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GR21.com
- 자유 주제로 사용할 수 있는 게시판입니다.
- 토론 게시판의 용도를 겸합니다.
Date 2019/05/31 10:43:11
Name 리니시아
File #1 fullsizephoto1042627.jpg (23.9 KB), Download : 61
Subject [일반] 강변호텔 (2019) _ 거의 모든 것의 홍상수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 영환
영환은 시인이다. 나름 유명한.
그 덕에 강변에 있는 호텔 주인으로부터 초대를 받고 숙박하고 있다.
누구처럼 나이를 지긋이 먹었고 사랑을 찾겠다고 아내와 이혼을 했다. 아내는 그를 무시무시한 괴물이라 표현하고.
​어느 날 잠깐 사이에 눈이 수북이 오고 그곳에 서 있는 상희와 연주에게 다가가 아름답다 말한다.
부담스러울 정도로 두 사람이 너무 아름다워 자신이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한다.
영환은 둘을 위한 시를 지어 준다. 잘은 모르겠지만 어딘가 고독하고 쓸쓸한 느낌의 시다.

영환에겐 두 아들이 있다.
정수와 병수. 사랑할 수 있을 때 마음껏 사랑하라며 아직까지 결혼하지 않은 병수에게 잔소리를 한다.
그리고 정수에게는 그렇게 이쁜 아내는 더 이상 없을 거라며 처한 테 잘하라고 이야기를 한다. 사실 정수는 이혼한지 좀 되었다.

종업원이 영환을 알아본다. 연주도 그를 알아본다. 나름 유명한 시인인가 보다.
처음에는 다들 영환이 신기하고 반갑고 그렇다. 설렘이 있다.
하지만 이내 본인들이 그려온 이미지와 다른 모습을 보여주자 그 설렘은 이내 사라져 간다.

​긴 동경의 시간과 오랫동안의 머무름은 단지 2분 만에 '더 이상 설렘이 없다'라는 고백으로 떠나가게 된다.
더 이상 설렘을 가져다줄 수 없는 그의 가치는 유지될 수가 없다.

​​


- 두 아들
정수는 이혼을 했다. 하지만 아버지 영환에게는 끝까지 숨긴다.
그에게는 자동차가 있는데 알고 보니 그 차는 연주가 몰다가 사고가 나서 수리해서 팔았던 차였다.
동생 병수를 병신이라며 놀린다. 이름이 병신과 비슷하게 지었으니 놀려댄다.
두 아들의 엄마는 남편이었던 영환을 괴물이라고 표현한다. 세상 나쁜 놈이고 그런 놈이 없다고.
근데 정수는 그걸 그대로 아버지인 영환에게 전달한다. 지독할 정도로 대놓고.
정작 이혼했다는 자신의 말을 숨긴 채 타인의 말과 이미지를 전한다.
자신의 이야기는 감추고 그냥 이미지를 퍼다 나를 뿐이다.


병수는 감독이다. 영화감독.
그는 어머니를 너무나 좋아한다. 그가 어렸을 때 아버지가 집을 나간 터라 사실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많지 않다.
여자를 무서워한다. 남자와 다른 그 존재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무엇을 해야 할지 미지의 세계이기에 그런 것 같다. 아니 여자를 무서워하는 게 아니라 결혼을 무서워한다.
여자를 만나긴 하지만 그냥 만나는 거다.

아버지의 존재에 심히 불안해한다. 어디로 사라지진 않았을까? 자살을 염두에 두시는 건 아닐까?
나름 감독으로 유명한 그에게 사인을 해달라는 사람이 있다. 그 요청에 매우 부정적으로 반응하지만 사인은 해준다.




- 두 여자
상희는 호텔에서 혼자 머물고 있다. 팔에 상처가 낫지만 스스로 자가 치료를 한다.
누군가처럼 감독이랑 사귄 모양이다. 하지만 헤어져서 쉬고자 호텔로 들어왔다. 헤어졌는데도 불구하고 감독이 걱정되는 모양이다.
연주는 그런 상희를 위로하고자 커피를 사들고 왔다. 같이 쉬고, 눈 쌓인 풍경을 즐기며 시간을 보낸다.
시인에게 사인을 받으려 하지만 상희의 만류에 관둔다.

두 여자는 시인으로부터 고독하고 쓸쓸한 시 한 편을 듣게 된다. 그리고 호텔로 돌아와 운다.




