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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08/12/08 13:50:07
Name happyend
Subject [일반] 소인배라 말하는 당신, 정의로운가
1.

북인들-엄밀하게 말하면 대북이라고 합니다만-에 의해 추대되고 이끌어진 정부인 광해군시대의 조정은 조선후기의 한국사의 지형뿐만 아니라, 지금까지도 우리나라를 밑바닥에서 좌지우지하는 영향력을 가졌습니다. 성공으로서가 아니라 실패로서...

북인들이 조선중반기 무시무시한 당쟁에서 승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임진왜란당시 거의 유일하게 실천적 지식인으로서 ‘의병활동’을 이끌어냈던데 있습니다. 그들이 더 실천적일 수 있었던 것은 사상적 뿌리가  남인이 숭배하는 이황이나 서인의 큰스승인 율곡이이보다 더 현실적이고 실천적인 남명조식과 화담 서경덕(소수)였던데 있습니다.

북인정권의 실패와 참혹한 숙청작업으로 남명과 화담은 이후 한국 사상사에서 거의 지워져버리는 아픔을 당하기도 합니다. 광해군의 실패보다 남명학파의 궤멸이 이후 조선의 암흑기를 가져오는데 결정적인 요인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북인정권, 그리고 광해군의 실패는 오만함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임진왜란의 책임에서 서인정권과 남인정권은 결코 자유로울 수 없었습니다. 선조와 서인들이 정치적 책임을 면하기 위해 악착같이 ‘명나라의 도움’을 강조하여야 했던 것은 이후 수여된 공신의 숫자에서 극명하게 드러납니다.
호성공신  86명 (1등공신 이항복,정곤수)
선무공신  18명 (1등공신  이순신,권율,원균 )

이름 그대로 호성공신은 의주까지 선조를 도와 피난길에 올랐던 사람들입니다. 이 숫자에는 24명의 내시와 6명의 마부의 이름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당연하겠지만 1등공신을 받은 두 사람은 명나라와 교섭에 성공하여 군사를 파견하도록 하는데 1등으로 기여한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아시다시피 일등공신에 권율만을 고집하다가 이순신을 넣지 않으면 민란이 일어날지도 모른다고, 남해안지역을 암행하고 돌아온 이덕형의 충고를 받아들인 선조가 슬쩍 원균을 끼어 넣어 그 의미를 반감시키려는 시도에 의해 만들어진 명단입니다.

선조와 서인-남인들은 분명하고 뚜렷하게 자신들의 역사적 책임의 면피를 위해 선조와 야합했습니다. 그들에게 의병운동을 주도했던 북인과 분조를 이끌었던 광해군은 체제위협적인 인물로 보였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선조와 조정대신들은 전쟁내내 위기의식을 끊임없이 느꼈습니다. 곽재우가 사라져야 했던 이유도 그러했지만 많은 의병장들은 의병을 서둘러 관군에게 넘기지 않으면 ‘반군’으로 처단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오히려 떨어야 했습니다. 의병운동은 정권에게 너무도 두려운 존재로 체제위협적인 것으로 여긴 나머지 일부의 의병장들은 반란군이란 낙인이 찍혀야 했습니다.

어쩌면 이때 모든 일들은 예고가 되었던 것이겠지요.이후 조선의 역사는 여기에서 출발했을 것입니다. 마치 현대사가 친일파문제와 한국전쟁에서 출발하는 것처럼...

2.

광해군이 조금만 더 현명한 군주였다면 역사는 많이 달라졌을 것입니다. 그는 영리했고, 전쟁의 승리를 이끌어낸 ‘실천력’을 통해 대중적 지지를 받고 있었으니까요. 그와 북인정권은 한순간에 남인-서인들을 글만읽는 나약한 선비나부랑이로 만들어버릴 수 있었습니다.

