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일전쟁으로 다시 섭정을 할 수 있게 된 대원군, 하지만 일본에 의해 앉혀진 자리였고 실권은 없었습니다. 그는 청군과 동학군에게 밀서를 보내 일본군을 잡고 친일내각을 없애려 했죠. 그 끝은, 민비와 그 친척 민씨들도 잡은 후 왕도 바꾸는 거였습니다.
이준용. 이재면의 아들로 대원군의 적장손입니다. 대원군은 서자 이재선과 적자 이재면에 이어 손자인 그를 고종을 대신할 왕으로 선택합니다.
평양성 전투 후 대원군의 밀서가 발견되었고, 항일과 반역으로 일본은 대원군을 다시 쫓아냅니다. 이준용은 박영효 등을 암살하려 했다는 혐의로 유배되었구요. 2개월만에 풀려나긴 합니다만.
흥선대원군... 조선 최고의 카리스마로 그가 초기에 했던 개혁 정책들은 분명 대단했습니다. 그 명성은 쭉 이어져서 임오군란 때의 구식 군인은 물론 갑신정변의 개화파도 그를 청에서 구해오자는 걸 요구했죠. 청은 그의 영향력을 우려해 납치했고, 일본도 그를 끌어들였습니다. 하지만 이건 다시 말하면 권력을 위해서 어느 쪽이라도 손을 잡으려 했다는 거겠죠.
그가 물러난 후의 모습은 실망스러운 것 뿐입니다. 그가 왕이 됐거나 실권을 계속 잡았다면 분명 어떤 형태든 조선이 개혁은 했을 겁니다. 근대적으로 가긴 힘들었을 것이고, 결과야 달라지진 않았겠지만요. 하지만 그가 자신의 아들인 고종을 상대로 계속 구테타를 시도하면서 고종의 권위를 너무 흔들었습니다. 원래 그런 성향일진 몰라도 고종이 전제군주제를 밀어붙인 건 그 영향도 클 겁니다.
청일전쟁이 끝나고, 일본은 다시 한번 더 그를 끌어들입니다. 대원군은 이것도 거부하지 못 합니다. 그 자리는 조선 역사의 큰 치욕 중 하나였고, 그에게는 며느리인 사람을 죽이는 자리였습니다. 그렇게 하고도 권력을 얻지는 못 했구요. 개인적인 원한이야 해결했을 수 있겠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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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보세 가보세 을미적 을미적(거리다가) 병신되면 못 가보리"
+) 당시 유행했던 노래입니다. 갑오년(94년)과 가보자는 말의 발음이 비슷한 걸 이용하고 을미년(95년)과 미적거리다를 합쳤으며, 병신년(96년)과... 음 여기까지요. 사람 생각은 예나 지금이나 비슷하죠 뭐
외세가 들어오자마자 화약을 맺고 해산했습니다. 교정청과 집강소가 세워지면서 점차 좋은 세상이 오지 않을까 했죠. 동학의 세가 약한 곳은 집강소가 힘을 못 썼지만, 반대로 동학이 잘 나간 곳은 집강소의 힘도 컸죠. 이렇게 조금씩 개혁이 될까 하는 꿈을 꾸었을 겁니다.
하지만 일본군은 물러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전쟁을 시작했죠. 동학 내에서는 물론 조선백성들 사이에서 반일감정이 들끓고 있었습니다. 동학군들에게 뿌려진 대원군의 밀서는 이걸 부채질했고, 강경파였던 김개남 등의 봉기가 시작됩니다. 이런 모습을 본 전봉준은 마침내 다시 봉기할 것을 결심합니다.
이른바 3차 봉기, 혹은 9월 봉기입니다. 1차를 고부 봉기고, 조정에서 내려온 자들이 해결은커녕 문제만 더 일으키자 다시 일어선 게 2차 봉기, 혹은 3월 봉기입니다. 이게 전주화약으로 끝나고, 다시 일어난 게 이 때죠.
전봉준은 양력 10월 14일(음력 9월 16일 - 음력 9월이라 9월봉기입니다), 전주성 등에서 관군의 무기를 탈취해 진격을 개시합니다. 일부는 일본군이 상륙한다는 소문으로 나주로 보냈구요. 2대 교주로 충청도의 북접을 이끌던 최시형도 척왜, 보국안민의 명분을 인정하고 봉기에 가담했죠. 불길은 경상도, 강원도, 황해도 등 조선 전체로 퍼집니다.
