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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6/05/09 02:00:02
Name 靑龍
Link #1 http://blog.naver.com/smh2829/220704194313
Subject [일반] <삼국지> 관우에게 단독군사작전권이 있었을까?
(편의를 위해 반말로 작성하였으니 양해 부탁드립니다)

관우는 단독군사작전권이 있어 독자적으로 양번전쟁을 일으켰다고 생각하는 점이 있다.
그 이유로는
1. 형주 도독과 비슷한 동독형주사의 직책.
2. 관우에 대한 유비의 신뢰.
등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사료를 살펴보니 나는 그러한 견해에 동의할 수 없어 이 글을 쓴다.
일단 사서를 보자.

  
선주는 강남(江南-장강 남쪽)의 여러 군을 거두어들이고는 으뜸 되는 큰 공훈을 세운 사람들을 봉배(封拜)하니 관우를 양양(襄陽)태수 탕구장군(盪寇將軍)으로 삼아 강북(江北-장강 북쪽)에 주둔하게 했다.
선주가 서쪽으로 익주(益州)를 평정할 때 관우를 동독형주사(董督荊州事)로 임명했다.
- 관우전 -


위의 기사 내용을 보면,
유비가 형남4군을 공략한 때는 208년의 일이니 관우가 령 양양태수 탕구장군이 된 시점은 208~209년의 일이다. 양양군은 조조가 남군을 갈라 설치한 군으로 실제로는 위나라의 소유였다. 그러므로 관우는 양양군을 실효지배할 수 없었다. 자국의 땅이 아닌 곳에 임명하는 것을 '요령'이라하는데 이는 적국, 속국 등에 행하여지고 동맹국에는 실행되지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요령은 관직의 부족을 충당하고 해당 관직에 대한 선임명권이 있었음으로 추측한다. 변경의 요령직에 임명됐던 관우, 위연, 강유 등의 호전성을 볼때 해당 지역의 공략제안 등의 권한도 있었던것 같다. 지금까지 관우가 스스로의 판단하에 단독적으로 군사작전을 행한 적은 없었다.

관우는 214년 이후로 하여 형주 책임자인 동독형주사의 직책을 담당한다. 흔히 관우가 형주 전체에 대한 인사권이 있다고 생각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관우는 양양태수부의 관속은 임명할 수 있었으나 남군 등의 지역에 대한 인사권은 없었다. 남군태수인 미방은 유비가 임명했고 공안에 주둔한 장군 사인도 유비가 임명한 인사였다. 미방은 장비의 후임자이고 사인은 조운의 후임자이다.
관우가 동독형주사가 된 214년 이후, 유비집단과 손권집단 간에는 큰 균열이 생긴다. 그것은 형주 반환을 요구한 손권과 그것을 거절한 유비로 인한 양 진영의 형주 지역에서의 충돌이었는데 사실 이것은 그전부터 깨질 조짐이 많았던 사건이었다. 형주 반환을 거부한 유비에 격분한 손권은 장사, 영릉, 계양의 3군에 관리를 파견하여 소유코자하나 관우에 의해 그들이 축출당하자 무력으로 기습하여 3군을 빼앗고만다. 이에 대해 유비는 직접 공안으로 출정하고 관우로 하여금 3만을 이끌고 익양으로 진격하도록 한다. 관우가 단독적인 군사작전권이 있었다면 오나라에 3군을 뺏긴 후 즉각적인 대응이 있었어야한다고 보는데 익주 성도에 있던 유비가 공안에 오기까지 관우는 별다른 움직임이 없었다. 사서를 보자.

  
건안 20년(215년), 손권은 선주가 이미 익주를 얻었다 하여, 사자를 보내 형주를 돌려받고자 한다고 통보했다. 선주가 말했다,
“양주(涼州)를 얻으면 형주(荊州)를 주겠소.”
손권이 분노하여, 여몽을 보내 장사(長沙), 영릉(零陵), 계양(桂陽)의 세 군(郡)을 습격하여 빼앗았다. 선주는 군사 5만을 이끌고 공안(公安)으로 내려가고, 관우에게 익양(益陽-장사군 익양현)으로 들어가게 했다.
이 해, 조공이 한중을 평정하자 장로는 파서(巴西)로 달아났다. 선주가 이를 듣고 손권과 화해하니, 형주를 분할해 강하, 장사, 계양은 동쪽(손권)에 속하게 하고, 남군, 영릉, 무릉은 서쪽(유비)에 속하게 하고는, 군을 이끌고 강주(江州-파군 강주현)로 돌아왔다.
- 선주전 -