정조는 젊은 홍국영을 단지 사냥개로만 쓰고 버릴 줄 아는 정치적 현명함을 가지고 있었지만 광해군은 그러점에서 운이 없었습니다. 광해군을 포위한 조정의 북인들은 노회한 산림이었던 정인홍 일파였습니다. 그는 의병장출신으로 ‘정의로운 자’로 자신을 느꼈던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정인홍은 조선을 한꺼번에 바꿔버리고자 했습니다. 남명 조식을 업신여기면서도 결국 전쟁때 아무것도 못한 무기력한 선비들, 변하는 세상따위에 맞설 실천력을 갖지 못한 성리학적 교조주의자들에 대한 그의 분노는 상상을 초월했습니다. 따지고보면, 그의 예언이 사실이기도 합니다만....

퇴계이황과 율곡이이의 제자가 조선 선비의 대다수인 마당에 그것은 너무 큰 모험이었습니다. 사상적 뿌리를 공격당한 남인-서인들은 반격을 준비했습니다. 광해군은 서인의 공격을 효과적이면서 노련하게 받아칠 준비가 안되어있었고,북인정권은 강수만 고집하며 고립을 자초하였고,결국 인조반정을 허용해야 했습니다.

인조반정은 남인-서인의 연립정권이라고는 하지만 서인우위의 정권이었습니다. 그리고 이황과 이이의 사상적,실천적 토대는 성리학의 틀 위에 이루어졌다고는 하지만 너무도 달랐습니다. 그들의 불안한 동거가 시작된 것입니다.

어쩌면 당연한 것이겠지만 인조시대 서-남인 정권은 변화에 대응할 수 없었습니다. 반정의 명분, 역사적 책임 등으로부터 자신들을 지켜내기 위해서는 ‘이념적 포장’이 필요했습니다. 이미 전쟁을 통해 더 이상 조선사회를 이끌어갈 리더쉽을 내놓을 수 없다는 판정을 받았던 ‘성리학’을 시대의 이념으로 부활시켜내는 일을 하는데 가장 손쉽고 그들로서는 현명한 방법이 무엇일까요?

선조시대 위기로부터 자신을 구원했던 그것.그것이 이 낡은 성리학주의자들을 구원해줄 것이라 믿었습니다. 바로 명나라에 대한 ‘재조지은’.호성공신을 대량 양산함으로써 위기를 돌파했던 그 방법이 다시 쓰였습니다. 낡은 유행가가사는 달리 하는 일도 없으면서 농촌사회의 ‘유지’로 살아가고 있었고, 바로 그런 이유로 여러 가지 세금을 면제받을 수 있었던 농촌지주 선비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으며 불려지게 되었습니다.

대명의리.이것이 두 번의 호란을 불러일으키면서 남인-서인 정권 사이엔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불안한 동거의 균열은 점점 심각해지기 시작했습니다.

3.

왜란의 책임을 공동의 힘으로 면책했던 남인-서인들은 호란의 책임을 두고는 갈라서기 시작했습니다. 아마도 서인들의 정권독점욕에서 시작되었을 것으로 보입니다만 이념적 차이에서 출발한 필연적 과정이라는 것을 그 유명한 ‘예송논쟁’은 보여주고 있습니다.

율곡 이이의 사상은 세상을 실천적으로 보는데 있습니다. 임금도 신하도 백성도 모두 ‘氣’일 뿐이니 그 차이가 있을 수 없습니다. 임금이 ‘理’가 될지 아니면 신하나 백성이 ‘이’가 될지는 현실에서의 실천이 좌우하는 것일 뿐이니까요. 근대민주주의의 뿌리라고 할 수 있는 평등이론이 여기에서 출발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반면에 퇴계 이황의 사상은 세상의 정의와 질서라는 ‘이’는 우리 인간 너머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을 따르는 것일 뿐이지요. 이 ‘이’의 표현인 ‘왕’을 따라서 ‘왕국’을 정의롭게 해야 합니다. 그래서 임금은 정의의 표현체이므로 세상은 임금의 것입니다.당연히 토지를 독점하는 것,어떤 붕당의 신하가 정의를 독점하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이런 뿌리에서 나온 남인들이 중세 왕도정치를 지향하고, 왕의 자리에 ‘하느님’을 넣으면서 주체적으로 서학(천주교)을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도 사상적 유사성에 기인한다고 여길 수 있습니다.

