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사이트 초창기부터 함께하신 분들은 대부분 스타크래프트 때문일 겁니다. 저 역시 스타에 빠져 게임방에서 수많은 밤을 지새웠습니다. 게임하다가 힘들면 인터넷 서핑을 했는데, 그러다 발견한 곳이 PRG21이었습니다. 프로게이머들의 전적 찾을 곳이 여기 뿐이었습니다. 당시에는 게시판도 적었고, 글도 많이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스겔이나 다른 사이트가 아닌 이곳에 정착한 이유는, 제가 욕을 안 좋아해서입니다. 다른 스타 관련 사이트들은 기본 반말에 서로 욕을 던지며 노는 분위기였습니다. 싫었습니다. 선비기질은 없지만, 모르는 사람에게 반말이나 욕을 하는 것이 마음에 안 들었습니다. 게다가 저는 불만이 적은 스타일이라 초성체금지라던가 그 외 자잘한 룰들에 거부감이 없었습니다. 개인사이트 어쩌구 사건으로 난리 났을 때도 바로바로 수긍했습니다.
이런 저에게 온라인 세계에 대해 알려준 2명이 있습니다. 한명은 스타 채널에서 알게 된 A라는 사람이고 한명은 PGR21에서 본 B라는 사람입니다. 둘 다 이름도 나이도 얼굴도 모릅니다.
스타 채널에서 본 A는 어느 날부터 길드 채널에 상주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인사말을 건네도 답을 하는 경우가 없었습니다. 당시 나름 유명길드여서 프로게이머들 보러 오는 사람들이 종종 있습니다. A도 그런 부류 중 한명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던 중 길드의 이런저런 일들을 정하던 정팅시간에 한 여성멤버가 A라는 사람에 대해 안좋게 말합니다. 무슨 소리인가 싶어서 이야기를 들어보니, A라는 사람이 이 여성멤버를 보고자 채널에 와서 이 여성멤버에게만 말을 걸거나 쓸데없는 채팅을 했고, 여성멤버는 굉장히 싫어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예를 들면, 어느 날 저와 여성멤버 그리고 A가 채널에 있었습니다. 당연히 A는 아무 글도 쓰지 않아서 저는 그냥 잠수 중인 줄 알았고, 저도 알트탭 해서 인터넷을 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 외국인이 채널에 와서 여성멤버와 영어로 이런저런 채팅을 하다가 여성멤버에게 장난스럽게 ‘얼굴이 이쁠 것 같다’라는 식의 채팅을 했습니다. 그러자 가만히 있던 A가 영어로 ‘너의 그런 채팅 때문에 저 멤버의 기분이 상했다.’라는 뉘앙스의 채팅을 했고 외국인이 그런 의미가 아니였다며 사과를 했습니다. 여성멤버가 ‘왜 내가 하지도 않은 말을 하냐’며 화를 내자, A는 채널에서 바로 사라졌습니다. 제가 때마침 다시 알트탭을 해서 그 상황을 봤고 여성멤버는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라며 너무 싫다고 했습니다.
그날 이후로 A를 유심히 봤습니다. 당시 많은 유저들은 스타 프로필에 대부분 싸이주소를 적어놨습니다. A의 싸이를 들어가 보니, 문과인 제가 이해 못하는 수학인지 컴퓨터 언어인지로 도배 되어있었습니다. 이게뭐야? 모든 게시물에 수식인지 언어인지 적혀있고 자신의 평을 짧게 달았습니다. 뭔가 특이하고 범상치 않은 사람이라 생각 들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그 여성멤버에게 A의 지인이 쪽지를 보내서 A에 대해 알려 주었다고 합니다. A는 쉽게 말해서 아스파거 증후군이었나? 아무튼 비슷한 질환을 가지고 있고, ‘죄송하지만 A가 무언가에 한번 꽂히면 아무도 말릴 수 없다. 이해를 부탁한다.’고 정중히 사과와 양해를 부탁 했습니다. 이 여성멤버는 그 이후로 A에게 짜증보다는 어느 정도 채팅도 같이 하며 한동안 잘 지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저는 당시 20대였고 주변에 그렇게 특수한 사람들이 거의 없었습니다. 그냥 막연히 이런 부류의 사람들은 전혀 소통이 안 될 것으로 생각했는데,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것을 A를 통해 알게 되었습니다.
