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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4/08/31 02:53:54
Name 王天君
File #1 movie_image_(6).jpg (65.3 KB), Download : 57
Subject [일반] (스포있음) 와즈다 보고 왔습니다.


모두가 단정한 검정색 단화를 신고 있는 가운데, 조금 튀어보이는 보라색 끈의 운동화를 신고 있는 소녀가 암송 도중 딴청을 피우다 혼이 납니다. 그녀의 이름은 와즈다, 이 열 살짜리 꼬마는 행실이 단정치 못한 행실로 꾸지람을 듣는 게 하루 일과입니다. 분명 와즈다는 보통의 여자아이보다 조금 더 왈가닥이긴 하죠. 그런 그녀에게 간절한 소원이 생겼으니 그것은 바로 자전거를 갖는 것입니다. 자신을 좋아하는 동갑내기 남자애 압둘라를 여봐란 듯이 이겨주고 싶어졌어요. 그러나 와즈다는 자전거를 탈 수가 없습니다. 자전거가 비싼 건 둘째 치고, 사우디 아라비아에서 여자가 자전거를 타는 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거든요. 그러나 열 살의 나이에 불가능이란 눈에 들어오지 않는 법, 주위의 어른들이 암만 고개를 저어도 자전거를 향한 와즈다의 소망은 이제 야망으로 활활 불타오르기 시작합니다. 이제 와즈다는 어떻게든 자전거를 가져야 합니다.

영화의 메시지는 무척 뚜렷합니다. 이슬람 문화 특유의 규율아래에서 억압받으며 사는 여성의 삶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있어요. 구체적으로는 여성이 자전거를 타지 못하는 현실에 대해, 더 크게는 남성 중심적인 사회에서 동등한 인격체로 취급받지 못하는 전반적인 사우디 아라비아의 현실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서구 문화권에 익숙해진 우리의 눈에는 아마 많은 것이 눈에 들어올 겁니다. 일단 여성은 바깥에 나가면 반드시 히잡을 둘러야 하고, 남성의 시야 바깥으로 여성이 먼저 몸을 피해야 하고, 노래도 못 부르고, 운전을 할 수가 없으니 운전 기사가 없으면 먼 거리를 이동하는 건 포기해야 하고, 일부다처제 때문에 사랑하는 남자가 다른 여자와 혼인하는 걸 보고 있어야 하고...

그렇지만 영화의 어조는 생각만큼 강경하지 않습니다. 영화 속 여성들을 통해 고통을 호소하며 동정을 유발하지 않기 때문이지요. 보는 사람에게는 기겁할 만한 차별이지만 사우디아라비아의 여성들에게는 그것이 당연한 생활입니다. 영화 속 화자인 와즈다를 비롯해, 어떤 여자도 이 현실에 대해 분노하지 않습니다. 단지 이 현실을 조금 불편하게 여길 뿐이죠. 오로지 와즈다만이 이 현실에 아직 적응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그녀는 여성이 할 수 없는 것을 하려하고, 남성에게 당당히 무언가를 요구합니다. 그렇다고 그녀가 여권신장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녀는 어리고 무지하고 당돌하니까 “감히” 그런 일을 벌이고 다닐 수 있는 것입니다. 나운규 감독의 아리랑에서 정신이상을 빌미로 항일정신을 설파했던 김영진처럼요.

