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론>
좋은 히로인이란 무엇인가?
오덕세계에서는 수많은 논란이 있어왔으나, 그 누구도 정확히 해명하지 못했고,
이에 따라 오덕계에는 회의주의와 독단주의, 특히나 상대주의가 판치게 됨으로써, 좋은 히로인이란 단지 주관적일 뿐이고, 오덕의 취향에 따라 다르다는 의견이 마침내 절대자로 군림하게 되었다.
얼핏 보기에 아무런 문제가 없어보이는 상대주의는, 그러나 어느 오덕이 보기에도 '좋지 않은 히로인'인 것처럼 보이는 경우, 예컨대 아무런 비중도 없고 스토리에 영향도 끼치지 않으며 단지 츤데레를 겉모습과 말투에서만 따라할 뿐인 히로인 역시 '상대적인 주관에 따라 좋은 히로인'인지 묻게 된다면, 최소한의 상식을 갖춘 오덕들은 "그래도 그것은 아니다"라고 결론내리기에 이르렀다.
이리하여 오덕계는 비록 상대주의가 군주로서 군림은 하되 자신의 주권을 국민들에게 하달하지 못하는, 단지 허울뿐인 여왕에 불과하게 되었으니,
실로 '무엇이 좋은 히로인인가'하는 질문 아래 오덕계는 그야말로 피 마를 날이 없고, 그 누구도 조그마한 영토조차 차지하지 못한 전쟁터와 같다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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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없는 상대주의, 그리고 상대주의의 시대에 언제나 암약하는 회의주의의 화목한 한 컷)
이러한 난세가 오덕계에 찾아온바, 이제는 회의주의자와 독단주의자 또한, 마치 자신들도 다른 의견과 똑같이 정당한 의견인양 자신만만하게 활개치고 다니게 되었다는 점은 대단히 통단스러울 뿐더러 모든 오덕적 존재자들에게 하나의 거대한 스캔들로 남아 있다.
그리하여 한 독단주의자가 '다른 모든 히로인은 쓰레기이며, 오직 소꿉친구만이 진리이다!' 하고 주장하더라도 그 자를 욕하거나 무시하고 비웃기는 해도 왜 그러한 주장이 잘못되었는지 논리적으로 반박하지 못하는 것이 작금의 현실이다. 더 나아가 '애당초 좋은 히로인은 없고, 그저 꼴리는 히로인이 있을 따름이다'라고 회의주의자가 음산하게 중얼거리더라도 우리는 전혀 반박하지 못하고, 도리어 한편으로는 '그럴지도 모른다'라고 수긍하여, 우리 자신이 회의주의에 완전히 허점을 드러내놓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있다.
그러나 오덕, '히로인을 사랑하는 자'들이여!
언젠가 그대들은 순수히 그저 히로인이 사랑스러워서, 히로인의 이야기가 좋아서 이 세계에 주민이고자 망명 신청을 스스로 제출했던 자들이 아닌가?
오직 히로인愛 때문에 모든 현실적인 가치와 모든 현실적인 아름다움을 등지고 이 왕국에 망명해온 그대들,
그대들이 아니라면 이제 누가 히로인을 두둔할 것이고 옹호할 것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 그대들 스스로 '좋은 히로인은 없다'라고 말하기에 이르렀으니
이는 망명자가 마치 낙원을 찾아왔으나 실제로 그가 발견한 것이라고는 폐허밖에 없어 자조하는 것과 뭐가 다르겠는가.
결국 그대들은 그대들이 과거에 떠나왔던 현실과 이곳이 다를 바 없다고 결론내리고, 자신의 망명은 단지 도피행각에 불과했다고 말하고 있다.
소위 현실의 인간들은 좋은 히로인이 있는지 없는지 전혀 상관하지 않고, 도리어 간단하게 히로인의 가치를 무시해버릴 터이니,
만일 그대들까지 히로인의 가치를 부정해버린다면 이제 그 누구도 이 왕국이 성립하는 근거를 제공할 수 없을 것이고
자연스럽게 히로인을 위한, 히로인에 의한, 히로인의 왕국은 소리없이 멸망하고 마리라.
그러나 실망하지 말자.
차라리 환호하라!
일찍이 그대들은 망명자에 불과했다.
그러나 누구도 왕국의 흥망에 관심을 갖지 않는 지금,
이제 그대들은 국가를 존립시키는가 존립시키지 않는가 하는 결정권을 쥔 국가의 주체로, 그것도 유일한 주체로 성립하기에 이르렀다.
우리들의 힘없고 나약한 여왕들,
그대들이 저마다 다르게 이름부를 무수한 히로인들――
그녀들에게 가치를 부여하고 그녀들에게 왕관을 씌워줄 자는 오직 그대들밖에 안 남은 것이다!
우리는 일찍이 열망했다. '그녀'를 돕고 싶다고. 그리고 우리의 열망은 2D와 3D의 벽에 가로막혀 좌절되었다. 비유하자면 이것은, 유년기의 소년이 성장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거쳐야만 하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이자 실패로서, 이 아픔을 겪고 나야만 비로소 진정한 오덕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그러나 예전에 단념한 열망이 오늘날 갑작스럽게, 마치 하늘에서 낙하하는 소녀처럼, 우리 눈앞에 떨어진 것이다.
