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말체인 점 양해바랍니다.*
*작품에 대한 스포일러 있습니다.*
[웹툰 리뷰] 파인(巴人) - 윤태호에게서 봉준호를 읽다
1975년, 전라남도 신안군 증도면 방축리 앞바다에서 조업을 하던 한 어부의 그물에 조개와 굴 껍데기가 덕지덕지 붙은 오래 된 청자 화병이 딸려 올라온다. 이렇게 발견된 화병이 우연한 계기로 신안군청에 신고되면서 고려시대의 청자 진품으로 판명되자 신안 앞바다에 난파당한 '보물선'이 묻혔다는 소문이 파다해진다. 그러자 전국 각지에서 이 소식을 듣은 도굴꾼들이 신안 앞바다로 몰려와 민간 잠수부들과 함께 해저 유물을 몰래 건져내 암시장에 팔기 시작했고 이를 뒤늦게 알아챈 정부당국에서 1976년 부랴부랴 '신안 해저유물 발굴 조사단'을 설치하고 정식 유물 발굴 작업에 나서면서 송-원나라 시대의 중국과 고려의 유물들이 신안 앞바다 갯벌 속에서 쏟아져 나오기에 이른다. 이른바 당시 세간을 떠들썩하게 만든 '신안 해저유물 발굴사건'의 시작이다. 그리고 현재 인기리에 연재중인 윤태호의 신작웹툰
[파인]은 이러한 실제 사건을 모티브로 그려진 범죄 드라마이다. 작가의 말 그대로 '신안 앞바다에 보물을 찾으러 모인 악당들의 고군분투기'.
통수에 통수, 정치와 모략이 난무하는 '윤태호식 케이퍼 무비'
삼촌과 함께 자라며 어릴 적부터 크고 작은 범죄에 길들여진 주인공 희동과 그가 따르는 삼촌 오관석은 골동품 밀매상 송사장을 만난 자리에서 우연한 계기로 일을 하나 제안 받게 된다. 바로 '신안 앞바다 뻘 속에 묻혀있는 그릇들을 꺼내달라는 것'. 이를 계기로 우여곡절 끝에 결성된 도굴팀에는 팀장 격인 오관석과 그의 조카 희동, 중간책 송사장의 심복인 나대식, 그리고 자금줄인 금정사업 천회장의 심복 임전출이 한 팀이 되어 신안군으로 출발하게 된다. 이렇게 시작되는 웹툰
[파인]에는 크게 여섯 개의 세력이 공존한다. 우선 주인공 오관석과 오희동 등의 도굴꾼들이 속해 있는 일명 '서울팀', 그리고 현지에서 맞닥뜨린 이들의 경쟁상대인 밀도굴 전문가 조청의 '광주팀', 골동품 사기꾼 김교수의 '부산팀'. 더불어 서울팀을 배후에서 조종하는 중간책 '송사장 패거리'와 이들의 자금줄인 '천회장 측'. 마지막으로 천회장의 후처인 천회장 사모와 그의 전남편인 임전출까지 복잡한 이해관계와 먹이사슬로 얽히고설켜있다.
"거듭되는 통수에 통수, 너무 맞아 남아날 뒤통수가 없다."
웹툰을 읽으며 가장 기억에 남은 독자 댓글 가운데 하나였다. 사실 겉으론 하나의 팀처럼 보이는 '서울팀'에만 해도 오관석패와 송사장패, 천회장패, 그리고 현지에서 만난 감정전문가 하선생과 뱃사람 황선장패까지 각각의 욕망과 목적을 가진 패거리들이 한데 뭉쳐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다. 여기에 더불어 현지에서 맞닥뜨린 도굴꾼들인 '광주팀'과 '부산팀'까지 도굴 경쟁에 가세하면서 상황은 점점 예측불허에 점입가경으로 빠져든다. 상황이 복잡한 것은 서울 쪽도 마찬가지. 천회장과 도굴팀 사이에서 중간책을 맡은 송사장 패와 자금줄을 쥔 천회장 측도
동상이몽을 꿈꾸며 쉴새없이 수면 아래로 주판알을 튕기면서 상황을 예의 주시하고 판을 뒤흔든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각 인물과 패거리들 사이에 통수와 역통수가 난무하고 이해관계에 따른 정치와 모략, 이합집산이 정신없이 벌어진다. 이른바 '신안 해저유물 도굴작업'의 과정에서 드러나는 도굴꾼들과 이해관계인들의 심리 대결과 수싸움, 그리고 인간의 욕망이 피어내는 대립과 충돌을 작가는 묵직하면서도 치밀하게 그려내고 있다. 이른바
[오션스 일레븐]으로 대표되는 '케이퍼 무비'의 윤태호식 웹툰 버전이랄까.
