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가 필요한 시간] 선물과 뇌물, 그리고 부득탐승(不得貪勝)


오래 전 '바둑과 연애'라는 타이틀로 바둑과 연애의 공통점에 대해 글을 쓴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저런 책을 읽다보니 우리의 연애라는 게 바둑뿐만 아니라 철학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래서 오늘 글은 강신주의 [철학의 필요한 시간]과 접목시킨 연애에 관한 이야기, 이른바 [연애가 필요한 시간]입니다. (참고로 오늘 글에서 소개하는 문단들은 [철학이 필요한 시간]에서 발췌한 내용임을 밝힙니다.)





강신주와 양현석의 만남


예전 [연애학개론] 글을 통해 <힐링캠프>에 출연한 양현석 사장의 말을 소개한 적이 있습니다. "사업을 하고 거래를 하는 데 있어서 가장 무서운 사람은, 필요한 게 없는 사람이다." 라는 그의 말이었죠. 곰곰이 생각해보면 사실 이 말만큼 인간관계의 무게 추와 갑-을 관계의 핵심을 잘 짚어낸 말이 없는 듯합니다. 이러한 그의 말이, 일반적인 거래나 사업만이 아닌 연애에 있어서도 그대로 적용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누군가에게 호감을 표시하고 대시하는 이들이 연애관계에서 철저히 을이 될 수밖에 없는 현실 때문이죠.

결국 이러한 초기 연애관계의 무게 추의 핵심은 이렇습니다. '나는 상대방에게 바라는 것이 많으나, 상대방은 내게 바라는 것이 없다.' 상대방은 나와 데이트를 안 해도 상관없고 나와 사귀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바라는 게 없어요. 근데 나는 상대방을 내 애인으로 만들고 싶고 자꾸 만나고 싶고 보고 싶습니다. 그러니 양사장의 말을 빌리자면 이렇게 바라는 게 많은 나는, 상대에게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섭지 않은 사람이 돼버리는 거죠. 반대로 내 입장에선 이 세상에서 가장 어렵고 두려운 상대가 바로 그 상대방입니다. 결국 이러한 기울어진 경기장을 벗어나 동등한 눈높이로 연애를 시작하기 위해선 어찌해야할까요? 그 실마리를 저는 뇌물이 아닌 호의, 이른바 대가없는 선물에서 찾습니다. 그렇다면 이를 위해 우리에겐 어떤 과정과 마음가짐이 필요할까요? 이에 대해 철학자 강신주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선물과 뇌물의 차이


[대가를 생각하지 않겠다는 의지, 다시 말해 선물을 선물로서 주겠다는 의지는 사실 타자와의 사랑을 유지하거나, 아니면 회복하겠다는 의지와 동일한 것이다.…(중략)…"일체의 대가 없이 네가 가진 것을 주어야만 한다." "수확의 기대 없이 심는 법을 배워야만 한다." 그렇다. 데리다는 우리가 너무나 진부하다고 생각했던 지혜로운 자들의 가르침을 새롭게 되새긴 것이다. 그렇지만 그는 우리가 망각해서는 안 되는 것을 망각하고, 망각해야만 하는 것을 망각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새롭게 가르쳐주었다. 이제 우리는 뇌물이 아닌 선물을 주는 지혜를 고민해야 한다. 오직 그럴 때에만 우리에게는 설레는 사랑과 진정한 행복의 조그마한 가능성이 찾아들 것이기 때문이다.] (p.166~170/ 선물의 가능성 - 데리다,『주어진 시간』中)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들은 생일, 기념일, 입학식, 졸업식, 취업, 승진 등 선물이라는 미명하에 너무나 많은 뇌물을 주고받고 있다고 말이죠. 내가 친구 A의 생일에 십만원짜리 상품권을 주었는데 내 생일에 그 친구로부터 이만원짜리 상품권을 받고 속으로 기분이 상했다면 내가 준 십만원짜리 상품권은 순수한 선물이 아닌 (그만큼의 대가를 기대한) 뇌물에 불과하다는 얘기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좋아하는 이성에게 지속적으로 호의를 베풀고 선물을 하다가 중요한 순간에 데이트를 거절당하거나 프로포즈를 거절당하는 때에, 서운함과 불쾌감을 느끼며 (대놓고든 속으로든) 그녀를 비난하며 관계의 책임을 그녀에게 돌린다면, 우리가 지금껏 그녀에게 주었던 것은 '대가 없는 선물'이 아닌 '대가를 바란 뇌물'에 불과한 것이죠. 만약 우리가 상대에게, 선물을 진정한 선물로서 순수하게 주었다면 우리는 그 사람을 비난할 필요도, 비난할 자격도 없습니다.





