능시험이지만, 우리에게는 하나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인생이라는 큰 여정에서 수능이 가지는 의미는 크지만, 극복 불가능한 것은 아닐터이다. 이제 막 수능을 치른 내가 어른이라도 된 듯이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도 웃기지만... 적어도 목숨에 우선할 정도는 아니라는 것쯤은 안다. 그러나... 삶의 대부분을 학업에 바친 이가 느낄 좌절감또한 그에 못지 않을 것이란 사실도... 난 안다..
“너... 수학 영역... 망했구나...”
나는 시험을 끝마친지 30분 정도밖에 안된 수험생이다. 아직도 머릿속에는 올해의 문제가 생생히 남아있다.
수학 영역... 말도 안되는 수준이었다. 적분 파트는 2점짜리 문제에도 함정이 가득했고, 확률과 통계파트는 학부생 수준의 문제가 나왔다. ebs는 더 적극적으로 반영한다 해놓고서는 학생들이 거의 보지도 않은 책들의 구석 부분에나 있는, 완전히 지엽적인 문제들이 말도 안되게 많이 출제됐다.
수학 영역 시험을 끝마치고 나서 나도 꽤나 많이 멘탈이 흔들렸다. 그래도 어찌어찌 정신차리고 다음 시험으로 넘어갔건만, 누군가에게는.... 죽음을 결심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왜...? 우스워...?”
망울져 흐르는 눈물을 닦을 새도 없이, 소녀가 흐느끼는 목소리로 외쳤다.
“죽겠다고 결심해놓고 몇시간 넘게 죽지도 못하고 거기 서있던 게 우스워? 이깟 시험 하나 제대로 못 봤다고 징징 거리는 거 같아서 우스워...? 이런 거 밖에 살아갈 희망이 없었던 내 꼴도 우스워...?”
그런 말 한 적 없다. 그러나 소녀는 이미 무너져 내려 있었다.
혈통이니, 요괴니, 뭐니.... 내가 모르는 무언가를 짊어지면서 살아왔겠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악물고 힘주어서 열심히 살아왔다. 이 소녀에게 있어서 학업은... 고되고 힘든 삶을 강요받는 운명 속에서 유일하게 스스로의 가치를 증명할 수 있는 수단이자 버팀목이었던 셈이다.
이 악물고 버텨 오늘까지 왔건만, 너무나도 뻔히 보이는 결과에 마음의 버팀목이 무너져버린 거겠지.
이야기의 전말을 머릿속으로 다시 짜맞추기 시작했다. 한유란의 시점으로.
한유란이라는 소녀가 있었다.
그 소녀는, 수능을 봤다. 그리고 망쳤다. 자살을 결심했다.
시험을 끝까지 치르지 않고 별관 옥상으로 올라왔다. 결심을 미루고 미루다 탐구시험이 끝나는 시각, 투신했다. 세상을 떴다.
그렇게 끝났어야 할 이야기였다.
그러나, 그녀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 세상이... 그녀의 죽음을 용인하지 않았다.
정신을 차려보니 탐구 시간이 끝나고 omr 카드를 걷어가고 있었다. 자신은 분명 세상을 비관해서 투신을 했는데, 눈을 떠보니 시험이 끝난 교실에 돌아와 앉아 있었다. 어떻게 된 일인지 알 수 없었다.
그저, 죽음만이 반복됐다. 운석이 떨어지고 지반이 갈라지며 자기가 사랑했던 학교 친구와 선생님이 고통을 울부짖으며 죽어갔다. 아무리 발버둥쳐도 마찬가지였다. 고통과 죽음의 반복. 그 속에서 몸은 초췌해지고 머리는 하얗게 새어버렸다. 도저히 방법이 없었다. 이 지옥의 반복을 벗어나는 방법을 알 수가 없었다.
그렇게 반복하고 반복한 끝에, 알아낸 것이다. 과거, 죽음을 결심했던 자신. 그 자신이 죽지 않아야만이, 이 지옥을 탈출할 수 있구나.
“대충, 전말이 보였다.”
나는 눈앞에 울고 있는 한유란에게 똑바로 이야기했다.
“아무래도 이 세상이 너한테 죽음을 허락하질 않나봐. 보아하니 뭐 혈통이니 능력이니, 남한테 이야기 못할... 비현실적이고 판타스틱한 속사정을 숨기고 살았나봐?”
