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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23/03/23 19:24:32
Name 具臣
Subject [일반] 심심해서 쓰는 무협 뻘글 11
역사적 사실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제갈민이 연산에 대해서 잊을 무렵, 제갈린이 돌아왔다.
ㅡ 아, 돌아오셨습니까. 건강은 어떠신지요.
ㅡ 찾았네. 내 일부러 전서구도 날리지 않고 왔네.
ㅡ !!
제갈린은 목함 둘을 내밀었다. 목함에는 각각 아주 오래된 듯한 비단 두루마리 하나와 가죽끈이 삭아서 사라져버린 죽간 하나가 들어있었다.
ㅡ 비단 두루마리가 연산일세. 죽간은 경고문 겸 설명서고.
제갈민은 비단 두루마리를 조심스레 펼쳤다.
ㅡ 주역에서 보이던 구절이 많이 보이는군요?
ㅡ 주역 자체가 연산역과 귀장역을 손질해서 만들었으니까.
ㅡ 이것만으로는 주역과 크게 다르지 않군요.
ㅡ 얼핏 보면 그렇지. 어찌 되었든 중요한 것은 구정이네. 연산에서 괘를 정하고, 그 괘의 방에 맞게 정을 배치한 다음, 그 괘의 시각에 정의 명문에 희생물의 피를 바르고 희생물을 삶으며 구정의 명문과 연산의 해당하는 구절을 법식에 맞게 읽어야 하지.
제갈민은 가지런히 추려진 죽간을 읽었다.
ㅡ 천하를 바로잡기 위해서만 써야지 사사로운 이익을 위해 쓰면 벌을 받을 것이다... 뭐 그렇겠지. 땅으로는 삼십리, 사람으로는 천명까지 감당할 수 있다....
ㅡ 바로 그거네. 희생 한번 바치면 삼십리까지 물바다나 잿더미로 만들 수도 있고, 천명까지 벼락맞아 죽거나 바람에 날려버린다는 거지.
ㅡ 그런데 베푸는 술법의 종류는 정과 연산의 괘에 따라 다른데, 그 위력은 희생의 가치에 따라 다르군요. 그렇겠죠......
이건 뭡니까? 천하를 얻으려는 자는 아들을 바쳐야 한다?
ㅡ 바로 그 때문에 할 말이 있네. 제갈세가에서 구정을 얻으면 쓸 수 밖에 없고, 쓰다보면 끝까지 쓰게 되어 있네. 그러면 자네와 형제들 중 누군가는 솥에 들어가야 한다는 거지. 그래서 말인데, 이쯤에서 덮는게 어떤가? 연산역만으로도 들인 돈값은 하고도 남았네. 연산은 정확한 위치가 주어졌으니 쉽게 찾았네만, 구정은 그렇지도 않아. 돈이 얼마나 들지 알 수도 없네.

제갈민은 고개를 숙인채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한식경 쯤 지났을까? 고개를 들더니 히죽 웃으며 제갈린의 손을 잡았다.
ㅡ 아니오. 제갈세가가 천하를 얻는다지 않습니까. 저번에 구정을 숨길만한 곳을 말씀하셨죠? 모든 지원을 해드리겠습니다. 찾아보십시다.
ㅡ 그....그래?
ㅡ 가주님께는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필요한 것은 무엇이든 말씀만 하십시오. 제갈세가가 천하의 주인이 된다는데 무엇을 아끼겠습니까?

제갈린은 또 투덜거리며 돌아왔다.
저눔 시끼, 동생 삶아버리고 황태자가 되겠다는 속셈이구만. 내 저럴 줄 알았다. 니 애비도 어릴 때부터 싹수가 노랬더란다. 역시 니들은 제갈세가를 맡을 그릇이 못돼.

그 때 또 마주친 왜소한 종. 속으로 욕을 하던 제갈린은 미처 못 보고 지나칠 뻔 했다.
카악~ 퉤.
종을 보자 깜빡했다는 듯 얼른 가래침을 뱉고 가는 제갈린. 종은 아무 것도 못 본듯 그냥 지나쳐갔다.

제갈린이 사서와 지도를 뒤지며 파헤칠 곳을 고르는 동안, 제갈민은 가주에게 승낙을 받고 발굴 준비를 했다. 돈이 워낙 많이들 일이니, 제갈민 혼자서 정할 문제는 아니었던 것이다. 제갈민은 아버지에게 아들을 바쳐야 한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건 돈이 많이 들어가 돌이킬 수 없게 된 다음, 구정을 눈 앞에 보여주고 법술의 효과를 확인시킨 뒤에 해야 할 말.

