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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4/11/17 16:35:02
Name A.Dia
Subject [일반] 신을 모르는 못난이가 올리는 기도


올해 4월에 수원의 유기동물 보호소에 안락사 예정이라며 올라온 사진 하나.

첫째 반려 아이와의 좋지 못한 이별과 그로 인해서 온종일 우울감에 빠져있던 둘째 반려 아이 때문에
매일이 너울너울하던 저는 이 아이를 임시보호하기로 합니다. 안락사 당일 아이를 구조할 수 있었습니다.

어디 아프냐고 어머니가 걱정하실 정도로 끝없는 골골송을 불러대며 자기를 살려달라 애교 부리던 녀석.
첫째 녀석과 똑같은 턱시도 코트를 쳐다보며 마냥 환영해주지도 마냥 안쓰러워하지도 못한 시간을 거치고
저는 매일같이 너울거리기만 하는 저의 손을 붙잡아 준 이 아이의 어미가 되기로 하였습니다.

둘째였던 녀석이 첫째가 되고 이 녀석이 저의 둘째가 되었지요.

2.8kg의 작고 왜소한 7~8개월령으로 추정되던 중성화 된 채로 버려진 이 아이는 
저와 함께 시간을 보내며 라임이라는 이름이 생겼고 2kg이나 늘어 4.8kg의 성묘가 되었습니다.




라임이는 알러지성 만성비염이 있었습니다.
버려졌을 때 허피스나 칼리시를 오랫동안 앓았고 치료받지 못해서 생긴 후유증일거라는 소견을 여러번 받았습니다.

얼마전 알러지 약이 갑자기 지속시간이 급격히 짧아지고 눈에 진물이 흐르고 기력이 없어지기 시작했습니다.
비염과 함께 허피스나 칼리시가 왔다고 생각했고 저는 그동안 유기묘봉사를 하면서 임시보호 활동을 쉰 적이 없었기에
합사 스트레스가 있어서 그런가 걱정을 했었는데...

병원에서 라임이는 포도막염을 진단받았습니다. 그리고 복막염도 가진단 받았습니다.

라임이의 단백질 a/g 수치는 0.53

병원마다 기준이 조금씩 다릅니다만 0.8 이상이면 정상/ 0.6~0.8 위험범위/0.5 근접수치는 가진단/
0.4 이하는 일반적으로 확진을 받습니다.
93%의 치사율 7%의 오진율. 실질적인 치사율 100% 
진단이 맞다면 살 수 없는 병. 고칠 수도 없는 병. 아직 아무것도 제대로 알려진 것이 없는 병. 
고양이가 제일 걸려서는 안 되는 병.

오진이기를 바라며 할 수 있는 모든 검사를 시도했습니다.

검사결과를 초조하게 기다렸지만 사실 은연중에 알고는 있었습니다. 오진이 아니란 사실을..
유기묘 봉사를 하면서 수많은 아이들을 만났고 그 아이들 중에 또 많은 아이들이 병마에 스러져가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매일 악화되어 밖으로 표출되는 증상들. 점점 확연하게 확진에 가까워져 가는 수치들.

제 짧은 생애에서 가장 초조하고 우울한 생일을 보낸 다음 날... 라임이의 복막염 확진을 받았습니다.
제가 아는 많은 동물병원 중에서 가장 복막염 진단을 신중하게 내려주실 분이 죄인의 표정으로 7%의 오진일 가능성을
저에게 위로로 건네주실때는 울지 말자고 수 없이 다짐했던 제 결심은 눈물에 떠내려갔습니다.

말을 건네는 선생님도. 말 없이 고개만 숙이는 저도.
사실 오진일 가능성은 7%조차 되지 않는다는 걸... 이미 라임이의 생명은 바스라져 가고 있다는 걸 느끼고 있었습니다.



복막염 앓고 살았다는 아이들이 한둘 있습니다. 혹자는 오진이라고 하고 혹자는 치료되었다고 말합니다.
모르겠습니다. 내 새끼의 복막염 진단은 처음이지만.. 그 동안 복막염 걸린 여러 아이를 지켜봐온 경험이 있는 저로서는....
헛된 희망으로 생각할 수 밖에 없는 현실이 참담할 뿐입니다. 
아직까지 수의학계에서 복막염이 치료되었다는 케이스는 하나도 없습니다...