“뭐? 그건... 아니..”
“굳이 설명 안해도 돼.”
나는 팔을 걷어붙이고 몸에 힘을 다시 넣었다. 다친 상처에서 올라오는 고통을 어떻게든 버텨냈다.
“니가 뭐 얼마나 대단한 숙명을 안고 태어났는지, 뭐가 어떻게 엄청난 인간이길래 세상이 너한테 죽음을 허락하지 않는지... 그런 건 잘 모르겠고... 무엇보다 천천히 너한테 설명을 듣기에는 시간이 너무 없다.”
창가에서 딸깍대는 소리가 들렸다. 운동장에 도달한 은발의 한유란이 로프를 당겨서 다시 안전 벨트를 위로 올려준 것이다. 나는 그대로 안전 벨트를 당겨서 소녀의 몸에 감았다.
“이, 이거놔!”
“그래도 일단 살자. 살고 보자.”
그대로 나는 이를 악물고 힘을 써서 창밖으로 한유란을 집어던졌다. 너무 발버둥 치면 위험할 수도 있지만, 여기 가만히 있다 건물이 무너져서 죽는 것보다는 낫다.
완강기 로프에 매달린 한유란의 비명이 점차 멀어져갔다. 속도를 보아하니 다치진 않을 것 같았다.
바닥에 도달한 소녀를 은발의 한유란이 제압해서 눌렀다. 그리고 다시 벨트를 올려주었다. 나는 올라온 벨트를 손으로 잡아챘다. 이제 나만 내려가면 된다.
몸에 벨트를 고정하고 창밖으로 한쪽 발을 내밀었을 때였다.
-쿠광!
갈라진 지반의 틈 사이로 또다시 폭발음이 들려왔다. 나는 얼른 밖으로 몸을 내던졌다. 반쯤 내려왔을 때 학교 건물이 완전히 무너지기 시작했다.
“박율!”
아래에서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아마 이 하루를 질릴만큼 반복했던 한유란의 목소리일 것이다. 2층 높이까지 내려왔을 때, 그대로 줄이 끊어져서 추락했다. 운동장 바닥을 굴렀다. 하늘에서 콘크리트 블록들이 쏟아져 내려왔다. 나는 고통을 참을 겨를도 없이 몸을 일으켜 미친 듯이 달렸다. 건물이 무너지는 굉음 속에서 운동장 중심까지 도망쳐나왔다.
흙먼지가 건물 높이보다도 높게 피어오르고, 이내 건물의 형상은 완전히 사라졌다.
숨을 몰아쉬고 있던 우리 셋은 그제서야... 탈출했음을 실감했다.
희열 비스무리한 감정이 가슴에 피어오르기 직전이었다.
-퓌릭. 쉬리릭.
-카흝. #$!찵.4!@#
기묘한 소리가 갈라진 지반의 틈 사이에서 올라왔다.
살덩어리, 라는 말이 가장 정확한 표현이었다. 보기만해도 구역질이 날 것 같은 고깃덩어리의 행렬이었다.
갈라진 지반의 틈에서 올라온... 생물이라고 부르기도 묘할정도로 역겨운 물체들이 수십, 아니 수백에 이르렀다. 사람의 얼굴 형태를 한 것 같기도 한 근육들이 수축하고 이완하며 비명 비스무리한 걸 내지르고 있었다.
그 중에서 방금 떨어졌던 경비원의 얼굴과 비슷한 형상을 발견 했을 때는... 이윽고 헛구역질이 올라오고 말았다.
“우,,, 우웩,,, 저게 뭐야...!”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고깃 덩어리 하나가 운동장으로 대피해있던 학생 하나를 덮쳤다. 팔이 뽑혀나가고 허리가 찢어지더니 내장을 쏟았다. 나는 온몸의 피가 역류하는 느낌을 받았다. 공포와 광기가 운동장에 퍼져나갔다. 죽임당하는 학생들의 비명소리가 고막을 때렸다.
“야.. 이건 대체... 이제 어떻게 해야해?”
이제 진짜 끝난 줄 알았건만, 뭐가 또 남아있었다고?
이젠 정말 기능을 정지하려 하는 머리를 다시 부여잡고, 이 상황의 해법을 알고있을 유일한 인간에게로 얼굴을 돌렸다.
