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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4/09/03 16:28:03
Name 글곰
Subject [일반] 奇談 - 아홉번째 기이한 이야기 (8) - 끝
글곰입니다. 이번 이야기는 여기서 끝입니다.

원래 이번 이야기를 쓴 목적은 '뒤틀린 현실'과 '부서진 사람'을 다루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결과물은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네요.
물론 글을 쓴다는 사람이 자기 글에 만족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아무래도 다소 역부족이 아니었나 하고 반성하게 됩니다.

기담 전체를 놓고 보면 몇 개의 떡밥을 투척하고, 해원과 대척점에 선 인물을 마침내 무대에 등장시킨 것 정도의 의의는 있겠습니다.  
하지만 제가 항상 댓글로 말씀드리는 것처럼 떡밥은 회수되지 않아야 제맛인 법입니다.

다음 이야기는 아마 친구와 가족에 관한 이야기가 될 것 같습니다. 글이 언제 올라오게 될지는 아무도 모르지만요.

그럼 이만 물러갑니다. 항상 읽어주시는 분들과 댓글 달아주시는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덧붙임)
Q. 장성철의 이름의 유래는 무엇일까요?
정확하게 맞추시는 분께는 기프티콘이라도 쏘아드리겠습니다. 어떻게 쏘는지도 모르지만 공부하면 되겠죠... 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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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마 후 여자가 돌아오면서 식사가 함께 날라져 왔다. 두 명의 여직원이 번갈아 가며 재빠른 손놀림으로 척척 상을 차렸다. 차라리 바위라고 불러도 될 정도로 크고 묵직한 접시가 상 한가운데에 놓였다. 접시에는 마치 유리알처럼 반들반들하게 닦인 조약돌들이 담겨 있었고, 다시 그 위에 면도날처럼 얇게 도려내진 날생선의 살을 맵시 있게 올려놓은 체였다. 여러 가지 쓰끼다시들이 함께 상에 올라왔는데 하나같이 깔끔하고 맛있어 보였다. 금세 상차림을 마친 직원들이 동시에 허리를 숙이더니 발소리도 없이 문틈 사이로 빠져나갔다. 탁, 문이 닫히는 소리가 살짝 울리고 나자 방 안에 남은 사람은 다시 해원과 여자뿐이었다.

  “드시죠.”

  여자가 음식을 권했다. 어차피 이렇게 된 거 배나 채워야겠다는 생각으로 해원은 젓가락을 들었다. 그러나 미처 젓가락을 가져다 대기도 전에 해원의 휴대전화가 진동소리를 냈다.

  “아. 실례합니다.”

  모르는 번호인 것을 확인하며 해원이 전화를 받았다. 어느 정도 나이가 느껴지는 중후한 목소리가 말했다.

  “나 장성철이오.”

  “예? 아, 안녕하십니까.”

  의뢰전화인가? 다짜고짜 자신의 이름부터 밝히고 들어오는 사람은 드문 편이었기에, 해원은 고개를 살짝 갸웃거리며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그 목소리가 다시 말했다.

  “조지연의 남편 되는 사람이네.”

  해원은 앉은 자리에서 반쯤 뛰어오를 뻔했다. 뜻밖의 급습이라도 당한 기분이었다. 한순간 여러 생각들이 한꺼번에 끓어오르며 머릿속에서 뒤엉켰다. 해원이 미처 그 생각들을 정리하기도 전에 목소리가 다시 말했다.

  “아마 그 여자하고 같이 있을 것 같은데, 실례지만 좀 바꿔줄 수 있겠나?”

  해원은 반사적으로 여자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여자는 약간의 호기심과 의도적인 무관심이 섞인 표정으로 해원을 마주보았다. 해원이 마이크 부분을 손으로 막고 속삭이듯 말했다.

  “남편분입니다. 바꿔달라고 하시는군요.”

