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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5/02/15 10:23:49
Name 꾹꾹이
Subject [일반] [MLB] 밤바다를 비추는 눈부신 별 하나에 대한 이야기.
* 이 글은 영어 위키피디아, 엔하위키, 김형준 기자의 레전드 스토리, 팬그래프와 베이스볼 레퍼런스 등을 대부분 참고해서 쓰였음을 말씀드립니다. 오역 작렬할 수 있습니다ㅜㅜ 잘못되거나 부족한 정보가 있다면 댓글로 알려주세요. 새로운 정보 또한 환영입니다:)






옛날에, 참 오래됐습니다. 제가 태어나기도 전 일이니깐요. 메이저리그에서 활동하던 우익수가 있었습니다. 


이 분은 18년간 한 팀에서만 뛰며 통산 타율 0.317, 통산 3,000안타, 12회의 올스타 출장, 골드글러브 12회 수상(그것도 연속!), fWAR 80.6 & bWAR 94.4 등의 성적을 남겼습니다.


명예의 전당 첫 턴 입성을 노릴 수 있을 정도로 대단히 훌륭한 커리어이지만, 그가 속한 우익수 포지션으로 한정하더라도 올타임 넘버원이냐면 그 정도까지는 아닙니다. 므르브의 역사는 길고 굇수들은 너무나 많거든요. (대표적인 굇수로 베이브 루스, 행크 아론, 스탠 뮤지얼 등이 있습니다 -_-;)





그러나, 그는 메이저리그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수가 되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로베르토 클레멘테입니다.









[메이저리거를 꿈꾼 푸에르토리코 소년]



그의 풀 네임은 로베르토 클레멘테 워커(Roberto Clemente Walker)입니다. 그런데 다들 로베르토 클레멘테라고 하지 로베르토 워커라고 하진 않는 게 의아해서 알아보니, 이름 + 미들네임 + 성의 영어식 이름이 아니라 이름 + 아버지 쪽 성 + 어머니 쪽 성의 스페인식 이름이더군요. 자녀들은 아버지 쪽 성을 따릅니다. 그래서 Roberto Clemente Walker와 그의 부인 Vera Zabala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의 이름은 Roberto Clemente Zabala입니다. 이해가 되시나요? 기억해 두시면 좋습니다. 이 이름과 관련해서 나중에 메이저리그 명예의 전당에서 좀 어이없는 실수를 저지르게 되거든요(...) 


어쨌든 로베르토 클레멘테 워커는 1934년 푸에르토리코에서 5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사탕수수 농장에서 감독관이었다고 하네요. 그래봤자 넉넉한 환경과는 거리가 멀었으리라는 추측을 쉽게 할 수 있습니다. 막내 클레멘테도 아빠를 따라다니며 일해야 했습니다. 


재밌는 사실이 하나 있는데, 어린 시절의 별명이 'monen'이었다고 합니다. 생긴 이유는 '조금만 더(one moment)'라는 말버릇이 있어서 크크 심지어 이 별명은 메이저리거가 되어서도 쓰였습니다. 동료들의 말을 잘 알아듣지 못했던 그는 말을 천천히 해 달라고 부탁하려고 'moment'라는 말을 자주 썼거든요.


어려운 가정형편에도 운동에 대한 재능은 숨길 수 없었고, 육상과 창던지기에도 소질이 있었지만 그 중에서도 그가 가장 흥미를 보인 것은 야구였습니다. 어린 시절 그는 라디오에서 나오는 브루클린 다저스(지금의 로스앤젤레스 다저스)의 야구 경기 중계를 들으며 그 꿈의 무대에 서 있는 자신을 그렸습니다.


고등학교에서 그는 소프트볼 팀에 스카웃되어 2년을 뜁니다. 그 때의 포지션은 유격수였습니다. 16세 때는 푸에르토리코 아마추어 리그에서 뛰었습니다. 그리고 18세 때는 푸에르토리코 프로야구 리그 팀에 들어가게 됩니다. 첫 시즌에 그는 벤치 멤버였지만 그 다음 시즌에는 리드오프로 활약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때, 꿈의 무대를 밟을 기회가 그에게 찾아왔습니다. 어린 시절 라디오에서만 듣던 브루클린 다저스의 스카우트가 그를 찾아온 것입니다.







[클레멘테, 다저스 와도 자리 없다]



클레멘테를 탐내던 구단은 다저스만이 아니었습니다. 밀워키 브레이브스(지금의 애틀랜타 브레이브스)는 다저스보다 몇 배 많은 계약금을 제시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는 어린 시절 꿈꾸던 다저스를 택합니다. 그리고 꿈과 희망에 부풀어 브루클린 다저스 산하 트리플 A 팀인 몬트리올 로열스로 향했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 다저스에 클레멘테의 자리는 없었습니다. 그도 그럴 게, 로베르토 클레멘테가 몬트리올 로열스에 입단한 1954년 당시 브루클린 다저스는 메이저리그에서 가장 개혁적이고 진보적인 구단이었기 때문입니다. 다저스의 단장이자 야구 역사상 최고의 천재인 브랜치 리키는 인종차별주의자들에게 밀려 니그로리그에서밖에 뛸 수 없었던 흑인 선수들을 메이저리그로 데뷔시켰습니다. 그 첫 타자가 바로 유일무이한 메이저리그 전 구단 영구결번의 주인공, 재키 로빈슨입니다. 

(* 재키 로빈슨에 대해서도 해 볼 만한 이야기가 많지만, 제가 쓰는 것보다는 좋은 글 써주신 분이 계셔서 그 분의 글을 읽어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https://ppt21.com/?b=8&n=36774 링크 타고 가셔요.)


여전히 인종차별 논리에 매몰된 병맛 구단주와 단장들도 있었지만, 막상 흑인들이 메쟈에서 뛰어 보니 잘 뛰거든요. 니그로리그에서 가장 뛰어난 선수가 아니라는 재키 로빈슨도 28살이라는 늦은 나이에 데뷔해서는 신인왕과 MVP를 휩쓸며 맹활약했습니다. 덕분에 메이저리그에서 인종의 벽은 꽤나 빠른 속도로 무너질 수 있었습니다. 재키 로빈슨이 1947년에 데뷔했는데, 5년 후에는 150명이 넘는 흑인들이 흑백통합된 팀에서 뛰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선봉장이 지금의 로스앤젤레스 다저스인 브루클린 다저스였습니다.


