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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08/11/12 20:27:27
Name Anarchie
Subject [일반] 수능보던 날
PGR에 계신 수많은 형님 누님들을 생각하면 조금 건방진 소리같지만 어느덧 수능을 본지도 5년이나 지나버렸습니다.

그래도 역시, 수능날을 떠올려보면 기분이 묘해집니다.



평소에는 자정이 넘어서야 문을 닫는 자습실이 열시도 되기 전에 문을 닫았고,

기숙사로 돌아와서 이른시간에 침대에 누워있으면서 친구들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내일 하루면 끝나는 시험 하나 때문에 짧게는 고등학교 3년, 길게는 초중고 12년을 공부했다.

생각해보면 엄청난 시간낭비 아니냐. 솔직히 그냥 검정고시 몇번 보고 수능보는건 어떨까.

아무리 생각해도 대학이 인생의 전부는 아닌 것 같다. 대학 안 가고도 잘 사는 사람 많지않느냐.

그래도, 대학이란게 인생의 절반쯤은 차지하는것이 아닐까. 그럼 시험 잘봐야지' 등등...




왠지 모르게 '수능 전날에는 긴장돼서 잠이 절대 안올꺼야'라는 믿음을 갖고 있었지만

믿음은 보기 좋게 깨졌고, 언제 잠들었는지도 모른 채 일어나보니 시계는 아침 6시를 가리키고 있었습니다.

멍한 머리로 평소 습관을 따라 세수를 하고 옷을 껴입고 침대에 걸터앉아 책상 위에 너저분하게 널려있는

참고서들을 보고있으니 오늘이 수능이라는 사실이 조금씩 실감나기 시작합니다.

순간 머리 속에 '내가 멍하니 있는 이 시간, 전국 구백만의 아이들이 머리속에 뭔가를 집어넣고 있다'는

말도 안되는 위기의식을 느끼며 서둘러 아무 책이나 한권을 집어들었습니다.

표지를 보니 '이 책을 마스터하려면 3년의 세월은 족히 투자해야 한다'는 전설이 내려오는 『독학국사』.

근현대사 부분을 10여분 읽어보다가, 그래 나는 최선을 다했어 - 라며 자기최면을 건 뒤

'이딴 책 오늘 이후로 다시는 보나봐라' 생각하며 책을 벽에 던져버렸습니다.



기숙사 밖으로 나오니 학교 앞 뜰이 응원하러 온 후배들과 부모님들로 시장을 보는 듯 합니다.

한켠에서는 종교동아리들이 머리를 맞대고 기도를 올리고 있는데, 그걸 보고있자니 왠지 모르게 손해보는 기분이라

나도 좀 기도를 해야하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평소에는 믿지도 않던 '그 분'께 과연 기도를 드려야 하나, 기도를 한다고 '그분'이 들어주시기는 하나,

지금 엄청나게 바쁘실텐데 내 차례가 올까 등등 쓸데없이 엄청난 갈등을 겪다가 타협점을 찾아냈습니다.

'조상님중에 똑똑하신분들이 몇몇 계셨다던데 그분들은 한가하실테니 조상님을 이용하자.'



아무도 없는 구석에서 아무도 찾지 않는 조상님들께 '저 제사 자주 갔으니까 잘 봐주세요'라고 기도를 올린 뒤

부모님을 찾아 헤메니 아버지는 보이질 않고 어머니만 손을 흔들고 계셨습니다.

"어머니, 아버지는 어디계세요"

"출근하셔야지"

"아...."

제가 수능을 보건 말건 세상은 굴러가는 법이었습니다.

그래. 오늘도 그저 여느 날과 같은 날이라고, 여느때와 같은 시험이라고 생각해보니 긴장이 풀어집니다.




어머니가 손수 제작해주신 특제 집중력 향상차(茶)가 담긴 보온병을 받아들고 고사장에 가는 버스에 올랐습니다.