  여자의 얼굴은 순식간에 핏기가 빠져 하얗게 되더니 곧이어 잿빛으로 변해 버렸다. 사람의 얼굴이 그토록 빠르게 변하는 모습을 본 것은 해원으로서도 처음이었다. 여자는 마치 도망치려는 것처럼 문 쪽으로 몸을 움찔거렸다. 그러나 이내 체념한 듯 자포자기한 표정으로 손을 내밀었다. 해원을 향해 내민 팔이 살짝 떨리고 있었다.

  “......여보세요.”

  여자는 떨리는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그리고 이내 그나마 남아 있던 핏기마저도 완전히 사라져 마치 하얀 종잇장 같은 얼굴이 되고 말았다. 통화를 하는 내내 그녀는 단속적인 대답 외에는 입을 열지 않았다. 얼마 후 그녀가 다시 휴대전화를 돌려주었다. 전화는 여전히 연결되어 있었다. 해원은 침을 꿀꺽 삼켰다. 그리고 최대한 침착하려 애쓰며 말했다.

  “예. 이해원입니다.”  

  “한번 만나세. 시간 괜찮나?”

  십여 년 가까이 큰무당을 대해 온 해원이었지만, 그는 큰무당 이상으로 단도직입이었다. 하지만 그대로 그쪽의 페이스에 말려드는 느낌이 싫어서 해원은 재빨리 받아쳤다.

  “저는 괜찮습니다. 언제가 좋으십니까?”

  “내일 점심때가 어떤가?”

  어디다 대고 반말이야. 해원은 속으로 투덜거리며 대답했다.

  “좋습니다. 장소를 알려주십시오.”

  “비서에게 문자로 보내도록 하겠네. 그럼 내일 보세.”

  해원은 뚝 끊어져버린 전화를 멍하니 내려다보다 여자에게 얼굴을 돌렸다. 여자는 마치 망부석처럼 방금 전의 자세 그대로 굳어 있었다. 시선은 해원을 향하고 있었지만 그녀는 아무것도 보고 있지 않았다. 그녀가 느끼는 극심한 두려움은 물리적인 무게가 되어 해원의 양 어깨를 짓눌렀다.

  다음날 해원은 약속장소로 향했다. 유명한 호텔 2층에 위치한 중식당이었다.

  “어제는 일식, 오늘은 중식. 갑자기 비싼 것만 먹으니 위장이 놀라겠는걸.”

  “맛있는 거 먹어서 좋겠네요.”

  “별로 맛있지도 않더라고. 그나저나 같이 밥 먹자고 하는 사람들이 뭐 이리 많담.”

  “인기스타네요.”

  바리가 야유하듯 말했다. 어제 토라진 이후로 바리는 내내 살짝 삐딱한 태도였다.

  ‘내 업보지 뭐.’

  그간의 경험으로 볼 때 이번 토라짐은 적어도 며칠쯤 지속되겠거니 싶었다. 그 때까진 일방적으로 져 주는 게 낫다고 생각했기에 해원은 잠자코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엘리베이터는 신속하고 부드럽게 해원을 2층으로 데려다 주었다.

  “일행이 있습니다. 장성철로 예약되어 있다던데요.”

  “네.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깔끔한 치마 정장을 차려입은 직원이 해원을 구석진 작은 방으로 안내했다. 딱 보아도 조용히 밀담을 나누기에는 최적의 장소였다. 나무로 만들어진 의자는 정신없어 보일 정도로 온갖 세공이 들어가 있는 고급품이었고, 테이블은 상판이 두꺼운 대리석으로 되어 있었다. 그 위에는 두 사람분의 수저가 이미 놓여 있었다. 해원을 안내한 직원이 문을 닫고 나가자 방 안에는 적막함이 감돌았다. 해원은 생전 처음 해외여행을 나간 사람처럼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조심스럽게 자리에 앉았다.