이 해, 유비가 촉을 평정했다. 손권은 유비가 이미 익주를 손에 넣었으므로 제갈근을 시켜 형주의 여러 군을 돌려주도록 요구했다. 이에 유비는 허락하지 않고 이렇게 말했다.
『나는 지금 양주를 취하려고 생각하고 있으므로 양주를 취한 후에 곧바로 형주를 오나라에 돌려주겠습니다.』
손권이 말했다.
『이는 빌렸으면서 돌려주지 않는 것이며, 공허한 말로 시간을 끌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남쪽 세 군(장사, 영릉, 계양)의 태수를 두었다. 그러나 관우가 이들을 모두 내쫓았다. 손권은 매우 노여워하며 즉시 여몽을 파견해 선우단, 서충, 손규 등의 병사 2만 명을 지휘하여 장사, 영릉, 계양 세 군을 취하도록 하고, 노숙으로 하여금 1만 명을 인솔하여 파구(巴丘)에서 주둔하며 관우를 방어하도록 했다. 손권은 육구에 머물면서 여러 군대를 총지휘했다. 여몽이 도착하자, 장사와 계양 두 군은 모두 복종했는데, 오직 영릉태수 학보만이 투항하지 않았다.
마침 유비가 공안에 도착하여 관우에게 병사 3만 명을 이끌고 익양까지 가도록 했다. 그래서 손권은 곧 여몽 등을 불러 돌아가서 노숙을 원조하도록 했다. 여몽이 사자를 보내 학보에게 항복할 것을 권유하자, 학보는 투항했다. 이렇게 하여 세 군의 장수와 태수를 모두 손에 넣었으므로 군대를 이끌고 돌아와 손교, 반장 및 노숙의 병사들과 함께 전진하여 익양에서 관우에게 저항했다.
아직 싸움이 시작되지도 않았는데, 마침 조조가 한중으로 들어갔다. 유비는 익주를 잃게 될까 두려워하여 사자를 보내 손권과 화해하도록 했다. 손권은 제갈근에게 유비에게 가서 응답하도록 하여 다시 동맹을 맺었다. 그래서 형주를 나누어 장사, 강하, 계양 동쪽 지역을 손권에게 돌려주고, 남군, 영릉, 무릉 서쪽 지역을 유비에게 귀속시켰다.
- 오주전 -

이후에 유비는 서쪽으로 진군하여 유장을 병탄하려고 도모하며, 관우를 남겨 지키도록 했다. 손권이 말했다.
"교활하게 포로가 감히 속이다니."
관우는 노숙이 경계를 인접하고 있게 되자. 자주 의심이 있었으므로 경계 지역에서 분쟁이 일어났는데 노숙은 항상 우호적으로 그들을 진무시켰다. 그러나 유비가 익주를 평정하자. 손권은 장사, 영릉, 계양의 반환을 요구했다. 유비는 이 요청을 거절했다.
손권은 여몽을 파견하여 병사들을 이끌고, 진격하여 취하도록 했다, 유비는 이 소식을 듣고, 직접 공안으로 돌아와서 관우를 파견해 세군을 쟁취하도록 했다.  노숙은 익양에서 관우와 서로 대항했다. 노숙은 관우에게 서로 만날 것을 요청하여 각각 병마를 백보 밖으로 주둔시키고, 단지 장군들만이 단도를 갖고 함께 만났다. 노숙은 관우를 여러 차례 질책하여 말했다.
"우리 군주가 본래 성의껏 그대들에게 토지를 빌려준 것은 그대들이 전쟁에서 패하여 멀리서 왔고, 의지할 곳이 없었기 때문이요. 오늘날, 벌써 익주를 얻었으면서 형주를 봉환하려는 뜻도 없소. 우리들은 단지 그대들이 세군만 반환해 줄 것을 요청하는데도, 명에 따르지 않고 있소."
노숙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자리에 앉아 있던 어떤 한사람이 말했다.
"영토란 덕있는 사람에게 속하는 것일뿐. 어찌하여 영원히 소유하려 하시오 "
노숙은 벽력같은 소리를 질러 질타했는데 언사와 안색이 매우 절절했다. 관우는 칼을 잡고 일어나서 말했다.
"이것은 국가의 일인데 이 사람이 무엇을 알겠소!"
눈빛으로 떠나가도록 했다. 유비는 상수를 경계로 하여 나누었으며, 쌍방의 군대는 대결을 끝냈다.
- 노숙전 -