그러나 이는 클레멘테에게 그리 좋은 상황은 아니었습니다. 흑인들에게 적극적으로 문호를 개방한 것으로도 모자라 중남미 시장까지 개척하기 시작한 다저스에는 우수한 선수들이 너무 많았습니다. 그는 분명 우수한 유망주였지만 메이저리그에는 도저히 자리가 없었습니다. 메이저에 올릴 수 없으면 마이너에서 수련을 해야 했겠지만, 그 당시 규정에 따르면 계약금 1만 달러를 받고 입단한 클레멘테는 메이저리그 로스터에 들지 못하면 룰5 드래프트(크보의 2차 드래프트와 비슷한 제도) 대상자가 되기 때문에 타 팀에 뺏길 가능성이 높았습니다. 그래서 다른 팀에 그의 존재를 들키지 않기 위해 마이너리그 경기에도 제대로 출전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클레멘테는 어떤 면에서는 재키 로빈슨보다 더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었습니다. 재키 로빈슨은 흑인이었지만 미국 국민이었습니다. 그러나 로베르토 클레멘테는 히스패닉에다가 이방인이기까지 했습니다. 게다가 언어의 차이 때문에 의사소통도 힘들었습니다. (푸에르토리코는 미국령이지만 주민들 대부분은 스페인어를 사용합니다.) 흑인들이 아직 차별에서 벗어나지 못한 시대에 그는 미국인인 흑인과도 차별을 받았습니다. 그래도 스페인어를 할 줄 아는 동료 조 블랙(Joe Black)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이 다행이었습니다.


하여간 다저스 입장에서는 외야에 자리가 날 때까지만 숨겨보자는 심산이었겠지만, 세상에 영원한 비밀이 있을 수는 없었습니다. 영원하기는커녕 1년도 가지 못한 비밀이었습니다. 피츠버그 파이리츠의 스카우트인 Clyde Sukeforth(네. 어떻게 읽는지 모르겠...;)가 몬트리올 로열스에서 벤치 멤버로 있던 클레멘테의 가능성을 보고 감독에게 "저 선수를 올해 룰5 드래프트로 뽑자"고 주장한 것입니다. 게다가 그 때 피츠버그에는 다저스의 혁신을 이끈 브랜치 리키가 단장으로 있었습니다. 

(* 브랜치 리키는 다저스의 구단주와의 갈등으로 인해 1950년에 피츠버그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클레멘테는 1954년에 다저스 산하 몬트리올 로열스에 입단했으므로 브랜치 리키가 클레멘테의 존재를 알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정도로 혁신적인 단장이라면 만약 이전에 그를 몰랐더라도 클레멘테를 뽑는 데 긍정적이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은 합니다. 정확한 사실을 아시는 분의 댓글이 필요합니다orz)







[미완의 유망주]



결국 1954년 말 룰5드래프트로 유니폼을 갈아입은 클레멘테는 어린 시절부터 꿈꾸던 브루클린 다저스가 아니라 피츠버그 파이리츠의 유니폼을 입은 채로이기는 했지만, 1955년 드디어 메이저리그 무대를 밟게 됩니다. 재미있게도 메이저리그 데뷔 무대의 상대 팀이 친정팀인 브루클린 다저스였다고...


그러나 팀을 옮겼다고 그가 받았던 차별과 모욕이 사라질 리가 없었습니다. 아니, 그나마 진보적이었던 다저스에서 피츠버그로 갔으니 이제 시작이었겠죠. 지역 언론은 그의 특이한 액센트를 과장하고, 그를 "Puerto Rican Hot Dog"라고 부르며 조롱했습니다. 게다가 그에 대한 악의적인 기사도 많이 썼습니다. 동료들도 그를 조롱하고 웃음거리로 만들었습니다. 이에 대한 그의 반응은 이랬습니다.

["저는 인종을 믿지 않습니다. 저는 사람을 믿습니다. 저는 항상 모든 사람들을 존중하고, 저의 부모님이 제게 그의 인종 때문에 누군가를 미워하지 말라고 가르치신 것을 신께 감사합니다." ("I don’t believe in color, I believe in people. I always respect everyone and thanks to God my mother and my father taught me never to hate, never to dislike someone based on their color.")]


주변의 냉대에 힘들었지만, 다행히도 그를 도운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가 피츠버그에 들어오기 1년 전 피츠버그 파이리츠 최초의 흑인 선수가 된 커트 로버츠(Curt Roberts)는 클레멘테와 친구가 되었고 그가 메이저리그 생활에 적응할 수 있도록 도와 주었습니다. 그래도 메이저리그 무대는 쉽지 않았습니다. 첫 시즌 그는 124게임에 출전해 .255/.284/.382라는 그다지 인상적이지 않은 성적을 남깁니다.


물론 수비는 이 때부터 뛰어났습니다. 어린 시절 창던지기를 했을 정도로 강한 어깨는 140m 거리에서 노바운드 송구를 할 수 있을 정도로 괴물 같은 송구 능력으로 발현되었습니다. 유튜브에 동영상을 봤는데, 진짜 쭈왁 정확하게 날라가요 덜덜... 그가 우익수 수비를 할 때면 주자들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면서 한 베이스 더 가기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가 외야에 설 때는 문제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타석에 설 때는 문제가 좀 많았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그가 끔찍한 수준의 배드볼 히터라는 것이었습니다. 발목 위부터 귀 아래까지가 그의 히팅 존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눈앞에 날아오는 공은 다 치고 봤습니다. 커리어 초반 그는 막 치면서 잘 맞추지도 못하는, 선구안 망에 컨택도 떨어지는 안습한 선수였습니다. 프로 2년차 3할을 찍기도 했지만 그 다음 해 다시 타율은 2할 중반으로 떨어졌습니다.


