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서기 14세기는 흑사병의 시대이기도 했지만, 인문주의의 시대이기도 했습니다. 이탈리아의 지식인들은 고대로마의 위대한 인물들, 가령 키케로나 비르길리우스 등의 저서를 탐독했고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 또는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업적을 칭송했습니다. 과거에 대한 향수는 현실의 불행 때문에 증폭되는 법. 사실 인문주의자들이 "상상 속의 로마"에 집착했던 이유는 "현실의 로마"의 상황이 너무도 처참했기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인문주의자들이 현실에서 보았던 로마는 더럽고 낙후된 삼류도시였습니다. 과거 백만에서 수십만에 달했던 인구는 3만명 미만으로 줄었고 과거의 영광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고대 로마의 중심이었던 포로 로마노는 소를 키우는 들판으로 변해 캄포 바키오(Campo Vaccio)라 불렸고, 과거 귀족들이 살았던 카피톨 언덕은 염소들이 어슬렁거린다고 하여 캄포 카프레제(Campo Caprese)라고 불렸습니다. 아비뇽 유수 시대 교황들이 로마에 귀환하지 않았던 것은 프랑스 국왕의 압력 때문이 아니라 그저 로마에 돌아가기 싫어서였습니다. 그들은 치안도 불안정하고, 더럽고 낙후된 곳에 돌아가기 싫었던 것입니다. 인문주의자들은 교황이 로마에 부재하기 때문에 상황이 개선되지 않는다고 보았고, 그래서 페트라르카와 같은 인물들은 교황의 로마 귀환을 촉구했습니다.
2. 페트라르카는 14세기 이탈리아 최고의 인문주의자였습니다. 그의 명성은 교황청에도 널리 알려져있었고, 귀족들도 그를 융숭하게 대접했습니다. 토스카나 출신이었던 그는 어려서부터 라틴어 고전을 탐독했는데, 과거의 현인들과 대화하는 게 즐겁다고 말하곤 다녔습니다. 게다가 낙후된 도시 로마를 방문했을 때 남들은 더럽고 불안하다고 짜증내는 와중에도 그는 여전히 우뚝 솟아있는 고대 시대의 유적들을 보면서 과거의 숨결과 과거의 영광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폐허가 된 카라칼라 목욕탕, 대리석이 벗겨진 콜로세움, 무너지기 일보직전인 포로 로마노의 기둥들은 그저 먼 옛날의 유적이 아니라 로마의 영광을 입증하는 살아있는 증거였습니다. 그는 로마 방문 이후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업적을 칭송하는 아프리카(Africa)라는 저서를 집필했는데 말년까지 완성하지 못했고, 결국 그의 사후 20년이 지나서야 미완성본으로 출판되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이야기하려고 하는 건 페트라르카가 아니라, 그의 사상과 명성에 큰 영향을 받은 다른 사나이, "상상 속의 로마"를 "현실에서 구현"하려고 했던 사나이, 바로 콜라 디 리엔조(Cola di Rienzo)입니다.
3. 콜라 디 리엔조의 본명은 니콜라 로렌조 가브리니(Nicola Lorenzo Gabrini)였습니다. 그는 로마의 여관 겸 술집 주인장의 아들로 서민층이었으나 그 스스로는 신성로마제국 황제 하인리히 8세가 이탈리아에서 피신 중이었을 때 낳은 사생아라고 여겼습니다 (물론 과대망상이나, 서민이 이런 과대망상을 품는 것 또한 놀라운 일입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총명했다고 하며 고전문학을 탐독했고 출신성분에 비해 상당히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받았습니다. 가는 곳마다 두각을 나타낸 그는 결국 당시 로마시 당국에 의해 교황청 사절단에 임명되어 아비뇽으로 파견되었습니다. 서민 아들로 태어나 교황 사절에 임명되는 것은 더할 나위 없이 큰 영광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더욱 놀라운 것은 교황 본인으로부터 인정받았다는 것입니다. 교황 클레멘트 6세를 알현한 콜라는 화려한 웅변술로 교황에게 로마로 복귀할 것을 촉구하면서 고전문학에 대한 지식도 뽐냈었는데 이에 깊은 인상을 받은 교황은 그를 교황청 직속 관료로 임명하여 다시 로마에 파견했습니다. 물론 여기에는 모종의 정치적 의도가 있었습니다. 당시 로마는 유력 귀족가문들이 분할 통치하던, 오늘날 시각으로 보자면 마피아 세력들이 도시를 서로 나눠가진 형국이었는데, 교황은 로마에서 교황의 권위와 권력을 다시 바로 세우기 위해 콜라를 이용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에게 공식직함을 부여하고 혼란을 수습하라고 파견한 것이었습니다.