책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친구도 있고, 음악을 듣는 친구도 있고, 자고있는 친구도 있고...

저는 그냥 버스 밖에 지나가는 광경을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수능보는 날이지만 하늘이 갈색으로 변하지도 않았고 운석이 떨어지지도 않았습니다.

그저 여느 날과 다를 것 없는 풍경들을.




고사장에 도착하고 자리에 앉아서 어머니의 차를 마셔보고 흠칫했습니다.

'이건 아무리 생각해도 그냥 집에 있던 결명자 물을 따뜻하게 해서 가져온 것이라고 밖에 생각할 수 없다.....

남들 어머님이 백일기도를 드리는 동안 나의 어머니는 대체 무얼하고 계셨는가.....'

불효자식같은 생각을 하고있으니 어느덧 감독관이 들어오고 수학능력시험이 시작되었습니다.




언어영역시간.

이상한 그림문제가 출제됩니다. 공중에 성이 둥둥 떠있습니다.

'이건 천공의 아성인가...'라는 생각을 하다가 '이런 뻘생각이 드는걸 보니 내가 긴장을 안하고있기는 하구나'라며

왠지 모르게 스스로가 뿌듯해집니다. 마지막 문제를 풀고나니 검토할 시간도 없이 시험이 끝나버렸습니다.


수리영역시간.

왠지모르게 시간이 남았습니다. 심심해서 자를 꺼낸 뒤 그림 문제들을 때려맞춰봅니다.

계산으로 푼 답들과 얼추 들어맞는걸 보고 만족하고있으니 시험이 끝납니다.


점심시간.

친구들과 밥을 먹으며 일부러 시험 이야기는 하지 않고 있는데, 건너편에서 식사하는 학생들 사이에서

오전 시험이 어려웠다는 말이 들려옵니다. 수만가지 생각이 머리속을 스쳐지나가지만 애써 무시하며 식사를 마쳤습니다.

어머니의 차를 마시며 다시 한번 확신합니다.

이건 결명자야.



수리II영역 시간.

언어영역시간이 빠듯했던게 생각나서 정신없이 문제만 풀었습니다.

그러다가 국사영역에서 아침에 10분 쳐다본 『독학국사』내용이 문제로 나오는걸 보고 황당함에 잠시 손을 놓습니다.

'조상님 고마워요. 앞으로도 제사 잘 올릴께요'



외국어영역 시간.

슬슬 머리 속이 텅텅 비어갑니다.

'난 왜 여기 앉아서 이런 짓을 하고 있나. 정말 이 시험 잘보면 김태희 전지현이랑 사귈 수 있나'

하지만 머리가 뭔 생각을 하든 말든 손은 관성의 법칙을 따라 문제를 풀어나갑니다.

문제를 모두 풀고나서 답안지를 검토를 해보니 정신줄을 놓고있던 증거로 실수를 발견합니다.


"감독관님, 답안지 좀 바꿔주세요"

"답안지 교체시간 지났네"

"네?"

"시간 지나서 안된다고"


감독관도 인간이니만큼 웬만하면 수능보는 학생들에게 잘해준다는 믿음이 한방에 날아갑니다.

순간 지난 3년간 수능을  준비하며 쌓여왔던 모든 울분이 폭발하며 완벽하게 정신줄을 상실하며


"아 XX 안 바꿔요 안바꿔 XX"


자리로 돌아가서 사람들의 시선을 무시하며 어머니의 차를 마시고 마음을 식혀봤지만....

지금 생각해도 열받습니다.



제2외국어 영역.

진정으로 완벽하게 정신줄을 놓았습니다.

몸은 시험장에 있지만 마음은 이미 저 먼곳에 있습니다.

덕분에 일주일 후에 독일어 선생님께

'넌 어디가서 외고출신이라고 말하면 내가 쫓아가서 죽여버린다'라는 말을 들을만한 결과를 얻습니다.