게다가 이런저런 부상에 시달렸다는 것도 불운한 점이었습니다. 신인 시절 그는 음주운전자가 일으킨 차 사고 때문에 등 부상을 입고 몇 경기를 빠진 적이 있는데, 그 등 부상은 한동안 그의 발목을 잡았습니다. 등 부상으로 가벼운 방망이를 쓸 수밖에 없었고 이는 그의 컨택에 마이너스가 되었습니다. 1960년에는 외야 펜스에 부딪혀 턱을 다쳐 5경기를 결장하기도 했고, 고향에서 윈터리그를 뛰다 부상당해서 시즌 초반 제대로 뛰지 못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후술하겠지만 언론은 그에게 호의적이지 않았기 때문에 정말 경기를 뛸 수 없어 결장하는 것인데도 꾀병인 양 기사를 써대는 일이 많았습니다.


이대로라면 그저 그런 선수로 남았겠지만, 그는 타율을 다시 끌어올렸고(0.253->0.289->0.296), 몇 가지 우연이 겹치면서 차분히 전설을 써내려가기 시작했습니다.







[최고의 우익수가 되다]


첫 번째. 그는 메이저리그에서 정규 시즌이 끝나면 고향 푸에르토리코로 가 윈터리그를 뛰곤 했습니다. 그런데 1958년 시즌이 끝난 후에는 윈터리그를 뛰지 않고 미 해병대 예비군으로 입대했습니다. 6개월간 복무하며 기초 훈련을 받았는데, 이 빡센 훈련이 그에게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10파운드를 증량한데다 그를 괴롭혔던 등의 통증도 사라진 것이었습니다.


그 후 1960년 그는 다시 3할을 때려내고, 처음으로 올스타전에도 출장하게 됩니다. 그 해 피츠버그 파이리츠의 월드시리즈 우승에도 큰 기여를 했습니다. 천금 같은 적시타로 역전의 발판을 마련한 것입니다. (그 이후 빌 마제로스키의 아직도 유일한 월드시리즈 7차전 끝내기 홈런으로 피츠버그는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리게 되죠.)


두 번째. 1961년 그의 팀에 타격 코치로 조지 시슬러(George Sisler)가 부임해 옵니다. 조지 시슬러는 우리의 증조할아버지 시절 야구선수로(...) 명예의 전당에도 헌액된 전설적인 안타왕이었습니다. 그가 세운 한 시즌 최다 안타(257안타) 기록은 2004년 스즈키 이치로가 깨기 전까지 거의 100년 가까이 깨지지 않았습니다. 아까도 나온 전설적인 명단장 브랜치 리키와 교분이 깊었던 그는 은퇴 이후 재키 로빈슨을 발굴하기도 하고(그는 재키 로빈슨을 올스타 2루수의 자질이 있는 선수라고 예견하기도 했습니다.) 다저스에서 타격 코치로 일하면서 선수들의 선구안을 기르는 데 힘쓰기도 했습니다. 피츠버그에서도 그는 크나큰 업적을 남겼는데, 바로 로베르토 클레멘테의 포텐을 터뜨린 것입니다. 


피츠버그에서 그는 클레멘테의 선구안은 도저히 기를 수 없다고 판단했는지(?) 나쁜 공에 스윙을 덜 하고 컨택 능력을 향상시키기 위해서 무거운 배트를 써서 배트 스피드를 줄이자는 대책을 내놓았습니다. 그 방법은 즉효약이었습니다. 그 해 클레멘테는 0.351의 타율을 기록했고 NL 타격왕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 한 번(1968년 0.291)을 제외하고는 3할을 놓치지 않았습니다. 그 해부터 마지막 해까지 골드글러브 연속수상 기록도 시작되었기에 그에게 1961년은 여러모로 뜻깊은 해였을 듯 합니다.


그 이후로 꾸준히 공수 양면에서 훌륭한 성적을 찍으며 리그 최고의 우익수로 군림했습니다. 1964년, 1965년, 1967년에 타격왕을 또 차지했고, 1966년에는 NL MVP가 되었습니다. 1964년에는 Vera Zabala라는 분과 결혼했고, 둘 사이에는 세 자녀가 태어났습니다.


1971년 피츠버그는 다시 월드시리즈 무대를 밟습니다. 상대는 그 당시 강팀이었던 볼티모어 오리올스. 그러나 0.414의 타율에 호수비, 그리고 우승 트로피를 가져온 7차전의 솔로 홈런으로 종횡무진한 클레멘테 덕분에 피츠버그는 우승했고, 그는 월드시리즈 MVP를 수상합니다.


1972년, 그는 부상에 시달리며 102경기밖에 출장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기량은 전혀 죽지 않아서 0.312의 타율을 기록하고 골드글러브도 탔습니다. 이미 그의 나이는 38살이었지만, 그가 가야 할 길은 아직도 많이 남아 보였습니다.


그 해 뜻깊은 기록을 세웁니다. 정규시즌 마지막 타석에서 통산 3000번째 안타를 2루타로 장식한 것입니다. 그 다음 경기에서는 대수비로 나섰고 포스트시즌에서 17타석에 들어서 4안타를 때렸기 때문에 3000번째 안타를 친 것이 그의 경기장에서의 마지막 모습은 아닙니다. 그러나 정규시즌 타석으로 치면 마지막이었죠. 예나 지금이나 3000안타는 명전 첫턴 입성의 보증수표였고(3000안타 치고 명전 삼수한 비지오가 특이한 경우;) 안타수만 꾸역꾸역 채운 것도 아니고 공수겸장의 최고 우익수였던 클레멘테는 그 시점에서 이미 명예의 전당에 자기 자리를 예약해 놓은 것이나 다름없었죠. 동판 찍기만 하면 됨. 모자는 당연히 피츠버그 걸로, 오케이?







[As a Rightfielder]



앞에서도 이야기했듯 엄청난 배드볼 히터였습니다. 그래서 통산 타율이 0.317인데 통산 출루율은 0.359, 통산 볼넷%가 6.1%, 볼넷 개수는 621개에 불과합니다. 3000안타 클럽에서 볼넷이 가장 적은 멤버가 클레멘테인데, 그나마도 본즈급의 고의사구 비율(26.892%. 본즈는 26.896%) 덕분에 그만큼이라도 볼넷을 얻은 거; 근데 고의사구 비율이 저렇게 높다는 건... 그 당시 피츠버그 타선이 대체 뭐였기에...;;


볼넷을 바쳐 안타를 때려낸 안타머신이었지만, 똑딱이라고 할 만한 정도는 아닙니다. 1960년 각성 이후 꾸준히 두 자리 수 홈런을 때린 결과인 통산 240홈런은 피츠버그 프랜차이즈에서 올타임 3위의 기록입니다. 통산 타/출/장/OPS/OPS+/wRC+는 0.316/0.359/0.475/0.834/130/129. 