‘예송논쟁’의 핵심은 이것입니다. 서인들은 왕족도 사대부와 평등하다고 여겨 1년상을 주장했던 것이고, 남인들은 왕은 ‘특별한 존재’이므로 3년상을 주장했던 것이지요.겉으로 보기에 아무것도 아닌것 같고 우스워보이는 이 싸움이 당파전쟁을 이끌어낸데는 다 이유가 있었던 것입니다.

어찌되었든 병자호란은 성리학에 대처하는 두가지 입장을 낳았습니다. 왕이란 이념적 결정체가 존재하는한 나머지의 변화는 비교적 쉽게 이끌어 낼수 있었던 남인들이 주체적이고 능동적으로 변화를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은 당연한 것이었지요.

그런 이유로 서인들은 더 ‘대명의리’에 집착하면서 성리학적 교조로 빠져들었습니다. 그들은 성인들의 글자를 한글자라도 바꿔써선 안되고,한글자라도 토를 달아서는 안된다며 그렇지 않은 모든 정치집단들에 대해 ‘빨갱이’라 부르기 시작합니다. 조선시대의 빨갱이. 그들은 변화를 부르짖던 모든 사람들에게 칠해진 색으로 조선시대의 언어로는 ‘소인배 오랑캐’였습니다.

4.

이런 색깔론은 매우 효과적이었습니다. 숙종도 그것을 인정했고, 서인독재정권은 이 색깔론에 힘입어 장기집권에 성공합니다.

당연히 그렇겠지만 이 색깔론은 ‘소인배 오랑캐의 나라인 청나라’의 존재 때문에 유지되고 재생산될 수 있었습니다. 비합리적인 서인들의 행동이 이 색깔론에 힘입어 ‘정의’로워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어째서 그토록 비이성적인 색깔론이 한나라를 망하게 하는 그 순간까지 ‘쇄국’이란 이름으로 부활하면서까지 계속될 수 있었는지 그 질긴 생명력에 대해서는 감탄을 자아낼 수 밖에 없다고 여겨집니다. 병자호란세대가 다 죽고 난 뒤 150년이나 지나 1700년대가 저물어갈 무렵에 박제가는 이렇게 푸념을 합니다.

-지금 우리 나라 사람들은 ‘오랑캐’라는 한 글자로 천하의 모든 것을 말살하고 있다....
시험삼아 ‘중국의 학자 중에도 퇴계와 같은 자가 있고,문장가에는 간이와 같은 자가 있으며, 명필중에는 한석봉보다 뛰어난 자가 있다’고 말해보라.그들은 반드시 발끈 성을 내고 낯빛을 바꾸며 대뜸 ‘어찌 그럴 리가 있겠소?’라고 말하리라. 심한 경우에는 그런 말을 한 사람에게 죄를 가하려 들 것이다.
이번에는 이렇게 말해보라!
‘만주 사람들은 말하는 소리가 개 짖는 소리와 같고, 그들이 먹는 음식은 냄새가 나서 가까이할 수 없다.심지어 뱀을 시루에 쪄서 씹어 먹으며,황제의 누이가 역졸과 간통하여 가남풍같은 불미스런 소행이 자주 일어난다.’
그러면 그들은 반드시 크게 기뻐하여 내가 한 말을 여기저기 전하기에 겨를이 없을 것이다.
내가 일찍이 사람들에게 힘주어 변론하여,‘내가 내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왔거니와 그런 일이 전혀 없다’라고 한 적이 있다.그들은 끝내 석연치 못한 표정을 지으며 말하기를,‘아무개 역관이 그렇게 말했다’라고 하는 것이다.그래서 내가 말했다.‘자네가 그 아무개 역관과 친분이 있는 정조가 나와 비교해서 어떠한가?’그러자 그 사람이 말하기를,‘그와 친분이 깊지는 않지만 그가 거짓말을 할 사람은 아니야’라고 하였다.나는 이렇게 말하고 말핬다.‘그렇다면 내가 거짓말을 했구려.’
-박제가,만필(조선인의 편견)

이토록 오랫동안 색깔론이 먹힌 이유가 뭘까요?