호기심과 부담감의 상관관계


그리고 여기에서 중요하게 짚고 넘어가야 것이 연애관계에서의 선물과 뇌물의 차이가 우리를 향한 상대방의 호기심과 부담감의 비율을 결정하는데 적지 않은 역할을 한다는 점이죠. 만약 직장 내에서 A라는 남자가 B라는 여자를 좋아한다고 해보죠. 그리고 B는 A의 호감을 어렴풋이 느끼고 있는 상태이구요. 이런 상황에서 그녀가 A가 베푸는 호의나 도움, 혹은 선물을 일절 받으려고 하지 않는다면 이건 무엇 때문일까요? 그건 아마도 부담감 때문일 것입니다. 이 남자가 베푸는 호의와 선물이 결국은 그만큼의 대가를 바라는 뇌물이라는 사실을 직감적으로 느끼고 있기 때문이죠. A가 아무리 "부담갖지 말아라." 라고 해봐야 소용없습니다. 오히려 이런 말이 더 부담스럽게 들릴 뿐이죠.

그렇다면 이런 경우는 어떨까요? 11월 11일 빼빼로 데이에 A가 B에게 빼빼로와 함께 작은 선물을 줍니다. B 입장에서 일단 받긴 받았는데 괜히 부담스러운 겁니다. 직장 내에서 이 남자가 괜히 내 주변을 어슬렁거리면서 자꾸 눈치 보며 무언가를 요구할 것만 같고 얼마 남지 않은 크리스마스 시즌에 괜히 만나자고 데이트 신청을 할 것 같은 불안감(?)과 부담감이 엄습합니다. 근데 막상 이 남자 A는 따로 눈치를 주거나 연락을 하지도 않고 크리스마스와 연말 시즌에 데이트 신청을 하지도 않습니다. 선물을 주었다는 사실 자체를 까맣게 잊은 듯이 행동하는데 볼수록 이상한 거죠. 그러면서도 직장 내에서 소소한 업무를 도와주고 짐을 함께 들어주는 등 지속적인 호의를 베풀어줍니다. 결국 이러한 과정이 지속되면 B의 마음속에는 부담감보다는 호기심의 부피가 점점 늘어나게 되어있죠. 괜히 신경 쓰이기도 하고 이 남자의 속마음이 궁금해지는 겁니다. 호기심의 부피가 늘어난다는 얘기는 하루 동안 A에 관해 생각하던 시간의 비율이 점점 늘어난다는 이야기와도 같습니다. 하루에 채 1분도 생각하지 않던 그 사람을 어떤 날은 10분, 또 어떤 날은 20분 그리고 어떤 날은 1시간.. 이렇게 떠올리게 되는 거죠. 결국 어찌 보면 연애란 하루에 나를 1분도 채 생각하지 않던 사람을 나를 24시간 내내 생각하게 만드는 과정이기도 하죠.

그렇다면 남자 A의 입장은 무엇일까요? A는 물론 B가 좋습니다. 당연히 사귀고 싶고 데이트도 하고 싶죠. 하지만 직장 동료인 만큼 B가 나에 대해 그만큼의 부담감을 갖고 있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B의 부담감을 증폭시키면서까지 그녀와 억지로 만나고 싶진 않습니다. 나의 욕망도 중요하지만 그녀의 입장과 마음도 중요하기 때문이죠. 그래서 그녀가 스스로 만나고 싶은 마음이 들 때까지 호의를 베풀며 차분히 기다려주고 싶은 거죠. 그리고 설령 그 끝에 가서 그녀가 부담감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만나주지 않는다 해도 할 수 없다는 생각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베푸는 호의와 선물은 그녀를 내 애인으로 만들기 위한 수단이기 이전에, 내가 좋아하는 한 사람을 위해 내가 해줄 수 있는 전부이기 때문이죠. 결국 A는 다른 것 다 떠나서 그냥 '좋아하기 때문에' 잘해주는 겁니다. 만약 어느 날 갑자기 B가 A에게 "왜 나한테 자꾸 이렇게 잘해주냐?"라는 식으로 단도직입적으로 묻는다면 A는 빙긋 웃으며 이렇게 대답할 것입니다. "니가 좋아서."

