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봤자 스승님의 하루조차 되지 못하잖습니까."
그가 아무리 종의 한계를 초월해 몇 백 년을 살았다 한들, 눈앞의 여인만 할까.
이 제국의 수호룡으로서, 셀 수도 없는 세월을 살아가고 있는 백룡의 그 말은 남자가 듣기에 우습기까지 했다.
"또 그 소리냐?"
"다른 드래곤은 심심하면 수면기에 든다던데, 왜 우리 스승님만 불면증인지 제자가 걱정이 되어서 그렇습니다."
보통의 드래곤들은 적당히 유희를 즐겼다 싶으면 자신의 레어로 돌아가 잠을 청한다.
아무리 그들이 영생에 가까운 삶을 사는 종족이라지만, 생물이라는 틀을 깨지 않은 이상 수면은 필요할 것 아닌가.
자신의 스승처럼 몇 백 년을 잠에 들지 않고 버티는 것은 분명 별종 이리라.
"한 가지 드래곤에 대해 알려주마."
그녀는 이제 막 노을이 져가는 주황빛이 하늘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황혼이 가까워 오는 것이 그녀인지 오늘인지, 잘 구분이 가지 않았다.
"우리에게는 망각이 허용되지 않았다. 그것이 너희의 눈에는 어떻게 비춰질지 모르겠다만, 적어도 나에게 있어서는 저주로 느껴졌다."
여인이 생각에 잠길 때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자신과 깊은 관계를 맺었던 인간들이었다.
"전장에서 칼을 맞아 목숨을 잃은 아이가 있었고, 혹은 세월을 이기지 못해 바스라 진 아이가 있었다."
그녀가 살아온 세월만큼 죽음의 형태는 다양했다.
차마 헤아릴 수도 없어야 할 그 죽음을 모조리 헤아릴 수 있는 것이 드래곤이란 생물이라, 그녀의 머릿속은 늘 누군가의 죽음으로 가득했다.
"우리는 명예로우나, 그럼에도 완벽하지 않다. 그렇기에 감당할 수 없는 기억들을 지우려 수면기에 드는 것이다."
드래곤이 수면기에 드는 이유는, 자신이 여태 쌓아왔던 기억을 버리기 위함이다.
허용되지 않은 망각을 마법의 형태로 빚어, 수면을 매개로 삼아 발현하는 의식이라고 해야 할까.
"그리 하면 새로운 기분으로, 너희의 표현을 빌려 말하자면 개운한 상태로 다시금 유희를 맞이할 수 있지."
감당할 수 없는 기억은 모조리 버렸으니, 새로운 하루라는 표현이 참으로 적절했다.
아니, 새로운 삶이라고 부르는 쪽이 더 옳을까.
남자는 그 이야기를 듣고는, 자신의 스승에게 물었다.
"그럼, 스승님께서는 어째서 수면기에 들지 않으십니까."
드래곤은 아무리 길어도 인간에게 주어진 한 번의 삶, 그 정도를 유희의 기간으로 삼는데 자신의 스승은 짧게 잡아도 몇 백이었다.
자신이 태어났을 때부터 그녀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었으니 어쩌면 네 자리를 넘었을지도 모른다.
"스승님은 다정하십니다. 누군가의 죽음을 안타깝다는 말 한마디로 넘기실 수 있는 분이 아니지요. 스승님의 말대로라면, 언제나 머리 한 켠에서는 그들의 죽음이 재생되고 있을 터인데, 어째서 스승님은 수면기에 들지 않으십니까."
정녕 그렇다면 남자가 아는 이 백룡은 진작에 쓰러졌어야 했다.
자괴감에 휩싸여 스스로를 자책하고, 수면기에 들어 기억을 버렸어야 했다.
그녀는 강했지만, 버틸 수 없는 기억들을 억지로 삼켜 감당할 만큼 강인하지는 않았다.
남자의 물음에, 여인은 고개를 돌려 웃으며 말했다.
"네가 있지 않느냐."
잠시, 시간이 멈춘 듯했다.
"한낱 아집으로 이 나라의 수호룡을 자처했다. 그렇게 과분한 칭송을 받았고, 수많은 죽음을 맞이했으며, 그리고 너를 만났다."
서서히 부서지고 있는 와중이었다.
더 이상은 견디지 못하겠다는 생각이 들어 레어를 찾아 떠나는 것을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던 때였다.
"그러나 마지막 미련에 의해 받은 제자가, 감히 제 스승에게 사랑을 속삭일 줄은 몰랐지."
"...거, 못 배우고 자란 시골 꼬마가 자기 스승이 드래곤일 거라고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남자는 과거의 흑역사를 들추는 스승을 째려봤다.
검과 마법을 배우며, 감히 드래곤에게 흑심을 품었던 철없던 시절이었다.
여인은 남자의 퉁명스러운 말에 큭큭, 웃으며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그래. 그 못 배우고 자란 시골 꼬마가 나를 자꾸만 붙잡더구나."
1년, 5년, 남자와 함께하는 세월이 길어질수록 드래곤에게 미련이란 것이 생겨버렸다.
자신의 친구라 할 수 있었던 인간들의 죽음을 잊고 싶으면서도, 그만큼 이 아이 하나를 잊고 싶지 않았다.
이 아이까지만, 정말로 이 아이가 죽으면 그때는.
하지만.
"그런데, 네가 이리도 오래 살고 있으니."
자신이 어떻게 죽을 수 있겠냐고, 단지 5년의 세월만으로 나에게 미련을 안겨 준 너와, 몇 백 년을 함께 살았는데 어떻게 잊을 수 있겠냐고.
그리 말하는 여인의 얼굴은 노을빛을 받아서인지 붉게 물들어 있었다.
"...거, 진작 좀 말씀하시지."
그걸 본 남자가 여인에게 다가갔다.
여인 또한 가만히 서서는 남자를 기다렸다.
"과거를 떠올릴 새도 없을 만큼 현재가 행복하면 어떻게 됩니까?"
"모르겠다. 하지만, 적어도 지금은 아무런 생각조차 들지 않는구나."
남자는 여인의 가녀린 허리에 팔을 감았고, 여인은 남자의 두꺼운 목에 팔을 둘렀다.
"이럴 거면 그때 받아주시지 그러셨습니까."
"시골 꼬마에게 반할 정도로 쉬운 여자는 아니라서 말이다."
코가 맞닿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서 대화를 나누던 그들은 한동안 서로를 바라봤고.
결국,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움직여 겹쳐지게 된 입술을 삼켜 한참을 우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