이렇게 기존의 동학군부터 반외세 반봉건의 명분을 받아들여 참가한 농민들까지 한마음 한뜻으로 싸웠고, 일본군이 탄압했다...는 게 동학농민운동(혹은 혁명, 전쟁)의 이야기입니다만, 그 내부도 복잡하긴 했습니다.
동학은 남접과 북접으로 갈라져 있었습니다. 북접은 2대 교주 최시형을 중심으로 충청도에 있었고, 종교 본원의 모습에 충실하려 했습니다. 그들의 집회는 종교를 인정받고 최제우를 신원하는 것, 서학인 천주교가 인정받은 상황에서 동학도 인정받을 수 있으리라 여겼죠. 봉기를 반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정치적인 모습을 싫어했을 뿐 아니라 역적이 되는 것 자체를 거부한 거죠. 3차 봉기에서 결국 척왜의 명분에 따라 일어났지만, 남접과 합류하는 데 한 달이 더 걸립니다. 청일전쟁에서 일본군의 우세가 확실해지는 상황에서 말이죠. 심지어 처음에는 남접과 싸우려고 했고, 결국 손병희를 보내면서 공식적으로는 동학군과 관련이 없게 됩니다.
전라도의 전봉준이 이끄는 남접은 정치적인 성향을 강하게 띠었습니다. 북접에게 동학이 종교라면 그들에겐 이념이었죠. 하지만 전봉준은 나라를 뒤엎는다는 생각까진 하지 못한 듯 합니다. 2차 봉기가 대원군의 뜻대로 한 거라면 전주화약도 안 맺었겠죠.
김개남은 전봉준과 함께 봉기했지만, 생각은 달랐습니다. 강경파로 어떤 형태로든 나라를 뒤엎으려 했습니다. 전주화약 때도 전봉준에 맞섰고, 결국 은둔하는 형태로 물러나게 됩니다. 3차 봉기 때도 먼저 일어났지만 전봉준과 함께 가지 않고 남원에서 한 달을 더 머물러 있다가 청주 쪽으로 따로 진격합니다. 신분제 타파 등 개혁적인 면에서 전봉준보다 더 했다고 합니다만, 정작 나라를 새로 세우고 자신이 왕(개남국왕)이 된다는 생각까지 했다고 합니다.
주역들이 이렇게 갈라져 있었던 거죠. 물론 힘을 다 잘 합쳤어도 맞설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겠지만요.
경상도나 황해도에서도 크게 일어났지만 이들은 자기 지역에서 싸우는 정도였습니다. 모두를 묶을 대장도 없었고, 이미 어느 정도 성공한 전라도와 달리 동학에 반발하는 세력이 더 컸으니까요. 다들 농민인지라 자기 지역을 떠나기도 힘들었을 거구요.
동학농민운동의 성격에 대해서는 말들이 참 많습니다. 기본적으로야 반외세 반봉건이라 하지만, 특히 반봉건과 근대적인 부분에 대해서 말이 많죠. 가장 큰 근거인 폐정개혁안 12조는 진짜 있긴 하냐는 의심을 받고 있고, 평등 같은 진보적인 부분이 있었지만 정말 체제 자체를 바꾸려 했는가는 장담할 수 없을 겁니다.
완전히 결론이 날수도 없다고 봐요. 각 대장들끼리도 생각들이 달랐을테니까요. 전국에 퍼진 봉기들이 다 같은 마음으로 했을리도 없구요. 누군가에겐 그저 못살겠다 관리들 잡아죽이자는 민란의 연속선상일 겁니다. 누군가에겐 개혁은 하되 온건한 것이고, 누군가는 아예 나라를 뒤엎길 바랐겠죠. 그 새로운 나라도 어느 정도의 근대성을 띠었을지 다들 달랐을 거구요.
근대성이 크진 않았을 겁니다. 결국 농민들이 한 거니까요. 오히려 일제의 강요 아래 이뤄진 갑오개혁이 확실히 근대적이었죠.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하나의 진보고, 기존의 지배층에겐 크나큰 도전이었습니다. 차별받는 지역민들의 울분이 터진 정도인 홍경래의 난, 뭔가를 크게 바꾼다는 생각조차도 못했던 임술농민봉기(=진주민란)을 생각하면 말이죠. 첫술에 배부를 순 없잖아요.