희뿌연 은발이 바람에 휘날렸다. 그곳에 있는 소녀가 답을 제시해줄 것이다. 나는 얼른 다친 팔을 부여잡고 일어나며 은발의 소녀에게로 시선을 향했다.
빨리 방침을 제시해라. 행동할 준비가 되어있다.
“야, 빨리.. 이제 뭘 어떻게..”
“...몰라...”
그러나 대답은 예상과 달랐다. 나는 그대로 헛숨을 삼키고 말았다.
올려다 본 얼굴에 새겨진 표정에서... 당황과 공포가 반쯤 섞인 감정을 느꼈기 때문이다.
“몰라... 뭐야.... 아직도... 끝이 아니야....? 아직도.....?!”
6.
유혈이 낭자하고 내장들이 허공을 날아다니는 그로테스크한 광경. 그 모습을 본 흑발의 한유란은 그대로 주저앉아서 기절해버렸다.
은발의 한유란은 미친 듯이 떨며 자기 어깨를 감싸안았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아무것도 못했다.
“뭐야... 뭐야...! 아직도.. 아직도 끝이 아니야?! 여기까지 오는데만 해도 얼마나 많이 죽고.. 얼마나 고통스러웠는데... 아직도 또 남았다고..? 저런 괴물들을... 저렇게 많은 괴물들을.. 나보고 어떡하라고...!”
부질없는 한탄만이 이어졌다.
“이제 충분하잖아! 이제 됐잖아! 이제 뭘 더 어떡하라고! 대체 몇 번이나 더 죽으라는 거야..! 저런 걸 내가 어떻게 하라는 거야...!”
이내 울먹거리기 시작했다. 덩달아 주저앉아서 울음을 터뜨렸다. 온몸이 만신창이가 된 나만이 두발을 딛고 일어서있었다.
학생들을 학살하고 먹어치우는 저 괴물 살덩어리들과는 아직 거리가 제법 있었다. 도망치려거든 지금이었다.
“야, 정신차려! 일단... 일단 도망가야 돼! 도망가야 된다고!”
“이제 지쳤어... 틀렸어...”
설상가상이었다. 이 녀석, 아예 생각을 놨다. 수백번의 죽음 끝에서 드디어 도달한 곳은 이 지옥의 탈출구가 아니었다. 이제야 겨우 본 궤도에 진입한 것이다.
그렇게 고통스러웠고, 그렇게 힘들었는데... 이제 겨우 여정의 초입에 들어선 것이다.
여기까지 도달하는 것만으로도 아득한 고통을 감내해야했을 소녀. 그 마음을 부수는 것쯤은 일도 아닐만큼 가혹한 현실이었다. 저 살덩어리 괴물들을 해결해 낸다고 한들 끝나리란 보장도 없다.
대체 얼만큼의 시련이 더 남았는지 가늠조차 되질 않는다. 나 같아도... 정신을 놓아버릴 것이다.
그렇다고 앉아서 개죽음을 당할 순 없었다. 나는 소녀를 업어들었다. 흑발의 한유란은 한쪽 손으로 감아올려서 겨드랑이 쪽에 끼워 들었다.
이미 만신창이가 된 몸이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격통을 억지로 눌러참고, 무너진 별관 콘크리트 더미쪽으로 다시 뛰었다. 살점 괴물들이 우리에게 신경을 쓰기 전에, 얼른 별관 콘크리트 더미 아래... 깊은 틈 사이로 두 소녀를 숨겼다. 엉성하고 위험하지만 저 괴물에게 들켜 온 몸이 찢겨 나가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다.
아마 들키는 건 시간문제다. 죽음은 예정되어 있었다.
더 이상 내가 할 수 있는 일도 많지 않았다. 아는 건 없고, 몸은 만신창이다.
비명 소리, 살점이 찢겨나가는 소리, 유혈이 낭자하는 현장의 혼돈이 갈라진 콘크리트 틈 사이로 들어왔다. 나 또한 이미 정신을 놓아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한유란을 내려놓고 나서 오른팔을 살펴보니, 이미 피가 범벅이 되어있어서 교복 셔츠가 붉게 물들어 있었다. 감각도 조금씩 없어져가고 있었다.
“하...”