4. 교황의 신임을 얻은 콜라 디 리엔조는 위풍당당한 모습으로 로마에 귀환하여 다양한 개혁에 착수하기 시작합니다. 먼저 줄곧 로마의 골치거리였던 치안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법을 정비하고 경비를 강화했습니다. 로마 귀족 간의 다툼은 종종 유혈사태를 유발했는데, 마치 마피아 세력들이 영역싸움을 하면서 서로 총격전을 하는 모습과 흡사했습니다. 콜라는 이러한 무정부 상태를 해결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또한 로마시민들의 복지에도 신경을 썼는데 그는 공공재원의 일정 비율 이상을 고아, 미망인, 수도원, 곡물창고 등에 투입하는 것을 명했습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하게는 고대 건물들의 훼손을 금지하고, 이의 보수에도 재원을 투입했다는 사실입니다. 고대로마를 흠모하던 그의 입장에서는 이는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여기까지만 진행했다면 그는 교황청의 훌륭한 관료로 이름을 남겼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야심이 아주 큰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스스로 아주 특별한 사명을 가진 인물이라고 보았고, 교황이 바랐던 일 그 이상을 추진하려고 했습니다.
5. 콜라 디 리엔조는 프로파간다에도 재능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는 카피톨 언덕에 대형 프레스코화를 제작하여 전시했는데, 유감스럽게도 그 실물은 남아있지 않습니다. 다만 그 내용은 잘 알려져있는데 다음과 같습니다.
먼저 태풍이 몰아치는 바다 한 가운데 여인의 모습을 한 로마가 흐느끼고 있었으며, 그녀 주위에는 이미 죽은 다른 여인들이 있었습니다. 그 여인들은 각각 바빌론, 카르타고, 트로이 그리고 예루살렘이었습니다. 그리고 로마 왼쪽에는 이탈리아가 겁 먹은 표정으로 서있었고, 오른쪽에는 기독교 신앙을 상징하는 인물이 있었는데, 기독교를 상징하는 자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었습니다. "오 신이시여. 로마가 사라진다면 저는 어찌해야 합니까." 한편 로마 주위에는 사자와 늑대 그리고 곰이 위협하고 있었는데 이들은 로마를 타락시킨 도시의 귀족들을 상징했고, 또 개와 돼지들도 있었는데 이들은 그 귀족들에게 봉사하는 부역자들을 상징하고 있었습니다.
6. 이 프레스코화는 로마 귀족들의 권위를 직접적으로 위협하는 것으로, 기존 질서를 신랄하게 비판하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민중의 감정을 표현한 것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한술 더 떠서, 귀족을 넘어 그동안 이탈리아 정치를 좌지우하던 신성로마제국 황제권 그 자체를 공격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라테란 궁전에서 베스파시아누스 황제의 법전(참고로 콜로세움을 건설한 황제가 바로 베스파시아누스 황제입니다)을 발견했는데 그 내용을 프레스코화에 담아 전시했던 것입니다. 여기서 로마의 원로원이 황제에게 월계관을 수여하는 장면을 그려넣었는데, 이는 황제의 권력은 인민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상징하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이로써 콜라는 신성로마제국 황제를 공격할뿐만 아니라 교황의 권위도 침해했습니다. 그동안 신성로마황제에게 왕관을 씌워주는 것은 것은 교황의 특권이었지 로마의 인민이 아니었는데, 콜라는 황제에게 월계관을 씌워주는 것은 로마의 인민이라고 선포한 것입니다. 물론 고대 로마는 일반 서민들에에게 그러한 특권을 부여한 적이 없었지만, 콜라는 상당히 "근대적(?)"인 방식으로 이를 재해석했습니다.
