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GR21.com
- 자유 주제로 사용할 수 있는 게시판입니다.
- 토론 게시판의 용도를 겸합니다.
Date 2008/04/20 13:41:29
Name 우리고장해남
File #1 학익진.jpg (0 Byte), Download : 127
File #2 학익진2.gif (0 Byte), Download : 57
Subject [일반] 이순신 [李舜臣, 1545~1598]


[ 불멸의 이순신 OST 타이틀 곡 ]

이 타이틀 곡을 들으면 가슴이 뭉클해 지네요
저만 그런가요? 하핫..


요세 뉴스를 보니 참 암울하다는 생각이 드네요

살인 납치사건 , 일제고사부활 , FTA , 대운하 등등


마음이 좀 답답해서

불멸의 이순신의 장면들이 생각나

다시 영상을 찾아서 봤네요

'명량대첩'

'한산도대첩'



명량대첩의 배경지는

제 고향인 땅끝해남과 진도 사이의 울둘목(소용돌이 치며 우는 바다 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이죠


(진도대교 여기가 바로 울둘목 입니다 명량대첩이 일어났던 곳이죠)

어렸을 때 부터 자주 가서 그런지

친근한 면이 많죠

울둘목 물살은 언제나 봐도 장난이 아니죠

물살을 이용해서 명량대첩의 승리로 이끄신 이순신 장군의 노련함

참으로 대단합니다

( 울둘목 물살에 대해서 사진 찍으신 분이 있던데 실제로 물살이 장난이 아니에요 http://imagesearch.naver.com/search.naver?where=idetail&rev=4&query=%BF%EF%B5%D1%B8%F1&from=image&ac=1&sort=0&res_fr=0&res_to=0&merge=0&start=10&a=pho_l&f=tab&r=10&u=http%3A%2F%2Fblog.naver.com%2Fworldcio%3FRedirect%3DLog%26logNo%3D30007641529  )


이순신장군과 같은 분이 없었더라면

명량대첩 한산도대첩에서 패했다면

지금의 한국은 어떻게 돼었을지 생각만 해도 끔찍 하네요

시험 끝나고 꼭 한번 우수영 들려야겠네요





<이순신 장군님의 백의종군(白衣從軍)>


조산보 만호로 부임한 이듬해(1587년, 선조 20년) 8월, 공은 녹둔도(鹿屯島)의 둔전관(屯田官)을

겸하게 되었다. 그의 나이 40세 때의 일이었다.


녹둔도란 함경도 경흥 고을에서 60리 떨어진 곳에 있는 섬으로 우리 말로는 사슴섬이라 부르던 곳이다.

이섬은 두만강이 바다로 흘러들어가는 어귀에 있으며, 조산보에서는 20리나 떨어져 있었다.

녹둔도 둔전관이란 이섬의 농장을 관리하고 개척민을 보호하는 일을 하는 벼슬이었다

녹둔도 둔전관을 겸하게 공은 지형을 조사하고 북병사(北兵使) 이 일(李 鎰)에게 공문을 보냈다.



이러한 내용의 공문을 여러 번 보냈지만 이 일은 공의 청을 들어주지 않았다.

충무공은 하는 수 없이 튼튼한 나무로 진을 세우고 그 곳에 10여명의 군사를 두어 지키게 하는 한편 백성들의 농사일을 도와주었다.
그 해 가을에는 풍년이 들어 백성들이 기뻐하기도 하였지만 하편 불안하기도 하였다.

풍년이 든 것을 알고 곡식을 탐낸 오랑캐들이 쳐들어 올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어느날 섬 사람들이 논밭에 모두 나와 마을은 텅 비어있을 때, 오랑캐들이 몰래 쳐들어왔다.

그 때 마을을 지키던 진지에는 10명의 군사밖에 없었는데 오랑캐들이 엄청난 군사를 몰고 짙은 안개를 이용하여 쳐들어왔던 것이다.

10여명의 군사들은 용감히 싸웠으나 엄청난 수의 오랑캐들을 당해낼 수 없었다.

들에서 추수를 돕고 있다가 뜻밖의 보고를 받은 공은 군사들을 이끌고 오랑캐가 짓밟은 마을 향해 달려왔다. 날쌘 장수들과 함께 오랑캐들을 i아가 사로잡혀 가던 우리 백성 60여명을 구했다.

공은 적과 싸우는 동안 왼편 다리에 화살을 맞았지만 병사들의 사기가 떨어질까봐 화살을 뽑고 용감하게 싸웠던 것이다.



이 녹둔도 싸움에서 충무공의 군사는 크게 승리했지만 10여명의 전사자와 수십 명의 부상자를 내었고, 농민과 부녀자 수십 명이 오랑캐에게 끌려가는 피해를 입기도 하였다.

녹둔도 싸움 소식은 곧 북병사 이 일에게도 알려졌다.

이 일은 수비 군사를 더 보내달라는 공의 청을 거절하였던 것을 은폐하기 위해,

강제로 고을 옥에 가두고 거짓으로 이야기를 꾸며 조정에 올렸다.

조정에서는 이 일의 보고를 받고,

충무공에게 그 책임을 물어 백의종군(白衣從軍)케 하였다.






<이순신장군님의 명언>


* 尙有十二隻 微臣不死 (상유십이척 미신불사)

또는, 今臣戰船 尙有十二 (금신전선 상유십이)

: 아직도 배가 열두척이나 남았고, 미천한 신또한 죽지않았습니다.

배가 12척 밖에 남지 않은 상황에 한 말로써 이길 수 있다는 것을 뜻함



* 必死則生 必生則死 (필사즉생 필생즉사)

: 죽고자 하면 살것이오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오.


명랑해전때의 명언

* 勿令妄動 靜重如山  (물령망동 정중여산)
: 가벼이 움직이지 말라. 침착하게 태산같이 무거이 행동하라.

임진왜란 중 첫출전인 옥포해전을 앞두고 군사들에게 공포심과 전쟁경험 부족을 극복하고 전장에서의 여유와 냉철함을 가질 수 있도록 한 명언



* 前方急 愼勿言我死 (전방급 신물언아사)
: 싸움이 한창 급하다. 내 죽음을 알리지 마라.

1598년, 마지막 노량해전의 대격전중 갑자기 날아든 총환이 공(이순신 장군)의 왼편 겨드랑이를 맞혀 공께서 전사하는 순간 마지막까지 왜군의 격퇴를 염려한 '애국의 유언'




< 이순신 장군이 당신에게 주는 11가지 충고 >



- 집안이 나쁘다고 탓하지 마라

나는 몰락한 역적의 가문에서 태어나 가난 때문에 외갓집에서 자라났다.



- 머리가 나쁘다 말하지 마라

나는 첫 시험에서 낙방하고 서른둘의 늦은 나이에 겨우 과거에 급제했다.



- 좋은 직위가 아니라고 불평하지 말라.

나는 14년 동안 변방 오지의 말단 수비 장교로 돌았다.



- 윗사람의 지시라 어쩔 수 없다고 말하지 말라.

나는 불의한 직속상관들과의 불화로 몇 차례나 파면과 불이익을 받았다.



- 몸이 약하다고 고민 하지 말라.

나는 평생 동안 고질적인 위장병과 전염병으로 고통 받았다.



-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고 불평하지 말라.

나는 적군의 침입으로 나라가 위태로워진 후 마흔 일곱에 제독이 되었다.



- 조직의 지원이 없다고 실망하지 말라.

나는 스스로 논밭을 갈아 군자금을 만들었고 스물세 번 싸워 스물세 번 이겼다.



- 윗사람이 알아주지 않는다고 불만 갖지 말라.

나는 끊임없는 임금의 오해와 의심으로 모든 공을 뺏긴 채 옥살이를 해야 했다.



- 자본이 없다고 절망하지 말라.

나는 빈손으로 돌아온 전쟁터에서 열 두 척의 낡은 배로 133척의 적을 막았다.



- 옳지 못한 방법으로 가족을 사랑한다 말하지 말라.

나는 스무 살의 아들을 적의 칼날에 잃었고 또 다른 아들들과 함께 전쟁터로 나섰다.



- 죽음이 두렵다고 말하지 말라.

나는 적들이 물러가는 마지막 전투에서 스스로 죽음을 택했다.









어제는 참 의미 있는 날이였죠

지금의 한국을 있게 해주신 분들께

언제나 감사하고 또 감사합니다 (__)


------------------------------------------------------------

학익진(鶴翼陣)과 정(丁)자 타법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자. (궁굼하신분들은 읽어보시는 것도 좋을 것 같네요)



학익진은 기본적으로 그림에서 보듯이 적은 아군에게 종대가 되도록 하고, 아군은 횡대가 되도록 배치하는 형태에 적을 감싸 안듯 양 날개가 휘어진 배치가 된다. 이런 배치는 아군의 포격 유효 사거리 안에 적을 최대한 집어넣기 위한 것이다.

4열 종대의 적선 100척과 이순신 장군의 함대 10척이 대적을 했다면, 병력의 차이는 100:10이지만 접전하는 시점에서는 4:10이 되어 그 비율이 역전된다. 이 같은 원리를 실전에 적용한 것이 학익진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실전에서는 이대로 되지는 않겠지만, 하여간 늘어선 적을 향해 아군으로 깔때기 모양을 만들어 에워싸는 것은 전투병력의 투입 비율에서 상당한 차이를 가져오게 될 것이다.

여기에 이순신은 함포전을 통한 일정한 거리의 유지로 그 효과를 극대화 하고 있다. 다시 이순신은 조선 수군이 보유한 판옥선을 적극 활용함으로써 더욱 큰 효과를 창출해 낸다. 즉 판옥선의 특징을 이용한 것인데, 이 배는 배의 바닥이 평평해 빠르게 달릴 수는 없으나, 홀수선(배가 물속에 잠기는 선)이 낮아 수심이 낮은 서해에서 유리하며, 특히 양측의 노를 반대로 젓는 것으로 제자리에서의 회전이 가능하다는 장점이 있다.

제자리에의 회전은 판옥선을 쉽게 돌려 측면에 설치된 화포를 적에게 발포함으로써, 선수와 선미에 설치된 2문 내외의 화포에 비해 5배인 10여문의 화포를 빠르고, 또 일시에 발포할 수 있게 해 준다. 즉 학익진의 형태에서 종대로 내려오는 적은, 위의 예에서 4척이 각각 2문씩 총 8문의 화포를 발포할 수 있지만, 이순신의 판옥선은 학익진으로 4:10, 다시 화포에서 8:100의 비율이 되도록 만드는 것이다. 즉 화포전을 계속하는 한 100:10의 전세는 8:100으로 역전된 것이다.