수비력에 대해서는 말이 필요없는 수준이죠. 당대에도 최고로 인정받았을 뿐만 아니라 훗날 세이버매트리션들도 그의 수비를 역대 최고급으로 꼽습니다. 그가 얻은 12개의 골드글러브는 외야수 부문에서는 윌리 메이스와 함께 공동 1위. 또한 팬그래프의 Defensive 수치에서는 우익수 중 역대 3위. 6위인 이치로보다도 높은데, 이치로는 아직 현역이지만 이제 수비에서 더 이상 누적을 쌓기는 힘들어 보이네요.


이렇게 공수 양면에서 빼어난 활약을 한 결과 선수의 가치를 종합적으로 판단하는 WAR 스텟에서 그는 역대 우익수들과 맞짱뜰 수치를 기록합니다.


그의 fWAR 80.6은 팬그래프 기준으로 역대 우익수 가운데 7위. 그의 위에는 베이브 루스, 행크 아론, 스탠 뮤지얼, 멜 오트, 프랭크 로빈슨, 알 칼라인이 있습니다. 그의 아래에는 폴 워너, 레지 잭슨, 토니 그윈, 새미 소사, 블라디미르 게레로, 스즈키 이치로 등등이 있습니다.


그의 bWAR 94.4는 메이저리그 전체 39위입니다. 타자 중에서는 26위입니다. 외야수 중에서 몇 위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ㅜㅜ 이런 파킹 베이스볼 레퍼런스!! 그의 바로 위에는 칼 야스트렘스키와 칼 립켄 주니어가 있고, 바로 밑에는 알 칼라인, 웨이드 보그스가 있습니다. 그는 조지 브렛, 치퍼 존스, 켄 그리피 주니어, 피트 로즈, 조 디마지오, 아지 스미스보다도 위에 있습니다. 참, 그리고 저 목록에 벨트레도 있습니다. 무려 42위 크크


그리고 클레멘테는 아직까지 역사상 유일무이한 기록 두 가지를 갖고 있습니다.


첫 번째로, 그는 끝내기 인사이드 파크 호테... 아니 장내 만루홈런의 주인공입니다. 1956년 7월 25일 시카고 컵스와의 경기에서 이 대기록을 작성했습니다. 아쉽게도 꽤 오래전 일이라 그런지 동영상을 찾을 수가 없네요. 

두 번째로, 그는 룰5 드래프트로 이적한 선수들 중 유일한 명예의 전당 헌액자입니다. (앗, 스포일러인가요? ^^)







[As a Man]



확실히 그는 언론과 친하거나 유한 성격은 아니었습니다. 데뷔 초 언론이 그를 바비(Bobby)라고 부르려 하자(Bob 혹은 Bobby는 Robert의 애칭으로 흔히 쓰임) 그는 정정을 요구했습니다. 자신의 이름이 Roberto로 똑바로 불리기를 원한 것이었습니다. 그렇잖아도 히스패닉에 대한 시선이 과히 곱지 않은 시대에, 자신에 대한 나쁜 기사를 얼마든지 써낼 수 있는 언론과 싸우는 것이 좋을 리가 없습니다. 그 정도는 그냥 웃고 넘어갔다면 로베르토 클레멘테라는 개인의 이미지는 훨씬 좋아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자신을 일개 메이저리거가 아니라 푸에르토리코와 히스패닉의 자존심으로 여겼습니다. 푸에르토리코 최고의 스타 플레이어인 자신마저 자존심을 챙기지 못하면 다른 모든 히스패닉 선수들도 무시당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기회가 될 때마다 히스패닉 선수들의 권리를 지키려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그의 고향 푸에르토리코에서 그는 스포츠 영웅을 넘어 그냥 영웅이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비슷한 예가 있으려나요? 김연아나 박지성의 우리나라에서의 위상도 클레멘테의 푸에르토리코에서의 위상과 비교가 되지 못할 듯합니다. 메이저리그에서 눈에 띄지 않는 선수였을 때도 그는 푸에르토리코 윈터리그에서는 구름관중을 몰고 다니는 슈퍼스타였는데, 메이저리그에서도 스타가 된 이후에는 말할 필요가 없겠죠.


그는 메이저리그에 진출하기 시작한 히스패닉 선수들에게는 정신적 지주였으며, 고향에서 그를 보는 푸에르토리코 민중들에게는 희망이었습니다. 1964년 고향의 성당에서 결혼식을 했을 때는 수천 명의 팬들이 몰려왔고, 1970년 7월 열린 "로베르토 클레멘테의 밤" 행사에서 그가 받은 두루마리에는 무려 30만 명의 푸에르토리코인들의 서명이 들어 있었습니다. 더 경악스러운 것은, 이 30만은 그 당시 푸에르토리코 인구의 10%에 해당하는 숫자라는 것입니다.


클레멘테는 푸에르토리코인들의 자존심이고자 노력했지만, 개인적으로도 오만한 성격은 아니었습니다. 고향에 돌아가면 그의 집은 항상 열려 있었고 아이들은 이웃 아저씨 집에 놀러 가듯 그를 찾아갔습니다. 또한 사인이나 사진, 아픈 아이들이 그를 만나고 싶다는 요청을 거절한 적이 없었다고 합니다.


또한 그는 평소 오프시즌마다 많은 시간과 돈을 사회공헌 활동에 썼습니다. 가난과 질병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을 돕고, 세상을 좀 더 살기 좋은 곳으로 개선하는 것이 자신의 의무라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의 가치관을 잘 보여주는 말이 있습니다.

["당신에게 세상을 바꿀 기회가 항상 있는데도 행동하지 않는다면, 그건 당신에게 주어진 삶을 낭비하는 것입니다."
(''Anytime you have an opportunity to make a difference in this world and you don't, then you are wasting your time on Earth.'')]