이 때 유비는 관우에게 영을 내려 진수하면서 형주를 독점하고 있으니, 손권이 여몽에게 명을 내려 서쪽으로 장사(長沙) 영릉(零陵) 계양(桂楊) 3군으로 공취하라고 했다. 여몽이 2군에 편지를 보내 귀복해 올 것을 바랬는데, 오직 영릉태수 학보(普)만이 성을 지키고 항복하지 않았다. 그러다 유비가 촉에서 친히 공안으로 와, 관우를 파견 3군을 쟁취하도록 했다.
- 여몽전 -


이상이 령 양양태수 탕구장군 동독형주사였던 관우의 군사활동에 대한 기록이다. 각 기록에서 전하는 바에 대한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유비가 관우에게 영을 내려 형주를 진수하도록 하고 익양으로 진격하라 한 것이다. 손권 또한 노숙이나 여몽에게 영을 내려 관우에 대항하도록 하였다.
그럼 관우가 스스로 군사를 지휘하여 작전한 것은 언제인가? 이것 또한 사서를 보는것이 정확할 것이다.

건안 24년(219년), 선주(先主)가 한중왕(漢中王)이 되자 관우를 전장군(前將軍), 가절월(假節鉞)로 삼았다.
이 해, 관우가 군사를 이끌고 번(樊)에서 조인(曹仁)을 공격했다. 조공이 우금(于禁)을 보내 조인을 돕게 했다. 가을, 큰 비가 내려 한수(漢水)가 범람하고 우금이 이끌던 7군(七軍)이 모두 물에 잠겼다. 우금은 관우에게 항복했고, 관우는 또 장군 방덕(龐德)을 참수했다. 양(梁-예주 양국), 겹(郟-영천군 겹현) 육혼(陸渾-홍농군 육혼현)의 군도(群盜-뭇 도적)들이 혹 멀리서 관우의 인호(印號-관인과 봉호)를 받아 그의 일당이 되었고 관우의 위세가 화하(華夏-중국)를 진동했다.
- 관우전 -

위의 기록을 보면 관우는 유비에 의해 전장군으로 승진하고 가절을 받은 후에 양번전쟁을 일으킨 것이다. 가절은 임시로 절을 받은 것으로서 고위관료에 대한 처벌권이나 지휘권을 준 것으로 생각된다. 다른 예로 제갈량의 북벌에서 사마의는 맞아 싸우려하지않았으나 제장 등의 반발로 인해 조정에 표를 올려 신비로 하여금 절을 지녀 제장들을 무마하는 일화 등이 있다.
아래에는 이해를 돕기위해 자료를 첨부한다.

호부 (링크)          
http://blog.naver.com/smh2829/220498405242

모절 (링크)
http://blog.naver.com/smh2829/220703346081

사지절使持節, 지절持節, 가절假節 :
삼국시대부터 남북조시대에 이르기까지 지방의 군사와 정사를 통솔하던 관리에게 준 것으로, 중급 이하의 관리를 참할수 있는 권한이었다. 그 다음 등급은 지절持節이라고 불렀는데 관직이 없는 자를 참할수 있었다. 그 다음 등급은 가절假節이라고 불렀는데 군령을 범한 자를 참할 수 있었다.