나는 그대로 주저앉았다. 정신을 잃은 소녀 하나와, 망연자실해서 현실을 부정하기 시작하는 소녀 하나.
바깥은 인간 하나 정도는 육포처럼 찢어발겨버리는 괴물들의 행렬.
“씨팔....”
직접 입으로 육두문자를 내뱉어 본 건 오랜만이었다. 거의 몇 년만이었지? 나는 교복주머니에서 담배를 하나 꺼내서 물었다.
“돗대네... 후우..”
겉보기에 모범생이었던 나로서는 흡연자라는 사실은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은 비밀이었다. 이제와서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비밀이고.
라이터에서 불을 당기고 있자니, 묘한 중얼거림이 들려왔다. 한유란이 어딘가 망가져버린 인형처럼 반복해서 비탄의 말을 내뱉고 있었다.
“이제... 더 못하겠어... 힘들어... 포기하고 싶어... 날 놔줘... 제발...”
나는 이를 악물고 몸을 이끌어서 한유란의 양 어깨에 손을 얹었다.
“포기하고 싶다고 포기가 되는 것도 아니잖아.”
절망스러운 사실이지만 그게 현실이었다. 한유란은 그 말을 듣더니 잠시간 멍하니 있었다. 이윽고 망울진 눈물이 턱을 타고 흘러내려갔다. 그제서야, 내가 알고 있던 한유란의 모습이 조금 보였다.
“힘들어... 힘들단 말이야...”
“이해해. 존나게 힘들겠지. 솔직히 가늠이 잘 안돼. 진짜 아프고 힘들고 관두고 싶을거고... 아.. 어떻게 위로가 안되네.”
이미 나조차도 온 몸을 타고 흐르는 고통 때문에 횡설수설하기 시작했다.
“힘내라고는... 차마 말 못하겠다.”
이해하지도 못하는 고통을 겪고 있는 인간에게 섣부르게 격려를 해보았자 상처를 더 벌릴 뿐이다. 한유란이 겪고 있을 시련은 정말 인간의 정신력으로 버티기에는 너무나도 가혹하겠지.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나는 죽으면 끝이다. 그러나 이 소녀에게 있어서 죽음은 또 새로운 고통의 연장에 불과할테니까.
진짜 개같겠지? 죽어도 죽어도 고통은 계속 반복되는데 이 지옥을 끝낼 방법은 눈에 보이질 않는다. 나였어도 진작에 정신을 놓아버렸을거야. 차라리 정신을 놓아버리는게.... 답일지도 모르니까.
해줄 수 있는 일도 없는데 함부로 격려를 하진 않는다. 하지만... 이대로 내버려둘 수도 없었다.
아마도 나는 곧 있으면 죽는다. 내가 확실하게 이 소녀에게 보장해줄 수 있는 건 뭐가 있을까? 죽고 나서도 끊임없이 지옥을 살아가야하는 이 소녀에게, 이 지옥을 탈출하는 방법이라고는 전혀 떠오르질 않는 내가 뭘 어떻게 해줄 수 있을까?
내가 보장할 수 있는 게 뭐가있지?
“또 도와줄게.”
생각보다 말이 먼저 나갔다.
“...”
한유란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래도 영혼없는 시선은 날 그대로 향하고 있었다.
“다음에는 좀 더 무대뽀로 날 데려가도 돼. 괜히 귀찮게 수험표 뒤에 안내문 같은 거 쓰지마. 아마 그냥 멱살 잡아서 끌고 가면서 대충 설명해도 나는 협조할거야. 다른 사람도 아니고, 나 자신이니까 잘 알지.”
굳이 낯부끄러운 말을 덧댈 필요는 없었다. 현실이고 사실이니까.
“좀 뻘스러운 얘기긴 한데. 원래 사내새끼들, 외모에 혹하면 대충 제 정신이 아닌 이야기도 다 들어주게 되어있어. 그러니까 천천히 설명하려고 시간들이지 말고, 일단 들이대서 끌고가면 협조할거야. 이런 상황에 이야기 하는 것도 좀 웃기긴 한데, 대충 너가 아까 말 걸어줬을 때 이미 외모에 혹해서 넘어갔어. 이상형인가봐.”
거기까지 이야기하고 말을 멈췄다. 그녀의 시선에 생기가 돌아오길 바랬다. 피식 하는 웃음이라도 흘려주길 빌었건만.