"동학당 같은 것은 우리 일본인 한 명이 200~300명을 당해낼 수 있다. 이로써 저놈들이 약한 적이라는 증거가 충분하다" - 일본군 병사 시마다 다메사부로
"일본 병사 한 명에 동학당 백 명이라는 예산으로 싸운다" - 동학군 백인장 박명근
동학군의 규모는 참 왔다갔다 합니다. 전라도에서만 10만이라고 하다가 전봉준이 이끌고 올라간 게 4천, 우금치 전투에서 전봉준 휘하가 1만이었다고 하죠. 조선 전역에서 13~16만이라 하다가 20만을 훌쩍 넘기기도 하구요. 일단 과장이 당연히 끼어있을 것이고, 봉기 때 참가하기만 한, 민간인이라 할 사람들이 대다수일 겁니다. 관아의 무기를 털어도 무장할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였고, 죽창이 너도나도 한방이라 해도 총 앞에서 들이댈 순 없을테니까요. 제대로 훈련 안 되고 제대로 된 조직도 없는 농민군이 대군을 진격시키는 건 불가능할 겁니다. 뭐 그렇게 해서 주력이라 할 건 남접 1만, 북접 1만 정도가 아닐까 싶습니다. 이것도 대군이긴 하죠.
동학군 [토벌]을 위해 일본이 동원한 건 2천여명, 실제 전투에 투입된 건 8백명 정도라 합니다. 그것도 예비군들로 이루어졌고 총도 구식인 후비보병이었죠. 하지만 이걸로 충분했습니다. 양측의 전투력은 비교할 바가 아니었으니까요. 약하다 해도 근대식으로 훈련된, 일본군보다 많은 조선군도 동원되었으니까요. 2차 봉기에서도 전주성 점령까지는 성공했지만, 이후 관군도 정신 차리고 싸우면서 대치가 계속되다 화약을 맺었죠. 그간 관군의 패배는 군기가 개판이었던 것, 농민군을 깔봤던 점 등이 컸습니다. 일본군이 조선군을 지휘하면서 그들도 충분한 전투력을 가질 수 있었죠.
개인화기의 발달과 기관총의 등장은 역사를 바꿔버립니다. 그 전에는 잘 훈련되었다면 활로도 총을 이길 수 있었고, 수가 많다면 냉병기로도 이길 가능성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안 됐죠. 중국에서 충분히 검증됐듯이요.
그리고, 현지인들의 협조가 없었다면 결과가 조금이라도 바뀔수 있었겠지만, 그것도 아니었습니다.
전국 곳곳에서 [의병]이 일어납니다. 양반들이 동학군에 맞서서 일어난 것이죠. 이들을 민보군이라 불렀습니다. 이들은 관군과 일본군에 협조했고, 동학군과 직접 맞서 싸웠습니다. 일본군이 투입되지 않은 곳에서도 각기 천명이 넘는 병력끼리 싸우는 일도 일어났습니다.
이들은 그냥 일본군에 끌려다닌 게 아닙니다. 자신들만의 이유가 있었죠. 관군이야 당연히 반란군, 혹은 비적(도둑)들을 토벌하는 거였습니다. 이번엔 정말 서울까지 오려 했으니까요. 이들이 서울을 점령해 나라를 갈아엎든, 대원군의 뜻대로 왕을 갈아치우든 관군에겐 막아야 되는 상황이었죠. 거기에 동학군의 무기는 다 각 관아를 공격, 무기고를 턴 거였습니다. 그러던 중 수령들도 죽어갔구요. 이들이 얼마나 탐관오리였든간에 관군이 나설수밖에 없었죠.
양반들도 첫째는 이런 왕실과 나라를 지키는 거였습니다. 이들에겐 일본보다 더 위험한게 동학이었습니다. 신분제 타파 등 기존의 질서를 엎겠다는 거였으니까요. 크게 봐도 그렇고, 작게 보면 자기 지역에서 아랫것들이 지역의 질서를 바꾸겠다는 게 되죠. 뭣이 중헌디? 그들에겐 그게 중요했습니다. 동학농민운동을 계급전쟁으로 보게 되는 부분입니다.
뭐 당시 계급사회에서 그게 정의라고 생각을 했겠죠. 관아를 털고 수령들을 계속 잡아죽이는 상황이기도 했구요. 이름만 동학을 내세울 뿐 정말 도둑질을 하는 이들 역시 있었을 겁니다. 계급 문제를 떠나서 정말 도둑떼를 잡아 질서를 회복하려 일어난 이들도 적지 않을 겁니다. 무조건 그들이 틀렸다고 할 순 없긴 합니다.
나중에 김개남을 밀고한 자가 의병장이 되는 임병찬입니다. 안중근의 아버지 안태훈도 동학군을 토벌했죠. 동학군으로 싸웠음에도 김구를 숨겨주었던 특이한 인연이 있구요.