앞에서도 말했듯이 성리학의 덕을 보는 사람들 가운데 가장 으뜸은 농촌의 지주들이었습니다.그들은 유교사원인 사우나 서원,향교에 이름을 올려 명망과 실리를 챙겼습니다. 수령은 그곳에 이름이 있는 지주는 함부로 할 수 없었던 것이 그 서원,향교,사우 등은 지역 여론의 중심지여서 밉보이면 상소한장으로 목이 날아갔습니다.게다가 유교사원에 이름을 올리면 엄청난 혜택이 돌아오는데 가장 큰 혜택은 역시 ‘면세’입니다.

조선시대 세금 중 지주들에게 가장 부담스러운 것은 역시 직접세인 ‘전세’입니다. 그런데 이 ‘전세’는 감세가 가능한 거의 유일한 세목이었습니다.흉년이라고 감세,열녀나 충신이 나오면 감세,유교서원에 쓸 제사용품을 냈다고 감세,흉년이나 전쟁때 기부를 하였다는 이유로 감세....반면 일반 서민들이 내는 간접세인 호포,대동미 등은 감세가 없었습니다.

문제는 이런 혜택을 받지 못하는 양반들이 덩달아 이 이념의 희생자가 된 것이지요.양반이라는 허울좋은 명분을 얻기 위해 과감하게 실리를 포기한 멋진 선비들이 조선후기에 무려 2백만명. 단 2만명에서 출발한 조선시대의 양반의 숫자는 100배나 증가했고,그들이 색깔론의 든든한 후원자가 기꺼이 되어주었습니다.

5.

잘 알려진 허생전에서 대부분은 무시하고 지나가는 대목이 바로 ‘이완’이란 장수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저도 어렸을 적에 이완대장에 대한 이야기를 읽고 감동의 쓰나미에 허덕인적이 있습니다만, 효종임금시대 ‘북벌’의 상징으로 ‘좌빨 소인배 오랑캐’에 대한 분노의 상징으로 추앙받아온 이 인물과 그 이념에 기생하는 양반들에 대해 박지원은 일침을 가합니다.
“좌빨이라 하는 당신, 정말로 정의로운가?”

------------------------

변씨는 본래 이완 이 정승과 잘 아는 사이였다. 이완이 당시 어영 대장이 되어서 변씨에게 위항이나 여염에 혹시 쓸 만한 인재가 없는가를 물었다. 변씨가 허생의 이야기를 하였더니, 이 대장은 깜짝 놀라면서,

"기이하다. 그게 정말인가? 그의 이름이 무엇이라 하던가?" 하고 묻는 것이었다.
"소인이 그분과 상조해서 3년이 지나도록 여태껏 이름도 모르옵니다."
"그인 이인이야. 자네와 같이 가 보세."

밤에 이 대장은 구종들도 다 물리치고 변씨만 데리고 걸어서 허생을 찾아갔다.
변씨는 이 대장을 문밖에 서서 기다리게 하고 혼자 먼저 들어가서, 허생을 보고 이 대장이 몸소 찾아온 연유를 이야기했다. 허생은 못 들은 체하고,

"당신 차고 온 술병이나 어서 이리 내놓으시오."
했다. 그리하여 즐겁게 술을 들이켜는 것이었다. 변씨는 이 대장을 밖에 오래 서 있게 하는 것이 민망해서 자주 말하였으나, 허생은 대꾸도 않다가 야심해서 비로소 손을 부르게 하는 것이었다.