“저딴 괴물들에게 몸이 찢기고 먹히고 하면 진짜 개같고 힘들겠지. 말마따나 저게 끝이 아닐 수도 있어. 니가 뭐 얼마나 대단히 판타스틱한 배경을 가진 소녀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저 다음에는 뭐 악마가 됐든 외계인이 됐든 뭐 더 대단한게 나와서 별 쑈를 다 할지도 모르는 일이겠지. 그것도 존나 힘들거야 아마. 그래서 얼마나 오래 걸릴지, 네가 이 지옥에서 탈출하는데 얼마나 큰 노력과 고통이 들지 나는 잘 모르겠다. 누가 알겠어. 그래서 내가 너한테 확신해줄 수 있는 게 이거 밖에 없어.”
모르는 것 천지인 세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확신할 수 있는 건 단 하나.
“또, 도와줄게.”
나는 무게를 담아 고개를 끄덕였다. 또 도움을 청하면, 아마 난 또 널 도울 것이다.
누구보다도 니가 잘 알겠지. 수십 수백번의 윤회 동안에 나는 항상 협조해왔을 거 아니야.
그렇다면 걱정하지마라. 니 생각보다 나는 훨씬 더 호구다. 좀 더 이 악물고 너를 도와 최대한 힘을 쓰겠지. 별 것도 없는 추리력과, 3대 100도 못치는 빈약한 근력으로 뭐라도 해보려고 악을 쓸거야.
세상이 다 등을 돌려도 언제든지 자기 편을 들어주는 사람이 하나 있다는 건, 생각보다 든든한 일이다.
“완전히... 원점이야...”
그제서야 한유란은 입을 열었다.
“수백번이나 죽음을 반복해가면서... 드디어 나를 살려냈는데도... 아무것도 변한 게 없잖아... 이래서야 완전히 원점이잖아...”
“아니, 내 생각엔 아직 살린 게 아니야.”
구석에 찌그러져있는 흑발의 한유란을 쳐다보았다. 그녀는 죽음을 결심했고, 별관의 옥상에 올라섰으나, 아직 죽지 못했다.
“죽으려고 하는 애를 억지로 옥상에서 끌어내린 것 뿐이잖아. 진짜로 살리려거든, 아예 마음을 고쳐먹게 만들어야지.”
“나보고.. 뭘 어쩌란거야...”
오른팔을 타고 다시 고통이 솟아올랐다. 나는 이를 악물고 참았다. 고통보다도 더 무서운 것은 소리였다.
쩌적대며 갈라지는 살점의 소리. 서서히 다가오는 괴물의 기척이 느껴졌다.
“살고 싶게 만들어야지. 뭐, 방법은 천천히 떠올리면 될 일이고...”
“그런 방법을 내가 어떻게 떠올려... 바로 내가 죽으려고 한 당사자인데...”
“또 도와준다니까? 사실 지금도 얼추 방법이 좀 떠오르긴 하는데... 천천히 설명하고 있을 시간은 없는 거 같다.”
우리를 덮고 있는 콘크리트 덩어리 하나가 허공을 날았다. 완전히 무방비 해진 우리 앞에 거대한 살점 덩어리의 괴물이 악취를 풍기며 서있었다. 잘라낸 팔 다리들이 온 몸에 덕지덕지 붙어있었다. 보고 있는 것만으로 다리가 떨리고 공포가 올라왔다.
“또 떠오르거든... 그 땐 천천히 설명해줄게.”
담배 꽁초를 집어 던지고 라이터를 꺼내들었다. 잔해들 사이에 굴러다니던 스프레이 캔 비스무리한 걸 집어들었다. 라이터에 대고 스프레이를 뿜으니 화염이 솟아올랐다. 지글지글 거리며 살점이 타오르는 냄새가 올라왔다.
───그리고 내 배엔 구멍이 뚫렸다. 감각이 마비되서 고통은 잘 안느껴졌다.
1초정도 허공을 날다가 운동장 바닥에 내팽개쳐졌다.
“으,컥.”
하나 또 알아냈네. 이 괴물, 불은 안통한다.
잘 숙지해줬으면 좋겠는데.
배에서 흘러나온 피가 천천히 모래바닥을 적시며 퍼져나갔다. 흐릿해지는 시야, 멀어져가는 소리들.