자... 그리고 일본군에게도 정말 확실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향후 조선을 [보호]해줘야 될 게 일본인데, 반대하는 세력이 있으면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그것도 조선의 지배층에서 토벌을 원하는 세력인데요. 일본군은 동학군을 완전히 소멸하기 위한 작전을 짭니다. 중부지방에서 남부지방으로, 병력을 셋으로 나눠서 내려갔죠.
전봉준이 이끄는 병력은 공주를 노리고 있었습니다. 공주에서 수원으로, 한양으로 가려 했죠. 하지만 진격이 늦어지면서 조일 연합군이 먼저 와 버립니다. 그래도 공격을 계속했지만 대패했죠. 청주로 갔던 김개남도 마찬가지였고, 농민군은 패배를 반복합니다. 관군이 패한 경우도 있지만 이건 인해전술에 밀려 후퇴한 것 이상이 아니었죠.
그렇게 운명의 12월 5일(음력 11월 9일)이 옵니다. 목표는 조일 연합군이 있는 우금치였습니다. 주력이 공격에 나서는 동안 공주 감영을 공격할 병력을 우회하기도 했구요.
"수만이나 되는 비도(匪徒)가 4,50리에 걸쳐 길을 쟁탈하고 산봉우리를 점거하여 성동추서(聲東趨西), 섬좌홀우(閃左忽右)하면서 깃발을 흔들고 북을 치고 죽음을 무릅쓰고 앞을 다투어 올라오니 저들은 무슨 의리이고 무슨 담략인가. 그 정황을 말하고 생각하면 뼈가 덜리고 가슴이 서늘하다. 만약 병력이 전후좌우에서 방비하지 못해 병사들의 사기가 떨어졌다면 맹렬히 밀어붙이는 기세에 대가를 톡톡히 치러야 했을 것이고, 결국 그들을 막아낼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 이규태
일본군의 병력은 이백명, 조선군은 이천명 정도였습니다. 공격하는 동학군은 만명이었죠. 연합군은 요충지를 차지하고 있었고, 동학군은 수적 우세를 이용해 사방을 장악한 후 공격합니다. 추위에 시달리고 있었지만 그 기세는 정말 맹렬했다고 합니다. 조선을 침략하는 일본과 부패한 지배층을 이기겠다는 의지, 종교적인 신념, 수적 우세로 인한 자신감 등이 있었겠죠. 하지만 무기가 너무 차이났고, 전투기간 동안 비가 계속 오면서 그나마 있던 화승총도 쓰지 못 합니다. 그저 돌격, 연합군은 침착하게 맞서 싸울 뿐이었습니다. 정면공격부터 우회공격까지 다 했지만 소용없었습니다. 그저 시체만 늘어났죠.
결국 후퇴해서 확인해보니 만명 중 삼천명만 남았다고 합니다. 이후 후퇴하면서 오백명까지 줄었다고 하구요. 공주 감영을 공격했던 병력도 패했습니다. 끝이었죠.
뭐... 관군의 승인을 찾자면 일본군이 요충지를 잘 골랐고 관군이 인해전술에 당황하지 않게 지휘를 잘 했다는 거겠죠. 그 관군도 제대로 된 지휘를 받으면 잘 싸운다는 -_- 네 뭐 그런 결론을 낼 순 있겠습니다.
이 전투에 참전한 장수 중 이규태는 이후 항일의병을 일으킵니다. 반면 역시 참전한 이두황과 이범호는 친일파가 되었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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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연합군은 공세로 전환했고, 동학군은 쭉 밀립니다. 12월 23일 태인에서 다시 맞서보지만 역시 패배했죠. 여기까지였습니다. 전봉준 등 지휘관들은 동학군을 해산했고, 숨습니다. 하지만 얼마 안 가 체포되었죠.
"왜 난을 일으켰느냐?"
"어찌하여 날보고 난을 일으켰다 하느냐? 작란(作亂)을 하는 것은 바로 왜놈에게 나라를 팔아먹고도 끄떡없는 부패한 너희 고관들이 아니냐?"
"관아를 부수고 민병을 일으켜 죄없는 양민을 죽게한 것이 난이 아니고 무엇인가?"
"일어난 것은 난이 아니라 백성의 원성이다. 민병을 일으킨 것은 기울어져가는 나라를 구하고자 함이요 백성의 삶에서 폭력을 제거코자 했을 따름이다."
"그리하면 지방의 방백수령을 혼내주면 됐지 왜 서울에 입성코저 했는가?"
"국체를 무시하고 궁궐을 침범한 왜놈들을 응징코저 한 것이다."
"그럼 서울에 살고 있는 외국인을 다 내쫓고자 했는가?"