다시 판옥선의 제자리 회전 기능을 적극 활용한다면, 좌현의 포를 발포할 때, 우현은 장전을 하고, 발포가 끝나면 배를 회전시킨다. 이 시간에 발포를 마친 좌현은 장전을 하고, 장전이 끝난 우현이 적에게 향하면 다시 발포한다. 다시 배는 회전하고 회전이 끝나면 장전이 마쳐진 좌현이 다시 발포할 수 있는 것이다. 이로서 앞서의 8:100은 다시 8:200의 비율로 역전이 된다. 바로 이것이 정(丁)자 타법으로 적선에 화포가 많은 측면을 향하게 하는 것이 핵심인 것이다. 그림의 학익진도는 바로 학익진과 정자타법이 동시에 적용되는 형태인 것이다.

이쯤의 설명이 충분한지는 모르겠으나, 이 전술을 고안하고 실천한 이순신이 왜 대영웅이고, 대제독인지는 분명한 것이다. 설명을 통해서는 쉽게 느껴질 수 있으나 이순신이 이와 같은 전술을 사용하고 있을 때, 이에 당하기만 했던 10여만 이상의 왜군들은 임진왜란이 끝날 때까지 아무도 패전의 원인을 찾아내지 못했다. 또 이 전술의 원리를 일본이 알아낸 것은 300년이나 지난 후였으며, 이순신 이후 대략 이때쯤까지 전세계의 해전은 계속 접현전으로 일관해 왔던 것이다. 즉 이순신이순신 이후 가장 빨리 이 전술을 고안한 사람보다 300년이나 빨랐던 것이다.



이순신의 학인진도를 보면 얼마나 정교한 진형인지 감탄하게 된다. 그림의 학익진 형태(즉 포위진형)는 이 진형이 가질 수 있는 가장 큰 약점을 완벽하게 커버하는 것이다. 그 약점의 첫번째는 이런 진형에서 함포의 사거리가 충분치 못하거나 정확도가 떨어질 경우, 함포의 영향을 받지 않는 중심부가 발생할 소지가 있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이런 진형을 상대하는 측이 충분한 이동속도(여기서는 배의 속도)를 가지고 있고 원추형의 진을 구성해 중앙을 빠르게 돌파하는 종심돌파를 통해 진의 중앙을 깨고 좌측이나 또는 우측으로 돌아 들어가면 순식간에 상호간의 위치, 즉 횡대와 종대의 위치가 반대가 되고, 병력은 반으로 나뉘어져 각개격파 당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림에서의 학익진도는 학익진 안에 작은 학익진을 배치한 형태로, 진의 중심부에 발생할 수 있는 사각지대를 없애면서 병력의 집중을 통한 종심돌파마저 확실하게 대비하고 있는 것이다.

흐르는 물살과 바람의 영향을 받으면서 이런 형태의 진을 수십척의 함선이 유지하기란 매우 어렵다. 모든 함선이 제자리를 고수하는 것도 어려운데, 레이더 등이 없어 정확한 위치를 알기도 어렵고, 육안에 의해 수평적으로 밖에 볼 수 없는 바다에서 진의 형태를 바로 잡으며 위치를 관리하는 지휘부는 더욱더 어렵게 마련이다. 실전에서 이런 형태의 진형을 그것도 평지에서의 육군이 아닌 바다에서의 수군이 유지해 완벽하게 운영했다는 것은 이순신이 단순히 전략과 전술의 귀재일 뿐 아니라 경영의 귀재이기도 했음을 짐작케 한다.


-----------------------------

그리고 임진 왜란이 일어 나기 전에

율곡이이 선생의 '10만양병설'의 내용을 적어 볼려고 합니다



1582년(선조 15년) 12월 율곡은 병조 판서에 임명되고 이듬해인 1583년 2월 시급하게 해야 할 일들을 '6조계' 란 글로 써 올리면서 국방 강화를 건의합니다, 그 건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임현능(任賢能) : 어질고 유능한 사람을 임용할 것.

2. 양군민(養軍民) : 군사와 백성을 양성할 것.

3. 족재용(足財用) : 재용(財用)을 풍족히 할 것.

4. 고번병(固藩屛) : 번병(藩屛)78)을 견고히 할 것.

5. 비전마(備戰馬) : 전마(戰馬)를 준비할 것.

6. 명교화(明敎化) : 교화(敎化)를 밝힐 것.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조정의 반대와 신료들의 무관심 속에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율곡은 '6조계'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심사숙고한 후 1583년 4월 경연석상에서 양병십만론을 제기하기에 이릅니다



養兵十萬論 (양병십만론)

國勢之不振極矣(국세지부진극의)  

나라의 기운이 부진함이 극에 달했습니다.



不出十年當有土崩之禍(불출십년당유토붕지화 )

10년이 못 가서 땅이 무너지는 화가 있을 것입니다.



願豫養十萬兵(원예양십만병 )

원하옵건대 미리 10만의 군사를 길러서



都城二萬( 도성이만)

도성에 2만,



各道一萬(각도일만 )

각 도에 1만을 두되,



復戶鍊才(복호연재 )

그들의 세금을 덜어주고 무예를 훈련시키며



使之分六朔遞守都城(사지분육삭체수도성)

6개월로 나누어 교대로 도성을 지키게 하였다가,



而聞變則合十萬把守(이문변즉합십만파수 )  

변란이 있을 경우에는 10만 명을 합쳐 지킴으로써



以爲緩急之備(이위완급지비 )

위급한 때의 방비를 삼으소서.



否則一朝變起(부즉일조변기 )

이와 같이 하지 아니하고 하루아침에 갑자기 변이 일어날 경우,



不免驅市民而戰(불면구시민이전 )

백성들을 내몰아 싸우게 하는 일을 면치 못하여



大事去矣(대사거의 )

전쟁에 지고 말 것입니다.



이 글에서 율곡은 십만의 병사를 길러야 하는 이유와 병사를 양성하는 방법, 병사를 어떻게 활용하는지 등 대비책을 실제적으로 제시하면서, 이와 같이 하지 않을 경우에는 전쟁에 지고 말 것이라고 단정짓고 있습니다.

그러나 당시의 정치적 상황은 붕당정치로 인해 상당히 시끌벅적한 상황이였고 이러한 율곡의 상소는 반대파에 의해 제지당하게 됩니다.



이때 군사력을 강화 하였다면
그때의 피해가 훨 씬 덜 하였을텐데 라는 생각을 하게되네요
옛날이나 지금이나 이놈의 당파싸움때문에
나라가 말아 먹는걸 보면 참 아쉽네요

임진왜란때 일본군이 강진(도자기로유명)의 도자기공들 엄청나게 잡아가서
현재 일본이 도자기로는 세계에서 알아주는데
참 아쉽고 분하네요
제가 알기론 임진왜란때 일본사람들은 도자기술이 미천해서 나무나 대나무에 구멍을 내서 거기다가 밥을 먹었다고 들었는데
역사는 돌고 돈다고 하는데

아 아쉽습니다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성야무인
08/04/20 13:49
수정 아이콘
이렇게 우수한 장군이 나오기 힘든 환경(조선시대엔 무조건 문관위주에다가 그나마 무관도 육군이 주라고 알고 있습니다~)에서 역사상 유래가 없는 해군장군에 나온건 정말 아이러니 하네요. 조선에겐 축복이겠고, 일본에겐 재앙이었겠죠. 물론 임진왜란에 이순신장군이 대활약했던건 맞습니다만, 어차피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일석이조의 효과를 노려 조선을 침략한걸로 알고 있습니다.전공이 높은 다이묘들에게 더이상 줄땅도 없거니와 팽창된 불만을 감소시키기위해선 최적이었겠죠. 이기면 조선땅을 주면 되고, 져서 죽어버리면 토요토미가의 권력도 높아져 버리고, 머리는 좋았지만 결국 토요토미가 도쿠가와에게 잡아먹혔으니까요. 거기에 어이없게 희생된 조선인이나, 일본인들보면, 중세시대의 인민이랑 권력자의 소모품정모로밖에 취급받지 못했죠..
펠쨩~(염통)
08/04/20 13:58
수정 아이콘
성야무인님// 저는 반대의견을 가지고 있습니다. 조선 침략에 동원된 부대는 대부분이 히데요시의 직속부하 혹은 자기파 다이묘들이었습니다. 소모시키려고 했다면 정치적 자살행위입니다. 히데요시는 진짜로 자신이 조선과 명을 정복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민족전을 해 보지 않았으니까요. 한성을 점령하면 조선국왕은 할복하던지 항복하던지 해서 조선점령 끝. 북경만 점령하면 명 정복 끝. 천하를 통일했노라. 이런식으로 순진하게 접근한게 아닌가 싶습니다. 실재로도 한성 점령 이후 자그마치 논공 행상 및 조선 통치 계획을 세웁니다.
모모리
08/04/20 14:13
수정 아이콘
윤작이시여...
왜 대세는 막장으로 가나요... ㅠㅠ
불멸이 일본에 수출됐다던데 정말 이해가 안가네요
드라마 자체의 수준을 떠나서 해전부분은 일본에서 방영할 만한 내용이 아닐 것인데... -_-
성야무인
08/04/20 14:18
수정 아이콘
펠쨩~(염통)님// 전 약간 다르게 봅니다. 히데요시의 직속부하 혹은 자기파 다이묘들이라고 보기보다는 영지를 바탕으로 모은 사람들이라고 봅니다. 즉 무공을 세운사람들도 있지만, 자기파를 만들기 위해 유력 다이묘들에게 땅을 줘서 끌어들였다고 봅니다. 이걸 어떻게 보느냐에 따른 문제인데, 하긴 도쿠가와 이에야스도 이런식으로 따지면, 토요토미파이긴하죠. 오다때부터, 인연이 있던 장수였으니까요. 아시겠지만, 임란후 토요토미 히데요시사후, 토요토미의 적자의 후견인으로 임명한 사람이외에 뒤를 돌아서지 않은 사람은 이시다 미쯔나리밖에 없으니, 자기파사람들이라고 하기엔 조금 부족하지 않을듯 싶네요. 그리고, 임진왜란이 시작되었음에도, 국내에서 몇몇 저항세력이 있어, 주요 다이묘들이 그걸 막기 위해 남아있었습니다. 따라서 임진왜란에 투입된 장수들은 총대장을 제외한 나머지는 오히려 토요토미의 권력에 눌려 참전사람들이 아닐까 생각됩니다만, 그리고, 임진왜란 참전에 반대한 측근중에 측근이자 센류리큐같은 사람은 아예 처형을 당했으니, 자발적이긴 많이 힘들겠죠.
펠쨩~(염통)
08/04/20 14:27
수정 아이콘
모모리님// 윤작가는 이미 황진이 시절부터 막장의 기미가 보였었죠. 이순신때 안티들의 저항이 없었다면 끔찍한 결과물이 나왔을겁니다. 지금 방영되는 대왕세종은 이 안티들이 설치질 않으니 이미 끔찍한 결과물을 내놓고 있거든요.