그 끝에서, 자리에서 일어난 한유란이 보였다.
징그러운 살점 덩어리를 똑바로 쳐다보는 그 두눈엔, 투지 비슷한 것이 꽤나 돌아와 있었다.
그 사실에 안도를 느끼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앞으로 몇 백번의 죽음을 더 반복해야 모든 재앙을 끝낼 수 있을까. 괜시리 가늠해보아도 답은 보이지 않는다. 앞으로 남은 여정이 더 많아 보이기에, 나는 조심스레 마음속으로 격려를 보냈다.
그러고보면, 말해주고 싶은 게 있었다.
우리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적의 이야기다. 췌장암으로 4년 넘게 투병하다가 결국 임종을 앞두게 되었을 때, 너무 고생해서 하얗게 새어버린 머리칼을 보고 내가 슬퍼했다.
어머니는 그런 내 볼을 쓰다듬어 주시며 부드럽게 미소지으셨다.
율아. 너는 하얗게 물든 내 은발을 보고 슬퍼하는구나. 하지만 엄마는 그렇게 생각 안한단다.
이 하얗게 샌 머리칼은 훈장이란다. 힘들고 고된 시련들이 가득했지만, 이겨내고 이렇게 살아남아 너의 곁에 있다는 증명이야.
훈장을 부끄러워할 수는 없는 노릇이잖니?
몸이 죽음에 굴복해가는 순간에 마지막으로 든 생각이었다.
초췌해지고 하얗게 샌 머리칼을 비참하게 생각하는 한유란에게 말해줄 걸 그랬다.
훈장을 부끄러워 하지는.. 말라고.
피로 물들어가는 흙바닥에 얼굴을 파묻고서 천천히 의식을 흘려보냈다.
11월이건만, 제법 따뜻한 느낌이 들었다.
******************************
1.
수능이 끝난 날, 나는 해방감에 휩싸여 교실을 나왔다.
신발을 챙기고 복도를 나서자 감독관 선생 한 명이 옆반 교실에서 나왔다.
“학생, 시험은 잘 치렀지?”
“네. 괜찮은 것 같아요.”
나는 애써 웃으면서 모범생같은 대답을 해주고 걸어나왔다. 제 2외국어 시험에 대해 안내하는 방송이 나왔다. 대략 두 번 정도 지직대는 걸 보니 방송 상태가 좋진 않은 모양이었다.
탐구 시험 시간에 화장실이 급해서 죽을 뻔 했다고 투덜대는 민우를 만나 같이 하교했다.
학교 정문을 밟고 나와서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5시 좀 넘어가는 시간인데 벌써 해가 뉘엿뉘엿 지기 시작한 걸 보니 겨울은 겨울이다. 붉게 물든 하늘을 배경으로 시험장의 전경이 눈에 들어왔다.
고등학교. 이제는 졸업을 앞두고 있었다. 성인이 되어간다는 사실이 잘 실감이 되질 않았다.
“야, 유성이다. 유성 떨어진다.”
두어개의 유성이 검붉은 하늘 위로 스쳐지나갔다. 퍽 멋진 광경이었다. 나는 속으로 소원을 빌었다. 제대로 된 어른이 될 수 있게 해주세요.
“눈 온다, 눈! 오옷! 수능 끝났다고 하늘도 축복해주네!”
철없이 뛰어다니는 민우와 함께 수능 시험장을 뒤로했다.
큰 일을 끝마친 기분에 해방감이 들었다.
*
“감사합니다~.”
편의점에서 따뜻한 캔커피 하나를 사서 나왔다. 눈이 오기 시작하니 생각보다 좀 포근해졌다. 엄청 추울줄 알고 목도리까지 두르고 나왔건만.
“에휴.”
편의점 앞 나무벤치에 털썩 주저앉았다. 슬쩍 시계를 들여다보니 8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치익 하는 소리와 함께 캔커피를 따고, 후루룩 대며 슬쩍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포근한 눈송이들이 세상을 다 덮을 기세로 차분하게 내려와 앉고 있었다.
“별 거 없는 법이구나.”
세상사 가장 큰 시련이자 벽처럼 느껴졌던 수능도 그렇게 아무렇지 않게 끝이났다. 뭐 엄청나게 대단한 이벤트라도 될 것처럼 준비하며 살았지만, 수도 없이 봐왔던 모의고사들처럼 그저 그렇게 스쳐지나갔다.
