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 초반에 친구들과 부산에 여행 갔을 때,
감성주점에서 만났던 제주도 여자분이 있었습니다.
아마 두 살인가 연상이었을 겁니다.
나중에 제주도 놀러 오면 연락하라고 해서 2주 뒤에 바로 제주도로 출발했습니다.
'설마 제주도까지 불러놓고 잠수타면 어떡하지?'
라는 의심을 품고 공항에 내렸는데 마중 나와 있더군요.
뭔가 처음 만났을 때는 감성주점에서 만났기 때문에 정신이 없었는데,
제주도에서 둘이 대화를 하려니 비 오는 하늘을 보며
"제주도는 참 날씨가 좋네" 따위의 대사밖에 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도 그런 노력(?)이 귀여워 보였는지 말을 먼저 붙여주곤 했습니다.
하긴 지금 생각해보면 제가 맘에 안 들었으면 오라고 하지도 않았겠죠? 낄낄
그렇게 그녀의 도움으로 제주도 곳곳을 투어했습니다.
사실 어디갔는지는 기억이 잘 안납니다.
제주 시청 쪽 부근에서 보드 게임방 가고, 당구 쳤던 기억밖에 없네요.
문제는 여기서 발생합니다. 그녀는 술을 먹고 싶어 했습니다. 근데 사실 저는 술을 싫어합니다. 체질적으로 엄청 안받아서
두 잔 먹으면 토하거든요. 그리고 20대 초반 때니까 더 못 먹었겠네요. 그래서 안 먹는다고 했습니다. (하.. 너는 진짜)
그래서 보드 게임방 가서 루미큐브하고, 당구장 가서 포켓볼 쳤습니다..
제주도에 비가 와서 이동할 때마다 우산 한 개로 딱 붙어서 갔던 기억, 참 좋았었네요.
시간이 좀 늦게 돼서 저는 근처 모텔을 잡고 돌려보냈습니다. (STAY!!!)
갈 때 그녀 표정이 뭔가.. 뭔가 '이 새끼 뭐지?' 라는 듯한 표정이었습니다.
저는 2박 3일을 계획해서 왔기 때문에,
'오늘 너무 재밌었다. 내일은 뭐 하고 어디서 놀지?' 라는 마음에 신나서 연락했습니다.
"누나 잘 들어갔음? 1"
"내일은 몇 시에 볼까? 1"
그 사라지지 않는 숫자 [1]은 20대 초반 저에게는 이해하기 어려운 [1]이었습니다.
몇 시간이 지나도 답장이 없자, 저는 하루를 복기해보았습니다.
'혹시 오늘 루미큐브 내가 다 이겨서 삐졌나?'
'설마 아까 포켓볼 칠 때 공 밖으로 튄 거 때문에 실망했나?'
'아니면, 고기 먹을 때 내가 계산해서 자존심 상했나?'
등등의 쉐도우 복싱을 하며 창문 열고 빗소리와 함께 담배 연기를 뿜어내며 첫날을 보냈습니다.
여전히 둘째 날이 되고도 연락이 없는 그녀.
그때의 나도 알고, 지금의 나도 알고, 읽는 분들도 알지만
그때의 저는 현실을 부정하고 있었습니다. 그녀가 일부러 연락을 안 한다는 것을요.
저는 번화가 속 2층 카페 창가에 앉아 핫초코 휘핑크림을 저으며, 혹시나 그녀가 날 찾지 않을까 하며
5분대기조처럼 몇 시간을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상황은 발생하지 않더군요.
창밖을 보니 건너편 건물에 PC방이 보였습니다.
'그래, 제주도 왔으니 오버워치 한 판 해야지..' 하며 제주도 가서 오버워치를 했습니다.
그때가 오버워치 나온 지 얼마 안 됐을 때라 꽤 인기가 있었습니다.
부산에서 만난 그녀를 생각하며 D.Va를 플레이했었죠..
그렇게 두 세시간 정도 게임을 하니 이게 뭐 하는 짓인가 싶어서 나와서 돌아다녔습니다.
어느새 땅거미가 지고, 한 오후 여덟시 쯤 되었나? 문자가 왔습니다.
<미안, 오늘 아빠가 집안일 ~~해서 못 나갔어>
모두가 알고 있었지만, 혼자만 부정했던 그녀의 마음. 하지만 이미 지나간 일.
저는 전혀 쿨하지 않지만 쿨하게 그녀를 놓아주기로 했습니다.
<제주도 참 이쁘네>
아마 이 사진이 당시에 그녀에게 보냈던 문자 속 사진이었던 것 같습니다.
저 장소가 제주도인지, 아닌지도 가물가물한데 아마 맞을 겁니다! (아마도)
그 후 그녀는 그냥 미안하다는 말만 되풀이할 뿐 더 볼 수 없었습니다.
오후 9시, (이미 그녀는 절 놓은 지 오래지만) 저는 그녀를 놓아주기로 했습니다.
또 모텔에서 혼자 자는 건 너무 처량할 것 같아서 이번에는 게스트 하우스를 찾아보았습니다.
때마침 걷고 있던 주변에 게스트하우스가 있더군요. 그래서 전화 예약 후 찾아갔습니다.
도착했을 때는 9시 30분쯤 되었습니다. 이미 게스트하우스에 온 게스트들은 서로 친해져서 바베큐파티를 하고 있더군요.
저는 불청객처럼 갑작스레 찾아와서 사장님에게 안내를 받는데 바베큐 파티하던 사람들이 저를 쳐다봐서 괜히 죄송했습니다.
2층 침대가 두 개 있는 방에 배정받았는데, 1층에 홀로 (나머지는 고기냠냠중) 누워서 골똘하게 생각에 잠겼습니다.
'나는.. 뭘까?'
이대로 있다가는 마치 비운의 여주인공처럼 비 맞으면서 울 것 같아서
2.5층 테라스로 나가 담배를 피우며 이어폰을 꽂고 당시 신곡이었던 <어반자카파- 널 사랑하지 않아> 를 들으며
'널 사랑하지 않~~아' 흥얼거리는데 1층에서는 시끌벅적한 게스트들의 화기애애한 소리가 대조되어
볼륨을 높이고 고막이 얼얼할 때 까지 노래를 듣다 들어가서 잤습니다.
그렇게.. 2박 3일간의 알찬 제주도 첫 여행기..를 마치고
당시 군대 가기 3달 정도 전이여서 열심히 놀고 있던 어느 날.
그녀에게 문자가 왔습니다.
<나 다음 주에 서울 가는데 볼래?>
이것은 무슨 뜻이었을까요.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아직도 모르겠네요.
여행, 어찌 보면 제 인생에 있어서 처음으로 혼자 떠난 제주도 여행의 끝은 이렇게 끝이 났습니다.
그 당시에는 저 자신이 너무 부끄러웠는데
지금 돌이켜보니 다시 생각해도 부끄럽네요.
제게 있어서 여행은 어디를 가느냐보다 누구랑 가느냐가 더 중요한 것 같습니다.
두서없이 쓴 글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글을 쓴다는 것 또한 나를 돌아보는 여행인 듯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