성야무인님// 고니시, 가토, 나베시마, 우키타, 와카자키등의 장군들이 직속인데 임란때 가장 피를 본 무장들이기도 합니다. 그외에 시마즈나 모리씨 역시 세키가하라때 동군편에 선 장군들이구요. 반면 최대 정적이었던 도쿠가와는 임란에서 배제됩니다.
성야무인
08/04/20 14:35
수정 아이콘
펠쨩~(염통)님// 네 맞습니다. 고니시, 가토, 나베시마, 우키타, 와카자키이 직속이죠. 허나 총대장아래 있던 장수들을 생각하면 일견 다른 면모를 발견하게 됩니다. 도쿠가와가 정적이다 아니다는 다른의미로 봐야 됩니다. 오다 노부나가의 혼노지 사건이후, 둘이 천하를 다투기는 하였으나, 다케다가처럼 아예 대놓고, 싸운건 아닙니다. 즉 서로의 이익에 맞춰 둘이 행동하던 인물이었고, 만약에 정말 정적이었다고 봤다면 임란직후해서 죽였겠죠, 그때당시 토요토미의 군사력은 도쿠가와를 능가할정도였으니까요. 북방의 다테 마사무네를 견제하기 위해 그쪽으로 보내지는 않았겠죠(틀렸으면 수정을) 그리고,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토요토미사후 후계자의 후견인으로 선택되었던 인물입니다. 토요토미가 도쿠가와를 신뢰하지 않았다면, (혹은 배신당하지 않았을것이라고) 후견인으로 세웠을거라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08/04/20 14:36
수정 아이콘
이순신 장군에 대한 결점을 아무리 찾아볼려고 노력해도 나오는 것은 단 한가지였다고 하네요. 무술실력이 약간 부풀려져있다는 것.
인품+통솔력이 완벽했던 장군이라고 생각. 현재 우리나라 조선업이 세계 최고인 것도 이순신 장군덕이라고 하죠. 현대 정주영 회장이 500원짜리에 거북선 그림이 있는 것을 이용해 런던에서 돈을 빌려 시작한게 현재 현대중공업이라고 하니까요.
우리고장해남
08/04/20 14:39
수정 아이콘
rakorn // 저도 과가 선박해양시스템이라 몇년 뒤에 조선소에서 일하게 될 터인데

너무 자랑 스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정주영 회장님도 그렇구요

우리나라 조선업이 더 발달이 되서 유럽처럼 일본처럼

기자재를 많이 개발해서 기자재로 먹고 사는 날이 왔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기 위해서는 우리 젊은이들이 노력을 해야겠죠

하여튼 화이팅입니다!!
nicewing
08/04/20 14:45
수정 아이콘
임진왜란 자체가
그 결과로 한중일에 엄청난 정치적 변화를 불렀고
(조선은 조선초기의 사회가 붕괴, 중국은 명에서 청으로 교체, 일본은 도요토미가의 몰락과 도쿠가와의 집권 등)

임진왜란 당시 전세를 뒤집은 것이 해전이었고
(육전은 조선이 많이 밀린거야 다 잘 알거고...민심도 초기에는 조선에 그렇게 우호적이지 않았습니다.
함경도로 도망간 왕자 둘이 백성들이 잡아서 왜군에게 넘겼던 걸로 압니다. 당시 조선이 백성들에게 좋은 나라는 아니었죠.
하지만 해전에서 왜군이 괴멸되고, 보급물자가 부족해지니 왜군들은 약탈을 일삼을 수 밖에 없었고 이걸 계기로 곳곳에서 의병이
일어나게 되었던 겁니다.)

한산도 대첩은 일본 해군이 더 이상 전라도 쪽을 돌아 북상하는 것을 저지했다는 점에서 세계 4대 대첩이라해도 부족함이 없죠.
펠쨩~(염통)
08/04/20 15:01
수정 아이콘
성야무인님// 그래서 실재로 도쿠가와와 토요토미는 시즈다카게에서 싸워서 도쿠가와가 이깁니다. 그래서 못건드린 겁니다. 졌으면 박살을 냈겠죠.
성야무인
08/04/20 15:12
수정 아이콘
펠쨩~(염통)님// 모 결론은 대충 정해진듯하네요. 그나저나 토요토미의 일본내 정세와 한국내정세 이런거 다 제외하고, 토요토미는 꿈을 쫓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오다 노부나가의 꿈을요. 오다 노부나가의 꿈은 일본이 아니라, 명을 목표로 했습니다. 그만큼 스케일이 크긴했지만, 무서운건 그걸 실행시킬 사람들까지 세뇌시켰다는데 있습니다. 어느누구도 오다 노부나가가 이마가와 요시모토를 오와리의 조그마한 영주가 무찌를지 거의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고, 기적이었죠. 그의 군사적재능에 대해선 저도 인정하는 바고, 실제, 토요토미가 천하를 잡고 관백으로 임명된후, 그뒤 많은 휘하 장수들이 오다가의 중신들이 많았으니까요. 토요토미는 오다가의 꿈을 잇는 자였긴 했는데, 그건 그의 필요에 따른것일뿐, 그이상도 이이하도 아닌것 같습니다. 정말 정명가도를 했을지도 모르니까요. 물론 오다노부나가였다면, 절대 정명가도라는 말자체를 생각지도 않을인물이긴 합니다.
08/04/20 15:15
수정 아이콘
시즈타카케가 아니라 코마키 나카쿠테 전투입니다. ^^;; 시즈타카케는 시바타 가문이 하시바에게 패전한 싸움이죠. (그 때 당시는 하시바 히데요시였어요. 그 것도 노부나가가 붙여준 이름 ;;)

사실 히데요시 입장에서는 충분히 이에야스를 견제했다고 보는 게 옳을 듯 합니다. 사실 이에야스의 본거지였던 지역을 모조리 뺏어가고 그 대신 쥐어준 땅이 관동 8주. 불과 1~2년 전 호죠 가문의 영토였던 곳이죠.
모모리
08/04/20 15:15
수정 아이콘
예전부터 궁금했던 건데 한산도대첩이 비록 큰 전투였고 적을 몰살한 전투라하지만
명량해전은 불가능한 전투를 승리로 이끈 전투가 아닌가요?
그런데 왜 명량해전이 아닌 한산도대첩이 세계 4대해전인가요?
펠쨩~(염통)
08/04/20 15:16
수정 아이콘
성야무인님// 네. 실재로 오다 역시 공공연히 명을 친다고 설쳤었고 그 옆에서 토요토미가 그걸 배우고 있었더랬죠. ^^;
08/04/20 15:19
수정 아이콘
모모리님 // 세계 4대 해전으로 뽑히는 지 확실히는 모르겠지만, 제가 들은 이야기로는 학익진이라는 진영을 완벽하게 구사했기 때문에 4대 해전으로 칠 수 있다고 합니다. 승리 그 자체도 중요하지만 승리의 과정에 있어서는 한산대첩이 명량대첩보다 위라는 거죠.
펠쨩~(염통)
08/04/20 15:19
수정 아이콘
모모리님// 조선수군과 일본수군의 주력부대가 남해의 재해권을 놓고 맞장을 뜬 전투였습니다. 이 전투로 남해의 재해권이 완전히 넘어갔고 칠천량 해전전까지는 일본 수군은 부산포 근처를 벗어나지도 못했습니다.

검색해 보니 한산해전이 전술상에서 획기적인 전환점이기에 그렇게 평가 받는다고 합니다.

4대해전이라 불리는 이유는 여러 해군 사관학교에서 그렇게 가르쳐서 그렇다고 합니다. 세계 7대 불가사의랑 비슷한거죠. 특정 기준이 있다기 보다는 그냥 그렇게 불리는 것입니다. 실재로 해사를 벗어난 범위에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아무리대 한국사 전체의 인지도가 낮으니까요.
08/04/20 15:26
수정 아이콘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이야기를 다룬 대망에서도 이순신 장군에 대한 언급이 나오기는 나오더군요. 별로 많은 이야기는 없지만 이순신 장군에게 해군이 대패했다는 것에 대해서 히데요시의 어머니와 히데요시의 정실 네네(거기서는 뭐라고 나오더라;;;)가 이야기를 하면서 이러다가는 천벌받는다는 식으로 말했던 게 기억이 나는데.. 확실하지는 않네요 ;; 이 부분 기억하시는 분 있으신가요? ;;

그런데 또 재미있는게, 일본에서는 한산도나 명량보다는 진주대첩에서의 패배를 더 굴욕적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더군요. 왜일까요?
펠쨩~(염통)
08/04/20 15:34
수정 아이콘
모쿠소관이라는 가부키의 영향입니다.
(진주)목사의 일본식 발음이죠.
http://andongkim.net/zboard.php?id=free1&no=17865 생각보다 이에 관련된 링크를 찾기힘드네요.
성야무인
08/04/20 15:35
수정 아이콘
A1B2C3님// 거의 그 내용이 맞는거 같지만 저도 찾아봐야 겠고, 한산도나 명량에서 진건 워낙 이순신장군이 뛰어났고 정규군이기 때문에 그럴수도 있다라고 인정하지만, 듣보잡인 김시민과 민간인으로 구성된 군대에게 진건 숙련된 무장으로써 치욕이라고 생각됩니다. 아마 제기억으로는 고니시 유키나가가 토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쓴 편지에 그런 내용이 있었던걸로 기억됩니다만, 다시 찾아봐야겠죠~~ (나이가 들면서 치매가~~)
골이앗뜨거!
08/04/20 15:42
수정 아이콘
성야무인,펠쨩//
지금 임란 때의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 침공의도에 대해 많이 왈가왈부 하시는데,
엄연히 말하면 도요토미는 조선과 명 정벌에 대한 '자신감'이 분명 있었습니다.