  여자의 남편은 약속시간으로부터 정확하게 오 분 전에 도착했다. 그간 여자의 이야기를 들으며 해원은 나름대로 그의 모습을 머릿속에 그려본 바 있었다. 해원의 상상 속에서 그의 모습은 대략 덩치 크고 성격이 괄괄한 불한당 정도였다. 그러나 그 상상은 단 하나도 들어맞지 않았다. 장성철은 보통 정도의 중키에 약간 마른 편이었다. 전반적으로 평범한 생김새였는데 피부가 흰 편인 것이 눈에 뜨였다. 도수 높은 안경을 끼고 있어 작아 보이는 눈은 살짝 신경질적이었고 입술은 얇았다. 다소 성근 머리숱은 주변머리부터 조금씩 희어져 가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입을 열자 놀랍게도 생김새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중후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에게 어떤 카리스마 같은 게 있다면 그건 분명 그 목소리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장성철이네.”

  “이해원입니다.”

  엉거주춤 일어난 해원이 그의 손을 마주잡았다. 장성철의 손은 미지근하고 건조했다. 그는 해원에게 앉으라고 손짓하더니 자신이 먼저 자리에 앉았다.

  “나를 만나는 게 딱히 반갑지는 않겠지.”

  “피차일반이지 않겠습니까.”

  “그래. 그래도 살다 보면 싫은 일을 해야 할 때가 자주 있지.”

  통화할 때와 마찬가지로, 그는 말을 돌리거나 뜸을 들일 생각이 없어 보였다.

  “내가 바라는 건 간단하네. 나는 사회적 지위가 있다 보니 적이 많아. 그래서 좋지 않은 소문이 나는 걸 바라지 않네. 그들에게 먹잇감을 주고 싶지 않으니까. 이해하겠지?”

  “예.”

  “좋아. 그래서 나는 자네가 그 여자의 일로 내 주변을 들쑤시고 다니는 게 마음에 들지 않네. 중단해주었으면 좋겠군. 그게 내 요청이네.”

  요청이라는 단어에 해원은 집중했다. 요구가 아니라 요청. 그렇다면 뭔가 협상의 여지가 있다는 뜻이었다. 해원은 약간이나마 자신감을 얻었다.

  “저도 요청드릴 것이 있습니다. 괜찮겠습니까?”

  그는 서슴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기브 앤 테이크는 당연하지. 말해보게.”

  “우선 저는 조지연 씨에게 의뢰를 받은 것이 있습니다.”

  “그 여자가 할 법한 일이지. 그 남자를 살려달라는 것 아니었나.”

  그는 자신의 아내를 항상 ‘그 여자’라고 지칭했다. 해원은 그의 말투에서 희미하게나마 경멸감을 느끼며 말을 계속했다.

  “그렇습니다. 그래서 저는 선생님께서 공태훈 씨의 생명을 더 이상 위협하지 않아 주셨으면 합니다.”

  말을 마치며 해원은 내심 긴장했다. 그러나 뜻밖에도, 장성철은 일말의 고민도 없이 바로 대답했다.

  “승낙하겠네.”

  “......예?”

  놀란 해원은 체면불구하고 반문할 수밖에 없었다. 장성철이 되물었다.  

  “내가 거절하리라 생각했나?”

  해원은 대답하지 못했다. 장성철이 고개를 가볍게 저었다.

  “그 정도 했으면 그 여자도 남자도 정신 좀 차렸겠지. 그 둘이 남들 눈에 뜨이지만 않으면 난 상관없네. 그 여자에게도 그렇게 말해 두었고.”

  “......애초에 공태훈 씨의 목숨을 빼앗을 의도는 없었다는 말씀입니까?”

  “아니. 의도는 있었네.”

  그는 가볍게 해원의 말을 부정했다.

  “다만 결과 따윈 상관없었지. 때로는 결과보다 시도 자체가 의미를 가질 때도 있다네.”

  해원의 등에 소름이 돋았다. 그는 확신했다. 이 남자는 위험하다고.

  “물론 이대로 놓아두면 리스크가 있지. 하지만 내가 그 남자를 없앤다면 아마 자네가 나설 것 같은데, 그렇다면 훨씬 더 요란스러워질 거라 생각하네. 자넨 젊은 나이치고는 의외로 여기저기 인맥이 있더구먼. 그래서 지금 정도의 리스크는 내가 감당하겠다는 이야기네. 설명이 되었나?”