절전節傳, 인수印綬, 부책符策 :
절節은 고대 사신의 신분을 증명하는 신물信物이었다. 주례周禮 추관秋官 '소행인小行人'에 "천하에 이르는 6절에는 산국山國에서 쓰는 호절虎節, 토국土國에서 쓰는 인절人節, 택국澤國에서 쓰는 용절龍節이 있는데 모두 쇠로 만들었으며 도로에서 쓰는 정절旌節, 문관門關에서 쓰는 부절符節, 도비都鄙에서 쓰는 관절管節은 모두 참대로 만들었다." 라는 기록이 있다. 전傳은 화물 통행 증명서인데 지금의 화물 통행증과 비슷했다. 최표崔豹의 고금주古今注 문답석의問答釋義에 "무릇 전은 모두 나무로 만드는데 길이가 5치이고 그 위에다 신표로 글을 쓰고 하나의 판자로 그것을 봉한다. 봉한 곳에는 어사의 인장을 찍어서 신표로 삼는다. 지금의 과소過所(행인의 통과에 필요한 증명서)와 같다."라는 기록이 있다. 부符는 조정에서 명령을 전달하고 군사와 장령을 조동시킬때 쓰던 증명서 같은 것이었다. 구리나 참대로 만들었는데 그 위에다 글자를 쓴 뒤 둘로 쪼개서 각기 하나씩 가졌다가 쓸 때에 맞춰보았다. 사기史記 효문본기孝文本紀에 "처음에는 군국수상郡國守相에게 동호부銅虎符와 죽사부竹使符를 주었다."라는 기록이 있다. 그리고 배인의 사기집해에는 "동호부의 첫째부터 다섯째까지는 나라에서 군사를 조동시킬때 사자를 군에 파견하여 부절을 맞춰보아 서로 맞으면 비로소 지시를 듣는다. 죽사부는 모두 참대 화살 다섯 개로 만들었다. 길이는 5치이고 거기에 전문篆文 글자를 새기는데 첫째부터 다섯째까지이다."라는 기록이 있다. 사마정司馬貞은 사기색은史記索隱에서 "한구의漢舊儀에 '동호부는 군사를 조동시키는데 쓰는데 길이가 6치이고 죽사부는 징벽하고 출발하는 것을 출입시킨다.'라는 기록이 있다."라고 했다. 책策은 책서策書인데 관직에 임명하고 작위를 수여할때 부신符信으로 썼다. 오늘의 임명서와 비슷했다.

권력이 컸던 제갈량, 사마의 등도 마음대로 지역정벌을 하지못했는데 그보다 권력이 적었던 관우가 감히 맘대로 그리하진 못했으리라 여겨진다. 특히 조조는 사실상 모든 권력을 틀어쥔 실권자였음에도 형식적으로라도 상표하는 절차를 밟았다.
관우가 유비와 특별히 신뢰하여 그랬다라는 반론도, 관우는 유비가 신임하는 중신이었음에도 그에 대한 시호가 사후 꽤나 오랜 후에 수여된 것을 보면 그에 대한 신용과 국가시스템에 의한 권한에는 거리가 있었던걸로 생각한다.


당초 선주(先主) 때에는 오직 법정(法正)만이 시호를 받았다. 후주(後主) 때에는 제갈량은 공덕이 세상을 덮고 장완(蔣琬), 비의(費禕)는국가의 중임을 떠맡았으니 또한 시호를 받았다. 진지(陳祗)는 총애를 받아 특별히 특별한 포장이 더해졌고 하후패(夏侯霸)는 멀리 와서 국가에 귀부했으므로 또한 시호를 받았다. 그러다 관우, 장비, 마초, 방통, 황충과 조운이 시호를 추증받았으니 시론(時論)에서는 이를 영예로운 일로 여겼다.


또, 손권의 형남3군 침탈을 관우의 책임으로 생각하는 의견에 대해서도 반박해보자면,
관우는 강북에 주둔하여 형남3군과는 거리가 꽤 멀었던데다 형남3군을 뺏겼음에도 유비의 명이 있기전까진 그곳을 지키고있었다. 그리고 애초 군현의 직접적인 방비는 태수 및 현령/현장의 몫이다.


건안 20년(215)에 손권은 여몽을 파견하여 주의 남쪽에 위치한 세군 --- 장사ㆍ영릉ㆍ계양 --- 을 급습하도록 했다.
요립은 탈출하여 유비가 있는 곳으로 갔다. 유비는 평소부터 그를 알고 있었으므로 예우해 주고 심하게 문책하지 않았으며, 파군태수로 임명했다.
- 요립전 -


관우가 양번전쟁을 일으킨 것은 한중전에 호응하여 위나라 내부를 교란시키고 유비가 한중에서 조조를 격파하자 그 분위기에 힘입어 위나라를 더욱 몰아부치기위해 한 것으로 생각한다. 유비는 관우에게 가절을 수여함으로서 그의 지휘권에 대해 묵인 및 단독작전의 허가를 한 것으로 보인다.

p.s
김경한 삼국지에는 해당내용이 어떻게 나왔나 궁금해서 발췌함.