솔직히 제가 생각해도 Familie 발음(파밀리)을 틀린건 좀 너무한 것 같긴 하지만

자주 듣던 라디오에서 '파밀리에'라는 아파트 선전을 너무 많이 한 탓에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수능이 끝나고 영혼이 빠져나간 느낌으로 멍하니 하늘만 보고있다가 저녁식사 장소로 끌려갔습니다.

부모님들이 음주를 허락해주시니 애들끼리 부어라 마셔라 난리가 났고,

수능 이야기를 꺼내기도 전에 주량의 한계(소주 5잔)를 넘고 맛이 가버립니다.

탁자에 엎드려서 정신줄을 놓고있다가 울고 웃으며 놀고있는 친구들을 보고있으니 이런 생각이 듭니다.


이제 다 끝난건줄 알았는데 아니구나.

다시 수능을 보는 사람도 있을거고, 아니면 대학교를 골라야 하고,

대학교를 가면 직업을 구해야 하고, 그 뒤엔 결혼도 해야하고,

자식도 키워야하고, 그럼 내 자식도 수능을 볼꺼고......


그러다가 잠이 들고 수능 날은 그렇게 끝나버렸습니다.




얼핏 생각하면 5년이나 지나버린 날이지만, 이렇게 떠올려보면 바로 어제같이 생생하게 기억나는 날입니다.

친구들과 동고동락하며 수능이라는 목표 하나만을 바라보고 보낸 3년이라는 시간.

그때만큼 열심히, 순수하게 앞만 보고 달려갈 수 있는 날은 다시 오지 않을거라 생각합니다.

짧게 보면 고등학교라는 달리기의 결승점이고, 길게 보면 인생이라는 마라톤의 반환점인 수능.


모든 수험생들이 의미있는 결과를 얻게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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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라면스윙
08/11/12 20:35
수정 아이콘
후덜덜 너무 실감나는 글이네요...추천-_-!
Go!Raptors!
08/11/12 20:37
수정 아이콘
잘 읽었어요~
역시 예상대로 결과는 안 나와있네요. 굿!
저 역시 수능보던 날은 잊혀지지가 않는군요.
입대날보다는 아니지만..
이민재
08/11/12 21:03
수정 아이콘
저 내일수능보는데 시간많이부족하면 어쩌죠; 모의고사풀때도 시간에딱맞춰푸는데...
08/11/12 21:10
수정 아이콘
흐... 수능날을 기억하고 있으시다니..
전 수능보기 바로 전날 심한 몸살감기에 걸려서 끙끙 앓다가,
아침에 감기약을 먹고 시험장에 들어갔습니다. 시험지의 글자들이 붕~ 떠 보였던건 기억이 나는데,
어떻게 시험을 마쳤는지, 시험장을 어떻게 빠져나왔고, 집에 어떻게 도착했는지 전혀 기억에 없습니다.
아마도 약기운에 취해서 필름이 끊긴 거겠지요. -0-;;

신기한건... 모의고사때보다 성적이 오히려 올랐고, 제가 2지망으로 원하던 대학에 장학생으로 합격했습니다 ^^; (네, 자랑입니다 -_-;;)
08/11/12 21:14
수정 아이콘
저도 2003년 11월 5일에 수능을 봤는데요.. 하루 전날 서지훈 선수가 성학승 선수에게 듀얼에서 패배하며 예선으로 떨어지는걸 보고 열받아서 그냥 자버렸죠..-_-;;

언어영역 시간에 마킹 잘못했는데 "시간이 지나서 안됩니다" 한 번 당하고..-_- 힘겹게 푼 수리 영역 시간 끝나고 나니 친구들이 "이번 수리 쉽지 않았냐" 따위의 말을 하고.. 수리 2는 나중에 채점하고 보니 막판에 고치고 마킹한 문제들만 골라서 틀렸고, 외국어 칠 때쯤 허리 아파서 ...-_-;;;
그래도 수능 준비할 때가 참 즐거웠습니다.
ComeAgain
08/11/12 21:15
수정 아이콘
다른 얘기지만, 이번에 임용고시를 봤는데,
1교시때 시험지를 받고, 뒤집어 놓으라 하죠, 그래서 눈으로 볼까 했는데,
이게 왠걸. 뒷장이 그냥 여백이더군요. 그냥 백지로. 겹쳐서 보이는 것도 방지하려고 빈 종이가 서너장 있더군요.
럴수. 한 순간이었습니다. ;
08/11/12 21:26
수정 아이콘
다시 고3으로 돌아간다면 정말 열심히 할텐데요. ^^;