저는 '선물과 뇌물'에 관한 이 작은 마음가짐의 차이가 제법 큰 결과의 차이를 만들어낸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 A와 B의 관계가 어찌될지 그 결과는 저도 모릅니다. 쉽게 장담할 수 없죠. 이 둘은 아주 높은 확률로 이번 연말 크리스마스에는 데이트를 하지 못하게 되겠죠. 하지만 제가 볼 때 이 둘은 내년 발렌타인데이나 화이트데이 즈음에는 같이 밥을 먹거나 데이트를 하게될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남자에 대한 호기심이 부담감을 압도하는 시점이 오면 B 또한 A와의 만남을 무턱대고 거절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죠. 아, 그리고 설령 거절당해도 괜찮습니다. 적어도 이 관계 안에서 A는 후회 없이, 자신의 할 도리를 다했기 때문이죠. 그것만으로도 A는 충분히, 멋진 연애한 것입니다.





부득탐승(不得貪勝), 승리만을 탐하면 얻을 수 없다


바둑의 위기십결(圍棋十訣) 중에 부득탐승(不得貪勝)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말 그대로 바둑에서 승리에만 집착하며 탐하게 되면 결국 패하게 된다는 뜻이죠. 진정한 승부사라면 승리 그 이전에 승부 그 자체를 즐길 줄 알아야 한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물론 그런다고 다 승리하는 건 아니죠. 승부를 즐기더라도 이번 대국에서는 패배할 수도 있습니다. 연애도 마찬가지로 이번에는 실패할 수도 있구요. 그게 바둑이고 인생이니까요. 하지만 이러한 자세라면 언제라도, 그리고 결국에 가서는 승리하게 되어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연애를 시작하려는 우리 또한, '상대방과 사귀어야겠다.' 라는 목적의식에 매몰되어 상대방의 입장을 헤아리지 못하고 썸 그 자체를 즐기지 못하는 패착에 빠져서는 안 됩니다. 상대방과 마주앉아 대국을 두고 있는 이 순간, 승부 그 자체에 설렘과 기쁨을 느껴야죠. '져도 할 수 없다.', '지더라도 후회 없는 한 판 대국을 즐기면 그만이다.'라는 배짱이 결국은 승리를 불러오는 원동력이 됩니다.

[누군가를 사랑하기에 앞서, 그가 누구이며 그리고 무엇을 원하는지를 알아야 한다. 그렇지만 불행히도 우리는 누군가를 알아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기 때문에 그를 알려고 하는 존재이다. 우리가 '타자란 무엇인가'라는 문제를 숙고해야만 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중략)…타자를 사랑할 때 사랑하는 마음을 제외한 일체의 마음을 비워야 한다. 오직 비어 있는 잔만이 술이 가득차기를 희망할 수 있기 때문이다.] (p.193~195/ 사랑의 지혜 - 장자,『장자』中)

이제 한번쯤 돌아봅시다. 우리의 '마음의 잔'이 상대방을 꼬셔서 어떻게든 사귀고 싶다는 '욕망의 술'로 가득 차 있지는 않은지 말이죠. 이러한 욕망이 연애의 고속도로 역할을 해준다면 다행이지만 현실은 그렇지가 않죠. 이러한 일방적인 욕심만이 가득 찬 상태에서 우리가 무엇을 헤아리고 무엇을 절제할 수 있겠습니까. 이제부터라도 우리가 좋아하는 그 누군가에게 뇌물이 아닌 선물을 주는 연습을 해보는 건 어떨까요? 이러한 마음가짐과 노력이 결국 눈앞의 관계를 넘어서서, 앞으로의 연애와 나 자신을 풍성하고 성숙하게 만드는 작은 디딤돌이 될 것이라 저는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