7. 콜라를 지지한 것은 하급귀족, 소상공인, 변호사 등 전문직, 이제 막 탄생하기 시작한 은행가 등, 이른바 훗날 부르주아지라 불리는 중산층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들의 지지를 전폭적으로 받아 자신감을 얻은 콜라 디 리엔조는 더욱 과감해졌고 지지자를 규합해 일종의 혁명정부를 수립하고자 했습니다. 그는 로마 공화국의 민중영웅 가이우스 그라쿠스가 죽임당했던 언덕에 올라 로마의 영광을 재현하겠다고 선포했습니다. 행운이 그와 함께 했는지, 그는 손쉽게 정부를 접수하고 귀족들을 추방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오랫동안 잊혀졌던 관직 "호민관(Tribunus)"를 부활시켜 그의 관직으로 삼았습니다. 과거 호민관은 로마의 인민을 보호하는 대표자였으며, 군사를 지휘하던 권능을 지닌 관직이었으며 심지어 로마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의 법적 권능의 원천이기도 했습니다. 콜라는 이 역사를 완벽히 이해하고 있는 자였고 의식적으로 이를 재현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그의 새로운 정부를 좋은 상태 또는 좋은 정부(Buono Stato)라고 불렀는데 15-16세기에 활동했던 마키아벨리보다 백년 앞서 Stato라는 단어 (영어 State의 어원) 를 국가의 의미로 사용한 사례입니다.
8. 콜라의 정부는 13-14세기 이탈리아에 탄생한 다른 도시국가들의 선례를 따라 자치정부를 수립했으나, 콜라가 바랐던 것은 그저 단순한 다른 도시국가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시대의 대문호 페트라르카에 편지를 써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로마는 그동안의 노예상태를 벗어던졌다. 로마는 이제 자유(Libertas)의 우두머리이자 원천이다. 이탈리아 모두를 여기에 초대한다." 콜라는 로마가 세계의 우두머리(CAPUT MUNDI)라고 진지하게 여겼으며, 산타 마리아 아라첼리 성당에서 열린 성대한 미사에 이탈리아 다른 도시들의 대표를 초대했습니다. 그리고 페루지아, 피렌체, 토디 그리고 시에나 대표들을 특별히 우대했는데 이들에게 늑대 젖을 먹고 있는 로물루스와 레무스, 독수리와 월계수, 그리고 그 유명한 SPQR이 새겨진 깃발을 수여했습니다. 이와 같은 깃발은 친선의 상징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로마의 우위를 상징하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피렌체의 사절단의 경우 이를 매우 불쾌하게 생각했습니다. 피렌체는 이미 당시 이탈리아에 가장 부유한 도시 중 하나였으며 비슷한 시기 피렌체 찬가라는 저작이 탄생할 정도로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이 넘처났던 도시였습니다. 그들은 더럽고 낙후된 로마 따위에게 머리를 숙일 마음은 추호도 없었습니다.
