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 스타리그를 돌이켜보면,
온게임넷리그는 컨셉맵이 많이 배치됨으로써, 맵제작자가 의도한 색다른 경기양상이 나오는 때가 많았습니다.
815나 패러독스가 생각이 나네요.
반면에 엠겜리그는 예전 김철민 캐스터 말처럼, 도화지같은 맵을 깔아두고 선수들이 자신의 색깔대로 경기를 칠해나가길 바랬던 것 같습니다.
루나가 대표적이죠.
전자의 경우, 그 맵에 맞는 독특한 명경기가 나오는 경우가 있었지만,
반면 선수들이 새로운 맵에 적응을 못 하거나, 밸런스가 깨져 허무한 경기가 나오는 경우도 많았죠.
후자의 경우, 선수들 본연의 실력을 즐길 수 있는 명경기도 많았지만,
비슷한 경기양상에 좀 지루해한 기억도 있습니다.

일단 전, 제작진이 '원주율 배치'대로 숫자를 배치한 것이
다분히 의도적이었고, 나아가 최정문이 무언가 역할을 해 주길 바란 판짜기였다고 생각합니다.
콩픈패스 때도 그랬지만, 숫자배치를 원주율 배치로 한 것은 '누군가가 알아봐주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
3.'14159265...'의 순서까지 맞춘 건 확정적이죠. 초반 숫자를 1145/2569 ... 이런 식으로만 배치해도, 원주율이라는 것을 알아보기 조금 더 어려웠을 수 있습니다. 1415/9265 이렇게 나간 건, '원주율 배치를 누군가가 초반에 알아봐라!' 라는 의도지요. 카이스트 수학과와 서울대 이과 출신들이 끼었있음을 감안하면요.

그리고 제작진은 최정문이 원주율을 백자리까지 외우는 것도 알고 있었을 겁니다.
원주율은 그 자리에서 계산할 수 있는 성질의 숫자가 아니지요. 오현민이라도 그건 무리입니다.
'원주율을 알아보고, 나아가 게임에 활용할 수 있는 사람'은 그 자리에서는 최정문밖에 없었습니다.
거기에 룰을 잘 훑어보면, '역적 3명'에게 불리한 구성으로 되어 있습니다.
본편에 나온대로, 역적 1명이 배신하면 나머지 2명이 독박쓸 수 밖에 없는 구조죠.
역적이 승리할 경우, 마지막에 충신에게 일발역적의 기회를 주려면
'역적 3명을 찾아서 감옥에 가두는 것' 으로 룰을 만들어도 되었습니다.
'역적 2명'으로 좁힌 순간, 역적에게 배신을 종용하는 룰이 되어버렸죠.

그래서 전, 제작진이
1) 최정문이 원주율을 활용하는 것
2) 역적 1명이 다른 두 사람을 배신하는 것
을 다분히 의도했다고 생각합니다.

그 점에서 제작진에 대한 불만이 발생합니다.
지나치게 제작진의 의도를 강요하는 게임이었다는 거죠.

1. 역적이 지나치게 불리한 조건
충신-역적이 나누어지자마자 게임을 시작해버리면,
충신 측에서는 다들 한자리에 모이길 원할테고,
역적은 서로간의 의사소통도 안 되는데다, 각자 숫자를 이용한 승리방법까지 강구해내야 하는 상황에 빠지게 됩니다.
단순한 마피아 게임이라면, 연기를 잘 해서 끝까지 시민을 속이면 되죠.
하지만 이 게임은 역적이 이기려면 전략을 짜고 공유해야 합니다.
그나마 숫자를 다 알고 있는 최정문은 맞춤전략을 생각해냈지만,
다른 두 사람은 안 그렇죠. 장동민 말대로 X줄이 탈 수 밖에 없었습니다.
전략을 짤 시간도, 공유할 시간도 역적에게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이죠.
이는 각 역적들이 스스로의 정체를 쉽게 노출하게 만드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반면에 충신은 숫적 우세를 기반으로 단결하면 됩니다.
이 게임은 충신이 '배신할 동기'가 전혀 없습니다.
충신들은 최선의 전략(원주율이든 랜덤한 숫자든, 주어진 숫자를 기반으로 최고 작은 숫자를 선택)을 수행하면서 매의 눈으로 서로를 관찰하기만 하면 되었죠.
3명도 아닌 2명만 찾아내면 되니까요.

이 점을 종합해보면, 역적이 단독 승리로 끝낼 가능성은 굉장히 낮았다고 생각합니다.
반면에 배신을 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열매는 너무나 달콤했죠.
저는 이런 룰 하에서 역적이 이길 수 있는 방법은
'게임을 터뜨리고 역적 1명이 왕이 되어서 충신들을 가둠'
'역적 1명이 배신한 척하면서 충신에게 역적 리스트가 아닌 충신 리스트를 넘김'
정도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전자도 어렵죠. 충신 입장에서는 '왕이 되는 것'에 대한 메리트가 전혀 없으니, 제일 덜 의심스러운 한 명만 계속 왕을 시키면 그만입니다.
결국 후자의 전략 정도만 노려볼 수 있고, 이는 제작진이 너무 역적을 불리하게 만든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2. 최정문이 충신이었다면?
아마 제작진이, '최정문이 알고 있는 숫자 100개'를 감안해서 룰을 짜긴 했을 겁니다.
최정문이 모르는 숫자가 나오는 후반부에, 역적들이 무언가 행동하길 바랬겠죠.
하지만 그랬다면 역적의 멘탈이 더 일찍 터졌을 겁니다 --;;
진짜 원사이드한 게임이 될 수도 있었다고 생각해요.
이 점에서도 저는 제작진의 개입이 너무 과했다고 생각합니다.

3. 결론
전 이 게임에서 최정문-김경란-김유현 모두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합니다.
주어진 판짜기가 너무 강했고, 그 안에서 역적이 할 수 있는 것이 많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전 그래서 최정문-김경란에게 과도한 비난의 화살이 돌아가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전 철권을 즐겨하는데, 2연패만 당해도 멘탈이 터져서 레버와 버튼을 탓하는 사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