  남자가 재미있다는 듯 살짝 웃었다. 뱀이 웃는 것을 본 적은 없었지만 분명 이런 식으로 웃을 것이라고 해원은 확신했다. 해원은 밀려오는 불쾌감과, 그보다 더 큰 긴장감과 싸우며 다시 입을 열었다.

  “알겠습니다. 공태훈 씨의 안전이 보장된다면 저도 구태여 초과근무를 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말이 잘 통해서 좋군.”

  “그리고 그와는 별개로 여쭤볼 것이 있습니다.”

  “뭔가? 말해보게.”

  “그 부적의 출처입니다.”

  “아아. 그거 말인가.”

  그가 다시 한 번 웃음 비슷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더니 갑작스레 말을 돌렸다.

  “나도 하나 물어볼 게 있네. 별 건 아니네만.”

  “무엇입니까?”

  해원이 다소 경계하며 신경을 곤두세웠다. 그러나 장성철의 말투는 평온했다.

  ”같이 온 건 여자친구인가?”

  일순간 해원을 둘러싼 시간이 멈춘 것처럼 느껴졌다. 해원은 그대로 굳어 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해원이 미처 제지하기도 전에 바리가 먼저 입을 열었다.

  “내가 보여요?”

  “물론이지.”

  그는 가늘게 웃더니 손가락 사이에 젓가락을 끼우고 한 바퀴 돌렸다. 안경 뒤의 눈동자가 검은 색으로 빛났다. 해원은 간신히 정신적인 충격에서 회복했다.  

  “......당신이 만들었군요.”

  “맞아.”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만든 부적이네.”





  흰색 외제차가 가파른 골목길을 올라오고 있었다.

  이윽고 언덕 위까지 올라온 자동차는 조금 더 전진하다 2층 단독주택 앞에서 멈추었다. 곧 한 여자가 운전석에서 내렸다. 그녀는 잠시 주변을 살피다 이내 현관 쪽으로 향했다. 문은 열려 있었다. 마당에는 푸른 잔디가 깔끔하게 깔려 있었고 한쪽에는 수십 그루나 되는 대나무가 심어져 있었다. 가벼운 바람이 불어보아 대나무 잎들이 서로 부대끼며 시원한 소리를 냈다. 그 앞에 놓인 작은 나무벤치에는 한 남자가 앉아 있었다. 머리는 덥수룩했고 한동안 깎지 않은 수염이 엉망으로 나 있었다. 다소 피곤해 보이는 그 남자는 다리를 앞으로 뻗은 채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남자를 발견한 여자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그녀는 주저하지 않고 현관 안으로 발을 내딛었다. 그리고 마당을 가로질러 남자에게 다가갔다. 인기척을 느꼈는지 졸고 있던 남자가 문득 눈을 뜨면서 느긋하게 여자 쪽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남자의 눈이 커졌다.

  “오랜만이야, 자기.”

  여자는 달려가서 남자에게 안겼다. 남자는 여자를 와락 끌어안은 채 그녀의 귓가에 얼굴을 묻었다. 한가로운 가을의 어느 날 낮이었다.





  “왜 그러나. 설마 이런 쪽의 능력이 있는 사람이 자네뿐이라고 생각한 건 아니잖은가.”

  해원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러나 쏘아대는 것처럼 바리의 목소리가 먼저 튀어나왔다.

  “그런 힘이 있으면서 어째서 사람을 해치는 데 쓰는 거죠?”

  “왜 안 되지?”

  그가 느긋한 태도로 반문했다. 바리는 힐난하듯 말했다.

  “엄마가 그런 능력은 하늘이 내리는 거라서 다른 사람을 돕는 데 써야 한다고 했어요! 해원 오빠처럼요. 그러지 않으면 그 업이 반드시 돌아온다고요! 하늘의 그물은 성글어 보여도 결코 빠져나갈 수 없댔어요!”

  그것은 언젠가 큰무당이 해원에게 말해준 이야기였다. 그러나 장성철은 태연했다.

  “그럼 그 업을 내가 감당하면 될 일이 아닌가, 아가씨.”

  “......!"