이 말은 제가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명언이기도 합니다:)







[떨어진 별]



뜻깊은 1972년 시즌이 끝나고 겨울이 깊어갔습니다. 모두가 다가올 새해를 기다리는 12월 말, 니카라과의 수도 마나과에 큰 지진이 일어났습니다. 평소 사회공헌에 힘썼던 클레멘테가 이를 외면할 리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즉시 구호품을 마련해 항공편으로 보냈습니다.


그러나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이 세 번에 걸쳐 보낸 구호품이 부패한 소모사 정권에 의해 모조리 빼돌려져(이는 나중에 산디니스타 혁명의 원인이 됩니다), 정작 구호품이 필요한 사람들에게는 하나도 전달되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클레멘테는 네 번째로 구호품을 준비하며, 이번에는 구호품을 실은 항공기에 자신이 같이 타서 자기 눈으로 구호품이 난민들에게 전해지는 것을 보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클레멘테와 푸에르토리코 윈터 리그에서 같이 뛴 톰 워커(Tom Walker)가 짐을 싣는 것을 도왔습니다. 워커는 클레멘테와 함께 비행기에도 탈 생각이었습니다. 그러나 클레멘테는 워커가 비행기에 같이 타는 것을 말렸습니다. 비행기에 실은 화물이 워낙 많기도 했고, 또 아직 총각인 워커가 니카라과로 가는 비행기를 타는 데 한 해의 마지막 날을 보내기보다는 새해가 다가오는 것을 즐기는 것이 더 좋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비행기에는 조종사와 클레멘테만이 올라탔습니다.


낡은 비행기는 클레멘테가 조금이라도 더 난민들에게 전해주고 싶어 눌러담은 화물의 무게를 견디지 못했습니다. 이륙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바다로 추락한 비행기. 비행기의 잔해와 조종사의 시신은 며칠 지나지 않아 발견되었지만 클레멘테의 시신은 끝내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 때가 1972년 12월 31일, 클레멘테의 나이는 고작 서른여덟. 사회인으로서는 물론 야구선수로도 아직 한창일 나이. 3할 타율도 기록하고 골드글러브도 받은 게 바로 지난 시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더 이상 타석에도, 외야에도 나올 수 없었습니다.


선수 생활 내내 부상과 이로 인한 고통에 시달린 클레멘테는 카이로프랙틱 마사지의 달인이 되었고, 때때로 그 큰 손으로 동료들에게 마사지를 해 주기도 했습니다. 그는 은퇴하면 마사지사가 되어 부상에 시달리는 선수들을 돕겠다고 이야기했지만, 그의 은퇴 계획 또한 이루어지지 못했습니다.


이후 한 인터뷰에서 클레멘테의 부인이 이야기한 바에 따르면, 그는 부인에게 자신이 일찍 죽을 것 같다는 말을 여러 번 했다고 합니다. 또한 1971년 시즌 중반에 리포터에게서 "이제 1년만 더 뛰면 3000안타를 달성할 수 있지 않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클레멘테의 답변은 이랬습니다.

["음, 그게, 모릅니다. 만약에 제가 살아 있다면요, 제가 전에도 말했듯이, 신이 당신이 얼마나 이 세상에 오래 머무를지 말하기 때문에 당신은 알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내일 어떤 일이 일어날지 절대 알 수 없습니다."
("Well, uh, you never know. I, I, uh, if I'm alive, like I said before, you never know because God tells you how long you're going to be here. So you never know what can happen tomorrow.")]



대기록을 코앞에 둔 젊고 팔팔한 운동선수가 죽을 걱정부터 하는 것이 흔한 일은 아닙니다. 그가 정말 수정구슬을 통해 자신의 미래를 내다보기라도 한 건지, 아니면 단지 주변 사람들의 죽음에 마음이 복잡했던 건지(그의 의붓형제들은 젊은 나이에 죽었고 그의 아버지도 그가 죽기 몇 년 전 수술을 받았습니다.) 저는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인간에게 주어진 시간은 너무나도 짧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나는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주고 떠난 선수로 기억되고 싶다."]


그는 그가 생전에 한 말처럼 그가 가진 것들은 물론이고 그 자신조차도 모조리 내주고, 길지 않은 생을 누구보다도 강렬하게 불태우며 이 세상을 떠나갔습니다.







[영원히 지상에 남은 별, 영원히 공중에 빛날 이]



그가 세상을 떠나자 푸에르토리코 정부에서는 3일간의 국민 애도 기간을 정했습니다. 메이저리그 명예의 전당 피투표 자격은 원칙적으로 은퇴 후 5년이 지나서야 주어지지만, 클레멘테에게는 이 유예기간이 특별히 면제되었습니다. 그는 이듬해 3월 특별 투표에서 92.69%의 득표율로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습니다.


다만 이 헌액에는 약간의 문제가 있었는데, 명예의 전당 동판에 그의 이름을 'Roberto Walker Clemente'로 표기한 것입니다. 이는 히스패닉의 이름 표기법에 맞지 않음에도 오랫동안 고쳐지지 않다가 2000년이 되어서야 'Roberto Clemente Walker'로 제대로 표기된 동판으로 바뀌었습니다.


메이저리그에서 실력, 스포츠맨십, 사회 공헌에서 모범을 보인 선수에게 수여하기 위해 1971년 제정한 '커미셔너 상(Commissioner's Award)'은 클레멘테가 세상을 떠난 다음 해 '로베르토 클레멘테 상(Roberto Clemente Award)'으로 개칭되어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이는 수많은 메이저리거들에게 매우 명예로운 상으로 여겨집니다. 2005년 수상한 존 스몰츠는 "선수가 이룰 수 있는 최고의 영예이다. 사이 영 상을 받았을 때보다, 월드시리즈 우승을 했을 때보다 더 기쁘다."고 수상소감을 밝히기도 했습니다.