9. 콜라의 과감함, 아니 과대망상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심해졌습니다. 8월 15일 성모승천일을 기념하는 행사 중 그는 산타 마리아 마조레 성당에서 월계관을 수여받는 의식을 개최했는데, 옛날 로마의 개선장군의 의례를 세밀하게 재현했습니다. 심지어 "당신은 필멸자인 것을 기억하시오"라는 대사까지 재현했는데, 그는 이제 그저 호민관이 아니라 존엄한 호민관(Tribunus Augustus)임을 선언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당대인들을 가장 놀라게 했던 것은 그가 이 행사 직전 라테란 궁전에 있는 욕조에서 목욕을 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곳은 옛날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세례를 받은 장소라고 알려져있었는데, 콜라는 바로 그 공간에서 목욕을 함으로써 스스로 콘스탄티누스의 후계자임을 암시했던 것입니다. 나아가 그는 로마 시민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은총으로 로마는 세계의 수도임을 선포하노라. 이탈리아의 모든 인민은 로마의 시민이며, 로마와 이탈리아는 이제부터 자유임을 선포하노라"
콜라는 이렇게 교황과 황제 모두에게 커다란 가운데 손가락을 내민 셈인데, 당대인들은 모두 그러한 행위가 내포하는 상징성을 잘 이해하고 있었기에 더욱 충격받았습니다. 그의 이러한 기행(?)들은 교황청에도 전해졌고, 아비뇽 교황청 그리고 신성로마제국은 그의 도전을 더 이상 묵과할 수 없었습니다.
10. 콜라의 기행을 더 이상 묵과할 수 없었던 로마의 전통적 귀족 콜로나 가문은 세를 규합해 반격을 가했습니다. 군대를 이끌고 로마를 침공했는데 콜라는 여기서 어렵게 가까스로 승리했습니다. 그런데 콜라는 지지자들에게 충분한 보상을 하는 것을 잊고 계속 로마의 영광을 재현하려는 집착에 빠졌습니다. 교황청은 그의 폐위를 선포했으며 그를 이단이자 범죄자로 규정했습니다. 로마의 영광은 상상 속의 이념이었고, 중요한 것은 지금 당장의 먹고 사는 일이었습니다. 콜라 디 리엔조는 상상 속의 왕국에서 역할놀이에 빠진 나머지 지금 당장 눈앞에 있는 현실의 문제를 도외시하였고, 결정적으로 교황청의 권위로 처음 로마를 통치했었기에 교황청이 그를 적으로 규정하자 그에 대한 지지도 급속히 사라져버렸습니다. 결국 민중봉기가 일어나려고 하자 콜라는 스스로 자리를 포기하고 변장하여 도시를 떠나게 되는 비참한 말로를 겪게 되는데 그는 신성로마제국 영토에서 발각되어 황제 직속 감옥에 갇히게 되었고, 황제는 다시 그를 아비뇽으로 보냈습니다. 아비뇽에 다시 갇힌 그는 처형 당할 위기에 처했었는데, 그의 오랜 친구 페트라르카의 간청으로 간신히 목숨을 구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새로 교황에 등극한 이노첸시오 4세는 콜라가 여전히 유용한 도구로 쓰일 수 있다고 보아 그를 사면했고, 로마 귀족으로부터 다시 정권을 빼앗아보라고 그를 로마에 보냈습니다. 교황은 그에게 원로원(Senator)이라는 관직을 수여해서 보냈는데, 콜라는 어렵게 얻은 이번 기회도 살리지 못하고 만용과 실정을 저지른 끝에 그가 해방시키고자 했던 로마의 시민들의 손에 죽임당하게 되었습니다.
11. 콜라의 꿈은 신기루처럼 잠깐 번쩍이고 사라져버렸는데, 그의 이름은 19세기에 다시 발견되어 독일 바그너와 이탈리아의 베르디에게 영감을 주었습니다. 바그너는 그의 업적을 기려 리엔치라는 오페라 공연을 제작했고, 베르디는 리소르지멘토 운동에 대한 공감을 표시하면서 그 상징 중 하나로 콜라 디 리엔조라는 작품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1877년 신생 이탈리아 왕국은 콜라 디 리엔조를 리소르지멘토의 선구자로 인식, 그를 기념하는 동상을 제작하여 카피톨 언덕에 세웠습니다. 작은 동상으로 많은 관광객들은 그저 지나치는데, 나중에 이탈리아에 가게 될 일이 있다면 한 번 감상해보는 것도 좋을 것입니다.
카피톨 언덕 - 콜라 디 리엔조 (187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