단순히 국내 다이묘들과 사무라이들의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한 것이라기엔 총력전 이상의 의미가 있었구요.
실제로 임란때 출정한 주요 다이묘들을 보면 친 도요토미 세력이 주류를 이뤘습니다.
가토 기요마사, 구로다 나가마사, 고니시 유키나카, 후쿠시마 마사노리, 토도 다카토라 등으로 대표되는 측근 장수들로 부터,
모리 데루모토, 고바야카와 다카카게, 우키다 히데이에, 시마즈 요시히로, 나베시마 나오시게와 같은 친 도요토미 유력 다이묘들이 뒤를 바쳤고, 일본 최고의 수군 제독인 구키 요시타카와 모리 가문의 삼도 수군의 수장인 구루시마 미치후사와 같은 인물들이 출정한,
당시 일본 올스타 군단이라 해도 손색이 없는 구성과 규모였습니다.

이 뿐만 아니라 히데요시 본인이 큐슈 지방의 히젠 나고야에다 조선,명정벌을 위한 최전선 병참기지를 건설하고,
예비군으로 마에다 도시이에, 도쿠가와 이에야스, 우에스기 가게카쓰, 다테 마사무네와 같은 유력 다이묘들을 대기시켜
명 원정 시에 추가 파병까지 준비할 정도로 히데요시의 정치적 생명을 걸고 벌인 전무후무한 전쟁이었습니다.

물론 전쟁 발발 과정에서 대마도 도주 소 요시토모(종의지)와 고니시 유키나카의 농간이 있었던 건 사실이지만,
패왕 오다 노부나가 휘하 시절부터 그의 원대한 포부를 옆에서 지켜봤고,
또 일본 최고의 권력자 '태양인'으로 거침없이 위로 올라선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자신감에서 발로된 전쟁이었다고 봐야합니다.
그 당시 전국시대를 거치고 통일된 일본의 저력은 노쇠한 명과 무기력한 조선이 감당할 수 없을꺼라는 계산이 있었구요.
단 적인 예로 조선 원병을 위해 파병한 명나라 군대는,
선발대 조승훈의 7천,본대 이여송의 4만 3천,그리고 유정, 진린의 수군 이 정도였는데,
명은 임란 원군 파병 때문에 그 후유증에 시달리다 50년 뒤에 후금에 의해 멸망당했습니다.
그에 비해 임진,정유년에 파견된 일본군의 숫자는 총 20~30만으로 추정되고 전선 숫자도 명,조선을 압도하는 숫자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임란 직후 세키가하라 전투라는 전무후무한 대규모 내전(20만 내외)을 벌일만한 저력을 가지고 있던 게
그 당시 일본이었습니다.
(물론 명의 경우에는 워낙 국경이 넓고 방비해야할 곳이 많았기 때문에 전력을 동원할 수 없었다고 하더라도 일본의 군사력은
당시 조선은 물론이고 명을 충분히 공략할 수 있는 파괴력이 있었습니다.군대도 당시로선 최신식 군대였구요.)

도쿠가와에 대하여 말하자면,
도쿠가와는 원래 미카와,도토우미를 중심으로 도카이도 일대에 연고를 가지고 있었고 가이 다케다의 영토까지 흡수하면서,
도요토미에게 있어 가장 위협적인 다이묘였습니다.
(실제로 1585년 오다 가문의 후계자 분쟁 때 개입하여, 도요토미와의 일전을 벌인 적이 있었구요.)
이러한 도쿠가와의 세력 신장을 달가워하지 않았던 도요토미는,
오랜 전란으로 황폐해져있던 구 호죠 가문의 관동 일대의 영토를 도쿠가와에게 선사하면서 기존에 가지고 있던 도쿠가와의 영토를
빼앗아버렸습니다. 그리고 사방에 도쿠가와를 견제할 수 있는 유능한 다이묘들로 포위를 해버렸구요.
(에치고의 우에스기 가문, 아이즈의 가모 가문, 오슈의 다테, 히타치의 사타케, 우에노의 사나다 뿐만 아니라, 구 도쿠가와의 영토 일대는 자신의 충신들에게 나눠주었습니다.)
즉 일본 내에서 가장 큰 영토(250만 석)를 선사하는 척하면서 가장 고립되어 있고 황폐화되어 있는 곳에 '유배'를 보내버린 셈이었죠.

이러한 도요토미의 계략 때문에 도쿠가와는 자신의 군사적,정치적 기반을 잃는 대신에 '영토 정비'라는 이유로 임란 출병 의무를 면제받았죠. 어차피 도요토미 입장에서는 도쿠가와가 없어도 충분히 조선 정도는 함락시킬 수 있을꺼라는 계산이 있었고, 자신의 군대 상당수가 출병한 틈을 타서 반란을 일으킬 수 있을 것 까지 대비하여 당시 5대로(도요토미 정권 하 5명의 최대 유력 다이묘)중 둘(마에다 도시이에,우에스기 가게카쓰)을 조선에 출병시키지 않았습니다. 거기에 도쿠가와와 인접한 오슈의 다테 마사무네까지 남겨두는 치밀함을 발휘했죠.

제 생각으로는 도쿠가와가 도요토미로부터 정권을 탈취할 수 있었던 건, 도쿠가와 자신의 능력보단 도요토미의 자멸에 가까운 자충수(조선,명정벌)를 둔 '운빨'이 강하게 작용했다고 봅니다. 거기에 정권의 유력한 후계자 조차 제대로 정해지지 않은 상태에서 도요토미가 죽고(조카인 히데츠구와 적자이자만 젖먹이인 히데요리를 두고 많은 분란이 발생했었죠.결국 히데츠구가 할복을 하고 히데요리가 후계자가 되지만 정권을 물려받기에는 너무 어렸습니다.), 도쿠가와를 유일하게 견제할 수 있었고, 도요토미 측근 내 무단파와 문신파의 분란에 중재를 할 수 있었던 도요토미의 충신이자 친구인 마에다 도시이에까지 죽으면서 정권의 향배가 자연스럽게 도쿠가와 쪽으로 가게됐던 것 같습니다.
happyend
08/04/20 15:42
수정 아이콘
A1B2C3 님//당시 일본군은 해군은 수송군이고,주력군은 육군이었습니다.육군은 세개의 부대로 나눠지는데,그중 가장 호남을 확보,식량문제를 해결하려는 부대가 진주에서 꺾인 것입니다.그래서 저는 진주대첩을 임진왜란 최고의 전투라고 생각합니다.
08/04/20 15:49
수정 아이콘
그런데 사실 세키가하라에서 동군이라고 도쿠가와 편을 들었던 사람들 중에서 상당수는 바로 친도요토미파라는 인사들이였습니다. 가토 기요마사가 대표적인 친도요토미파의 동군 지지 장수였구요.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처음에 주장했던 것도 도요토미 가문를 농락하는 이시다 미츠나리 처단이였고... 실제로 이에야스는 오다 시절 때부터 야금야금 키워온 세력과 인망이 있던 인물이라서 충분히 그런 역할을 맡을 인물이였습니다. 물론 그 이후에는 하나둘 친도요토미파를 처단해가면서 끝내는 오사카 전투를 끝으로 도쿠가와 막부를 세우죠. 운빨도 분명 있었습니다만 운빨은 노부나가, 히데요시, 이에야스 이 삼인방에게는 공통적인 거였구요 ;; (겐신하고 신겐이 그리 가버릴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
성야무인
08/04/20 16:01
수정 아이콘
A1B2C3님// 이시다 미츠나리에 대해선 의견이 굉장히 분분합니다. 한편에선 토요토미가의 수호신이라는 의견도 있고, 한편으로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주장처럼 토요토미가문을 쥐고 흔드는 인간이라는 표현도 있습니다만, 이시다 미츠나리는 몇안되는 토요토미 히데요시에게 발탁된 인물중에 하나입니다.
골이앗뜨거!님// 네 저도 그 부분에 대해선 동의합니다. 자신감이 있었기에 친거겠죠. 제가 말하고 싶은건 임진왜란이 내부불만을 억누르기 위한 정벌이냐 아니면 정말 조선과 명의 정벌을 목적으로 한거냐라는것에 대한 논의였습니다.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천하통일후 입버릇처럼 말했던건 더이상 무장들에게 줄땅이 없어입니다. 그걸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른 문제겠죠. 솔직히, 그당시 전투전술의 연계성이나 숙련도에 있어 명,조선, 일본중에 가장뛰어났던건 일본이었습니다만, 이순신장군같은 멘치킨이 나타날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
골이앗뜨거!
08/04/20 16:14
수정 아이콘
A1B2C3님// 세키가하라 전투의 경우에는 도요토미 히데요리를 보좌해야할 도요토미의 가신들끼리 분열되면서 일어난 거죠. 그 당시 그런 가신단을 하나로 끌어모을 인물이 필요했지만 마에다 도시이에가 죽고 난 다음 그런 인물이 사실 상 없어졌고,도쿠가와를 제외한 다른 5대로들은 중앙에 개입하기에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고 대개 경륜이 부족한 사람들이었습니다.그렇기 때문에 임란 때 전력손실이 가장 없었고 일본 최대의 다이묘였으며 가장 경륜이 넘치는 도쿠가와가 부각이 될 수 밖에 없었고 이런 도쿠가와가 도요토미 정권 내 무단파의 손을 들어주면서 결국 승부는 끝장 나버렸죠.전원단결했어도 감당하기 힘든 거대한 산 앞에서 내부분열하고 말았으니..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이전 까지 대규모 군대 지휘경력이 전혀 없었던 이시다 미쓰나리의 서군은 정말 잘 싸운 셈입니다.

고바야카와 히데아키의 배신과 모리 데루모토의 방관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도쿠가와 본진을 위협했었으니 말입니다. 물론 사나다와 우에스기의 교묘한 견제 때문에 제 시간에 합류하지 못한 도쿠가와 히데타다의 별동대의 부진이 있었긴 합니다만..