"아니다. 외국인은 통상만 하면 되는 것이다. 헌데 왜놈들은 군대를 주둔시켜 나라를 집어삼키려 하고 있다는 것을 그대들은 아직도 모르고 있단 말이냐? 어찌 뿌리가 썩었는데 가지를 친다함이 의미가 있을손가?"
(대원군의 명령이냐는 말에) "어찌 척양척왜가 대원군 한사람의 주장일까보냐? 그것은 만백성이 원하는 바이다. 내 창의문에 써있는 몇구절로써 그런 억측을 일삼는 것은 참으로 가소로운 일이다 대원군은 우리의 의거가 해산되기만을 효유했을 뿐이다. 우리의 의거는 대원군과 하등의 관련도 없다."
(교주 최시형의 명령이냐는 질문에) "진리를 펴는데 무슨 허락이 필요한가? 충의(忠義)란 본심(本心)이다. 그대 발 등에 불이 떨어졌는데 그대는 그것을 허락을 받고 치우겠는가?"
전봉준을 심문한 [전봉준 공초]가 사료로 남아있습니다. 그의 생각을 알 수 있는 부분이죠. 조정이나 일본에서는 대원군과의 관계를 알아내려고 했지만, 그는 끝까지 부정하며 모든 책임을 자신에게로 돌렸고, 자신의 주장을 당당히 했습니다. 다만 대원군이 나라를 다스리는 걸 당연시했고, 끝까지 대원군을 변호했다 합니다.
"정도를 위해 죽는 것은 조금도 원통할 바 없으나 오직 역적의 이름을 받고 죽는 것이 원통하다."
그렇게 녹두장군 전봉준은 사형을 당했고, 시체는 버려집니다. 역적을 감히 묻어줄 수 없으니 짐승들에게 먹히고 썩었겠죠. 그의 가족들은 죽었거나 행방불명으로, 대가 끊깁니다. 그의 후손이 있긴 하나 그걸 증명할 확실한 증거는 없다고 합니다. 땅도 세 마지기밖에 없었던, 가난했던 그의 집안은 이렇게 몰락하게 됩니다.
파랑새라는 민요가 그를 기리는 민요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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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군이 해산했지만 끝난 건 아니었습니다. 일본군과 관군은 남쪽으로 내려오면서 동학 교도들을 색출했고, 죽였죠. 민보군은 이에 협조해서 숨어있던 동학교도까지 샅샅이 찾아냅니다. 남은 사람들은 고향을 떠나고 동학이라는 걸 숨기고 살아야 했죠.
이 때 죽은 사람이 얼마나 될지는 알 수 없습니다. 일단 전쟁 때의 전사자까지 해서 최소 3만의 동학군이 희생됐다고 합니다. 어디까지나 최소로, 20만부터 40만이라는 무서운 얘기들이 나오고 있긴 하죠. 의외로 일본에서 이를 진지하게 연구하는 교수도 있습니다. 훗카이도대학 명예교수 이노우에 가쓰오로 일본군의 학살을 제노사이드로 규정하고 연구를 계속하고 있습니다. 한국에도 그가 쓴 책들이 출판되었구요.
이 쪽은 제가 모르니 자세히 얘기할 수 없겠군요.
동학을 토벌하는 데 함께했던 양반들도 나중엔 의병을 일으키죠. 이런 일본군의 강력함과 찾아내서 죽이는 잔인함을 보고서도 (혹은 함께 하고서도) 이후 계속 의병들이 일어난 게 대단하긴 합니다. 게릴라전으로 싸웠다고 하더라도요. 하지만 양반들의 인식은 크게 바뀌지 않아서, 의병을 일으키고서도 안에 있는 동학교도들을 찾아내서 내쫓았다고 합니다. 평민 의병장을 차별한 거야 잘 알려진 얘기구요. 수백수천년간 이어진 계급사회가 바뀌는 건 역시 어려운가 봅니다.
동학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은 일부 개화파들을 중심으로 바뀌어 갑니다. 박은식 같은 경우는 갈수록 동학에 대한 인식이 긍정적으로 바뀌어갔구요. 이렇게 시간이 지나면서 긍정적으로 바뀌어 갑니다. 동학혁명이라는 명칭을 퍼뜨린 게 박정희였습니다. 퍼뜨린 정도가 아니라 공식명칭으로 만들었죠. 근대화를 이끈 시민혁명으로 말입니다. 아 물론 5.16을 그것과 동일시했습니다 -.- 그가 죽은 후 현재의 동학농민운동이라는 명칭으로 바뀌었죠. 지금이야 부정적인 인식은 거의 없긴 합니다만, 그 성격이 무엇이냐로 논의가 계속되고 있죠. 의외로 북한에서는 전근대적 근왕주의로 보고 높게 평가하지 않는다 합니다. 남쪽에서 일어난 거라서 그럴지도요.