그런데 구정을 찾는다고 소문낼 수는 없고, 무슨 핑계를 대지? 우물 판다고 하는게 좋긴 한데, 한군데에서 물이 나와버리면 다른 곳을 파볼 수 없다. 철광? 광산은 너무 깊게 판다. 그보다는 얕고 넓게 여러 곳을 파야 하는데. 요새나 기관진식을 짓는다? 그건 돈이 너무 든다. 파봐서 없으면 덮고 빠져야 하는데, 그러지 못한다.
결국 제갈민은 도자기를 빚는 분청토나 백자토 따위를 찾는다는 구실을 대기로 했다. 이것도 그리 좋은 핑계는 아니었지만, 급하게 찾다보니 다른 핑계를 찾지 못했던 것이다. 얼마 뒤 사람들 사이에서 제갈세가가 요업窯業에 뛰어들었다는 소문이 퍼졌고 이 소문은 바로 화씨세가로 흘러들어갔다.

화씨세가는 돈이 넘쳐났지만, 놀고먹어서는 안된다는 화국번의 뜻에 따라 도자기와 비단에 손을 대고 있었다. 워낙에 돈이 많다보니 투자가 확실해서, 최고의 도공들을 데려다가 수많은 일꾼들을 붙여주고 있었다. 이들에 대한 처우도 좋아서 다들 열심히 일하니 결과가 좋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장수선무 다전선고長袖善舞 多錢善賈 - 화씨세가는 요업계의 왕자로 군림하고 있었는데, 제갈세가가 요업에 뛰어든다는 소문이 퍼진 것이다. 어찌된 일인가 싶어 화씨세가의 눈과 귀들이 제갈세가의 움직임을 살펴보았다.

ㅡ 가주님, 이놈들이 신성한 요업에 먹칠을 하는 거 같습니다.
웃겨보겠다고 노력하지만 늘 실패하는 인검대주 남운이 화진천을 찾아왔다.
ㅡ 그게 또 무슨 말인가?
ㅡ 제갈세가에서 요업에 마수를 뻗치고 있다고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ㅡ 그랬지.
ㅡ 요즘 제갈세가에서 분청토를 찾는다며 여기저기 파고 있습니다. 그런데 파고 간 자리를 보면, 너무 깊고 넓게 팠습니다. 분청토가 있나 보려면 그렇게 팔 까닭이 없습니다. 도공을 구한다고는 하는데, 제갈세가와 만났던 도공들을 보면 딱히 뛰어난 수준이 아닙니다. 가마도 거의 구색만 맞추는 수준입니다. 이 건 대규모 요업을 위해서 분청토 수급을 확보하려는게 아닙니다. 땅을 파보려고 분청토 핑계를 대는 것 같습니다.
구파일방이나 오대세가 쪽에서는 도자기를 감상할 줄이나 알지 요업은 전혀 모르니까 전혀 낌새를 채지 못하는 모양입니다만.
ㅡ 그래? 왜 땅을 파는 거지?
ㅡ 그건 아직 밝히지 못했습니다.
ㅡ 조용히 지켜보게. 티내지 말고.
ㅡ 예. 그리 하고 있습니다.

남운은 화국번이 낙향한 뒤 흉년에 거둔 숱한 고아 중 하나다. 부모는 얼굴도 기억나지 않고, 남운이라는 이름이 정확한지도 모른다. 화국번이 꼬맹이에게 이름을 물어보자 남운이라고 했다는데, 워낙 어렸던지라 이름을 제대로 말한 건지, 다른 이름을 잘못 발음한 것인지, 물음에 엉뚱한 소리를 한 건지 알 수도 없다나.
화국번은 거둔 고아들이 자라면 이것저것 가르쳐보게 했다. 셈을 조금 하면 상단이나 전장錢莊으로 보냈고, 글을 조금 하면 의원을 돕게 했는데, 남운은 힘이 워낙 세고 몸도 날래 무공을 배우게 되었다. 그 때는 매선 같은 장로들이 오기 전이라 소림의 속가제자로 보내졌는데, 어릴 때는 그게 무슨 의미인 줄 몰랐다. 그러나 머리가 굵어지고, 다른 토호들에게 거두어진 고아들은 시골 무관에서 제미곤이라도 잡기는 커녕 종살이를 하며 빗자루를 쥐어야 한다는 것을, 무공을 배운 고아는 거의 살수로 죽어갈 뿐이라는 걸 깨달은 다음부터 자신의 행운에 깊이 감사했다. 소림에서도 오갈데 없는 고아가 아니라 잘나가는 화씨세가의 사람으로 대우받으면서 지냈기에 더더욱 그러했다. 남운은 소림에서 구파일방이나 오대세가의 대주급은 될 재목이라 평가받았는데, 지금 화씨세가의 인검대주가 되었으니 자신의 재능만큼 인정받은 셈이었다. 화씨세가가 신흥 방파이다보니 윗세대가 없어서 더 빨리 크긴 했지만.