적어도 관우의 군사행동은 독자적 판단에 따른 것은 아니었다. 유비는 건안23년 한중을 공략하면서 형주의 관우에도 여차하면 양동작전을 펼칠 수 있도록 비상을 걸어놨다.
(중략)
조인이 완성의 반란을 진압하는 동안 관우는 전혀 움직이지않았다. 이를 보면 관우가 독자적 판단으로 군대를 출동시켰을 가능성이 없었음을 알 수있다. 관우는 유비로부터 만약에 대비해 군대를 동원하라는 명령만 받은 상태였지 아직 출병여부에 대한 지시가 없었으므로 완성을 구원하기 위한 어떤 행동도 하지않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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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lemens2
16/05/09 02:28
수정 아이콘
글 잘 읽었습니다. 질문 하나 하자면, 대체로 삼국지 드라마에서 형주에 있던 관우에게 군후라 호칭하던데 사실인가요?
16/05/09 02:31
수정 아이콘
저도 그건 잘 몰라서 정확히 말씀드리기는 어렵지만 관우는 제후 신분이었으니 제후를 높혀 군후라 불렀던것은 아닐지요?
꺄르르뭥미
16/05/09 04:38
수정 아이콘
만일 관우의 북상이 중앙의 지시에 의해 시작되었다면 상용에서 군사를 내지 않은게 설명이 안되지 않나요?
16/05/09 13:03
수정 아이콘
상용군은 형주 소속인지라 중앙정부인 익주 소속이 아닙니다~
또 유봉 측 말처럼 얻은지 얼마되지않았으니 걔네들 말도 충분히 일리는 있습니다.
peoples elbow
16/05/09 09:00
수정 아이콘
아직도 이해가 안가는것이 손권에게 유비가 형주를 빌리는 장면이 삼국지에 있나요? 적벽대전에서 유비가 직접 관우 장비 조운등으로 무릉 장사 영릉 계양등을 얻은것으로 나오던데..
카롱카롱
16/05/09 10:08
수정 아이콘
당초 협정이 형주는 손권꺼! 였는데 적벽끝나자마자 전속력으로 형주 먹고나선 이거 빌린거야~ 촉 먹으면 돌려줄게...이러는거 아니었어요?
cadenza79
16/05/09 10:15
수정 아이콘
빌려준다는 표현은 여러 군데서 나옵니다.
형주 중부 이하의 힘 공백상태는 적벽대전 이후의 공방에서 비롯된 것인데, 주유는 유비군과 공동작전으로 빼앗은 중심지 남군(강릉)을 먹어버렸댔습니다. 유비가 인근의 공안에 본진을 둔 것도 그 때문이었구요.
그러다가 주유가 죽고 나서 후임자인 노숙의 건의로 빌려준다는 표현을 쓰게 되지요. 이때 노숙은 사실상 강릉에서 철수합니다.
이와 같이 빌려주는 관계는 이후 손권도 형주 관련 직위들을 설치하지 않는 식으로 공식화됩니다.

그리고 형남4군의 경우에는 사실상 저항이 어려운 상태였으니 처음부터 유비군의 접수를 눈감아준다, 즉 우리는 손을 대지 않는다고 묵인하면서 남북으로 반띵을 합니다.

