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00년 중국문명을 규정짓는 하나의 키워드가 있다면
중화문명을 중심으로 하는 '천하질서'가 바로 그 키워드가 될 것입니다.
이는 주周나라 때부터 지속되어온 중원의 독특한 화이(華夷)관념에 바탕을 둔 것이었는데, 기본적으로 중원의 華가 우월하고 오랑캐인 夷는 열등하다는 사고에 입각했습니다.
華의 지역범위는 황하강을 중심으로 하는 중원에 국한된 뚜렷한 경계가 있었던 지리적 장소였습니다.
따라서 화족(華族)은 중원에 위치한 문명을 이민족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두 가지 전술을 구사했는데 하나는 무력으로 오랑캐를 복속시키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책봉과 조공"으로 대표되는 례禮였습니다.
무력으로 오랑캐를 복속시키는 것은 비용이 많이 들고 장기적으로 손해가 되기 때문에 중원국가는 대부분 "책봉과 조공"이라는 독특한 시스템에 의존하여 주변국과의 관계를 모색했습니다.
소위 조공시스템이라 불리는 이 체제는 기본적으로 불평등하고 위계적인 시스템이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에 참여하는 각 국가에 이득을 안겨다주는 시스템이었습니다. 중원왕조는 조공국의 수를 늘림으로써 황제의 권위를 높일 수 있었고, 조공국은 책봉을 받음으로써 국내에서의 권위를 높이고 동시에 동아시아 경제의 중심지였던 중원과의 합법적인 무역을 늘릴 수 있었습니다.
또한 이는 '禮'를 통해 이민족을 교화하고, 큰 것을 섬기고 작은 것을 어여삐 여긴다는 '사대자소(事大字小)'의 이념에 기반을 둔 것이었습니다.
이 시스템의 이데올로기는 [유교]였고, 공통어는 [한자]였습니다. 그리고 지리적 중심지는 주, 한, 송, 명으로 이어지는 [중원]이었죠.
그런데 이러한 천하질서에 하나의 예외적인 존재가 있다면
바로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이지 않을까 합니다.
대청제국(大淸帝國, Dai Cin Gurun)은 굉장히 독특한 국가였습니다.
그들은 본래 만주족으로 화이질서에 따르면 분명 오랑캐(夷)에 해당하는 집단이었지만 중국의 자생적 지도자들처럼 천명(天命)을 받고 천하를 바로 잡겠다는 슬로건 하에 중원을 차지했습니다. 그런데 중원을 차지한 그들은 중원왕조에 머무르지 않고 적극적으로 영역을 넓히는 세계국가의 면모를 보여줍니다.
위 지도를 보면 세계제국 청국의 면모가 잘 드러나는데, 그들이 차지한 중원은 노란색으로 색칠된 중원의 18개 성이고 이 영역 너머로 그들은 중원 본토만큼이나 넓은 영토를 획득했습니다.
그리고 대청제국은 공식적으로 한문, 만주문자, 몽골문자, 티베트문자를 사용했고, 이러한 성격은 열하의 외팔묘나 베이징의 자금성에서도 드러납니다. 간판에 만주문, 몽골문, 한문 등이 병기되어있죠.
그래서 요즘은 대청제국을 당대 다민족제국이었던 오스만제국이나 러시아제국과 비교하는 학자들이 많습니다
아무튼 만주족이 어떻게 이러한 거대한 제국을 유지시킬 수 있었던 것인가라는 물음에 답하려면 그들의 독특한 시스템에 주목해야 합니다. 이는 다음과 같이 정리해볼 수 있습니다.
1. 對 중화세계
중원을 차지한 만주족인 기존 중원왕조와 중원왕조에 조공을 하던 국가들에 대해서는 기존의 유가(儒家)적 사대자소와 조공-책봉 시스템을 그대로 유지했습니다. 특히 조선은 예로부터 중원왕조와 이념적 문화적 친밀성이 상당했던 나라여서 만주족의 청국은 조선에 대해서 스스로를 중원왕조의 연속으로 어필하고자 했습니다. 실제로 만주의 지도자 누르하치 또한 조선을 명과 같은 종의 국가로 인식했고 반대로 몽골은 명나라와는 완전히 다른 종족으로 인식했었죠.