윤태호에게서 봉준호를 읽다
결국
[살인의 추억]으로 일약 충무로 최고의 감독으로 발돋움한 봉준호가 '농촌 스릴러'라는 새로운 장르를 개척했다면, 윤태호의
[파인]은 웹툰형 '된장 케이퍼 무비', 혹은 '어촌 케이퍼 무비'라고 명명해도 손색이 없겠다. 짜임새 있고 치밀한 극의 구성, 관객을 빨아들이는 캐릭터들의 힘, 전율을 일으키는 반전의 연속까지. 만약 봉준호가 케이퍼필름을 만들면 이렇게 만들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웹툰을 읽는 내내 들었다. 이러한 봉준호와 윤태호의 첫 번째 공통점을 꼽으라면 프레임 안의 공기를 독자(관객)에게 생생하게 전달하는 디테일에 있겠다. 1980년대 화성을 스크린에 고스란히 살려낸
[살인의 추억]이 그랬듯, 윤태호의
[파인] 또한 웹툰을 읽어내려가는 독자들이 직접 1970년대의 신안군에 내려가 도굴꾼들의 범죄 행각을 바로 옆에서 지켜보는 듯한 생생함을 그대로 전달해준다. 이른바 그럴듯한 흉내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시공간의 공기와 현장감의 완벽한 재현. 이와 더불어 도무지 속을 알 수 없는, 그러면서도 각각의 개성과 아우라를 놓치지 않는 묵직하면서도 섬세한 캐릭터들의 향연과 이에 더해 얽히고설킨 인물들 간의 먹이사슬과 그 속에서 벌어지는 날카로운 심리싸움과 혀를 내두르는 반전까지. 알고는 있었지만 윤태호 작가가 역시 보통사람이 아니라는 생각과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작가의 내공에 압도당하는 느낌을 웹툰을 읽으면서 저릿저릿하게 받았다.
어쨌든 이렇게 놓고 본다면 봉준호의
[설국열차]를 웹툰화시킨
[설국열차 : 프리퀄]을 윤태호가 맡은 것 또한 우연의 일치만은 아닐 것이다. 더불어 언젠가 리뷰를 통해 봉준호의 반전에는 다른 감독에게 없는 '전율'이 있는 것이 특징이라는 얘길 한 적이 있는데 봉준호에게서 받았던 이러한 전율을 윤태호에게서 또한 여러 번 느꼈다. 이 중
[파인]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반전 가운데 하나는 신안군에 내려간 서울팀의 우두머리 오관석과 송사장이 야밤에 통화하던 도중 통화 말미에 던져지는 오관석의 한마디, "임전출이... 담궈버리라고..."였다. 어스름한 달빛이 비치는 부둣가를 배경으로 흘러나온 오관석의 이 한마디는, 한 편의 만화를 단박에 작품의 경지로 끌어올리는 작가의 내공과 클래스를 보여주는 명장면이다. 더불어 이 못지않은 전율과 감탄을 느끼게 만든 또 다른 반전의 주인공은 오관석도 오희동도 아닌 주조연 캐릭터 '천회장 사모'였는데, 천회장의 젊은 아내를 유혹하려는 나름의 계략을 가지고 천회장 집에 찾아갔다가 그녀에게 알몸으로 발가벗겨지는 굴욕과 함께 문전박대 당한 희동에게 뒤늦게 전해진 신문지 뭉치, 그리고 그 속에 숨겨진 비밀쪽지.