이 글의 첫 부분에도 썼듯이 저는 반말이나 무례하게 글을 쓰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이런 성격 때문인지 PGR21에서 벌점 한번 받아 본 적이 없습니다. 아마 15여 년 전 PGR21에서 B와의 댓글 설전으로 느낀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까지 글을 쓰고 혹시나 해서 검색해 보니 이 글이 아직 살아있네요. 글 내용 썼으면 저격글 될뻔) 댓글의 흐름은 흔한 장판파가 열린 상황이었습니다. B가 어떤 분이 쓴 글을 잘못 이해해서 저와 몇 명의 유저분이 그 부분에 대해 설명했더니 오히려 성인군자처럼 구는 당신들 때문에 화가 난다며 이상한 논리 전개를 폈습니다. 저에게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상대방의 의견에 반박 댓글을 달았던 사건이었습니다. 글이 어려운 것도 아니고, 다른 분들의 설명이 무례했던 것도 아닌데 급발진 하더니 별별 꼬투리 잡는 모양새가 정말 이해 안됐습니다. 아무튼 이 일 이후로 논란이 될 만한 글에는 댓글을 단 적이 거의 없습니다. 만일 누군가 약간의 공격적 댓글만 달아도 관심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마흔이 넘어서자 댓글이 많은 글에는 눈길조차 안가게 되더군요. 특히 정치관련 글. 제 나이또래 분들은 많이 비슷할 것 같습니다. 이제 귀찮죠. 이게 뭐 별거라고 크크.
온라인 세상에는 누구나 평등하다고 합니다. 기능에 문제가 있는 A도, 감정 조절과 논리전개가 이상했던 B도. 그 외 인종, 나이, 다양한 개인적 문제를 떠나 누구나 자신의 의견을 표하거나 인터넷 문화를 즐길 수 있습니다. 인터넷 익명문화의 밝은 면이지요. 문제는 세상이 밝지만은 않다는 것입니다. 그래도 자신의 모습에 진심이었던 A나 B와는 다르게 5만원 주고 아이디를 사서 트롤짓에 재미를 느끼는 사람들도 익명문화의 한 면입니다. 20년을 함께한 PGR21에 애정이 있고 함께한 많은 분들에게 감사의 마음이 있습니다. 20년 전에도 트롤짓 하는 사람들은 있었고, 20년 후에도 존재 하겠지요. 예전의 PGR21이 그립다는 뜻이 아닙니다. 사이트도 하나의 작은 사회인데 우리 사회가 변해가는 모습 중 하나가 아닐까 생각할 뿐입니다. 아니면 사회는 그대로인데 제가 나이를 먹으며 변한 것일 수도 있죠. 저는 오늘도 PGR21에 들려 자유게시판을 쓰윽 봅니다. 그리고 댓글이 많은 글을 눌러서 본문을 훑어 본 후 스크롤을 주욱주욱 내려서 댓글들을 대충 보고 유머게시판으로 갑니다. 아참, 질문게시판에는 댓글도 종종 답니다. 이제 PGR21의 중요한 장점 중 하나가 게임이라는 유대감을 가지고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는 40대 전후 전문가들의 집단지성이 아닐까 싶습니다.
PGR21에서 저를 아는 분들도 있고, 제가 아는 분들도 있고, 떠난 분들도 있고. 그래도 PGR21이라는 작은 사회 안에서 20년이라는 시간을 함께 했다는 것이 신기하기도 하고 왠지 모르게 뿌듯하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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