이제는 수능 치는 학생들이 부러워집니다.

후회없는 결과 나오길 바랍니다 수험생 여러분 !
brainstorm
08/11/12 21:55
수정 아이콘
제가 수능 볼 당시에는 임요환vs홍진호 3연벙..
그리고 그 다음해에는 [임]vs오영종!
대박이벤트를 다 놓친..
GoGoSing
08/11/12 21:58
수정 아이콘
저근데 답안지 교체 안하고 수정테이프로 그면 안되나요?ㅠㅠ

내일이 시험인데 왜 난 이러고 있지 ㅠㅠ
Judaicus
08/11/12 22:25
수정 아이콘
GoGoSing님// 얼마전부터 수정테이프로 그어도 됩니다. 혹 성능이 떨어질수 있으니 서너번 그으세요

수험생분들은 빨리 주무셨으면..^^
전 8시에 누웠는데 새벽 5시가 넘어서 잠들었다가 문닫고 학교에 도착해서 완전히 말린 기억이있네요.
가뜩이나 늦었는데 차까지 막히고 오토바이는 안보이고 2km를 뛰고 겨우 학교가 보이는데 저 멀리서 문이 닫히면서 순간 정신이 멍~해지고 점심시간 친구들이랑 떠들면서 긴장풀때까지 심장이 뛰더군요.
나중에 알았는데 1교시 직전까지는 들여보내주나 봅니다.^^
happyend
08/11/12 22:33
수정 아이콘
밤의 정적이....무섭네요.
(방금 운동하러 나갔더니...거리가 텅비었습니다.그시간쯤이면 늘 고등학생들이 오갔는데...)
수험생 여러분 모두 최선을 다했노라 말할 수 있게 되길 바랍니다.
플레이아데스
08/11/12 22:50
수정 아이콘
작년에 쳤는데 어휴 그때의 기분은 별로 기억하고 싶지가 않네요. 같은 교실에 수많은 학생들이 친구들이 있지만 결국 이 문제들, 전부다 누구의 도움 없이 나혼자 해결해야 한다는 뜬금없는 고립감. 그것때문에 몸서리쳤던 기억만ㅠㅠ 결과와 상관없이 수능시험이란건 무서웠어요 정말로ㅠㅠ
밀가리
08/11/12 22:59
수정 아이콘
후. 저는 수능을 보지 않았지만 그때의 긴장감이 막 느껴집니다.
08/11/13 00:05
수정 아이콘
05년 제가 고3때 수능은 당시 아펙때문에 미뤄져서 무려 23일에 시험을 봤죠..내일이 수능이니 10일이나 시간적여유가 있었네요..
본문에 딴지는 아니지만 수능을 보는 수험생은 대략 50~60만명일겁니다..내년부터 문과 수학이 미적분을 보기때문에
06,07,그리고 이번 수능 수험생은 70만명을 육박할겁니다..다음해는 좀 줄려나 모르겠네요..
구백만은 전국 초중고 모든 학생을 합친 숫자 정도?구백만이 교실이데아에 나오는 가사라 글 읽으면서 응?했네요..;;
wish burn
08/11/13 00:54
수정 아이콘
처음 봤던 00학년도 수능..
언어영역 65문제 100분이었던 시절이었는디
남은 문제와 시간을 따져보니 30문제-30분..-_-
열심히 풀고 한번더 시간을 체크해보니 남은건 지문 1개 10문제 10분..
(지문이 굉장히 길었습니다. 모의고사나 문제집에선 접해보지 못했던 길이..-_-;;)
[내가 어려우면 남들도 어려울테고,수능은 상대평가야]란 생각은 했지만
이런 상황을 맞닥뜨리니 정말 암담하더군요.