이 장면은 내 개인적으로 이 작품을 통틀어 가장 충격적인 장면 가운데 하나였다. 우선 주인공이 그런 식으로 황당하고 허무하게 발가벗겨지며 문전박대 당하게 될 줄은 몰랐고, 또 그 와중에서 그런 쪽지가 전해질 줄은 더욱 상상도 하지 못했다. 이렇듯 작품 내내 <더 지니어스 – 게임의 법칙>은 저리가라 할만한 심리 대결과 수 싸움, 그리고 정치와 모략이 뒤엉켜 판을 뒤흔든다. 과연 최후까지 생존하는 승자는 누구일까? 아니, 그 승자가 진정한 승자(勝者)이기는 한 걸까? 이쯤 되면 작가가 독자의 마음을 들었다 놨다 유린하고 농락하는 수준을 넘어서서 '나는 곧 죽어도 이 작가의 속을 예측할 수 없겠구나.'라는 경탄이 깔린 무력감마저 느끼게 만드는 그런 경지이다. 결국 따지고 보면 이 작품에서 가장 '매운 머리'를 지닌 인물은 판을 읽어내는 기지와 고도의 판단력으로 위기를 헤쳐 나가는 핵심 주인공 오관석도, 뒤에서 판을 쥐락펴락하려드는 천회장 사모도 아닌 바로 작가 자신인지도 모른다.
왜 '파인'인가
["이 친구야. 사기를 치려면 뭐가 가장 중요한 줄 알아? 거짓말? 말재주? '진심'이 가장 중요해."] (5화 中)
사실 작품의 연재분을 다 읽고 난 지금까지 아무리 골똘히 생각해봐도 작품의 제목이 왜 '시골 촌뜨기'를 뜻하는 '파인(巴人)'인지 잘 모르겠다. 솔직히 작가의 속을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어쨌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은 재미있다. 그 재미의 본질은 무엇일까? 무엇보다 이 작품에는 '정치'가 있다. 그 정치의 본질은 욕망이라는 이름을 지닌 인간의 맨얼굴이다. 마치 바다 속 뻘밭 깊숙이에 묻혀있는 보물들처럼 우리들의 태연한 얼굴 뒤 심연, 그 기저에 거미줄처럼 뒤얽힌 채 깔려있는 욕망의 먹이사슬. 결국 해저 보물을 도굴하기 위해 신안 앞바다에서 충돌하고 이합집산하며 뒤엉킨 웹툰 속 인물들은 바로 현재 우리네 삶의 모습이기도 하다. 바다 속에서 수면 위로 드러나는 해저의 보물들에는, 인간의 가면 위로 드러나는 욕망이란 껍데기가 조개처럼 덕지덕지 뒤엉켜 붙어있다. 돈이라는 욕망의 노예가 된 인간 군상들의 치열하고 처절한 가면놀이. 그 피 터지는 악다구니 속에서 갑이 될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는 을들의 총성 없는 약육강식의 전쟁. 결국 이 작품은 파인(巴人), 즉 촌뜨기에 불과한 주인공과 인물들이 욕망 앞에 스스로를 파괴하고 무너뜨리는 파인(破人)이 되어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는 지도 모른다. 사기(詐欺)를 위해 진심이 필요한 시대, 돈을 좆기 위해 순수가 필요한 사회. 그 사회에서 살아가고자 하는, 아니 어떻게든 살아남고자 하는 우리들은 모두 파인(巴人)인 동시에 파인(破人)인 것은 아닐까.
어쨌든 윤태호의
[파인]은 읽으면 읽을수록 정말 맵다. 어떻게 범접하고 따라잡기 힘들 정도로 작가의 매운 연출력은 뜨거우면서도 차갑다. 머리를 저릿저릿하게 휘젓고 가슴을 덜컥 뒤흔드는 작품의 힘과 마력. 그 지독한 매운내가 글을 쓰는 지금까지도 가시질 않는 걸 보면 이 작품, 엄청난 물건이긴 물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