뭐 얼마나 대단하겠어. 수능 하나 본다고 세상이 무너지고 천지가 뒤집히는 것도 아닌데. 알고는 있었다만, 막상 아무 일 없이 평화롭게 지나간 하루가 오늘따라 더욱 덧없게 느껴졌다.
제법 모범생으로 살았다. 어머니 없이 자란 놈이라는 욕지거리가 싫어 더욱 착실한 놈으로 있어왔다. 하루 하루가 고되고 힘들어도 그럭저럭 잘 버텨냈다. 고독은 이미 신체의 일부와도 같았다.
수능이 끝난 날이다. 단짝 민우는 물론이고 대부분의 친구들이 각자의 가족들과 외식이라도 하러 다 떠났다. 허심탄회하게 시험에 대해 이야기하고, 성인이 되는 것을 축하받고, 앞으로의 삶을 함께 고민하겠지.
아버지는 심야까지 연장근무하시니, 나를 맞이하러 올 사람은 없었다. 말했듯이, 이제와서 새삼스럽게 고독에 아파하지는 않는다. 편의점 앞 벤치에 앉아, 따뜻한 캔 커피라도 후루룩 거리며 눈과 달을 올려다보는 것이면 됐다. 이런 따스한 풍경 속에 섞여있노라면 세상에 홀로 남겨진 것 같은 느낌은 오히려 기분 좋은 편안함으로 다가오곤 하니까.
담배 한 대를 물었다.
이제 뭐 할까, 하는 생각들이 연기와 함께 피어올랐다. 배낭여행이라도 한 번 가려면 아르바이트 좀 해야겠지. 고베랑 훗카이도 중에 어디로 갈까. 책도 몇 권 사고 싶은데. 입시 원서는 어디로 넣지? 의대 갈 수 있을까? 돌아가신 어머니처럼 훌륭한 소아과 의사가 되는 꿈은 이룰 수 있을까? 집에 돌아가면 아버지한테 연락도 해야지. 수험생 신분도 끝났으니 휴대폰도 하나 사자. 요즘엔 공짜폰 많다고 들었는데. 수험표 들고 가면 더 싸게 주나?
그런 잡생각들을 캔커피의 온기와 함께 흘려보내고 있자니 한 개피가 끝이 났다. 기분도 좋겠다, 한 개피 더 꺼내려 하는 순간이었다.
“그거 돗대지? 자, 선물.”
담배 연기와 함께 잡생각을 떠올리고 있자니 주변에 신경을 못 썼다.
처음 보는 은발 머리칼의 소녀가 담배 한 갑을 내밀고 있었다. 말보로 레드였다. 내가 피는 거랑 똑같은 거다.
“뭐?”
“돗대일걸? 자, 받아.”
주머니에 쥐고 있는 담뱃곽을 만져보니 안이 비어있었다. 진짜였다.
은은한 가로등 불빛과 속삭이듯 내리는 눈송이들 사이에 서있는 은발의 소녀는 신비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한 켠으론 어디서 본 것 같기도 한 느낌이 들었다.
“너, 어떻게 내가 담배피는 거...”
“사는 거 참 빡빡한데, 담배 좀 필 수 있지. 그치?”
모범생스러운 삶을 살던 나에게 흡연이란 하나의 역린과도 같은 비밀이었다. 아버지는 물론이고 단짝 민우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너 미성년자 같은데 담배는 어떻게...”
“학교 후문에서 두 골목 들어가는 작은 편의점, 거기는 신분증 검사 안하잖아.”
나랑 똑같은 방법으로 조달하고 있다고? 나만 알고 있는 비밀 장소인줄 알았는데.
“그리고 피차 동갑이면서, 뭘 그런 말을 다 하니?”
소녀는 그리 말하고 베시시 웃었다. 내 손에 담배를 쥐어주고, 답례로 한입만 달라면서 캔커피를 받아갔다. 그리고 벤치 옆에 나란히 앉아 한 입 홀짝이면서 하늘을 올려다봤다.
소금 같이 박힌 별들이나 입꼬리를 올린 초승달 따위가 눈에 들어왔다. 나는 갸웃거리며 소녀를 여러번 쳐다보았다.