나중에 형남지역을 내놓으라고 한 건, 형남 4군을 빌려줬다는 의미라기보다는, 그때 가서 원래 목적물인 남군 돌려달라고 하면 미네랄 가스 왕창 들여서 벙커 터렛 짓고 시즈탱크 빵빵하게 박아놓은 기지 내놓으라는 꼴이 되어 안 줄 게 뻔하니, 대체물인 후방 멀티 주면 그거 먹고 떨어지겠다는 의사표시로 봐야겠죠.
꺄르르뭥미
16/05/09 10:37
수정 아이콘
연의에서는 적벽대전 후에 제갈량이 주유에게 남군(강릉)을 공격하라고 양보하는 대신 1년 후에도 강릉이 함락되지 않으면 우리도 공격하겠다고 말합니다. 그 일년동안 유비는 형남4군을 먹는데 주유는 강릉에서 조인에게 막히죠. 그리고 1년후 주유와 조인이 둘다 지쳐있을 때 유비가 강릉성 주워먹고 주유는 열받아서 죽죠.
무식론자
16/05/09 11:50
수정 아이콘
빌린게 맞긴 맞습니다. 문제는 형주 전체를 빌린거냐, 아니면 일부만 빌린거냐 하는거죠.

손권: 조조군과 싸우고 형주를 탈취한건 우리힘이 컸고, 남군을 빌려줬고, 유비가 형주 나머지 먹은것도 우리 묵인하에 그런거잖아? 그러니까 형주 전체를 빌려준거지.
유비: 적벽에서도 같이 싸웠고, 남군에서도 같이 싸웠고, 형남 4군은 내 힘으로 얻은건데 어떻게 형주 전체가 니들꺼냐?
16/05/09 13:02
수정 아이콘
사서를 보니,
형주(남군, 장사군, 무릉군, 계양군, 영릉군)를 빌린것은 사실입니다. 형남4군은 남군보다 아래에 위치하는데 남군을 손유연합군에 뺏긴 이상 중앙조정과는 연락이 끊긴 상태라 손권 측이 접수하기에도 어렵지않다 보여지는데 유비가 어떠한 제안으로 그곳을 먼저 공격해서 선점한 것이지요.
이건 추론인데 아마도 유비가 반환하기로 했던 형주는 장사, 계양, 영릉 같습니다. 본문의 사서에서도 확인되는데 이쪽은 인구도 많고 위나라와 접경하고 있지않아 어찌보면 알토란같은 땅이지요.
필휘지
16/05/09 20:52
수정 아이콘
어디서 읽었는지 기억이 정확하지는 않습니다만 계양, 영릉 이쪽은 오가 점령한 후 반란이 끊이지 않았다고 읽었습니다. 반준이 이 쪽 반란 때문에 죽을 똥을 쌌다고 들었구요. 적어도 손오의 입장에서는 알토란까지는 아니었을 겁니다.
16/05/09 21:14
수정 아이콘
위나라와 접경을 맞이하고 총알받이가 되는 남군에 비하면 그렇다는 뜻입니다~
숙청호
16/05/09 11:27
수정 아이콘
잘 봤습니다.
16/05/09 13:04
수정 아이콘
감사합니다 ^^
peoples elbow
16/05/09 11:37
수정 아이콘
모두들 댓글 감사합니다.. ^^
답이없음
16/05/09 11:49
수정 아이콘
단독군사작전권이 무슨말인지 잘 모르겠네요...
그런 대 전쟁을 일으키는 거야 당연히 중앙의 지시를 받아서 했던 것 아닌가요?
중앙은 공략명령만 내리고 그에 대한 디테일은 관우가 짰을 것 같은데... 촉과 형주의 거리가 전령이 왔다갔다 하기엔 너무 멀잖아요.

관우가 번성을 공략한게 본인의 혼자의 판단이라는 이야기가 어디서 있었나요??
16/05/09 13:05
수정 아이콘
학계에서도 나름 의견이 분분하다고 알고 있고,
삼국지 팬덤 쪽에서는 오히려 관우가 독단적으로 전쟁을 일으켰다는 쪽이 압도적으로 많을 겁니다.
무식론자
16/05/09 13:16
수정 아이콘
당연히 중앙의 지시를 받아서 한거면 사서에 그런 내용이 나와야하는데
그게 불명확하거든요. 그러니 의견이 갈리는거죠.
나이트해머
16/05/09 14:08
수정 아이콘
개인적으로 상용의 점령이 관우의 북진 신호였던 걸로 봅니다. 상용은 형북을 장악하지 못하면 고립되는 지역이기 때문에 이 지역을 점거했다는 건 관우가 여기까지 올라와라 하는 뜻이 아닐까 싶거든요.
16/05/09 19:31
수정 아이콘
가능성 높은 의견이라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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