웃긴건,4개영역중 언어영역을 가장 잘 본덕에 2번째로 원하던 대학에 진학할 수 있었다는 것..
언어영역 덕분에 변환표준점수가 높게 나와서 약-_-대에 갔더랬습니다.
그래서일까요? 대학4년동안 심해탐사 제대로 해줬죠.

재수도 한번 해봤는데,이건 정말 기억이 안나는군요. 이렇게 기억이 안날 수 있나 신기할 지경입니다.
Anarchie
08/11/13 01:14
수정 아이콘
꼬비님// 그저 개그포인트였을 뿐인데.....
구원왕조용훈
08/11/13 02:39
수정 아이콘
저도 작년에 수능봤지만 뭐 ..

버스정류장 끝과 끝인 장소여서 ..

아침에 엄청 일찍일어나고

아무 생각없이 시험보고 끝났죠..
honnysun
08/11/13 02:47
수정 아이콘
인구수가 거의 최고였던 98학번입니다. 98학번과 99학번 사람이 많다고 재수는 없다고 맘가짐을 단단히 하고 시험을 봤더랬죠.

최고의 실수는 시계를 안가져 간 것이었습니다. 당연히 교실에 시계가 있겠지 하고 갔는데 없어서 헐~~ 하면서 시험이 시작되었습니다.

1교시 언어영역.. 시계가 없었기에 그냥 막 풀었습니다. 검토를 원래 잘 안하는 성격이라 한번 쭉 보고 마킹하고 좀 있으니 10분 남았다고 하더군요. 워낙에 언어영역은 재미가 없었기에 성적은 기대도 안했다는..
2교시 수리영역1. 고등학교때 수학, 한문, 축구 빼면 시체였기에 자신감 만만으로 문제를 다 풀었는데, 마킹도 끝내고.. 해도 도대체 시험이 안끝나더군요.. 결과는 참패... 친구들이 넌 만점이지 라고 물어봤는데, 저랑 수리1에서만 30점 차이나던 친구와 동점.. 아~~ 하늘이시여 ㅜㅠ
3교시 수리영역2도 역시나 하늘나라로 갔습니다. 시간이 한 한시간은 남았던 거 같습니다. 자도자도 안끝나는 시험시간. 아무튼 이과인데 72점 만점에 과학탐구에서 40점정도 나오더군요. 48점 만점에 사회탐구가 만점 ㅡㅡ;. 도대체 난 왜 이과인거냐 -0- 물리를 가르치던 분이 우리 담임선생님이었는데 너무 싫어서 공부를 안했더니 10문제 정도에서 한개 맞더군요.. -0- 대학와서는 정말 쉬웠던 물리가 그때는 왜케 공부하기 싫었는지..
4교시 외국어영역. 영어가 싫고 수학이 좋아서 이과를 갔을 뿐인데, 문과 이과 영어 단위수도 같고 거참.. 아무리 봐도 문과 체질이었던 것도 싶고.. 다행히 고3때 별명이 마인부우인 여선생님에게 목소리가 좋다는 이유로 수업시간마다 영어 지문 읽기를 당해서 실력이 저도 모르게 팍팍 늘더군요.

결과적으로 원서 쓸때 처음 듣던 학교에 와버렸다는 ㅡㅡ;

캬~ 지금 적어놓고 그 시절을 감상해보니 정말 좋은 추억이었던 것 같긴 하군요.

아무튼 모두들 이제껏 노력하신 것 만큼의 결과를 얻으셨으면 좋겠네요.
Lunatic Heaven
08/11/13 10:59
수정 아이콘
01학번입니다.
난이도 조절 실패로 점수 인플레를 겪었던 01년도 수능.
지금 돌이켜 보면 전 수능날 정말 아주 대책없이 느긋했던 것 같습니다.