화진천이 자신이나 다른 고아들보다 크게 낫지도 않은 밥을 먹고 비슷한 옷을 입는 것을 보며 어릴 때는 그러려니 했지만, 커서는 그게 얼마나 대단한 건지 깨달았다. 그러다보니 남운은 화씨세가를 위해 뭐든지 할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이었고, 이 일도 그 가운데 하나가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제갈세가에서는 무사들은 세가의 사람을 썼지만, 땅을 파는 일꾼들은 그때그때 막일꾼을 사서 썼다. 세가의 일꾼들을 몰고 먼길 다니는 것보다는 은자 들고 가서 싼값에 막일꾼 부리는게 낫기도 했거니와, 땅이나 파는 일꾼은 아는 조각이 작을 수록 좋다고 본 것이다. 그러다 보니 일꾼들은 입이 가벼웠고, 남운의 끄나풀들은 거친 술 한사발에 그들이 보고들은 모든 것을 알 수 있었다.

ㅡ 일꾼들은 다른 건 전혀 아는 게 없고, 땅에서 뭔가가 나오면 알리라고 한답니다.
ㅡ 뭔가가 뭔가?
ㅡ 으하하하.....역시 대주님이십니다! 제 배꼽이 벌써 몇번 빠졌는지 모릅니다.
ㅡ 험험. 내가 좀 치긴 하지.
ㅡ 뭘 찾는지는 전혀 말을 하지 않습니다. 무사들도 아는게 없나봅니다. 관리하는 문사文士가 하나 있나본데 그 사람만 아나봅니다.
ㅡ 무사들도 알지 못하는 뭔가라.....
ㅡ 문사는 무사들이 원주님이라고 부르는데 나이는 예순이 넘은 거 같답니다.
ㅡ 제갈세가에서 원주는 하나 뿐이지. 예순이면 얼추 맞는군.

며칠 뒤
ㅡ 뭐 좀 나왔나?
ㅡ 한림원주는 현장을 거의 쳐다도 안보는데, 뭔가 나와서 말씀드렸더니 짜증을 내는 일이 있었답니다. 죽은 범, 오래된 질그릇 몇접, 부서진 수레, 번쩍이는 광석, 돌부처, 헌이불, 녹슨 망치가 나와서 그 때마다 말씀드렸더니, 보지도 않고 앞으로 이런 건 알리지 말라고 했답니다. 그러면 어떤 걸 말씀 드릴까요 여쭤보니까, 큰거랍니다. 보면 이거다 싶을거라나요?
ㅡ 보면 이거다 싶을 큰거?

파는 것이 식물을 찾기엔 너무 깊고, 광물을 찾기엔 너무 얕다. 큰거라.....보면 이거다 싶을....저들도 정확한 위치는 모르는. 땅에서 썩는 건 아닌 모양이고.
제갈세가가 저렇게 인력과 돈을 들이는 걸 보면 중요한 거다. 드러내고 찾지 못하는 걸 보면 뭔가 깔끔한 건 아니거나, 남들도 탐낼 뭔가.
도무지 알 수 없었지만, 남운은 끈기라면 한가락하는 사람이었다. 제갈세가의 흔적을 티나지 않게 더듬어가고 있었다. 포기하지 않고.
두달 뒤 제갈세가가 작업을 할 때마다 빈수레 아홉대가 따르는 것을 보고 찾는 것이 9개로 이루어졌음을 눈치챘고, 다음 해에는 제갈세가가 파는 곳들의 공통점이 진 소왕 시절 전쟁터라는 것을 알아냈다.


1부 요기妖氣가 자미紫微를 범하니....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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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23/03/23 22:52
수정 아이콘
서사가 서서히 합쳐지는 느낌이군요...!
혹시 문피아에도 올려보시는 건 어떠실까요
23/03/24 02:42
수정 아이콘
좋게 봐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제가 그럴 주제는 못 되고, 글을 제대로 끝낼 수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매번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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