운빨은 뭐..노부나가의 경우에는 신겐과 겐신의 죽음을 많이 예로 드는데, 신겐은 몰라도 겐신의 경우에는 노부나가를 멸망을 시킬 만한 상황이 못 되었다고 봅니다.한 때 호쿠리쿠는 물론이고 관동 8주를 석권하면서 호죠 가문을 오다와라 성 안으로 몰아넣었던 때에 비해서는 굉장히 쇠약해져 있던 시기였고(그 당시 관동 내 고즈케 1국 하나 일부를 겨우 소유하고 있을 정도로 관동관령으로서의 입지가 약해졌던 터고,잦은 가신단의 반란으로 출병 가능한 병사 수도 매우 줄어든 터였습니다.)비록 오다 군의 선진인 시바타 가쓰이에 군단을 작살내긴했지만 만약 기나이 일대까지 진출했다고 하더라도 날씨와 보급선 문제 때문에 철퇴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신겐의 경우에는..워낙 그 때 노부나가의 위기였던 때기도 하지만 신겐이 살아있었다고 한다한들,미카타가하라에서 무찌른 도쿠가와 가문을 서서히 정리하면서 서진할 예정이었기 때문에(워낙 안정적인 것을 추구하는 신겐의 용병술과 전략을 감안한다면)그 와중에 우에스기와 호죠의 변심(혹은 노부나가의 계략)으로 인한 후방타격을 고려한다면(충분히 가능성 있는 일입니다.)신겐 입장에서도 겨우 쥐어짜낸 2만 군대의 일부를 국경으로 보낼 수 밖에 없을 터고 그렇다면 가용병력이 4~5배가 넘는 오다군을 상대로 단기간 내에 승리하기엔 어려웠을겁니다.게다가 전쟁이 장기화 된다면 보급선 문제와 농사 문제(병농분리가 안되어 있었던 다케다 군대의 특징 상)로 결국 서진을 포기해야 했을겁니다. 일본 내 알짜 지역을 가지고 있던 노부나가와 달리 신겐은 상당히 가난한 지역에서 일어난 영주기 때문에 직업군인을 부려서 1년 내내 군대를 파견할 만큼의 재력이 없었죠.

물론 노부나가가 반드시 이겼을 꺼다라는 100퍼센트 확신을 하는 건 아니지만, 설령 그런 상황이 왔었어도 노부나가에게는 충분히 해볼만한 상황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골이앗뜨거!
08/04/20 16:20
수정 아이콘
성야무인님// 네, 그런 점에서 조선 땅에 이순신 장군과도 같은 분이 계셨다는 것은 정말 기적이라고 봐야합니다. 전투경험,병력의 질,규모 그 어떤 면에서도 희망적인 부분 하나 없는 상태에서 그 것도 전국시대를 거쳐 살아남은 역전의 용장들로 구성된 일본 최고의 수군 올스타 함대를 상대로 7년 내내 전승을 거두었다는 것은 실로 신의 경지에 이른 용병술이었다고 봐야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세계 4대 제독이니,세계 4대 해전이니 하면서 그 하나로 이순신 장군을 내세우지만, 그 중에 그 어느 인물도 어느 전투도 이순신 장군과 같이 불리한 조건에서 전투를 하고 압도적으로 승리를 거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다고 봐야합니다.즉 비교 대상이 못 되고, 우리나라가 만약 세계 굴지의 강대국이었다면 이미 해전 분야에서는 독보적인 위치로 격상되어도 반론의 여지가 없는 그런 세계사상 가장 훌륭하고도 위대한 제독이었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하심군
08/04/20 16:31
수정 아이콘
그런데 생각을 해보자면 일본의 수군들도 사실 의외로 약하지 않았을까라는생각도 해봅니다.

사실 수군이라고 하지만 스페인의 아르마다 처럼 배에 갈고리를 걸어 육탄전을 거는 방식을 주로 애용했고 이 이야기를 약간 비틀어 해석하자면 일본 수군도 결국 '배에서 잘싸우는 육군'정도로 해석해야하지 않나 싶거든요. 따라서 수군 올스타 함대라고 해도 흔히 말하는 왜구가 일본의 정규육군으로 바뀌는 수준이고 이 상황에서 육탄능력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우리 수군이 병력차를 극복하기 위해 무기고 구석에 쳐박혀있던 대포를 이용한 근대 해전으로 바꾼것이 의외로 주효하지 않았나 생각해봅니다.

물론 그렇다고 이순신 장군의 위대함이 가려지는 것은 아니지만 이순신 장군도 이러한 세계적인 해전의 흐름을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었지 않았나 싶다는 생각은 드네요.
하심군
08/04/20 16:35
수정 아이콘
결국 제가 생각하는 임진왜란의 주요 테마는 의외성이라고 생각해봅니다. 건국이후 제대로 된 전투도 해보지 못하고 국경의 산적과 해적들 때려잡는것에만 익숙한 전투경찰이 된 우리나라 군대가 수십년의 전투노하우를 갖춘 '왜구'에게 유린당하고 전투력충만한 일본군이 배도 제대로 없는 수군에게 포격당해 결국 조선과 일본 둘다에게 정신없는 전쟁이 아니었나 싶네요
08/04/20 16:38
수정 아이콘
진짜 이순신장군은 먼치킨...국가지원도 못받았고, 병력의 양이 많았던 것도 아니었고, 시기를 받고 백의종군했고..
나중에 위기 벗어났지만 그동안 일궈 났던거 다 잃고 결국 12척.. 그걸로 했다하면 승리.. 이미 인간이 아니야...
삼국지라면 지력100 통솔100 신장의 야망이라면 지력SSSS+통솔SSS(이정도는 당연히 없겠지만 ㅡㅡ)
하지만 역시 정치쪽은 힘드시겠죠.. 하지만 그건 제가 그냥 생각해본거구.. 하여튼 진짜 영웅이죠..
우리고장해남
08/04/20 16:38
수정 아이콘
하심군 //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일분 수군들 약하진 않았을 꺼라고 봅니다

근데 저 전투가 있을 쯤에 일본의 안택선은 속도는 빨랐지만 판옥선에 비해 방향바꾸기,회전하는것은 판옥선보다는 덜했으니깐요.

확실히 스포츠에서도 보면 어떤 감독이 하느냐에 따라 다르듯이

원균과 이순신장군의 차이점은 이라고 할수 있을 것 같다는 게 제 생각이네요

현대중공업에서 말하는 기업정신 ' 無에서 有를 창조한다' 게

이순신장군님이랑 딱 맞아 떨어지지 않나 싶네요

그 열악한 환경속에서 승리 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 셨다는게 대단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고장해남
08/04/20 16:43
수정 아이콘
지금 생각해도 아쉬운건

율곡 이이 선생의 '십만양병설'의 주장이 무산 됐다는게 아쉽네요

적의 침입으로부터 어느정도 군사력을 더 확충했더라면

임진왜란에서 피해 너무나 아쉽네요

해남의 옆에 있는 강진 이라는 곳도

옛날에

도자기로 굉장히 유명했었는데

임진왜란때 도자기공들 다들 잡어가서

지금 일본 도자기술이 세계에서 최고로 알아 준다는 것에 비해

참.. 역사라는게 아이러니 할수밖에요
골이앗뜨거!
08/04/20 16:47
수정 아이콘
하심군님// 이순신 제독은 참으로 지피지기면 백전불태라는 손자의 말을 가장 잘 이해하고 있던 사람 중에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자신과 자신의 군대가 가지고 있던 장점과 자원을 극대화시킬 줄 알면서도 상대가 예상할 수 없는 묘수까지 겸비한 전략의 천재라고 생각하구요.

제가 생각하는 이순신 제독의 가장 위대한 점은,칠천량 전투의 패배에서도 나타났듯이, 지형과 원거리 포격전을 무기로 삼은 조선 수군의 전술에 대해 일본군이 그에 대한 면역이 어느 정도 생긴 상태에서, 단 12척의 배로 명량 해전을 완승으로 일궈냈다는 점입니다.

또한 7년 내내 수군 시스템 조차 갖추지 못했던 해양경찰 수준의 조선 수군의 시스템을 완전 정비하여, 중앙의 지원 없이 자급자족으로 전쟁을 수행할 수 있는 기반을 스스로 마련했다는 점에서 행정가로서의 수완도 굉장했다고 봅니다.(사실 이게 더 대단하게 느껴질 때가 많습니다. 자신이 원하는 전력을 스스로 마련하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인데 말입니다.)특히 칠천량 전투 이후의 수군 복구 속도는 수군 기지가 전란지역이었음을 감안했을 때 가히 기적적인 수준이었습니다.

알면 알 수록 먼치킨스러운 게 바로 이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심군
08/04/20 16:47
수정 아이콘
우리고장해남//음..십만양병설은 제가 알기로는 좀 생각했어야하는 문제가 아닌가 싶습니다. 실제로 이이의 주장을 격하게 반대했었 분이 오성 이항복(맞나..;)이고 그 근거로 중국에 쓸데없는 의심을 키운다는 것이었거든요. 임진왜란만 보자면 십만양병설이 옳았다 생각할 수도 있지만 이 십만군대가 꼭 정예병력이 된다는 보장도 없는데다 덩치를 불리면 명에서 달음박에 달려오겠죠...육군을 키우면 가장 기겁하는게 명이니까요. 결국 어제의 롯데VS우리 5회초마냥(어?) 최악의 위기에서 정말 잘버텨냈다고 생각하시는게 가장 편할 것 같습니다.
08/04/20 16:56
수정 아이콘
명량 해전은 이순신 장군이 아니었다면 절대로 일어날수 없는 기적..