청의 피해는 전사자만 3만 5천 정도로 잡는다고 합니다. 아편전쟁, 청불전쟁에 이은 대패, 그것도 그간의 전쟁보다 훨씬 큰 패배였습니다.
청일전쟁의 패배는 청에게 큰 충격이었습니다. 그동안 서구 열강에게 당하긴 했지만 이들이 원한 건 중국 내의 이권이었죠. 강화도 조약 때 조선이 그랬듯 불평등 조약이라도 그 심각성을 잘 몰랐습니다. 하지만 일본은 달랐죠. 서양이야 강했다 하더라도 일본은 중화세계에서 작은 오랑캐의 나라였고, 근대화를 시작한 기간도 그리 차이가 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큰 차이가 나게 된 겁니다. 그리고 요동과 대만이라는, 청의 영토를 노렸구요. 청일전쟁과 몇 년 후의 의화단 운동까지 일어나면서 청은 확실한 밑천을 드러냅니다. 청나라로는 안 된다는, 전근대적인 나라로는 안 된다는 생각이 그 어느때보다 넓고 강하게 펼쳐집니다. 결국 신해혁명으로 이어지죠.
청군은 일본군보다 수가 훨씬 많았고, 일본군보다 장비가 좋은 부대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대다수는 아니었고, 그 소수의 정예병도 조직이나 훈련은 전근대적이었죠. 여기에 해군에 대한 투자를 없애고 부정부패가 판치는 등의 문제도 컸구요. 동도서기니 하지만, 그저 겉만 바꾼 걸로는 안 됐습니다. 일본처럼 철저히 바꿔야했죠. 이런 점 때문에 일본에게 굴욕을 겪었음에도 일본에게서 배우려는 시도도 나오게 됩니다.
이홍장은 시모노세키 조약까지 마친 후 실각합니다. 어쩔 수 없었죠. 그가 이끈 전쟁이었으니까요. 이홍장의 생각이 그리 틀리진 않았습니다. 열강들이 청보단 일본이라고 해도 일본의 확장을 그냥 놔두진 않을테니까요.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라도 청에 영토 욕심을 내는 일본을 막을 거니까 말입니다. 일본이 강하다는 것도 알고 있었고, 전쟁을 최대한 피했으며 전쟁이 일어나도 피해를 적게 보기 위해 방어적으로 나왔습니다.
하지만 이게 오히려 독이 됩니다. 열강들이 일본을 견제하긴 했지만, 그건 청이 패한 후의 일이었습니다. 방어적으로 나오니까 일본이 더 적극적으로 나왔고, 청의 약점이 제대로 드러나게 됩니다. 여기에 그의 사병이나 다름없던 병력이기에 너무 몸을 사린 것도 있구요. 그 힘든 시기에 중국을 이끈 인물이지만, 결국 한계는 컸죠. 싸우면서도 청군의 각 계열끼리 제대로 돕지 않는 모습도 볼 수 있구요. 결국 나중에 이홍장의 후계자 위안스카이를 비롯해 온갖 군벌들이 난립하게 되죠.
이렇게 청의 시대, 중국식의 세계질서는 끝이 나게 됩니다. 이후 쑨원을 비롯한 이들이 새로운 중국을 위해 일어났죠. 그들이 어떤 사상을 가지고 어떻게 행동했든, 이제까지의 중국과는 다른 중국을 꿈꾸었습니다. 중국의 현대가 시작된 것이죠. 잠재력으로 보면 여전히 세계 최강이었지만, 갈 길은 멀었습니다. 지금이야 그 잠재력을 무서울 정도로 발휘하고 있지만요.
일본은 이 전쟁에서 처음으로 대규모 병력을 해외로 투사했습니다. 그리고 겉으로는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죠. 병력 24만명 등 총 35만명을 투입해 전사자는 불과 1417명이었다 합니다.