시험 전날 막내딸이 고3이라고 수능날 시험장 가는 거 보겠다며 올라오신 엄마와 언니와 이불깔고 앉아서
송혜교와 송승헌의 가을동화를 보며 찹쌀떡을 까먹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 엄마와 언니와 시험장에 갔는데 교문 앞은 이미 북새통.
시험장도 바로 제가 다니던 고등학교와 담장 하나 두고 있는 중학교라 별로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는데
그 인파들을 보니 '아, 오늘 뭔가 하기는 하는 날인가 보구나.'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엄마와 언니의 배웅을 받으며 후배들에게서 커피 한 잔을 얻어 마시고 '내 시험장은 어디인가~'를 찾아보고 있는데
시험장 안내 벽보 앞에 담임이 서 있는 걸 발견하고 흠칫 했습니다.
제가 담임쌤을 상당히 좋아하지 않았거든요-_-;
일부러 모르는 척 하고 벽보에서 시험장을 찾아 보고 있는데 등뒤에서 절 부릅니다. "OO아, 잘 봐라~" 이러시는데
그냥 고개만 까딱해 보이곤 냅다 교실로 줄행랑.
가보니 제 자리는 복도 옆줄 뒤에서 두번째 자리, 이미 온 사람들이 조용히 시험준비를 하고 있더군요.
귀에 이어폰 꼽고 당시 나온 H.O.T.의 5집을 들으며 3교시 수탐2 요약 정리집을 봤습니다.
곧 감독관님이 들어오시고 시험이 시작되었습니다.

1교시 언어영역 - 긴장감 제로. 크흥... 못 보던 생명과학 관련 지문이 있긴 했지만 '어차피 내가 어려우면 남들도 다 어려워~'라는
대체 어디서부터 나왔는지 알 수 없는 자신감으로 찍기 신공 발휘.
나중에 보니 언어영역 만점자가 넘쳐났는데 제가 있던 시험실에서 1교시 끝나고 나가더니 안 들어오는 옆줄 맨 앞자리 수험생.
'정말 저런 사람이 있구나....'

2교시 수탐1 - 다 풀고 나니 딱 4문제가 남았는데 왠지 하나하나 풀기엔 시간이 모자랄 듯 싶었습니다.
평소에도 워낙 수학은 쥐약이었던 터라 80점 만점에 42점만 맞아도 황송할 지경이었으니 말 다했죠-_-;
문득 수학쌤께서 해주신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모르는 문제는 일단 제껴라. 일단 아는 것부터 풀어라. 그리고 답안지에 체크한 답의 갯수를 체크해봐라.
수능은 답의 배분을 한 번호에 몰지 않는다. 반드시 골고루 배분하게 되어 있다.
모르는 문제가 있는데 시간이 없다 싶을 땐 제일 답이 적게 나온 번호로 찍어라."
아, 물론 저 방법은 앞에 쓴 답이 다 맞았다는 걸 전제로 하고 못 푼 문제가 5개 내외일 때 적용할 수 있습니다.
못 푼 문제는 딱 4개, 답안지 세어보니 유난히 4번이 부족합니다. 전부 4번으로 몰아서 찍었습니다.
결과요? 80점 만점에 77점 나왔습니다. 찍은 건 다 맞았고 3점짜리 5번 문제 하나 틀렸더군요.
수학쌤께 감사드렸습니다.