낯이 익다 했더니 옆반의 한유란이라는 아이였다. 내 기억이 맞다면 좀 더 단정한 외관을 하고 있었는데.
“너.. 분명 옆반에... 한유란... 맞지?”
“어머, 기억하고 있었네.”
“수능 끝났다고 이렇게 인상이 바뀌다니... 확실히, 여자의 변신은 무섭다..”
“수능이 끝났다고 바꿨다기보다는... 음... 뭐 어때. 왜? 은발 머리칼은 너무 날라리 같아?”
내가 멍한 얼굴로 가만히 있자 한유란은 다시 한 번 스윽 미소지었다.
“그래도 어쩌겠어. 나한테 이 은발 머리칼은 훈장 같은 거거든.”
덧붙여서 말하길,
“훈장을 부끄러워 할 수는 없잖아.”
그 말에 스윽 한유란 쪽을 쳐다보자 세상에서 가장 여유로운 미소로 나를 바라보았다. 원래 성격이 이런 애였나. 고등학교 3년 동안 동창들 얼굴, 성격 정도는 얼추 다 알고 지냈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사람 속이란 봐도 봐도 모르는 법이다.
“그렇다면야, 뭐..”
우연찮게도 그 말에는 동감하는 입장이다. 나는 손에 쥔 담배를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눈송이 하나가 떨어져 담배곽 위에 맺혔다.
그런 걸 멍하니 보고있자니 한유란이 다시 말을 건네왔다.
“사실말야, 너한테 말할 게 엄청 많아서 너 찾아왔어.”
“나? 왜?”
3년 동안 말 몇 번 섞어보지도 않은 사이에 이제와서 수능 후일담을 나누는 것도 부자연스럽다.
“어제 오늘 해서... 엄청 많은 일이 있었거든?”
“그야 그렇겠지, 수능날이었으니까.”
“뭐어, 그래서... 차근차근 무슨 일이 있었는지 설명하고 싶어서.”
“굳이 나한테?”
“굳이 너한테.”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바라보았지만 한유란은 아랑곳 하지 않고 이야기했다.
“책으로 치면 장장 몇 권에 이르는 대서사시가 될 걸. 배경부터 시작해서, 우리 집안 이야기, 조금 비현실적이고 안 믿기는 이야기, 너에 대한 이야기... 뭐 차근차근 말하려거든 정말 엄청나게 시간이 들 것 같은데. 지금이야 다 끝나고 지나가서 결말이 난 이야기지만 말이야.”
“너무 과장해서 말하는 거 아니야?”
“뭐어, 과장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
미소는 여전했다. 대충 거기서 가늠이 갔다.
수능이 끝난 날,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내지 않고 여기서 나와 함께 벤치에 나란히 앉아있는 것부터가 자연스럽지는 않다. 필시 이 아이도 모종의 사정으로 인해 이런 경사스러운 날을 고독 속에 보내야 하는 안타까운 소녀겠지.
나야 뭐 이제와서 고독에 마음 상하는 일은 없지만, 이 애도 그럴거란 법은 없다. 그러니, 고독한 인간들끼리 실없는 담소나 나누며 서로 상처나 핥아주자는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퍽 슬픈 이야기지만, 이후에 일정이 있는 것도 아니니 조금 정도는 어울려 줘도 괜찮겠지.
“그래서, 시간 괜찮아?”
“시간은 많지.”
“다행이다,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거든. 머리도 좀 복잡하고.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될지도 잘 가늠이 안되고...”
“천천히 해. 남아돌아, 시간.”
그 말에 즉각 반응이 돌아오진 않았다. 시간이 많다, 그 사실을 지그시 곱씹듯이 소녀는 멍하니 별들을 쳐다보았다. 뭐어, 그간 바쁘게 살았으니까.
“그러네, 시간 참 많구나, 이제.”
그렇지. 수능도 끝났고. 이젠 정말 여유가 넘치는 시기가 왔다.
“이건 말야, 내가 한 남자를 사랑하게 되기까지의 이야기야.”
가로등 빛 아래에서 눈송이들만이 차분하게 내려앉는 벤치 구석.
"그럼 어디 한 번... 천천히 설명해볼게."
한유란이라는 소녀의 장황한 대서사시는, 그렇게 아주 천천히 시작되었던 것이다.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