클레멘테의 등번호인 21번은 당연히 피츠버그 파이리츠의 영구결번이 되었습니다. 유족들은 그가 최초의 히스패닉 선수라는 점과 그의 영웅적인 최후를 고려해 그의 등번호를 재키 로빈슨의 42번처럼 전 구단 영구결번해 주기를 원했으나, 재키 로빈슨의 딸은 '다른 방식으로도 그를 기념할 수 있다'는 이유로 반대했고 메이저리그 사무국에서도 들어 주지 않았습니다. 해줘도 될 텐데... 좀 아쉬울 수는 있지만, 그래도 로베르토 클레멘테 상은 모든 메이저리거들이 받고 싶어하는 명예로운 상이니 이로 아쉬움을 달래야겠습니다.


그의 고향 푸에르토리코에서는 아예 리그 이름 자체를 '로베르토 클레멘테 프로야구 리그(Liga de Béisbol Profesional Roberto Clemente - LBPRC)'로 바꿔 버렸습니다. 그리고 이 리그에서 21번은 비공식 영구결번입니다.


100년도 더 넘은 긴 역사를 가진 피츠버그 파이리츠에서도 클레멘테는 최고의 레전드 프랜차이즈 스타로 대접받으며, 아직도 팬들의 열렬한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그래선지 그가 평생 뛴 팀 피츠버그 파이리츠의 홈구장과 그 주변에는 그를 기리기 위해 만들어진 것들이 많습니다. PNC 파크의 우측 담장 높이는 약 6.4m인데, 미국인들이 쓰는 피트 단위로는 21피트입니다. 이는 생전에 우익수였던 그와 그의 등번호를 상징합니다. 그래서 이 담장의 별명도 '클레멘테 월(Clemente Wall)'입니다. 또한 PNC 파크로 가기 위해 건너야 하는 다리 이름도 '로베르토 클레멘테 다리(Roberto Clemente Bridge)'입니다. 이 다리를 건너면 클레멘테의 동상이 서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 외에도 미국과 푸에르토리코를 가리지 않고 그의 이름을 딴 시설들이 엄청 많습니다. 너무 많으므로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하는 걸로... 또한 사후에 대통령으로부터 Congressional Gold Medal, Presidental Citizens Medal(1972), Presidental Medal of Freedom(2003) 등을 수여받았습니다.


당연하다면 당연하지만 많은 메이저리거들, 특히 푸에르토리코 선수들에게 클레멘테는 절대적인 존경의 대상으로, 푸에르토리코 출신의 강타자인 카를로스 델가도는 WBC에 출전할 때 21번을 달라는 제의에 "그 번호는 클레멘테의 번호다."며 거부한 적이 있으며, 새미 소사는 자신의 영웅이었던 그를 기리기 위해 21번을 달았다는데... 이제 어디 가서 그런 얘기하면 안됩니다...


그는 또한 한 가지 놀라운 인연을 남기고 떠났는데, 김형준 기자의 칼럼을 통해 이제는 국내에서도 많이 알려져 있을 듯합니다. 클레멘테와 함께 비행기에 타지 않아 목숨을 건진 톰 워커는 이후 피츠버그에 정착해 3남 1녀를 얻었는데, 그 중 막내는 피츠버그 파이리츠에 지명되어 지금까지도 뛰고 있습니다. 그 막내가 바로 강정호의 주전 경쟁 대상이 되어 본의아니게 한국에 이름을 널리 알린 현재 피츠버그의 주전 2루수 닐 워커입니다. 그가 피츠버그 팬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는 것은 물론 홈보이이기 때문도 있지만 이런 인연도 이유가 되지 않았을까 추측해 봅니다.


하여간 그가 얻은 명예는 아무리 대단한 권력자도 부자도 갖고 싶다고 쉽게 가질 수 없는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그가 세상을 떠난 후에 주어졌다는 것이 그저 아쉬울 뿐이지만... 후세에 자기 이름 한 군데라도 남겨보겠다고, 어디 가서 선생님 소리 좀 들어보겠다고 돈을 퍼붓고 권력을 휘두르는 백만장자나 독재자들이 많지만 뜻을 이룬 사람은 드뭅니다. 그러나 그는 세상 곳곳에 '로베르토 클레멘테'라는 그의 이름을 남겼고 아직도 수많은 메이저리그 팬들과 푸에르토리코 소년들의 영웅으로 남고 있습니다.


이제는 강정호 선수가 입단해 한국에서도 관심을 받게 된 피츠버그 파이리츠는 100년이 훌쩍 넘는 긴 역사를 갖고 있습니다. 영광의 시간도 있었고, 오욕의 시간도 있었으며, 수많은 스타들과 무명의 선수들이 스쳐갔거나, 지금 여기에 머물러 있습니다. 올해 월드시리즈 우승을 할 수도, 꼴찌를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피츠버그의 항해가 끝나지 않는 한, 클레멘테는 언제나 그들의 길잡이별로 남을 것입니다. 그는 바닷속에 묻힌 것이 아니라 그저 별이 되었을 따름입니다.







[잠깐만 빡치고 가실게요]



이 부족하고 쓸데없이 긴 글을 읽다 감동에 젖어 훌쩍이시는 분이 혹시라도, 혹시라도 있으시다면 매우 죄송스럽기 짝에 없습니다. 이제는 저보다도 더 허접한 글을 읽고 감동이 아니라 분노를 느껴야 하기 때문이죠(...)


긴 말이 필요없습니다. 일단 링크(http://m.blog.naver.com/chinadrum/70160214180)를 타고 가십시다. 링크의 블로그 글에 기사 원문도 있습니다.


사실 이 기사는 큰 문제가 없습니다. 오히려 읽어 볼 만한 기사이기도 합니다. 마지막 문단만 빼면요.


문제의 마지막 문단에 대해서는 제가 링크한 블로그에도 이미 나오지만 다시 한 번 복사해 오겠습니다.


[실제 메이저리그에서는 피츠버그에서 뛰었던 로베르토 클레멘테가 38세이던 1972년 딱 3000개의 안타를 기록하고 은퇴했다. 클레멘테는 그해 3할이 넘는 타율을 기록해 충분히 몇 년 더 뛸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기록 달성 후 미련 없이 유니폼을 벗었다.]


...이게 말이야 막걸리야!! 이런 쌍쌍바! 아니 쌍쌍바는 최소한 맛있고, 둘이 나눠먹을 수라도 있지만 이 기사는 정말이지... 허허... 미련없이 유니폼을 벗었다니요. 선수생활을 계속 하고 싶으면 비시즌에 어디 가서 봉사활동도 하면 안 되나 봅니다.