3교시 수탐2 - 아, 대체 뉴턴은 왜 관성의 법칙 따위를 발견한 거야!! 자동 반자동의 법칙이 제2법칙이라는 건
문과생인 나도 안다!! H2O가 산소라는 건 과학 '양' 나오는 나도 안다!! 기타등등, 기타등등을 연이어 되뇌이며
풀었습니다. 다 풀고 시간이 조금 남길래 사회 선택과목 중 세계사 문제도 풀어봤습니다.
나중에 채점해보니 반타작 나오더라고요. '...선택과목 정치하길 잘 했구나....-_-;'

4교시 외국어영역 - 단 하나뿐인 문법 문제 따윈 사뿐히 무시했습니다.
친구와 둘이 수능 전에 얘기하길 '어차피 우리에게 문법따윈 없다. 보기는 다섯개이니 제일 쉬운 구문 5개만 외우자!'고 했거든요.
유난히 듣기쪽이 잘 들린다 싶었고 지문들 중에서도 그다지 까다로운 지문이 없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뭐야......'라는 말이 절로...

5교시 제2외국어 영역 - 저희가 1회 시험이었던 탓에 문제의 난이도라는 건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전 중국어로 봤는데 시험지 나눠주고 거짓말 조금 보태 15분만에 검토까지 다 끝냈습니다.
당연히 만점 나왔고 과목 퍼센테이지가 전국 60% 나오더군요-_-;


시험이 끝나고 나가는 길에 제 앞의 한 아이가 울면서 나가고 있는 걸 봤습니다.
끝난 후 울고 싶은 기분이 들 정도로 시험이 어렵다고 느끼질 못 했던 지라 왠지 그 아이도 신기해 보였습니다.
과목별로 조금씩 다르긴 했지만 다 풀고 답안지 마킹하고 검토까지 다 하고 나서
수험표에 답 옮겨 적었는데도 시간이 약간 더 남을 정도였거든요.
지금 생각해보면 대체 뭔 자신감이었는지 알 수 없지만 말입니다-_-;
그렇게 긴장감 제로의 시험을 끝마치고 와서 교육방송을 보며 가채점을 했는데 딱 수탐1 영역 점수 오른 것만큼 점수가 올랐더군요.
다음날 학교를 가보니 온통 아이들이 웅성웅성.
대부분이 20점은 기본이고 저처럼 30점 넘게 오른 아이들도 많았는데
그 와중에 모의고사때랑 점수가 똑같이 나와버린 아이들도 있었고 심지어는 점수가 떨어진 아이들도 있었습니다.
저희는 비평준화 지역이었던 터라 내신에서 상대적으로 불리하기 때문에
학교 학생의 대부분이 수능에 올인해 특차로 가는 것이 가장 정석코스였거든요.
때문에 이런 분위기에서 점수가 떨어졌다는 건 재수로 가는 롤러코스터를 탄 거나 마찬가지였습니다.
또 재수를 한다해도 과연 원하는 대학에 갈 수 있을지도 의문이었고요(01학번이 특차 마지막 세대였습니다.).
아이들도 패닉, 선생님들도 패닉, 부모님들도 패닉.
하지만 역시나 담임쌤께 비협조적 태도를 유지하고 있던 전 한 달 뒤 나온 성적표를 받고
바로 반 뒤에 붙어 있던 진학지도표에서 제 커트라인에 걸리는 학교, 원하던 과에 특차원서를 썼고
크리스마스 이브던 12월 24일 합격통보를 받았습니다.
저희 언니는 저를 보고 "텍스트시험 로또"라고 합니다-_-;


지금쯤이면 1교시가 끝나갈 무렵인가요?
저처럼 너무 긴장감없이 시험 보다간 대략 낭패일 수 있으니 적절한 긴장감은 갖고
다들 좋은 결과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캬흥~ 그래도 다시 돌아가고 싶네요. 다른 고민없이 공부만 하면 되던 시절로.
차이코프스키
08/11/13 19:16
수정 아이콘
98학번 수능볼 때 수학이 많이 쉬웠었죠...전체적인 시험 난이도도 극악이였던 97에 비해 엄청 쉬웠습니다.

덕분에 EBS로 혼자 채점할 땐 내가 서울대 갈 줄 알았다는....

그런데 다음날 아침인사가 굿모닝 300이였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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