  바리는 말문이 막혀 버리고 말았다. 해원이 오른손을 들었다.

  “그만두자, 바리야. 지금 무슨 말을 한다고 해서 상황이 바뀌지는 않을 것 같다.”

  “정확한 판단이네. 자네가 좀 더 마음에 드는군.”

  “사양하겠습니다.”

  해원이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저도 바리의 말에 동감입니다. 저는 그렇게 배웠습니다.”

  “정의의 사자인가? 요즘 세상에 뜻밖이로군.”

  하필 그에게서 그 말을 들은 것은 해원으로서도 뜻밖이었다.

  “하지만 그렇다면 어째서 그 여자를 도와주는 건가? 그 여자가 정의의 사자의 도움을 받을 정도로 착한 사람은 아닐 텐데.”

  “하지만 악당은 더더욱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글쎄. 그런가? 하지만 자네도 이걸 한 번 잘 생각해 보게.”

   장성철은 기묘한 표정을 지었다.

  “벌써 오 년쯤 전인가. 그 여자가 너무 나대다가 협박범에게 꼬리를 잡힌 적이 있었네. 나는 그 여자에게 부적을 줬지. 그 여자는 자기가 무슨 일을 하는지도 모르는 채 무조건 내가 시키는 대로 했어. 그리고 남자가 죽었네. 그 여자가 이 이야기를 하던가?”

  해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들었습니다.”

  “그래? 그런데도 자네는 계속 그 여자의 편을 들려는 건가?”

  “하지만 그 일이 제 의뢰인의 잘못이 아닙니다. 오히려 선생님의 책임이지 않습니까?”

  해원이 반격하자 그가 느닷없이 웃음을 터뜨렸다.

  “맞아. 자네 말대로 그 협박범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그 여자에게 묻는 건 과한 일이야. 그 여자는 기껏해야 도구 정도의 역할을 했을 뿐이니까. 내가 말하려고 하는 건 예전의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의 이야기일세.”

  순간 해원은 다시 위화감을 느꼈다. 어제 조지연과 이야기하면서 느꼈던 희미한 위화감이 다시 돌아와 해원의 주위를 맴돌고 있었다. 뭐지? 해원은 저절로 신경이 곤두섰다. 그러나 여전히 그 정체를 파악할 수 없었다. 장성철이 팔짱을 끼더니 흡사 대학교에서 강의하는 것 같은 어투로 말했다.

  “잘 생각해 보게. 그 여자는 내가 시키는 대로 했네. 그러고 나자 그 한심한 협박범이 죽었어. 그 여자가 아무리 멍청하다 하더라고 그 사이의 인과관계를 추론하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겠지.”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 해원은 비로소 희미하게나마 알 것 같았다.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장성철이 한쪽 입술꼬리를 치켜 올리더니 선언하듯 말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그 여자는 내가 시키는 대로 했네. 그렇게 하면 어떤 결과가 나올지 ‘알고 있으면서도’ 말일세.”

  “......하지만 그건 당신의 위협 때문이지 않습니까?”

  해원은 항변했다. 하지만 스스로도 자신의 말이 무력함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가 다시 한 번 웃었다. 아니, 비웃었다.

  “아, 물론 그렇겠지. 그건 사실이야. 그 여자는 내 말을 거역하지 못하니까. 겁이 많아서이기도 하고, 내게 대들면 잃을 것이 너무 많기 때문이기도 할 거야. 하지만 말이네, 이해원 군. 그 여자가 자기 손으로 자기 남자를 죽이려고 했던 것도 역시 사실이야. 그렇지 않나? 그런데도 정말 자네가 그 여자를 도와줄 가치가 있는 건가?”

  해원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장성철이 손목시계를 들여다보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거, 생각보다 즐거운 시간이었네. 난 바빠서 이만 가 봐야 하네만, 계산은 내가 해 둘 테니 식사는 챙겨 먹게나. 여기 코스요리가 꽤 괜찮거든.”