이 대장이 방에 들어와도 허생은 자리에서 일어서지도 않았다. 이 대장은 몸둘 곳을 몰라하며 나라에서 어진 인재를 구하는 뜻을 설명하자, 허생은 손을 저으며 막았다.

" 밤은 짧은데 말이 길어서 듣기에 지루하다. 너는 지금 무슨 벼슬에 있느냐?"
"대장이오."
"그렇다면 너는 나라의 신임을 받는 신하로군. 내가 와룡 선생(臥龍先生) 같은 이를 천거하겠으니, 네가 임금께 아뢰어서 삼고 초려(三顧草廬)를 하게 할 수 있겠느냐? "

이 대장은 한참 고개를 숙이고 한참 생각하더니,
"어렵습니다. 제이(第二)의 계책을 듣고자 하옵니다." 했다.
"나는 원래 '제이'라는 것을 모른다."
하고 허생은 외면하다가, 이대장의 간청에 못 이겨 말을 이었다.

"명(明)나라 장졸들이 조선은 옛 은혜 있다고 하여, 그 자손들이 많이 우리 나라로 망명해 와서 정처 없이 떠돌고 있으니, 너는 조정에 청하여 종실(宗室)의 딸들을 내어 모두 그들에게 시집 보내고, 훈척(勳戚)권귀(權貴)의 집을 빼앗아서 그들에게 나누어 주게 할 수 있겠느냐?"

이 대장은 또 머리를 숙이고 한참을 생각하더니, "어렵습니다." 했다.
"이것도 어렵다, 저것도 어렵다 하면 도대체 무슨 일을 하겠느냐? 가장 쉬운 일이 있는데, 네가 능히 할 수 있겠느냐?"
"말씀을 듣고자 하옵니다."

"무릇, 천하에 대의(大義)를 외치려면 먼저 천하의 호걸들과 접촉하여 결탁하지 않고는 안 되고, 남의 나라를 치려면 먼저 첩자를 보내지 않고는 성공할 수 없는 법이다. 지금 만주 정부가 갑자기 천하의 주인이 되어서 중국 민족과는 친근해지지 못하는 판에, 조선이 다른 나라보다 먼저 섬기게 되어 저들이 우리를 가장 믿는 터이다. 진실로 당(唐)나라, 원(元)나라 때처럼 우리 자제들이 유학 가서 벼슬까지 하도록 허용해 줄 것과, 상인의 출입을 금하지 말도록 할 것을 간청하면, 저들도 반드시 자기네에게 친근하려 함을 보고 기뻐 승낙할 것이다.

국중의 자제들을 가려 뽑아 머리를 깍고 되놈의 옷을 입혀서, 그 중 선비는 가서 빈공과(賓貢科)에 응시하고, 또 서민은 멀리 강남(江南)에 건너가서 장사를 하면서, 저나라의 실정을 정탐하는 한편, 저 땅의 호걸들과 결탁한다면 한번 천하를 뒤집고 국치(國恥)를 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만약 명나라 황족에서 구해도 사람을 얻지 못할 경우, 천하의 제후(諸侯)를 거느리고 적당한 사람을 하늘에 천거한다면, 잘 되면 대국(大國)의 스승이 될 것이고, 못 되어도 백구지국(伯舅之國)의 지위를 잃지 않을 것이다."

이 대장은 힘없이 말했다.
"사대부들이 모두 조심스럽게 예법(禮法)을 지키는데, 누가 변발( 髮)을 하고 호복(胡服)을 입으려 하겠습니까?"