어느블로그에서 퍼온 명량해전 관련..펌질..
명량해전

전함 12척과 군사 120여명의 병력으로 전함 133척, 군사 3만여명의 적군을 맞아싸운 불가사의한 승리 명량 해전. 적군(왜)은 전함 31척이 격침되고 8천여명의 사상자가 생기는 피해를 입었으나 아군(조선)은 단 한척의 전함도 격침되지 않았으며 전사자 2명과 부상자 3명으로 경미한 피해만 입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는 이러한 기적의 승리에 대해 그다지 경외심을 느끼지 않고 있다. 과연 충무공은 어떻게 이러한 승산없는 불가능한 전투를 승리로 이끌수 있었을까?
영국의 해군사관학교 교장 게니얼 빌라드 소장은 "동양에도 넬슨에 견줄만한 해군 지휘관이 있다는 사실을 영국인들은 인정하기 힘들겠지만 이순신이 동양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해전 영웅인 것은 부정할수 없는 사실이다."고 말하였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너무 사기적이고 불가사의한 승리(13척 vs 133척-예비수군 200척)이고,
그가 아니면 승리할 수 없을 정도의 통솔력과 지력과 혜안은 어디에서 나온건지 정말.. 장군같은 제독께서 지금계시면 참 든든할텐데..
하심군
08/04/20 16:57
수정 아이콘
골이앗뜨거!님//세계해전사에 대해서는 상식수준밖에 알고 있지 않지만 해전에서 육탄전VS원거리포격전이 알고있다고 극복되는 상성은 아닌것 같더군요. 물론 노량해전같이 가면 갈 수록 소수포격전에 대한 대책을 확실하게 마련해놓긴 하지만서도 명량해전 전의 그 미칠듯한 원균(정확하게 말하자면 선조대왕)의 김치말이국수 마냥 말아먹은 전술만 아니었어도 해전에서는 확실하게 방어를 할 수 있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러고보니 참 대단하긴 대단하네요 이순신 장군님.
골이앗뜨거!
08/04/20 16:58
수정 아이콘
우리고장해남님// 십만양병설에 대해서는 글쎄요...숫자 상으로 10만이란 것을 갖춰봤자 그 당시 조선의 경제력으로 과연 그 정도 숫자의 군인을 먹여살릴 재원이 있었을까 싶네요. 또 그러한 재원이 있었다고 한들, 이에 투자 되는 비용에 상당수가 중앙관료들의 녹봉을 뺏어서 이뤄질 듯 한데 과연..그 당시 조선의 행정능력과 지배계층의 의식 수준이 감당할만한 일이었을까 싶네요. 많이 회의적이네요.
Mr.Children
08/04/20 17:03
수정 아이콘
전세계 모든 영웅을 통틀어 이처럼 먼치킨한 인물이 또 있을까요...
우리고장해남
08/04/20 17:05
수정 아이콘
골이앗뜨거! // 아무래도 그때의 경제력으로는 어림도 없었겠죠 TT 지금 400년이 지났어도 그 전을 생각하면
굉장히 아쉬운거 같네요 하긴 역사라는게 오르막길도 있음 내리막길도 있겠지만요
임진왜란 이후의 피해가 엄청났다고 배워와서
문화재 강탈이나 그런걸 보면서 흠..
역시 '약해지면 강해져라' 이게 딱 맞는말 인거같네요

예전에 TV를 보다가 문화재라는 내용으로 보게됐는데요

이집트 문화재들 보니깐
프랑스 박물관에 다 박혀있던데
프랑스 曰 : " 여기(유럽)에 있으니 이 귀한걸 볼수 있는 거지 너희가 가져가면 어림도 없다 "

이런 말투로 얘길 하더라구요

이집트 문화재 반환 꼭 돌려받았으면 하는 생각이 들고

진짜 프랑스 이기적이라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약탈한문화재 쩝....
골이앗뜨거!
08/04/20 17:07
수정 아이콘
하심군님// 물론 상성이 존재하긴 하지만 평이한 전략과 상성 차로는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의 격차가 아니었다는 점을 감안해야할 듯 싶습니다. 해전의 특성 상 배의 성능차가 크게 나지 않는 한, 육상전 처럼 소수의 기마병이 다수의 상대를 '속도'로 제압할 수 없고, 또 넓게 탁트인 바다의 특성을 감안 한다면 '기습'과 '매복'과 같은 상황이 나올 수가 없는, 순전히 한 번의 진형과 큰 판짜기로 승패의 70퍼센트 이상을 먹는, 이변이 매우 적은 싸움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한 번 크게 붙고 나면 온전히 물러서기 조차 힘들구요.(비유를 하자면 배틀크루저 간의 싸움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는 거죠.배틀 싸움 붙으면 뺄 수가 없지 않습니까.승패에 따라 피해가 확연히 차이가 나죠.)화포 적재를 제외하고 성능에서 큰 차이가 없는 판옥선과 안택선을 감안한다면 이순신 제독의 승리는 결코 상성의 우위에서 비롯한 승리라고 볼 수 없는 게 제 생각입니다.
골이앗뜨거!
08/04/20 17:14
수정 아이콘
우리고장해남님// 작년에 루브르에 가서 보고 화가 치밀더군요. 아예 통째로 뜯어서 갖고 온 만행은...정말 야만적이라고 밖에 느껴지지 않더군요. 우리나라 외규장각 도서도 돌려줄 생각이 없다고 하는 걸 보면...후...한 숨만 나올 뿐입니다.
낭만토스
08/04/20 17:17
수정 아이콘
한국위인중에 가장 존경하는 분입니다. 이순신장군님.

역사적 사실이 뭐든 간에, 존경할 만한 위인이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죠.

영화 '천군'처럼 조선시대로 가서 이순신장군님 곁에서 종군해보고 싶습니다 -_-;;;
김평수
08/04/20 17:25
수정 아이콘
정말 모든게 드라마틱하시죠 시작부터 끝까지
어려서부터 지금까지도 정말 너무나 존경하는 분
바람소리
08/04/20 17:27
수정 아이콘
펠쨩님의 의견에 동의합니다.
임진왜란은 내부 반대세력을 축소시키고자, 혹은 시선을 밖으로 돌리고자, 다이묘에게 땅을 주기위해서 한 전쟁이 아닙니다.
물론 어느정도 그런 효과를 낸 부분도 있지만요.

최측근들의 결사반대에도 히데요시가 강력하게 추진했고, 그렇다면 히데요시의 인물됨부터 보는 것이 순서겠죠.
평민출신, 엄청난 승진속도, 빠른 결단력, 추진력, 치밀함, 그리고 과대망상증.
얼핏 누군가가 떠오르기도 하네요..

히데요시는 정말 조선, 명을 정벌할 생각이었습니다. 줄땅이 없다 외에 입버릇처럼 또 말한것은 대륙으로 진출한다는 것 이었습니다.
조선, 명 정벌 구실을 위해 다이묘들에게 당근을 내걸었다고 보는것이 합리적입니다. 평민에서 전일본을 통일한 사나이가 되었는데 대륙이라고 진출 못하겠어? 라는 생각이었겠죠. 실제로도 조선, 명의 전력은 상당히 만만했고 특히 명은 불안한 상태였습니다. 실제로 몇십년있다 망해버리고요

히데요시처럼 치밀한자가 가장 믿을만한 최측근을 전쟁에 투입하고
통일된지 얼마안된 자국에서 직접 병력을 이끌고오려고 하고(이순신 장군땜에 무산되었지만..)
수도를 명으로 옮길것이라 하고
가장 큰 정적들을 전쟁에 제외하고
한번이 아닌 두번에 걸쳐 침공한다는 것

이것은 액션이 아니고 반드시 정벌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준 겁니다.
실제로 도쿠가와에 비해서 압도적인 정치력과 군사력을 보여줬던 히데요시가가 전후 자멸해버린것만 봐도.. 히데요시는 정말 정벌한 자신도 있었고 그러려고 자신의 힘을 소모한거라고 봐야죠. 정치적인 효과를 노린거라기엔 너무 파급효과가 큽니다.

사실 우리나라 교과서가 상당히 일본을 과소평가하고 있습니다만(물론 의도엔 동감합니다만...)
보급만 잘됐다면 장비상, 인원상 일본이 북경까지 점령하더라도 전혀 이상한 전쟁이 아니었습니다.
골이앗뜨거님 말씀대로 임진왜란에 투입된 일본군의 전력도 어마어마한데 그게 일본의 전병력도 아니었거든요.

그리고 히데요시와 도쿠가와는 분명한 정적이었습니다.

ps 당시 정규군과 의병의 차이는 없다고 보여야합니다. 정규군은 어차피 전쟁초기에 거의 궤멸되었습니다. 그리고 조선이 그 이상 규모의 정규군을 편성해서 준비하지도 않았고요. 이순신장군의 해군이나 김시민 장군이 갖고있었다던 오합지졸이나 같은 수준입니다. 물론 수천기에도 쫓겨다니는 조선의 육군도요. 지휘관의 차이였죠.
영웅만들기 썩 좋아하지 않습니다만, 같은 장비, 같은 규모, 같은 참모, 같은 병력으로도 일본에 참패당한 칠천량해전을 생각해보시면 이순신장군의 하나의 차이가 얼마나 큰 차이인지 느껴지실겁니다.
전술따위보다 더 어마어마한건 한산도라는 기지를 일궈서 보급까지 자체해결해버린거죠. 이건 뭐... 그냥 무장의 그릇정도가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 정치력이 부실한것이 아쉽습니다만 신념의 문제였으니..
08/04/20 17:47
수정 아이콘
반 농담으로 한마디 하자면,
충무공은 사실 외계인이었습니다.(소근소근)
스타바보
08/04/20 18:10
수정 아이콘
우왕 다 사학과 출신들이신가요...
^^;
몽키.D.루피
08/04/20 18:11
수정 아이콘
백소님// 결론인가요...크크
Withinae
08/04/20 18:25
수정 아이콘
아..다른 곳에선 볼수 없는 이런 글과 주루룩 달리는 엄청난 수준의 분석 댓글들 너무 좋아요.
08/04/20 18:33
수정 아이콘
그건 그렇고, 전쟁 이후 명은 청으로 교체됐고, 도요토미가는 도쿠가와 막부로 바뀌었습니다. 당시 조선도 이순신 장군이 살아 있었다면 역성혁명을 해봄직도 했을만 한데 하는 생각이 드는군요. 여러분들 생각은 어떠신지..
우리고장해남
08/04/20 19:17
수정 아이콘
Hong // 이순신 장군님께서 전사하지 않으셨다면 충분히 가능 했으리라 생각이 되어지네요

태조 이성계 처럼 힘이 있었던 것도 아니였구 해서

노량해전에서 이순신 장군님의 의아한 죽음설도 있긴 한데

아무래도 제가 그때 이순신 장군님 이라고 생각된다면

이 노량해전 전쟁을 통해서 시민들의 호응을 받고 역성혁명도 할 수 있었을 꺼라 생각이 되어지지만

이순신 장군은 그러한 욕심이 없을 것같네요

아마 선조가 이순신장군을 가만히 뒀을까요?