하지만 그 성공에 가려진 문제가 너무 컸죠. 일단 병사자만 1만 2천명 가까이 나왔습니다. 동상과 콜레라, 각기병 등이었죠. 전쟁에서 비전투손실도 큰 법이지만 참 심하죠. 이렇게 병사를 잃으면 손해니 일본 내에서도 나름 연구가 진행됐고, 나아진 면도 있긴 합니다. 하지만 이런 비전투손실을 낳은 원인 자체를 고치진 못 했죠.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군의 전매특허인 비합리적인 돌격은 청일전쟁 때도 충분히 나왔습니다. 타군과 경쟁해서 필요 이상으로 진격하는 경우도 나왔구요. 입을 필요 없는 피해가 많았죠. 하지만 이게 청군에 워낙 잘 통해버립니다. 뭐 1차대전에서 보듯 열강들도 이런 부분이 있으니 아직까진 큰 문제가 아닐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열강이 피로 배운 걸 일본은 청일을 넘어 러일전쟁에서도 먼저 배워놓고는 고치지 않았죠. 뭐... 우리로선 다행일지도요.
일본은 이 전쟁에서 총예산 7억엔 중 2억엔을 썼다고 합니다. 1년 예산이 8천만엔이었다니 그 규모를 알 수 있죠. 그만큼 일본에겐 지면 망할 수도 있는 전쟁이었습니다. 하지만 이겼고, 청에게 배상금을 뜯어내죠. 고평은 2억냥은 일본의 4년 예산(청에겐 3년)이었다 합니다. 일본으로서는 기를 쓰고 뜯어낼 돈이었죠. 이렇게 도박에 가까운 전쟁을 치렀고, 죽어라 싸우니 그 강했던 청이 무너졌다는 게 강조됩니다. 우리가 약해도 정신력만 있으면 된다는 생각이 말이죠. 일본은 신이 수호하는 나라니까요. 러일전쟁은 청일전쟁보다 더 큰 도박이었고, 그것마저 이기고 나니 더 확고해집니다.
여기에 삼국간섭이 좋은 양념을 쳤죠. 죽어라 싸워서 이겼는데 열강(러시아, 독일, 프랑스)이 압박을 주고 뺏기게 됩니다. 만주와 연해주를 노리고 있던 러시아가 주도했죠. 일본의 확장도 확장이지만, 그 뒤의 영국을 견제하는 것도 있었습니다. 이 때 외상 무츠는 괜히 회담을 벌이다 다른 것까지 놓치는 것보단 반납하는 게 낫다는 결론을 내립니다. 대신 3천만냥을 더 뜯어냈구요. 이렇게 열강, 특히 러시아에 대한 분노가 갈수록 심해졌고, 러일전쟁으로 이어지죠.
+) 위에서 얘기했듯 열강도 일본이 중국을 먹는 걸 싫어했습니다. 이러니 조선에 더 집중한 부분도 있죠. 그래봐야 나중에는 억지로 억지로 만주를 뺏고 기어이 중국 본토까지 노리게 되지만요
일본의 목표였던 조선은 이걸로 확실히 먹었습니다. 거기에 그 이전부터 노렸던 대만까지 먹게 되었죠. 열강은 일본을 인정했고 조선을 먹는 것은 반대하지 않았습니다. 이러니 일본의 행동은 더 대담해졌죠. 조선이 러시아에 기대려 하자 민비를 죽이는 짓까지 저지르게 됩니다.
류큐에 이어 대만을 얻었고, 사실상 조선의 주인이 되었습니다. 이름이야 원래 그랬지만, 이렇게 식민지들을 만들면서 일본은 확실히 제국주의의 길로 달려갑니다. 犬일본제국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게 되었죠.
+) 누누이 말씀드렸듯 저 한자는 훈독으로 읽으셔야 합니다.
하나만 더 짚고 가자면, 이 일로 의외의 공화국이 탄생합니다. 대만이 일본에 할양된 것을 알게 된 대만인들의 저항이었죠. 대만에 있던 청군도 합류해 일본과 맞섭니다. 이른바 대만 민주국이었습니다. 일본군은 5개월에 걸쳐 이를 진압했고, 164명이 전사합니다. 그리고 4천 6백여명에 이르는 병사자가 나옵니다. (...) 아시아 최초의 민주국가라지만 사실 그 의미는 없다시피하고, 그보단 대마인들이 일본의 지배에 저항했다는 게 크겠죠. 하지만 열강은 물론 청도 그들을 돕지 않습니다. 결국 패했고, 이후 일본의 지배에 순종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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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조선...
청은 무너졌고 동학농민운동은 실패했습니다. 그런 가운데서 갑오개혁은 진행되고 있었죠. 일본의 힘 덕분이지만 개화파에게 기회가 다시 왔고, 양반들이 싫어해도 개혁은 진행되었습니다.