클레멘테가 딱 3000안타만 기록한 것도 맞고, 그해 3할 넘는 타율을 기록한 것도 맞고, 몇 년 더 뛸 수 있었다는 것까지도 맞습니다. 그런데 그걸 다 아는 기자양반이 어떻게 그의 삶과 비극적인 죽음을 모를 수가 있나요. 제대로 조사도 하지 않고 외국 기사를 제대로 번역하지도 못하는 기레기들은 많다지만 이건 진짜 의도적으로 클레멘테를 능욕하려고 해도 이렇게 못 씁니다.


게다가 이 문단만으로도 문제가 꽃피는데, 이 기사의 전체 내용이 '3000안타라는 기록에 집착하는 야구선수가 팀플레이를 배운다는 내용의 야구 영화 소개'이고 첫머리에 홍문종 고의사구 사건까지 소개한 걸 생각해 보세요. 메이저리그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은 이 기사를 읽고 로베르토 클레멘테를 기록에만 집착한 이기적인 야구선수로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아이고 머리야...ㅜㅜ


당연히 이 기사와 기자는 욕을 바가지로 먹었고, 결국 기자는 맨 마지막 문장을 뺐습니다. 그러나 수정된 기사도 마음에 들진 않습니다. 여전히 문맥상 클레멘테가 3000안타 기록을 의식했다고 오해할 소지가 충분하거든요. 만약 제가 클레멘테의 사례를 꼭 넣어서 마지막 문단을 써야 했다면, '그렇다면 메이저리그에 정말 딱 3000안타만 치고 은퇴한 선수가 있을까? 있다. 로베르토 클레멘테는 1972년 시즌 마지막 타석에서 3천번째 안타를 쳤다. 그 시즌 3할 타율을 기록했기에 몇 년은 더 뛸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그의 마지막 시즌이었다. 기록을 세운 것에 만족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비시즌이면 항상 사회공헌에 힘쓰던 그는 그 해 시즌 이후 니카라과의 지진 피해자들에게 구호물자를 전하려 비행기에 올라탔다가 비행기 추락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래서 그의 3000안타는 많은 이들에게 안타까움을 주었다.' 뭐 이런 식으로 썼을 것 같네요...







[신의 뜻은 무엇이었을까]



저는 무신론자는 아니지만 딱히 믿는 종교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절친한 친구가 독실한 기독교인이기 때문에, 신이 매우 독실하고 착한 신자에게조차도 항상 좋은 것만 주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알 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자기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는 법과 도덕도 거리낌없이 어기는 사람은 부와 명성을 모두 거머쥐는데, 왜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나는 사람들은 항상 효자, 효녀에 어려운 환경에서도 성실하게 살아가던 착한 사람일까요.


누군가는 클레멘테가 2972안타나 2994안타도 아니고 딱 3000안타를 맞춘 것이 신의 뜻이라고 이야기하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차라리 운명의 장난이었다면 또 모를까, 아직 한창 뛸 수 있는 선수, 꿈의 4000안타에 도전할 수 있었던 선수를 3000안타에서 멈추게 하는 신의 뜻도 있나요. 

(* 메이저리그에서 4000안타를 친 선수는 증조할아버지 시절 선수인 타이 콥과 가만 있어도 명전 가실 분이 자기 팀에다 도박을 해서 모든 기록을 흑역사로 만든 피트 로즈밖에 없습니다. 이치로는 미일 통산기록.)

200안타를 5년, 150안타를 7년 쳐야 하기 때문에 그 때 나이가 38세였던 그에게 쉬운 일이라고는 할 수는 없지만, 마지막 시즌에도 노쇠화의 기미가 전혀 없었던 만큼 가능성이 떨어지지도 않습니다. 3-4년 주전으로 뛸 여력은 있었을 테고, 이후 기량이 떨어지더라도 백업이나 대타 선수로 몇 년 더 버틸 수 있으니까요. 나이를 감안해서 가능성을 짜게 먹여도 최소 3500안타는 쳤을 것이고, 그것도 메이저리그에서 5명(타이 콥, 피트 로즈, 행크 아론, 스탠 뮤지얼, 트리스 스피커)밖에 달성하지 못한 대기록입니다.


게다가 그 과정에서 쌓는 WAR를 생각하면, 우익수 부문에서 올타임 몇 위까지 올라갔을지 또 모릅니다. 팬그래프 기준으로 그는 매 시즌 4 이상의 WAR는 꾸준히 찍어 줬는데, 그 페이스로 한 5년 뛰었다면 그의 커리어 WAR는 100이 넘어갑니다. 우익수가 아니라 타자 전체에서 커리어 WAR가 100이 넘는 선수는 20명뿐입니다.


그렇지만 그 숫자놀음이 뭐 큰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깟 기록 못 세우고 그 해 은퇴했더라도 그는 충분히 위대한 선수 중 하나였고, 또 선수가 아닌 인간으로서 앞으로도 더 많은 족적을 남기고 세상에 더 많은 일을 할 사람이라는 것은 명백하지 않습니까.


굳이 그를 데려간 신의 뜻에 대해 추측하라면, 저는 이렇게 답하겠습니다. 신은 클레멘테가 세상에 더 많은 기여를 할 방법을 생각했고, 그의 마음을 세상 모든 사람들이 알기 원했다고.