못 잡아 먹어서 난리 였겠죠

백의종군 한것만 봐도 알수 있죠

하여튼 선조가 나라를 잘 말아주셨죠
Eternity
08/04/20 19:38
수정 아이콘
Hong님//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고 봅니다. 누가 뭐래도 임란 직후 조선의 최대 실력자는 이순신 장군이였을테니까요.

해로를 통하여 한성으로 직접 밀고 들어가는 걸로 가정하면... 배후기지는 조선의 곡창인 호남지방. 보급은 해로를 통하면 가능. 어차피 임란 직후 조선의 육군 전력은 빈약한 상황. 이런저런 걸 감안하면 가능성이야 넘쳤다고 봅니다. 만약에 이순신 장군이 역성혁명을 하면서 서인 계열의 원리주의자들을 떨어내버리고, 동인계열 정치인들을 중용했다면? 우리나라의 근대-현대사의 많은 부분이 수정되었을 가능성이 정말 크죠.
happyend
08/04/20 19:38
수정 아이콘
Hong님,우리고장해남님//
어지간하면...그냥 ....넘어가려고 했지만,이순신장군이 역성혁명의 주역이 될 수 있었는가에 대한 낭만적인 평가는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한마디 합니다.

명나라가 무너진 것은 외세입니다.외세!!!!조선이 무너지는 방법은 당시로서는 외세밖에 없었습니다.왜냐하면,역성혁명의 주체가 없었기 때문이죠.

고려가 역성혁명에 무너진 것은 그 '주체'가 한세기에 걸쳐 준비되었기 때문입니다.향리출신이었던 신진사대부는 무신정권의 관리직에 문신을 대체하여 등용되었습니다.그들이 하나의 이념,즉 성리학으로 묶이며 단일세력화한것은 원나라 유학파들에 의해서이고요.
그외에도 그들의 정치세력화는 순조롭게 진행되었습니다.

하지만,임진왜란 당시 국내정세는 그렇지 않았습니다.유일한 중세왕정에 대한 대안 이념을 갖춘 것이 화담서경덕-율곡 이이라인입니다만,그들이 정치세력화할 근거가 없었죠.정치경제적으로....

이순신은 그냥...평범하나 위대한 무장일 뿐,....정치세력화의 한축으로 '역성혁명'을 이룰 이념이 없었습니다.

유명한 동양사학자가,조선의 멸망은 임진왜란으로 늦춰졌을 뿐이다라는 구절을 읽고...꽤 오래 고민하다 저도 이순신에 대해 연구했습니다만....결론은 ...이순신은 ....그냥 무장이었고,인간이었다는 것 뿐입니다.(제가 이순신을 폄하한다고 생각하실까봐...미리 말씀드리는데,저는 이순신장군 관련하여,주변 인물들의 생가까지 답사를 할만큼 탐닉했던 사람입니다)

그리고,십만 양병설에 대해서 사족을 붙이자면,제가 십만양병설이란 소문(?)의 근원지가 되는 상소문을 제법 오래전에 읽었는데요,제 독해력으로는 그 설의 핵심은 이것이었죠.
1.세금제도의 개편(이것은 대동법에 대한,제 글인 김육에 대한 글에서 말씀드렸는데,거기 나오는 인물들은 이이의 사상을 계승한 사람들입니다)
2.일자리가 없는 가난한 사람들 10만명을 정규군으로 편입하자는 얘기입니다.여진족과 일본 등 국제정세에 대한 냉철한 분석력이 돋보이는 글이죠.이 재정을 세금제도의 개편을 통해 확보하자는 내용입니다.

당연하게도....이황계 사람들에게 거부됩니다.왜냐하면,그들이 당리당략때문이 아니라,철학적 관점의 차이,국가관의 차이 때문입니다.이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선조든 누구든...한 인간의 잘잘못으로 역사를 본다면.....그 인간에게 주어지는 무게가 너무 크다는 것이죠.

십만양병설의 핵심은 ...국가관이었고,군대체제의 개편은 아닙니다.아마 십만 정규군이 있어도...임진왜란의 상황은 그리 달라지지 않았을 지도 모릅니다.일본군은 오랜 내전으로 닳고 닳은 지상군을 핵심전력으로 편제했으니까요....우리민족에게 운이 좋았다면,그들이 주력으로 삼지 않았던 수군에서 이순신을 만난것,김시민장군이라는 불세출의 명장이 있었다는 것....

(음.제가 지금 좀 제정신이 아니라...죄송합니다)
Eternity
08/04/20 19:58
수정 아이콘
happyend님// '쉽지 않은' 것은 사실이겠지만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신왕조의 개창이 반드시 대안이념이 있어야만 하는 건 아니지 않은지요? 한국사에서야 고려-조선 교체기에 대안이념이 부상합니다만.. 세계사적으로 봤을 때에도 꼭 그러한지는 의문이군요. 오히려 외세에 의한 침공을 받은 후, 전쟁이나 혼란기에 실력을 기른 무장이 신왕조를 개창하는 경우도 많지 않은가요?

뭐 어차피 역사의 가정의 가정이니 만큼 별 의미는 없는 이야기긴 합니다만. 킁킁.
happyend
08/04/20 20:29
수정 아이콘
Eternity 님///대안이념의 문제가 아니라,대안세력이요...새로운 시대를 창조하는 새로운 세력....음....그것이 이순신 장군에게 있나요?설령,백성들의 지지로,왕조를 무너뜨릴지 모르지만...그다음은요?음....
Eternity
08/04/20 20:45
수정 아이콘
happyend님// 글쎄요. 저는 뒷받침 해줄 '세력'보다는 '코어'에 방점을 찍는 게 맞지 않나 싶습니다. 핵이 있으면 세력은 모이기 마련이죠. 현체제에 대한 불평불만이 있는 이들이야 어디든지 있으니까요. 조선시대에 여러 차례 무력전복기도가 있었지만, 이순신 장군만한 파괴력과 무력을 지닌 핵은 없지 않았나 싶습니다. 이괄이나 이징옥, 홍경래 같은 이들에 비할 바는 아니지 싶군요.
08/04/20 20:48
수정 아이콘
백성들의 지지가 이순신 장군이라는 한 개인에 대한 지지라면, 역성혁명이 무슨 의미가 있나 싶습니다. 또다른 왕을 세울 뿐이죠. 백성들이 왕조 말고 다른 이념을 가지고 있지 않는한, 또 왕조를 세울 텐데, 이러한 역성혁명이 무슨 의미가 있나요? ;;
스터초짜~!
08/04/20 21:13
수정 아이콘
이순신 장군.. 정말 존경하고 또 존경합니다.. 13척의 명량해전, 학익진의 한산도대첩. 오늘 한번더 뇌리에 남는 날이었습니다.
펠쨩~(염통)
08/04/20 21:42
수정 아이콘
10만 양병설 자체가 후세의 조작의 혐의가 있습니다.
당시 실록의 기사를 보면 왜적의 침입에 대비한 십만 양병설이 아니라 이율곡이 국방부 장관으로서 북방을 순시하면서 한 일종의 형식적인 연설이랄까요. 국방부 장관이 국경에서 국방력 강화를 외치는건 당연한 것이겠죠.

무었보다 당시 조선군 편제는 30만이 넘었고 임란 첫해 동원된 병사가 10만이 넘습니다.
펠쨩~(염통)
08/04/20 21:45
수정 아이콘
Eternity님// 힘들었을 겁니다. 조선은 사대부가 세운 나라입니다. 그리고 임란때 나라를 지킨건 사대부입니다. 왕실의 위엄이 떨어질 지언정 사대부들에 대한 민중의 충성은 확고해졌고 이 사대부들이 조선 왕조의 중핵입니다. 충무공 역시 이런 사대부 중에 한명이구요. 충무공의 후손들 역시 명문 무가의 후손으로서 국난이 있을때마다 목숨을 바쳐서 나라를 지킵니다.