허생은 크게 꾸짖어 말했다.
"소위 사대부란 것들이 무엇이란 말이냐? 오랑캐 땅에서 태어나 자칭 사대부라 뽐내다니, 이런 어리석을 데가 있느냐? 의복은 흰옷을 입으니 그것이야말로 상인(喪人)이나 입는 것이고, 머리털을 한데 묶어 송곳같이 만드는 것은 남쪽 오랑캐의 습속에 지니지 못한데, 대체 무엇을 가지고 예법이라 한단 말인가? 번오기(樊於期)는 원수를 갚기 위해서 자신의 머리를 아끼지 않았고, 무령왕(武寧王)은 나라를 강성하게 만들기 위해서 되놈의 옷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다.
이제 대명(大明)을 위해 원수를 갚겠다 하면서, 그까짓 머리털 하나를 아끼고, 또 장차 말을 달리고 칼을 쓰고 창을 던지며 활을 당기고 돌을 던져야 할 판국에 넓은 소매의 옷을 고쳐 입지 않고 딴에 예법이라고 한단 말이냐? 내가 세 가지를 들어 말하였는데, 너는 한 가지도 행하지 못한다면서 그래도 신임받는 신하라 하겠는가? 신임받는 신하라는 게 참으로 이렇단 말이냐? 너 같은 자는 칼로 목을 잘라야 할 것이다." 하고 좌우를 돌아보며 칼을 찾아서 찌르려 했다.

이 대장은 놀라서 일어나 급히 뒷문으로 뛰쳐나가 도망쳐서 돌아갔다.
이튿날, 다시 찾아가 보았더니, 집이 텅 비어 있고, 허생은 간 곳이 없었다.

-박지원,<허생전>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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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힌자
08/12/08 14:03
수정 아이콘
정말 역사에서 '격리와 수용', '선택과 배제'라는 개념은 빠질 수가 없는 것 같습니다.
higher templar
08/12/08 14:32
수정 아이콘
좌빨 이라는게 네이버 지질학자들이 관심끌려고 그냥 하는 소리가 아니라 정말 그런 사람이 있을까 하고 저는 생각했습니다만 꼭 그렇지도 않은가보네요
정현준
08/12/08 15:57
수정 아이콘
오늘도 좋으면서... 하지만 씁쓸할 수 밖에 없는 글 감사합니다.
담배피는씨
08/12/08 16:16
수정 아이콘
읽을 때마다 역사의 부정적인 부분은 계속 반복하는 것 같습니다..
chcomilk
08/12/08 16:30
수정 아이콘
비극으로 재현되는 군요.
에인셀
08/12/08 17:22
수정 아이콘
항상 잘 읽고 있습니다.
飛上夢
08/12/08 19:08
수정 아이콘
저 조선판 극우보수들(서인 -> 노론 -> 벽파세력)은 나중에 일본에 나라를 팔아먹을 때도 한 몫 거들죠.
그 결과인지 일제강점기 때 양반가에서 독립운동 나섰던 가문들은 거의 소론, 남인계열 가문들이었다군요.
(이덕일 저: [아나키스트 이회영과 젊은 그들] 참고)

그나저나, 우리나라 역사에서 개혁을 주창했던 세력들은 왜 대부분 비극적인 종말을 맞이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묘청, 신돈, 조광조, 심지어는 국왕이었던 정조에 이르기까지...

ps) 조선판 "색깔론"은 제가 좀 퍼가겠습니다. ^^
08/12/08 21:12
수정 아이콘
뒤가 구린 집단일수록 수구, 반동으로 돌아서기 마련이죠.
이래서 역사는 반복된다는게 맞는말인것 같습니다.
어쩌면 인간은 정신적으로 몇백년전에 비해서 그다지 성장하지 않은건지도....
낭만토스
08/12/09 07:04
수정 아이콘
역사를 배우는 이유중 하나 아니겠습니까?

우리의 과거를 뒤돌아보며 잘못을 다시 보고, 현재에서 그 과오를 다시 범하지 않기 위해 말이죠.

오늘도 재미있는 글 잘 읽고 갑니다.

PGR매거진이나 PGR문집 이런것 안나오려나요 흐흐
백마탄 초인
08/12/09 13:48
수정 아이콘
오늘도 좋은글 보고 갑니다...

하지만 기분은 씁쓸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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