- 이미지
그간 23편의 장편을 찍은 홍상수의 이미지는 다양하다.
젊은 여성에게 껄떡대는 감독, 교수.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추파를 던지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는 남자.
철학적 궤변을 늘어놓으며 그럴듯한 이야기로 상대에게 자신의 이미지를 구축하는 사람.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의 이미지는 점점 더 파편화되고 변주되고 반복되며 하나의 정물화를 보여주지 않는다.

무언가의 개념에 정면을 오랫동안 비춰주다가 갑작스레 아랫면을 보여준다. 그 아랫면은 갑작스레 측면이 되기도 하고, 아랫면을 쌓고 있던 껍데기가 잠깐 비치기도 한다.
파편들로 이루어진 이미지를 그는 조립하지 않고 비춰주기만 할 뿐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각 인물들의 언행으로 파편들을 나열한 듯하다.

시를 만드는 늙은 영환. 시를 만들듯 영화를 만드는 홍.
뻔하지만 요즘 대세 감독 병수. 덕분에 여러 여자 그냥 그냥 만나는 홍.
남의 말이나 퍼나르는 이혼남 정수. 정작 카메라 뒤편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직접 하진 않는 홍.
감독과 헤어졌지만 여전히 그를 걱정하는 상희. 헤어진 여인이 자기를 걱정해 주길 바라는 잡념.
그런 상희를 위로하고 시인을 너무나 좋아하고 반가워하는 연주. 착하지만 나를 또 좋아해야 하는 상상.

각 인물들은 감독의 여러 이미지의 한 꼭짓점 들을 매달고 있는 것 같다.
거의 모든 홍상수의 파편이 아닐까.




- 방향
혈기 왕성하던 김의성의 외침은 김상경의 찌질함으로 이어졌다. 이후 능글맞은 김승우는 고현정 몸을 슬쩍 넘어갔고, 유준상과 함께 껄껄댔다.
북촌에 터를 잡은 그는 우리 정유미를 통해 좀 더 생기가 생겨나는 듯했다.

지맞그틀 이후 <당신 자신과 당신의 것>, <밤의 해변에서 혼자>, <그 후>, <풀잎들>까지.
사랑하는 사람과의 만남 이후에 죽음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철저한 고독과 쓸쓸함의 세계를 비춰준다.

더 이상의 파편과 반복은 일어나지 않고, 인물들의 이미지로 대체되어 소복이 내리는 눈과 감독 뒤를 따라가는 고양이 같은 순간의 우연을 집중한다.




- 엔딩
작가는 자신의 이야기를 표현한다.
그 안에 있는 모순적이고 비 도덕적인 것들을 꺼내놓고 조소의 대상으로 삼기도 하고, 가끔은 궤변 같은 철학으로 독특한 매력을 보여주기도 한다.
반복과 파편을 통해 현대음악 같은 연출적 독특함을 보여주기도 하고, 꿈과 영화를 연결해 새로운 시공간으로 그의 생각을 보여주기도 했다.
그리고 이제는 힘을 많이 뺀 것 같다.

​설렘 없는 이미지는 더 이상의 가치가 없다는 듯 죽어버린다.
그런 자신을 위로해 달라는 듯 두 아들은 아버지를 부여잡고 오열하고, 여신 같다던 두 사람은 눈물로 그를 보낸다.
이토록 직접적이고 드러내는 슬픔과 연민이 불쌍하기까지 하다.
너무나 자기 연민에 빠진 엔딩에 찝찝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마냥 욕할 수 없는 건 담담했던 첫 내레이션부터, 그저 '아름답다'라고 이야기하는 그의 설렘도 함께 죽어서가 아닐까 생각이 든다.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리콜한방
19/05/31 12:31
수정 아이콘
아무리 풀잎들과 클.카가 별로였지만 저는 후기 홍상수, 즉 현재의 홍상수 영화가 그의 필모 시기 중 가장 좋습니다. '당신 자신', '그 후'에 반했기 때문이죠.그리고 강변호텔 역시 만족했어요. 추잡하고 변명하고 인정하고 자해하며 죽음으로 향하는 그의 모습이 그 어떤 관찰 예능이나 개인방송 보다 적나라 속내를 드러내니까요. 기주봉씨의 상황도 참 잘 반영됐고요.
리니시아
19/05/31 16:10
수정 아이콘
지금쯤 되니 찌질남으로 대변되던 그 시기의 홍상수는 참 재기발랄하다 싶습니다.
지도 리콜한방님 말씀처럼 '당신 자신', '그 후' 작품부터 바뀌어가는 무드가 꽤 마음에 듭니다.
다만 죽음 이후의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 곳이 있을까 싶은 궁금함이 있습니다.
19/06/01 01:43
수정 아이콘
쓰신 글 보고 갑자기 보고싶어져서 넷플릭스로 잘 알지도 못하면서를 보고 왔습니다. 최근작은 풀잎들 밖에는 보지 못하였지만, 무언가 힘이 좀 빠진듯하다는 느낌을 받게 되네요.

