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들어 가장 즐겨 듣는 앨범 중 하나가 제이펙마피아(JPEGMAFIA)와 대니 브라운(Danny Brown)이 함께 만든 'SCARING THE HOES'[2023]다. 이 음반을 듣고 있노라면 10대 시절의 한 친구가 떠오른다. 그는 에미넴(Eminem)을 듣고 감탄하던 내게 ‘찐’을 들으라며 ‘열’을 올렸던 녀석이다. 그런 ‘찐열’이도 'SCARING THE HOES'는 좋아하지 않을까.
얼마 전 로지 브라이도티(Rosi Braidotti)의 『포스트휴먼』을 읽는데, 이런 대목이 나왔다. “보편적 ‘인간’은 사실 암묵적으로 남성이고 백인이며 도시화되고 표준 언어를 사용하고, 재생산 단위로서 이성애적이며, 승인된 정치 조직의 완전한 시민으로 가정”(87쪽)되었다. 브라이도티는 이러한 규정으로 인해 배제되었던 사람들에 관심을 둔다. 찐열이는 브라이도티는 아니지만, 이런 맥락에서 에미넴을 싫어했다. “주류 백인 놈이 저항과 울분의 힙합 음악을 가지고 저열한 장사를 한다!”
하지만 나로서는 그런 걸 알 턱이 없었고, 힙알못이었기에 에미넴으로 입문했다. 에미넴은 내게 힙합 전도사였고, 그가 전한 'The Eminem Show'[2002]는 힙합 바이블이었다. 정말이지 나는 이 앨범을 듣고 한 귀에 반했다. 그리고 다행히 이런 덕통사고는 나만 난 것이 아니었다. 우리 동네 전체가 들썩였다. 부흥강사 에미넴의 혀 놀림에 우리는 홀라당 넘어갔다. 찐열이가 “이건 사이비다!”라고 외칠수록 정말 ‘찐’이 되었고, 우리는 끝나지 않았으면 하는 쇼를 들으며 끝나기만을 바라는 야간 자율학습 시간을 버텼다.
문제는 리스닝. 나는 둥둥 울리는 힙합 사운드가 좋았고, 혀로 귀싸대기를 날리는 그 타격감이 좋았다. 수능 모의고사의 친절한 영어 스피치도 잘 들리지 않는데, 혓바닥 차력쇼가 들릴 리가 있겠는가. 내게 힙합 음악은 서커스였다. 에미넴이라 더 그랬을 것이다. 그랬는데, 세상에서 영어가 제일 좋다던 맛이 간 친구가 노래 가사를 번역해서 돌렸다. 주류 백인 아들의 서커스 쇼로 생각했던 이 음반의 에미넴은
상놈의 자식이었다.
아니, 후레자식이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개놈의 자식?
맛 간 친구의 번역 가사에 의하면 선을 넘지 않은 구간이 거의 없을 정도로 에미넴은 맛이 가있었다. 조선의 유교보이가 즐기기에는 도가 넘쳐흘렀고, 무덤에서 안식을 취하던 성균관의 위인들이 벌떡 일어날 판이었다. 하지만 에미넴 신자들은 그럴수록 “오히려 더 좋아”했고, “마, 봤제? 이게 힙합이다!”라며 의기양양했다. 나로서는 이 쇼의 주인공은 ‘대체 왜 이럴까?’ 싶었다.
다음 해에는 에미넴의 자전적 영화인 <8마일>(8 Mile, 2003)이 개봉했다. 관련하여 전기적 사실을 다룬 기사들도 여럿 나왔다. 알고 보니 에미넴은 싱글맘이자 마약중독자인 엄마 밑에서 학대를 받으며 자란 백인이었다. 엄마가 에미넴을 낳은 나이는 겨우 17살이었고, 그들은 디트로이트의 슬럼가에서 살았다. 그곳은 흑인들의 동네였고, 그 동네에서 흑인의 음악을 하게 된 것이 에미넴이었다. 당연히 미국에서 백인은 상류층이고 부유하며 주류라고 생각했는데 그건 당연한 것이 아니었다. 백인도 쓰레기통에서 살 수 있음을 알게 됐다. 물론 에미넴의 영광은 그가 백인이었기에 가능했던 것도 있다. MTV는 그에게 호의적이었고 백인 힙합은 좋은 상품이었다. 하지만 냄새는 지독했다. 에미넴의 걸레 문 입은 한결같았고 터무니없었으며, 무엇보다 가관이었다.
우리 동네의 신도들은 장난기가 넘치고 극단적인 폭력을 묘사하며, 정말이지 미친개처럼 짖어대는 트랙을 사랑했다. 우리는 아침 7시 30분에 수감되어 밤 10시에 퇴소하는 하루하루를 살았기에 그 울분을 풀어줄 복음송이 필요했다. 나도 뭐, 사정이 같았지만, 내겐 누메탈 음악도 있었기에 에미넴의 처연한 트랙들을 더 좋아했다. <8마일>의 주제곡이었던 ‘Lose Yourself’를 사랑했고, 엄마에게 쏟아내던 쌍욕을 거두고 진솔한 이야기를 건넨 ‘Cleanin' Out My Closet’도 좋아했다. 아빠가 된 에미넴이 자신의 딸에게 전하는 ‘When I'm Gone’ 같은 곡은 아니 좋아할 수도 없었다. 열을 올리며 ‘찐’을 들으라며 동네의 파수꾼을 자처했던 찐열이도 함께 <8마일>을 보고 나서는 우리 교회의 마지막 의자에 걸쳐 앉기도 했다. 돌이켜 보면 그 시절의 우리는 부모와 선생, 선배 앞에서 스트레이트한 폭격도 받았지만, 그 뒤에 있다던 기성사회라는 추상적인 적과도 싸워야 했다. 그래서 서로는 서로에게 신앙이 되었다. 신앙고백의 양상은 달랐지만.
함께 에미넴을 듣거나 ‘찐’블랙을 듣거나, ‘누메탈’을 듣거나 하며, 기성세대를, 사회를, 학교를, 부모를 까대던 우리도 이제 불혹이 됐다. 구원이 될 수 없었던 부모 밑에서 우리는 각자의 구세주를 가려 믿었고, 그 불신의 세계에서 어른이 됐다. 우리는 우리의 가능성을 너무 믿거나 전혀 믿지 않았지만, 어른이 되어서 그 가능성을 증명해야 했다. 사회는 증명에 성공하면 친절했지만, 우리는 매번 그럴 수 없었다. 그렇게 실패의 굴곡 속에서 어른의 시절을 보내고 있다.
지난 설에는 그 시절 함께 투옥되었던 죄수들을 만났다. 우리는 어느덧 청춘을 회고하는 나이가 되었고, 아직 발목이 자유로운 한 친구를 빼면 모두가 부모가 되었다. 죄수 시절에 우리는 자신의 불행을 경쟁했고, 그건 매번 부모의 얼굴에서 나왔다. 우리가 겪은 부모의 애정과 폭력은 각기 달랐지만, 부모가 된 심정은 다들 비슷했다. 그랬거나 말거나, 앞서간 부모의 심정을 생각하게 됐고, 딸 헤일리를 향한 에미넴의 마음을 떠올렸으며, 아직 결혼하지 않은, 혹은 못한 자유인의 부모를 생각했다. 출소 후 우리는 세월에 쫓겨서 흩어져 살지만, 서로의 심정은 이웃하고 있다. 그러고 보면, 이 나라에서 허락한 유일한 마약이 음악이라 다행이다. 뭐, 그런 이야기도 했던 것 같다. 우리는 여전히 중독자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