이에 만주족은 기존 명나라 범위 안에 있었던 영역에서는 명나라의 시스템을 그대로 유지하고, 이 시스템이 요구하는 전통과 질서에 입각해서 통치를 합니다.
2. 對 몽골세계
만주족은 중원을 재패하기 이전에 이미 강력한 무사집단인 몽골족과 동맹을 맺었습니다.
징기스칸의 옥새를 손에 넣고 몽골족의 수장인 "칸"의 칭호까지 따냈습니다. 그리고 몽골족과 통혼을 장려했습니다.
아울러 중원을 재패하고 나서 청국의 '강희제'는 몽골의 마지막 왕국이었던 준가르를 멸망시키고 몽골세계를 청국에 강제로 편입시켰습니다. 본래 '칸'의 지위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무력'에 의존하는 것이었습니다. 청국의 황제는 몽골세계의 '칸'으로서 권위를 보이기 위해 이들에 대한 지속적인 무력시위를 할 필요가 있었고 이러한 연례행사를 하는 장소는 황제의 별장이었던, 그리고 박지원이 방문했던 열하였습니다. 열하에서 정기적인 사냥시위를 함으로써 청국은 막강한 군사력을 몽골인들에게 보여줄 수 있었고 몽골인들은 그러한 '칸'에게 경의를 표했습니다.
3. 對 티베트 세계
현재 중화인민공화국의 변방에 위치한 티베트는 과거에 찬란한 문화와 국력을 뽐내던 지역이었습니다.
그러나 티베트마저 강력한 전투민족인 몽골의 위협에 시달리고 있었고 청국은 이를 기회 삼아 티베트에 원조를 제공한다는 명목으로 티베트에 거점을 마련하였습니다.
한편 만주족 황제들은 티베트의 정치적-종교적 지도자 달라이 라마의 보호자를 스스로 자처하고 달라이 라마를 청국 황제의 왕사(王師)로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티베트에는 일종의 "대사관"을 설치하여, 영토라기 보다는 번국처럼 간접지배하였습니다. 마치 교황청을 보호하면서 권위를 뽐냈던 샤를마뉴와 샤를마뉴를 통해 교황의 권위를 강화했던 관계와 유사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를 통해 만주인들은 티베트를 보다 쉽게 지배할 수 있었고 동시에 라마교를 믿는 많은 몽골인들을 포섭할 수 있었습니다.
4. 對 외부세계(러시아)
중국과 러시아의 국경을 확정지은 네르친스크 조약은 오직 만주어와 러시아어 그리고 라틴어로만 작성된 문서로 유명합니다. 한족의 한문이 전혀 사용되지 않았습니다. 만주족의 청나라는 외부세계와의 매우 중요한 외교과정에 한족을 배제하고 본래 자신들의 정체성인 만주인으로서 외교를 수행했습니다.
협상과정에는 한족관료가 전혀 참여하지 않았고 오직 만주인들만이 교섭하였습니다. 그리고 가장 놀라운 것은 그 조약의 원문입니다. 왜냐하면 황제와 번국의 관계가 아닌 대등한 국가 대 국가로서 서명한 문서이기 때문입니다.
이 문서의 첫문장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중국(dulimbai gurun)의 황제(hūwangdi)의 성지를 받들어 경계를 확정하려 파견된 대신들인 내대신 송오투(Songgotu, Сумкуту) 등과, 러시아국(Oros gurun)의 백인 황제(cagan han)의 칙명으로 경계를 확정 (이하 생략)"
만주인들은 러시아와 대등한 조약을 체결한 것입니다.
어쩌면 영국과 체결한 난징조약에서 대등한 황제 대 황제의 입장을 나타내는 문서를 쓸 수 있었던 건 이러한 배경이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천하질서의 외부인)
아무튼 만주족의 황제는 이렇게 천명을 받은 중원의 황제로서, 그리고 몽골세계를 재패한 칸으로서, 그리고 티베트 라마교의 보호자로서 역할을 동시에 수행하였습니다.
이는 중화문명이라고 불리는 [관념]의 지리적 범위를 비약적으로 확장시킨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삼중의 구조로 되어 있는 청국의 세계질서 덕분에 중국은 과거의 중원이 아니라 현재 중화인민공화국의 강역을 보유하고 있는 것입니다. 쑨원이 처음 혁명을 일으킬 때 중화민국의 강역을 중원본토로 생각했던 것을 생각하면, 상당히 재미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