여러 무지개다리를 향해 떠나간 유기묘들을 보면서 울기도 많이 울었고 가슴속에 멍도 많이 들었다 했는데
내 새끼 아픈거엔 비할 바가 아니더라구요. 먼저 간 아이들에게 다시 한 번 또 미안해지고...

함께 하게 된 지 반년하고도 조금 더.
이제야 라임이는 등 따시고 배부르게 맛난 거 먹으며 지내게 되었는데
매일 너울거리던 저도 이제야 두 녀석과 10년 뒤를 상상하며 웃을 수 있게 되었는데...

저 살면서 동물한테 해코지 한 번 한 적 없고 봉사도 정말 열심히 했는데
왜 이제야 행복하게 지내는 우리에게 이별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는 것인지.

너무나도 억울하고 억울하고 원통해서. 처음엔 이 현실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매일 웃는 얼굴로 아침 인사를 하고 나와서 출근을 하고 초조해 하면서 일을 하고 구석으로 도망가서 눈물짓고
퇴근을 하면 집 앞에서 잠시 망설입니다. 자꾸 꺼져가는 아이를 바라보는 게 너무 겁이 나더라구요.

쉼 호흡 하고 나서 에미는 밝아집니다. 오늘도 내 새끼를 향해서 한 번이라도 더 웃어줘야지요.

해줄 수 있는 일이라고는 고작 거의 하루를 누워지내는 아이 옆에서 말라가는 등을 쓸어주고 약을 먹여주고 밥을 먹여주는 일뿐.
해줄 수 있는 말이라고는 고작 "힘내자. 살자. 사랑한다" 이 말들뿐

근육이 점점 소실되고 안구에 계속 데미지를 입어 눈도 잘 못 뜨고 시력을 점점 잃어가는 아이는
제일 좋아하는 깃털 장난감을 흔들어줘도 움직이기를 힘들어합니다. 
딱딱한 건 이제 삼키기가 버겁고 숟가락으로 떠서 코 밑에 대줘야 이게 자기가 좋아하던 캔인지 간식인지 알아챕니다.
쉴 새 없이 열이 오르내리고 그로 인해서 몸살 경련을 합니다.

신 같은 건 없다 라고 말하고 다니던 에미는 누구에게인지 모를 기도를 합니다.
제발 부디 이 아이에게 아름다운 마지막을 오기를. 평안함과 행복함으로 마무리를 지을 수 있기를.

아무리 먹여도. 아무리 돈을 쏟아부어서 약을 먹이고 주사를 맞혀도 나을 수 없는 이 아이.
이제서야.. 행복함을 잠깐 맛본 이 가여운 아이. 부디 마지막은 너무 고통스럽지 않기를.


이런 못난 에미를 아는지 한 시간마다 만들어주는 유동식을 거부하지 않고 힘들 텐데도 먹어주는 아이를 보면서
함께 크리스마스를 보낼 수 있기를 꿈꾸어 봅니다.




울렁거리는 감정을 집 밖에서 풀고 들어가야 아이에게 조금이라도 더 밝게 웃어줄 수 있기에
정리하고자 하는 마음에서 쓴 글인데 너무 번잡스럽고 길어졌네요.
그럼에도 아직 하고픈 말이 많다는 게 참 우스운 일입니다.
한탄스러운 이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반려와 함께 지내시는 분들 부디 저 같은 경험 모르시고 오래도록 즐거운 시간 보내며 행복하시길.
반려가 없으신 분들도 가족에게 한 번 더 웃어 줄 수 있는 시간 보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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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andertal
14/11/17 16:57
수정 아이콘
힘드시겠네요...위로의 말씀을 전합니다...
14/11/17 17:20
수정 아이콘
제가 첫 강아지를 보낸 내용과 너무 비슷해서 슬프네요... 힘내십시오...
녹용젤리
14/11/17 17:23
수정 아이콘
지금도 라임이는 힘내고 있을거에요. 그러니까 집사님도 힘을내세요.
냐옹냐옹
14/11/17 17:46
수정 아이콘
힘내세요. 라임이에게 기적이 일어나리라 믿습니다.
이 분이 제 어머
14/11/17 20:18
수정 아이콘
라임이에게 기적이 일어나길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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