그것과는 별개로 잘알지도못하면서를 제목이 마음에들어 오래전부터 보고싶었는데 기대한만큼 재미있는 영화네요.. 크크 좋은 글 감사합니다. 강변호텔 감상하고 한번더 찾아오겠습니다
리니시아
19/06/01 01:48
수정 아이콘
댓글에도 있지만 '그 후' 를 시점으로 죽음에 대한 정서가 뭔가 강해진 느낌인데 재미있게 보실 것 같습니다.
19/06/01 09:06
수정 아이콘
펜인데 개봉했는지도 몰랐네요. 다 막 내렸네요. 어디서 봐야할지.
리니시아
19/06/02 22:46
수정 아이콘
목록 삭게로! 맨위로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81349 [일반] 강변호텔 (2019) _ 거의 모든 것의 홍상수 [6] 리니시아7759 19/05/31 7759 5
81279 [일반] 내 맘대로 쓰는 소설 추천과 비추천 목록 [15] chldkrdmlwodkd6412 19/05/26 6412 0
81248 [일반] 페미니즘과 레즈비언 [190] 저글링앞다리15675 19/05/24 15675 65
81230 [일반] ??? : 난 쓰레기야! 하지만! [70] 2213776 19/05/22 13776 90
81022 [일반] 아시아나 화물기 991편 기장의 잃어버린 명예 [11] 잰지흔12499 19/05/03 12499 4
81021 [일반] 고양이를 죽였습니다 [34] 뒹구르르11884 19/05/03 11884 18
80799 [일반] 한동안 만들어 놓은 비즈들 [17] 及時雨12471 19/04/15 12471 5
80732 [일반] 아즈텍 창조신들의 조별과제 수준 [28] Farce14108 19/04/10 14108 29
80729 [일반] 한국형(Korea) 고양이의 개발 - 그루밍폭력으로부터의 해방 [59] 산들바람뀨9515 19/04/10 9515 24
80695 [일반] 한국(KOREA)형 차가운 도시남자의 연애모델 [68] Dukefleed13305 19/04/07 13305 32
80501 [일반] (안 진지, 이미지) 과몰입과 가능성의 역사. [22] Farce10663 19/03/21 10663 22
80417 [일반]  ADD, 애더럴, 박봄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이야? [28] 모모스201316608 19/03/13 16608 9
80365 [일반] 캡틴 마블 후기(스포) 이 영화는 패미니즘 영화가 아닙니다. [77] 미스포츈9403 19/03/10 9403 2
80364 [일반] 한국에서 지하철 요금(교통비) 현실화가 어려운 이유 [88] 군디츠마라16065 19/03/10 16065 35
80362 [일반] 캡틴 마블 후기(약스포) - 무난하거나 무디거나 [73] aDayInTheLife10398 19/03/10 10398 4
80340 [일반] 호평 가득한 캡틴 마블 관람 후기 (스포 엄청 많음) [60] 심영13084 19/03/06 13084 6
80331 [일반] 고양이와 마우스 그리고 AS. [12] 김티모7670 19/03/06 7670 2
80329 [일반] 버닝썬 사건에서 언급된 물뽕, 그리고 마약 이야기 [9] 모모스201312818 19/03/06 12818 22
80326 [일반] To watch or not to watch? 캡틴마블 보고왔습니다 :)(스포일러 자제) [24] 복슬이남친동동이9379 19/03/06 9379 12
80118 [일반] (수필) 사람 조각 [8] Farce6429 19/02/14 6429 7
80035 [일반] 마초적이고 세속적인 아재의 결혼론 [100] 상한우유12558 19/02/11 12558 20
79798 [일반] 나도 따라 동네 한 바퀴 - 노량진 사육신공원 [14] 及時雨7462 19/01/19 7462 19
79717 [일반] 동물보호단체<케어> 박소연 대표 지시로 개, 고양이 230마리 죽였다” [110] 어강됴리18850 19/01/11 18850 11
목록 이전 다음
댓글

+ : 최근 1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