이것은 마치 고고한 이상을 포기하는 것이 '어른'이 되기 위한 조건인 줄로만 여기던 청년이, 이제 와서,
사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상을 지켜내는 것이 '인간'이 되기 위한 조건임을 마침내 깨달은 것과 같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2D와 3D의 벽을 인정하는 것이 오덕으로서의 상식으로만 알았던 터에,
히로인을 지켜내는 것이 '히로인을 사랑하는 자'가 되기 위한 조건임을 마침내 다시금 확신한다.
나는 모든 오덕들에게 무엇이 좋은 히로인인지 해명해주고자 한다.
그럼으로써 나는 모든 오덕들이 동의할 만한 기준에서부터 시작하겠다.
그래야만 나의 결론이, 만약 그것이 내가 바라는대로 논리적으로 이끌어졌다면, 모든 오덕들에게 타당하고 필연적일 것이니 말이다.
만인의 오덕이 동의할 만한 기준이란 바로 캐릭터에도 제1속성이 있고 제2속성이 있다는 것으로,
이는 몇몇 이들에게는 낯선 용어일지는 모르겠어도 실제로는 우리에게 아주 친숙한 것들을 전문적인 용어로 갈무리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자아, 이제 연설은 끝났다.
연설이란 사람의 감정을 자극하는 것으로 아무래도 논리적인 언변에는 걸맞지 않는다.
나는 여러분을 자극하고 선동함으로써 '좋은 히로인은 있다! 이것이 좋은 히로인이다!' 하고 떠들어대고 싶지 않다.
그것은 사이비 종교와 다르지 않고, 또다시 회의주의와 상대주의에게 영토를 빼앗길 게 분명하므로.
그리하여 나는 완전히 감정적인 말투를 배제하고,
오로지 논리적으로,
상식적인 오덕적 존재자라면 누구나 수긍할 만하게 단순히 논리만을 구성해보도록 노력하겠다.
<정리>
1. '히로인'은 제1속성이다.
2. 학급반장, 미래인, 츤데레 등등은 제2속성이다.
3. 설령 캐릭터가 제2속성에 충실할지라도 제1속성에 충실하지 못한다면, 즉 히로인으로서 활약하지 못한다면, 그 캐릭터는 매력이 없다.
ex. <스즈미야 하루히> 아사히나 미쿠루. 미래인은 과거에 개입할 수 없다는 제2속성에 지나치게 충실한 나머지 도리어 히로인으로서는 불성실하다.
4. 좋은 캐릭터란, 추상적으로 정의하여, 제2속성과 제1속성에 모두 충실한 캐릭터이다.
5. 좋은 캐릭터란, 구체적으로 정의하여, 제2속성을 지키기 위하여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이나 상황과 사건이 그 노력을 배반하는 캐릭터이다.
ex. A라는 캐릭터는 츤데레이다. 그녀는 계속해서 츤데레이고자 한다.
그러나 그녀에게 정신적인 압박, 물리적인 어려움이 닥침으로써 남자 주인공에게 마음을 열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결론. 좋은 캐릭터란, 제2속성과 제1속성 간의 끊임없는 갈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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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 <신만이 아는 세계>에서는 제2속성을 끊임없이 유지하려는 캐릭터들,
캐릭터들에게 끊임없이 제1속성을 강요하는 남자 주인공의 플롯을 성공적으로 그려낸다.)
<주해>
1.
제2속성은 주관에 따라 선호되거나 거부된다.
어떤 오덕은 츤데레를 좋아하고 어떤 오덕은 싫어한다.
그리하여 라노벨 작가 등은 최대한 '많은' 수의 제2속성을 작품에 마련해야 한다. 이는 히로인 숫자의 증가로 이어진다.
2.
반면에 제1속성, 즉 히로인이라는 속성은 사정이 전혀 다르다.
이러한 제1속성을 애호하는 자만이 애당초 '오덕'으로 규정된다는 점에서, 제1속성은 오덕적 세계에 있어 절대적으로 타당하다.
그러나 히로인은 추상적인 것에 불과하고, 히로인이 구체적으로 현실에 주어지기 위해서는 제2속성을 갖출 수밖에 없다.
말하자면 히로인은 과묵하거나 활발해야 하며, 나이가 어리거나 많아야 하고, 처녀이거나 칸나기여야 한다.
그러나 단지 과묵하다는 이유만으로, 어리다는 이유만으로, 처녀라는 이유만으로 히로인이 매력적이게 되지는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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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리노: "키리링 다이쇼리!" ―<내 여동생이 이렇게 귀여울 리 없어>에서 키리노는
여동생이라는 속성만으로는 좋은 히로인이 되지 않는다는 걸 입증한다.)
제2속성은 '좋은' 히로인이 되기 위한 필요조건이지 충분조건은 아니다.
이때 충분조건이란 물론 제1속성 외에는 없다.
그리하여 모든 라노벨 작가 등에게 떨어진 지상과제는 다음과 같다:
어떻게 제2속성에 충실하면서도 제1속성에 충실하게 히로인을 그려낼 것인가?
이것은 제1속성에 충실한다는 것, 즉 '히로인으로서 충실하다'는 것이 도대체 무슨 뜻이냐고 묻는 것과 다르지 않다.
출처 : http://gall.dcinside.com/board/view/?id=fantasy_new&no=964185&page=2&exception_mode=recommend
가터벨트의 창시자이며 오덕학에서 모에주의와 비모에주의를 통합한 칸트다운 통찰력있는 논문이로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