  해원은 여전히 아무 말 없이 그대로 앉아 있었다. 장성철은 다소 유쾌해 보이기까지 하는 태도로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문을 닫기 직전, 그가 뒤를 돌아보며 마지막 인사를 남겼다.

  “또 만나세.”

  문이 닫히자 남은 것은 오직 적막뿐이었다. 해원은 말없이 닫힌 문 너머의 어딘가를 노려보고만 있었다. 오래도록. 적막은 차츰 그 두께를 더해가며 해원을 짓누르다 마침내 거대한 압력이 되어 흔적조차 남기지 않은 채 해원을 짓뭉개 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여전히 해원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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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머니어
14/09/03 16:36
수정 아이콘
와우~ 드디어 안타고니스트의 등장이군요~!

읽는 내내 소름돋았습니다. 덜덜... 필력이 대단하시네요.
14/09/03 18:23
수정 아이콘
흐흐. 문학도를 자처하면서도 솔직히 고백하건대 안타고니스트가 무엇인지 오늘 처음 알았습니다. ㅠㅠ
Je ne sais quoi
14/09/03 16:39
수정 아이콘
잘 읽었습니다. 앞으로도 대적할 일이 생긴다는 뜻이군요. 기대하겠습니다~
14/09/03 16:40
수정 아이콘
이렇게 아홉번째 이야기가 끝이 나는군요~ 장성철은 나중에 다시 또 등장할꺼 같은 느낌이네요
잘봤습니다.
14/09/03 17:56
수정 아이콘
또 등장해야 합니다. 마땅한 반찬 없으면 곰국 끓이듯이 질질 우려먹을 예정이라서요.
카라이글스
14/09/03 16:41
수정 아이콘
저도 장성철이 또 나오려나 싶네요 흐흐 즐거웠습니다~
14/09/03 16:44
수정 아이콘
놀라운 악역이 등장하는 느낌이군요. 잘 봤습니다~
웨일리스
14/09/03 16:44
수정 아이콘
수고하셨습니다. 해원에게 드디어 비슷한 능력을 가진 적이 생기다니... 장성철과는 또 어디서 어떻게 얽히게 될까요? 흥미진진하네요!
데오늬
14/09/03 16:56
수정 아이콘
어쩐지 이걸로 큰무당님 사망플래그... 라고 생각한 저는 아무래도 대중소설을 너무 많이 읽은 거겠죠.
14/09/03 17:58
수정 아이콘
일단 지금으로서는, 큰무당님은 아흔 살 넘게 사실 예정입니다. 그때까지도 여전히 정정하실 듯.
하지만 이 댓글을 보니 왠지 그러고 싶은 기분이 스믈스믈 피어오릅니다?
데오늬
14/09/03 23:17
수정 아이콘
힉 큰무당님 죄송...;
14/09/03 17:00
수정 아이콘
아....본문에 쓴다는 걸 깜빡했네요.
퀴즈 하나 드립니다.

Q. 장성철의 이름의 유래는 무엇일까요?
정확하게 맞추시는 분께는 기프티콘이라도 쏘아드리겠습니다. 어떻게 쏘는지도 모르지만 공부하면 되겠죠... 아마?
14/09/03 17:42
수정 아이콘
장씨에 부적쓰는거 생각하면 역시 퇴마록의 장준후인데........ 성철은 어디서 나왔나 싶기도 하고.. (....)
14/09/03 17:55
수정 아이콘
땡. 장준후 아닙니다.
가만히 손을 잡으
14/09/03 17:01
수정 아이콘
오...좋아요.
정말 훌륭한 결말입니다. 그리고 저 남자의 이야기 또한 매혹적입니다.
글곰님이 글로 어떤 경지에 이를지 프로가 될지 아마추어로 즐기실지 모르겠지만, 제가 최근 읽은 글들 중 가장 마음에 드는 결말입니다.
강동원
14/09/03 17:02
수정 아이콘
이해원의 절친 주원순이 존 왓슨의 이름에서 따 왔다고 하시고
남편이 뭔가 모리아티 교수 같은 존재가 될 것 같다는 댓글도 달았어서

그렇다면 남편의 이름은 뭘까... '모'씨가 있으니까 모... 모영태? 아 뭔가 이상한데다 너무 티나는 것 같음
'문'씨가 무난하겠지... 문영태? 아 뭐가 어울리지 이름에 리을 넣으려니까 너무 북한 동무 느낌나는데;;;

하면서 혼자 뻘생각 막 하고 있었는데
장성철이라... 뭔가 허무하군요.