후세의 상상일 뿐이죠.
물탄푹설
08/04/20 21:57
수정 아이콘
히데요시는 제 주관적인 판단으로 본다면
정상적인 사람이 아니었다고 봅니다.
그는 가장 낮은지위에서 가장높은 곳으로 오른 역사상 몇안되는 사람이죠
우리역사엔 아예 없고 중국역사에나 한고조 유방 홍무제 주원장 두사람과 동급인
일반적인 상식으로 설명될수 없는 불가사의한 인물이고
고금 미증유의 영웅 걸물임에는 틀림없다고 봅니다.
그런인물이기에 어찌보면 저런 과대망상증을 가질수 있었다고 보고
저만한 사람에겐 그런것이 필수 아니 없으면 안되는 필요덕목아니었을까요?
모두가 불가능하고 모두가 난색을 하는 상식밖의 일이라도
아니 난 할수있고 난 되 하는
실재 좀 만화같은 애기아닌가하는것이 도요토미가 스노마타에 하룻만에 성을
쌓아 오다군이 당시 일본중앙으로 나가기 위해 점해야 하고 무너트려야 할 최대세력
미노와의 전쟁에 기선을 잡게했다는 것만 봐도
도요토미가 당시 일본내 정국을 싹 일소하고 조선 명을 정벌하고 대륙을 호령하겠다는
야심을 가진게 전 전혀 이상해 보이지 않습니다.
그의 전기를 읽어본후 이런사람이라면 충분히 가능하고
오히려 그가 왜 천황가를 싹 없애버리고 새로운 텐노로 올라서지 않았을까 의아할뿐입니다.
그라면 가능했으리라 보니까요
전 도요토미가 임진왜란을 일으키고 결국 명을 조선을 떡실신 시킴으로서
여진삼부족중 별볼일없는 건주여진의 소추장(자신은 건주여진의 대추장가계 출신이라고 하지만 누루하치의 가계가
매우 의문투성이라는건 당연한거겠지요 누구나 최고가 되면 일단 별볼일없는 집안이라도
휘황찬란하게 어디어디의 위대하신 누구의 자손이다 하는 식으로 미화하고
어쩌면 몽고족출신일지=전 확신 모른는 태조 이성계가 전주에서 이주한 칠대조누구의 후손이다 식으로
하는일은 다반사니) 누루하치가 후금을 탄생시키고 그것을 발판으로 아들 다이곤이 명을 멸한 이자성을
쓸어내고 청을 대륙국가로 그리고 세계제국으로 만들어내 역사의 전환을 더 깊이 봅니다.
도요토미의 존재는 거기에 있고 그의 야심을 꺽은 이순신장군의 용맹역시
임진왜란은 작게는 동아시아 허나 그 파급은 확실히 아시아 전체 세계사에 까지
이른다고 확신합니다.
일단 세계제국 청이 탄생할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준게 도요토미의 대야망 정명가도
동아시아 삼국을 이전투구의 전쟁터로 몰아넌 그의 결단으로 건주여진의 별볼일 없던
추장집안 출신중 하나였다가 건주여진 나아가 해서 야인 여진까지 꼴깍하곤 후금을 만든
누루하치
조선출병이라는 댓가없는 출혈에 매사 만전을 기해왔던 북방민족에 한눈을 팔고는 그만
이자성의 내홍으로 무너진 명
그명을 대신해 대륙으로 들어간 후금=청
그리고 지금의 중국대륙의 판세를 결정지으며 제국을 만들어낸 청삼황제
도요토미는 확실히 초세의 걸물이고
일본이 낳은 미증유의 영웅임에는 틀림없다고 확신합니다.
그가 그런 인물이기에 결과론적으로 무모한 전쟁을 일으켰다고 확신하고
적어도 우린 정말 밉지만
일본에 저런 인물이 나왔다는건 정말 부럽기까지 합니다.
08/04/20 22:05
수정 아이콘
결코 히데요시같은 인물이 부럽지 않습니다. 영웅이라는 말에도 결코 동의할 수 없습니다. 히데요시는 그저 히틀러 만큼의 과대망상증을 가진 정신병자에 불과하다고 봅니다. 7년간에 걸친 전란으로 3국이 피폐해졌고 수천만의 민중과 병사들이 고통받았습니다. 아무리 그가 입지전적인 인물이라고 하더라도 용서할 수 없는 일입니다.
물탄푹설
08/04/20 22:14
수정 아이콘
펠짱님 의견에 동감합니다.
10만양병설은 정말 아니라고 봅니다.
지금은 뭐안합니까
대통령한번 바뀔때마다 안보의식 고취 국방력강화
매번 떠들잖아요
그리고 개전초기 너무 일방적으로 몰리고 떡실신 당해서 그렇지
조선의 병력이 없진 않았죠
아니 충분했다고 봐야 할듯 합니다.
다만 많으면 무슨소용 오합지졸에 무엇보다 이순신장군의 발끝도 못따라 가는
일개 병사만도 못한 인물들이 지휘관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니
당장 저 동영상에 나오는 와카사카 야스하루에게 개전 초기 전라 충정 경상의 삼도병력
그것도 5만8천에 달했다는 조선병력이 와카사카가 이끄는 단 1600병력에게
아작이라는 말 그대로 패했는데(솔직히 명랑해전과 동급이라고 봅니다.기가막힐뿐)
병사는 충분했다고 봅니다.
문제는 매관매직 혈연 파벌 등등으로 함량미달의 인물들을 그런자리에
않힌 선조를 비롯한 당시 지도부가 IMF를 일으킨 한나라당급이라는게 문제라고 봐야할듯 합니다.
하심군
08/04/20 22:14
수정 아이콘
Shermi님//그저 과대망상증의 정신병자로 치부하기엔 위인으로서의 그의 업적이라던가 능력은 상당합니다. 단순한 평민에서 사실상의 왕(덴노는 일본에서는 신이죠. 스스로 덴노가 되는일은 영양가도 없고 일본인으로선 잘 연상이 안되는 부분입니다)이 된 정말 극히 드문 케이스의 자수성가형 인물인데다 대륙정벌을 꿈꾸고 있었던 이유도 충분히 가능하리라 예상했었기 때문이지 누구를 괴롭히려고 전쟁 일으킨것도 아니죠.(사실 전쟁이라는 행위자체가 그렇습니다. 괜히 이웃나라 괴롭히려고 전쟁일으키는 바보는 없죠.)
개인적으로 지금의 국사교육은 적어도 3국의 세계사와 병행해서 가르쳐야 된다고 생각되는 이유중 하나일까요. 우리입장에서는 너무 미운 그대이지만 일본에서는 아니듯이 역사교육은 냉정하게 분석하고 현재에 대처하는 참고서로서의 교육이 되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요약하자면 알고깝시다. 진짜.
08/04/20 22:26
수정 아이콘
하심군님//제가 무식하게 보였나요? 그렇지만 아무리 그의 일대기를 다시 보고 또한 3국의 역사와 병행해서 생각해 보아도 별로 그가 영웅이라는데에는 동의 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히틀러도 충분히 영웅이라고 불리울 수 있겠군요. 그 또한 별볼일 없는 화가에서 시작해 독일 제3제국의 총통에까지 올랐으니까요. 그리고 전쟁을 벌인 이유 또한 추축국에 의한 세계 재패가 가능했다고 생각했기에 전쟁을 벌인 것 아니겠습니까?? 히틀러도 결코 이웃나라 괴롭힐 생각은 없었겠지요...
하심군
08/04/20 22:52
수정 아이콘
Shermi님//그런관점에서 저는 히틀러가 정신병자 취급받는것도 좀 회의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실제로 히틀러가 처음에 한 일은 무너지기직전의 독일을 어떤방식이든 다시 일으켜 세운일이니 그들에게는 구국의 영웅이죠.

다만 그 이후에 한 짓이 좀 그렇습니다. 정책적인 실수도 있고 자기자신이 자신의 나라 전황에 좀 안좋은 영향을 준게 있거든요. 결정적으로 히틀러는 정말 좀 정신병자기질이 있었으니 뭐
nicewing
08/04/20 23:53
수정 아이콘
히틀러는 실제로도 정신적인 결함이 있었던 걸로 보여지기도 하죠...
그리고 히틀러는 정치적인 측면에서 재미를 봤지만 전쟁을 제대로 지휘한 적이 없지만
도요토미는 실제 군사적으로 뛰어난 능력을 보였던 것도 사실입니다.
세츠나
08/04/21 02:01
수정 아이콘
성격과 정신병력, 재능은 별개일 수도 있죠. 관계가 있을 수도 있고. 사반트 같은 경우는 오히려 정상이 아닐때 나오기도 하고요.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걸물이었던 것은 거의 확실하다고 봅니다. 오다 노부나가는 인간이라기 보단 마왕급 인사이고...(자칭 타칭)
그렇게 극동지방의 어떤 운이랄까 기운 같은게 섬나라에 집중되어 크게 거듭나 대륙까지 뻗어나가려 할 때
이순신이라는 인물이, 별로 경력도 뭐도 보잘 것 없던 인물이 갑자기 튀어나와 개발살내버린게 참...역사의 재미죠.
이순신 장군님이 없었다면, 정말 일본이 대동아공영권이니 그런 소리 나오기도 전에, 누르하치가 나대기 전에 극동을
싹 평정해버렸을 가능성도 있죠. 어떤 분 말씀대로 명나라는 암군 3단 콤보(?)로 누가 손 안대도 지혼자 누워버렸으니...
세츠나
08/04/21 02:05
수정 아이콘
암군 3단 콤보가 한 계단씩 띄우고 가정제+만력제+천계제를 말하는 거니까 임진왜란 당시 이미 2단 콤보 들어간 상태였군요.
...10만 양병을 해서 수군 키우고 이순신 제독으로 앞세워서 일본하고 얼라이 맺고 명을 갈라먹는 선택지는 없었을까요? ^^;
08/04/21 11:45
수정 아이콘
후의 명나라의 출병 후유증으로 인한 멸망을 보면 명나라가 당시 얼마나 허약했는지 잘 보여주죠. 당초 히데요시의 생각대로 조선의 왕을 사로잡았다던가 이순신 같은 인물이 없어서 속전속결로 조선이 점령당했다면 명나라도 별볼일 없었을 겁니다. 다만 점령을 했더라도 그것을 유지하는 건 사실상 불가능했을거라 생각합니다만..
목록 삭게로! 맨위로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6580 [일반] 광장은 나의 힘. [2] 네로울프3068 08/06/07 3068 3
6571 [일반] 늦게나마 집회에 다녀왔습니다. [11] Tabloid3495 08/06/07 3495 0
6539 [일반] 오늘도 다녀왔습니다. [6] 머씨형제의힘3429 08/06/06 3429 0
6348 [일반] 광화문 다녀왔습니다. [6] 브랜드뉴3057 08/06/02 3057 0
6078 [일반] 전화사기 조심하세요 [19] 우리고장해남4757 08/05/23 4757 0
5661 [일반] 2008.05.03 촛불문화제 갔다왔습니다 [24] MinWoo3787 08/05/04 3787 0
5486 [일반] 4월 25일 자이언츠 팬들의 수다. [7] 파벨네드베드3807 08/04/26 3807 0
5382 [일반] 이순신 [李舜臣, 1545~1598] [67] 우리고장해남5924 08/04/20 5924 2
2617 [일반] (펌)슬픈 시각으로 본 원균 명장설 (이번 한동욱 사태를 바라보며..) [14] opSCV4765 07/09/07 4765 0
2252 [일반] [세상읽기]2007_0808 [23] [NC]...TesTER3306 07/08/08 3306 0
2224 [일반] [여행-맛집] 피지알과의 약속 지키기 2/4 [17] 작고슬픈나무3722 07/08/06 3722 0
2198 [일반] 나름대로 생각해본 우리나라 역사의 특징 [37] 연식글러브3448 07/08/04 3448 0
2090 [일반] 한국 대통령에 관한 설문조사 [148] carrier5071 07/07/28 5071 0
808 [일반] 하얀거탑이 끝났습니다 [18] 사탕한봉지6250 07/03/11 6250 0
597 [일반] 역사상 최고의 인기를 누렸던 사람은 누구일까요?? [38] 가혹한인생7954 07/02/19 7954 0
179 [일반] pgr 식구분들은 사극을 즐겁게 시청하십니까? [25] 사탕한봉지5947 07/01/18 5947 0
50 [일반] 임진록2+ 조선의반격을 아십니까? [13] 그래서그대는12661 07/01/10 12661 0
목록 이전 다음
댓글

+ : 최근 1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