당연히 서울 중심이긴 하지만, 개화는 서서히 일반 민중들에게도 퍼지기 시작합니다. 이제 다들 깨닫기 시작했을 겁니다. 전근대적인 걸로는 안 된다는 것을요. 죽창으로는 총을 이길 수 없었고, 근대적인 것을 배우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말이죠. 독립협회가 보여준 모습은 놀랍죠. 탄압과 자기 자신의 한계가 크긴 했지만요.
동학의 3대 교주, 천도교의 창시자 손병희는 숨어 지내다가 1901년 일본으로 건너갑니다. 그의 변신이 놀랍죠. 개화파가 된 겁니다. 이후 천도교는 독립운동은 물론 교육 등의 분야에서도 크게 활약하죠. 가령 어린이날을 만든 게 방정환이 있던 천도교였습니다.
약육강식의 세계, 살아남는 방법은 결국 근대화였습니다. 힘을 키워야 했고, 배워야 했습니다. 이렇게 차츰 항일도 근대적인 방식으로 바뀌어 갑니다.
하지만 참 아이러니한 길이었죠. 일본에 당하면서도 살아남기 위해선 일본을 배워야 했으니까요. 사회진화론, 문명개화론을 받아들일수록 조선의 상황에 좌절하게 되고, 그럴수록 오히려 일본에 끌리게 됩니다. 손병희도 러일전쟁 때 일본 편을 듭니다. 아예 일본의 힘을 빌려 친러 정권을 전복시키려 했다고 합니다. 손병희가 이용구에게 맡긴 진보회는 일진회와 합쳐져서 한일합방을 주장했구요. 손병희는 뒤늦게 그 사실을 알고 분노했죠. 개화를 외칠수록, 조선과 일본의 차이를 실감할수록 일본에 더 끌리게 되는 상황, 그런데 그렇다고 안 배울수도 없잖습니까. 시대는 바뀌었고, 근대식으로 배운 사람들이 없으면 독립은 둘째치고 세상이 돌아가지 않거든요. 뭐 이러니 마지막까지 변절하지 않은 독립운동가들이 대단한 거겠죠. 일제강점기 이후 독립운동을 이끈 지식인들의 변절, 민족개조론, 해방 후의 친일파 재기용, 현재의 식민지 근대화론까지 이어지는 큰 담론입니다. 지금의 헬조선 드립과 연결해봐도 될 얘기가 아닐까 싶네요.
+) 뭐 이승만처럼 미국에서 배운 사람도 있긴 하죠
어찌됐든, 일본의 조선 지배는 더 이상 막을 수 없었습니다. 조선 내에서 아무리 으쌰으쌰한들 한계가 너무 컸고, 조선 내에서도 각 세력의 지향점이 달랐기에 혼란스러웠죠. 시대가 바뀔 때 있을 수밖에 없는 혼란입니다. 시간이 더 있었다면 우리 안에서 나름의 결론을 낼 수 있었을지 모르겠지만, 일본은 그걸 기다려주지 않았습니다.
아, 아직 하나가 더 있긴 하네요. 고종은 거기에 마지막 기대를 겁니다. 뭐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이겠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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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나긴 여정이 끝났군요. 이렇게 오래 끌 줄은 몰랐네요. 기다려주셔서 감사합니다 '-'
다음 게 뭐가 될지는... 고민할 필요 없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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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청일전쟁 즈음까지의 일본을 잘 그려낸 역작으로 만화 '왕도의 개'라는 작품이 있죠^^ 김옥균 일본 망명으로 시작해 동학농민군 참패(직전)로 끝납니다.
당대의 일본에 대한 직시(공화파(?) 변절, 아이누족 문제 등등)가 돋보입니다. 홍종우가 무슨 괴물처럼 묘사된 점은 아쉽지만...
무츠 외상이 핵심 악역으로 활약합니다.
청일전쟁이나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패했다면...
여태까지 봤던 가장 그럴싸한 가정은, 조선 전체가 공산화되었을 것이다라는 결론이었습니다. 뭐, 역사에 만약은 없지만요.
근데, 조선 전체가 공산화됐다면, 우리나라의 현실은 지금보다 훨씬 더 암담했을거라는건 확실하긴 합니다.;;
크크 둘을 빼놓을 수 없으니까요ㅠ
재밌는 문제죠. 안군님이 말씀하신 공산화가 됐을수도 있고, 중립국이 실현됐을수도 있고, 그래도 일본에 먹혔을수도 있고요.
좀 무리수를 둔다면, 일본이 패하면서 진짜 이러다 황인이 백인에게 먹힌다는 생각으로 힘을 키워서 일본과 동맹, 2차대전 때 중국과 소련을 공격한다는 시나리오도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