- 어 댓글 달고 보니까 장성철 이름 유래를 퀴즈로 내셨군요!!!
한 번 열씸히 풀어보겠습니다. 크크크
14/09/03 18:08
수정 아이콘
흐흐. 모리아티 느낌은 외모의 묘사에만 반영했습니다.
장성철의 이름 유래도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습니다.
14/09/03 17:22
수정 아이콘
장성철 이라는 이름은 본 순간 북한의 2인자 였던 장성택이 갑자기 생각이 나더군요.. 퀴즈의 답은 아닐꺼 같지만 그냥 한번 써봅니다.. ^^;;;
14/09/03 18:09
수정 아이콘
헐.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이해원동무! 고죠 고 애미나이래 나쁘다우!"
14/09/03 17:30
수정 아이콘
일부러 이야기 끝날때까지 참았습니다. 크크크
역시 참은 보람이 있네요!
지금까지 이야기 중에 가장 여운이 남는 결말에 소오름이 돋는건 뽀나쓰!!!

떡밥은 회수되지 않아야 제맛이라지만 장성철 떡밥은 회수해 주셔야합니다...

항상 감사하게 보고있습니다.
아케르나르
14/09/03 17:33
수정 아이콘
기담판 모리어티같아요. 하여튼 이전 댓글의 바람?들은 원래 예정돼 있던 것이었나보군요.
14/09/03 17:54
수정 아이콘
대척점에 선 인물의 등장은 처음부터 예정해 놓은 것이었습니다.
인물의 성격이나 특색도 원안에서 거의 바뀌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생김새의 경우 해원이 상상했던 떡대 불한당이 사실은 원안이었습니다. 바로 어제 바꿨어요. 마치 모리어티같은 느낌으로요. 흐흐.
목화씨내놔
14/09/03 17:35
수정 아이콘
너무 재미있어요. 감사합니다. 잘 읽었습니다.
사악군
14/09/03 17:40
수정 아이콘
너무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저는 이런 영혼의 맞다이를 좋아합니다. 흐흐흐
14/09/03 18:10
수정 아이콘
그리고 해원은 탑에서 솔킬을 내줬습니다. 심지어 정글러의 서포트까지 받고 있었음에도요.
카레맛동산
14/09/03 1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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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 어제부터 기다린 보람이 있군요. 잘 읽었습니다.
이제 당장 내일 새로운 이야기를 올려달라 하면..무리한 얘기겠지요..흑. 애독장 마음만은 이렇다는걸 알아주시고 빠른 시일 내에 새로운 이야기로 돌아와주세요.
14/09/03 1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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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덟번째 이야기 후 아홉번째 이야기가 나오기까지 넉 달 걸렸습니다.
아니 뭐 그냥 그랬다고요......
사악군
14/09/03 1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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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남편 전화받고 여자는 얼굴이 하얗게 되었는데 다시 남자를 만나러 간다는 게 이상한데..
혹시 남편이 아내에게 네가 직접 처리하라고 해서 처리하러 간건 아닐까 뭐 그런 생각이 드네요.
14/09/03 1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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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성철 왈, “그 정도 했으면 그 여자도 남자도 정신 좀 차렸겠지. 그 둘이 남들 눈에 뜨이지만 않으면 난 상관없네. 그 여자에게도 그렇게 말해 두었고.”

사족이 되겠지만 조금 보충하자면, 그만큼 여자는 남자를 좋아하고 있습니다. 그와 동시에, 비록 수동적이었을망정 자신의 손으로 남자를 죽음 문턱까지 끌고 간 것도 그녀이며, 또한 그런 남자를 구하려고 해원에게 연락한 것도 그녀입니다. 애정 따윈 전혀 없는 결혼생활 내내 고통받은 것도 그녀이며, 동시에 여러 남자들과 마구잡이로 관계를 가지며 한 번은 크게 데였으면서도 여전히 정신을 못 차린 것도 그녀입니다. 모순덩어리죠. 바리가 한마디로 요약했지요.