클레멘테가 그 비행기를 타지 않고 평탄하게 선수 생활을 끝마쳤다면, 꿈의 4천 안타를 치고 역대급 우익수 반열에 들었을지라도 그의 이름은 야구팬들에게서밖에 회자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고 그의 플레이를 본 사람들이 줄어들면서 그의 이름도 함께 잊혀져 갔을 것입니다. 그러나 운명의 장난 같은 마지막 3000번째 안타를 끝으로 세상을 떠나 버리면서 그와 그의 마음은 영원히 잊힐 수 없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그의 부인과 큰아들 Roberto Clemente Jr.은 세상을 떠난 남편과 아버지의 뜻을 이어가고 있으며, 그를 아는 메이저리거들과 야구팬들도 그를 기억하며 그가 꿈꿨던 세상을 위해 힘을 보태고 있습니다. 가끔은 이렇게 클레멘테가 세상을 떠난 지 20년 후에 이역만리 먼 나라에서 태어난 누군가의 가슴에 불씨를 심어 놓기도 하구요:) 


메이저리그의 스타 플레이어였지만 그의 삶이 편안하지는 않았을 것 같습니다. 그가 데뷔할 때만 해도 흑인은 버스에서 백인에게 자리를 양보해야 하는 시대였습니다. 인종과 언어라는 이중의 장벽에 시달리며, 팬들과 동료들의 마음을 얻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게다가 그의 커리어에서 항상 발목을 잡아온 부상에다 불면증에까지 시달렸던(새벽 5시가 되어서야 잠에 들었다고.... 잠 못 이루는 밤에는 종종 글을 썼다고 합니다.) 개인적인 고통도 컸을 것입니다. 신은 그가 좀 더 편안하기를 바란 것일까요. 저는 모릅니다. 다만, 그가 천국에서는 누구보다 행복하기를 바랄 뿐입니다.



Rest in Peace, Roberto Clemente Walker.






* 바깥 고리


위키피디아 : http://en.m.wikipedia.org/wiki/Roberto_Clemente

엔하위키 : http://rigvedawiki.net/r1/wiki.php/%EB%A1%9C%EB%B2%A0%EB%A5%B4%ED%86%A0%20%ED%81%B4%EB%A0%88%EB%A9%98%ED%85%8C

레전드 스토리 : http://m.sports.naver.com/worldbaseball/news/read.nhn?oid=224&aid=0000001097

EBS 지식채널e '로베르토' 1부 : http://m.ebs.co.kr/reviewShow/3014630?form&hmpId=jisike&hmpMnuSno=1&pageNum=152&sortType=&#ebsPlayer

2부 : http://m.ebs.co.kr/reviewShow/3015170?form&hmpId=jisike&hmpMnuSno=1&pageNum=152&sortType=&#ebsPlayer

(* 괜찮은 영상이기는 하지만 기록 면에서 약간 틀린 부분이 있다는 것이 아쉽습니다. 예를 들어 영상에서는 클레멘테가 2번 MVP를 받았다고 하는데, 리그 MVP는 1번(66년), 월드시리즈 MVP 1번(71년)입니다.)

팬그래프 기록 보기 : http://www.fangraphs.com/statss.aspx?playerid=1002340&position=OF 

베이스볼 레퍼런스 기록 보기 : http://m.bbref.com/m?p=XXplayersXXcXXclemero01.s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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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내린비
15/02/15 10:43
수정 아이콘
좋은글엔 추천을..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꾹꾹이
15/02/15 12:18
수정 아이콘
제가 새로 뭘 알아낸 건 없고 다 있던 글을 정리한 것뿐이에요. 좋게 보셨다면 감사할 따름입니다:)
지금뭐하고있니
15/02/15 11:05
수정 아이콘
역경은 수많은 사람을 좌절하게 하지만, 역경 끝에 남은 자를 위대하게 한다.
꾹꾹이
15/02/15 12:26
수정 아이콘
맞아요. 인종, 언어, 부상 등 모든 어려움을 이겨냈기에 그가 훌륭한 외야수를 넘어 위대한 선수로 기억되는 거겠죠. 로베르토 클레멘테, 재키 로빈슨과 같은 선수를 훌륭한 선수를 넘어 위대한 선수로 기억하는 것은 그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멋진 댓글 감사드려요:-)
꾱밖에모르는바보
15/02/15 12:53
수정 아이콘
좋은글 써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재미있다가 엄청난 감동이 밀려와 버렸습니다
꾹꾹이
15/02/15 13:17
수정 아이콘
진지해야 할 글에 드립을 막 섞었는데(...) 재밌으셨다면 다행입니다. 저는 아직도 클레멘테에 대한 글이나 영상을 보면 가슴을 찌르는 듯한 느낌을 받습니다. 사고만 없었어도 아직 살아계실 텐데 신은 대체 왜 그를 그토록 일찍 데려간 걸까요ㅜㅜ 클레멘테를 알게 된 건 얼마 되지 않았지만 정말 그의 삶과 명언은 이제 막 사회인이 되는 저의 인생의 목표와 가치관에 큰 영향을 주었고 그를 너무 좋아해서 글까지 파게 되었네요. 글을 쓰면서 유튜브 영상과 댓글까지 다 봤는데, 그의 플레이를 실제로 본 사람들이 부러웠습니다ㅠ
오클랜드에이스
15/02/15 14:43
수정 아이콘
메이저리그는 유구한 역사만큼이나 감동적인 이야기가 많죠.

좋은 글 감사합니다.
꾹꾹이
15/02/15 23:23
수정 아이콘
맞아요. 저는 그런 이야기들 되게 좋아하는데 한국에서는 역시 정보의 한계가 있죠. 영어 울렁증의 소유자인데다 어디 가야 이런 이야기들을 찾을 수 있을지 모르는 저는 슬픕니다. ㅜㅜ
+ 닉네임을 보니 빌리 빈의 오클랜드 애슬레틱스 팬이신가 보군요! 개인적으로 머니볼도 기회가 되면 꼭 읽어보고 싶은 책 중 하나입니다.
전립선
15/02/15 15:59
수정 아이콘
좋은 글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로베르토 클레멘테 상이 어떤 상인지는 알았지만 로베르토 클레멘테가 어떤 선수인지는 몰랐네요.
꾹꾹이
15/02/15 23:27
수정 아이콘
진짜 이런 상에 이름이 붙어도 아깝지 않은 선수이죠. 훌륭한 선수를 또 한 분께 알렸다는 사실에 뿌듯합니다(?)
도들도들
15/02/15 18:50
수정 아이콘
정성들여 쓴 좋은 글이네요. 잘 읽었습니다.
꾹꾹이
15/02/15 23:29
수정 아이콘
감사합니다XD
푸르미르
15/02/16 13:28
수정 아이콘
잘 읽었습니다. MLB 팬으로서 참 좋은 글이네요.
대단한 선수가 있고 역사가 있는 MLB가 참 부럽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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