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렌체의 다윗상, 르네상스의 걸작입니다.
고대 로마 시절 이후 거의 천년 만에 처음으로 제작된 대형 청동상으로, 고전시대의 이상을 맘껏 뽐낸 작품이지요. 이 동상을 제작한 사람은 도나텔로입니다. 그리고 그는 피렌체 최고부자 코지모 데 메디치의 전폭적인 후원을 받았습니다. 코지모와 도나텔로는 비슷한 연배였고 서로 간의 친분이 아주 두터웠습니다. 단순히 후원자와 피후원자의 관계가 아니라 정말 친구처럼 지냈다고 합니다. 심지어 사후 도나텔로는 코지모 데 메디치와 같이 묻혔습니다.
이 둘은 르네상스 인문주의라는 이념을 공유하고 있었고,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는 대의를 공유하고 있었습니다.
그럼 메디치는 왜 다윗상 제작을 의뢰했을까요? 그리고 왜 그런 거대조형물을 공공기관이 아닌 메디치 가문의 사저 앞에 배치시킨 것일까요?
성경 속의 다윗은 보잘것 없는 목동이었으나 거인 골리앗을 돌팔매 하나로 무찌른 인물입니다. 약자에게 용기를, 강자에게 두려움을 심어주는 상징이었습니다.
당시 사회는 여전히 봉건귀족이 가장 높은 계층에 속하였고 이들은 평민과 벼락부자를 경멸하였습니다. 공화국이었던 피렌체도 마찬가지였으며, 파렌체 공화국의 지도층도 이런 귀족이 주류였습니다. 수백년을 거슬러 올라간다고 자부하던 봉건귀족들. 훗날 로렌초와 대적하게 되는 파찌 가문은 십자군 전쟁의 참전용사가 자기들 가문의 시조라고 주장했으며, 로마의 귀족 오르시니 가문은 자기 가문의 시조가 고대 로마의 율리우스 가문이라고 주장했었죠.
그런데 메디치는 피렌체 제일 가는 부자였으나 귀족이 아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메디치는 노골적으로 정치적 야심을 드러내기 이전, 민중의 환심을 사려고 부담히 노력했습니다. 대외적으로는 검소한 모습을 유지하고, 공공사업에는 아낌없이 투자하였고, 빈자를 구휼하는 데도 소홀히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다윗은 메디치 가문이 "민중의 편"이라는 점을 드러내는 상징이었습니다.
메디치는 다윗을 통해 피렌체 귀족들에게 도전장을 던진 것입니다. 골리앗을 쓰러트린 다윗처럼, 메디치 가문이 그대들을 쓰러트리노라.
실제로 코지모 데 메디치는 암살위협도 받았고, 귀족들에게 일시적으로 패하여 추방당하기도 했습니다. 훗날 위대한(il Magnifico) 로렌초라고 불리게 되는 로렌초 데 메디치는 그의 형제 줄리아노와 같이 미사를 보는 중에 암살당할 뻔했는데, 재빨리 피신한 그와 달리 그의 형제는 그 자리에서 즉사했습니다.
암살을 기획한 파찌 가문은 카이사르를 암살한 브루투스처럼, 민중이 자기들을 지지해줄 것으로 기대했는데, 결과는 정반대였습니다.
살아난 로렌초는 피비린내나는 복수를 신속하게 집행했으며, 파찌 가문은 거의 멸문당했습니다.
코지모와 로렌초는 공화국을 위해 봉사하는 제1시민이라고 항상 선전했었는데, 결과적으로는 카이사르와 마찬가지로 합법적인 권한으로 전제군주가 되었습니다. 결국 훗날 로렌초의 증증손자에 해당하는 또 다른 코지모는 공화국의 가면을 완전히 벗어던지고 토스카나 대공국의 대공자리에 올라 완전한 "전제군주"가 되어버립니다.
양모산업을 하던 업자에서 유럽의 은행가, 나아가 두 명의 프랑스 왕비를 배출한 대귀족 가문이 되어버린 메디치 가문...
코지모가 다윗상을 처음 제작했을 때 내세웠던 대의를 지킬 방법은 과연 없었는지,
흥미로운 대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