"다들 미친 것 같아"
사악군
14/09/03 1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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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그렇군요. 장성철은 제 생각보다도 더 쿨싴한 캐릭터군요. 해원에게 한 말이 다 솔직한 말은 아닐거라 생각했는데 그야말로 그냥 패를 까고 플레이하는군요. 어차피 내 패가 높은데 굳이 숨길 것도 없다..흐흐 좋네요.
14/09/03 1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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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아 허니잼 영화로 나와도 정말 재밌겠네요 ;;
감전주의
14/09/03 1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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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밌게 잘 봤습니다..
남빛바다
14/09/03 2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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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렸어요~~~
잘 읽었습니다^^
사악군
14/09/04 0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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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원은 그런 캐릭터가 아니지만.. 여기서 제 취향의 캐릭터는 코스요리는 먹고 나오는데. 크크크
자꾸 다시 읽게 되네요.
YaktTiger
14/09/04 0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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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있는 주인공보다 더 만들기 힘든게 멋있는 악역이라고 생각하는데 정말 대단한 라이벌을 만들어내셨네요.

잘 읽었습니다. 다음 편이 기대됩니다.

덧. 이러다 둘이서 폭포로 같이 떨어진다거나 그러진 않겠죠(...)
에인셀
14/09/04 0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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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성철이 능력자였을 줄이야.. 재미있게 잘 봤습니다~~
크리슈나
14/09/04 0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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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봤습니다.
해원의 대척점에 있는 인물이 등장하다니. 이제 진짜 본궤도에 오르는 느낌이네요!
장성철의 의미는 흠...
제가 솔직히 찾아보다가 결국 못 찾았는데...
[성철]은 성철스님에게서 따온 거 아니신지...
왠지 중간내용으로 봤을때, 성철스님이 과거에 본인의 업은 본인이 감당한다라는 취지의 발언을 하신게 아닐까 싶은데...확신이 없네요;
아님 성철스님이 승려가 되시기 전에 사고뭉치였는데 깨달음을 얻고 승려가 되셨던 과거가 있으신건지...
(혹 향후 연재가 장성철이 절대악이 아니라, 속세에 찌든거라 결국은 맘 고쳐먹고 성철스님처럼 결국 좋은 사람된다는 의미는 아닐지;;;)
[장]은...흠 글곰님 성이 혹시 장씨? 크 죄송합니다;;;
자유지대
14/09/04 16:31
수정 아이콘
해원이 왜 마지막에 한마디도 못하고 입만 다물고 있었는지 궁금하네요.
중화요리 코스에는 빼갈이 있어야죠.
술없이 코스요리만 먹으라는것은 일종의 도발이죠.
이런건 철저히 정의의 이름으로 응징해야합니다.
14/09/09 1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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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다 봤습니다ㅠ
개인적인 사정으로 피지알을 거의 못 들어와서 이제야 보게 되었네요.
덕분에 한 번에 몰아볼 수 있었지만요~ 크크크
잘 읽었습니다 언제나 바리는 옳아요 넵 그러합니다!

ps. 장성철 이름만 들었을 땐 정철만 떠올랐어요 크크
14/09/09 16: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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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아무도 못 맞히셨군요.
장성철의 이름은 제가 가장 악역 같지 않은 악역으로 생각하는 장성민(인정사정 볼 것 없다)과
가장 악역다운 악역으로 생각하는 장경철(악마를 보았다)의 이름에서 두 글자씩 조합해서 만들었습니다.
휴머니어
16/02/17 19:33
수정 아이콘
이건 아무리 봐도 난이도가 극악의 문제입니다. ;)

영화 광팬도 맞추기 어려울 정도로요.
17/06/09 16:04
수정 아이콘
또 읽어도 재밌네요 크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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