무고하다고 할 순 없지만, 권력을 지닌 남성과 무력한 여성, 가해자와 피해자의 이분법으로 영화는 세상을 바라보지 않습니다. 영화가 변화의 목소리를 들려주고 싶어하는 쪽은 오히려 사우디아라비아의 여성 자신들입니다. 남성들은 그래도 되고, 그러는 것이 당연하니까 여성들에게 무심하고 형편없이 굴 뿐이죠. 그렇기에 남성들을 향한 투쟁과 권리의 쟁취는 이 영화의 목표의식과는 동떨어져있습니다. 오히려 영화 속에서 와즈다를 가장 압박하는 것은 같은 여성인 그녀의 어머니와 교장 선생님이에요. 그들은 와즈다에게 끊임없이 여자로서의 금기만을 교육하고 주입시키려고 애씁니다. 자전거를 타서는 안돼, 히잡을 벗고 다니면 안돼, 팔찌를 차서는 안돼, 노래해서는 안돼. 그들 스스로 굴레에 얽매여 종속의 논리를 공고히 하고 이를 미덕으로 계속해서 각인시킵니다. 그리고 이 굴레 속에서 그들은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가 되어 불편함을 수긍하고 견뎌냅니다. 여성을 위한 탈의실이 없어서 와즈다의 어머니는 여자 화장실까지 옷을 갈아입으러 가야합니다. 돈을 벌고 싶지만 남편의 질투가 무섭고 스스로의 보수적인 정조의식에 얽매여 병원 간호사 일을 멸시하고 포기해 버려요. 애인이 집의 담을 넘다 걸려 소문이 난 교장 선생님처럼, 사우디아라비아의 여성들은 자신의 욕망과 전통적 계율이 충돌함에도 이 갈등을 내내 삭이며 자기모순에 빠질 뿐입니다.

천방지축이던 와즈다는 별의별 짓으로 모았던 돈으로 꾸란 학습 게임기까지 사는 각고의 애를 쓰며 꾸란 암송 대회에서 일등을 차지하지만, 끝내 가지고 싶어했던 자전거를 갖지 못합니다. 우승 상금으로 자전거를 타고 싶다는 와즈다의 솔직한 소망은 여자답지 못하다는 교장 선생님의 일축 아래 팔레스타인의 전쟁 기금으로 기부되어 버리거든요. 와즈다는 자신의 기질을 억누르고 모든 것을 투자하고 희생하며 종교적 삶에 투신했지만 그녀에게 돌아오는 것은 비웃음 뿐입니다. 이를 보면 영화가 근본적인 책임을 묻는 곳은 다름아닌 그들의 종교, 이슬람입니다. 신과 성자가 가르치는 대로 억누르고 순종하며 살더라도 그녀들에게는 차는 커녕 자전거 한대도 허락되지 않습니다. 이런 현실에서도 맹목적인 신앙심만을 행복과 정숙의 척도로 삼을 것인지 영화는 진지하게 묻고 있어요. (신도들의 목숨을 폭탄 테러로 이용하는 광신적인 모습을 압둘라와 와즈다의 대화를 통해 꼬집기도 합니다)

와즈다 모녀는 나란히 실의에 빠집니다. 이는 미래에 대한 의지가 아니라 현재를 인지하고 좌절하는 과정을 통해 이루어지는 각성의 서글픈 옆모습이죠. 와즈다는 우승 상금이 눈 앞에서 날아갔고, 와즈다 어머니는 끝내 다른 여자와 또 다른 혼인을 치루는 남편을 봐야 합니다. 그러나 결혼식을 씁쓸하게 쳐다보던 와즈다는 옥상 한 구석에 어머니가 몰래 준비한 자전거를 발견합니다. 와즈다가 그렇게나 갖고 싶어했던 자전거 말이죠. 그럼에도 와즈다는 기뻐할 수 만은 없습니다. 거기에는 이루어진 소망과 환희만이 존재하진 않으니까요.이는 아버지에게 잘 보이기 위해 더 이상 이쁜 옷을 살 필요가 없는 어머니가 와즈다를 위해 그 돈을 모조리 자전거 구입에 쓴 결과입니다. 거기에는 왕자님께 구제받은 공주님도, 자력으로 현실의 벽을 넘은 혁명가도 없어요. 남성에게 버림받고, 신에게 낙담한 외로운 두 여성이 서로를 달래주고 있을 뿐입니다. 사우디아라비아라는 나라에서, 이슬람 문화 아래에서 여성이 자아 실현을 하기 위해서는 이렇게 또 다른 여성의 희생이 뒤따르지 않으면 안 될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해야 누군가의 소망은 또 다른 누군가의 용기와 지지에 힘입어 금기의 사슬에서 조금씩 풀려날 수 있겠죠.

와즈다는 자전거를 타고 압둘라와 함께, 아니 압둘라를 힘껏 제치며 페달을 밟습니다. 그런 그녀를 보고 자전거를 고이 가지고 있던 문방구 주인은 미소를 짓지요. 물론 모든 여자들이 와즈다처럼 씩씩할 수도, 어머니처럼 자애로움을 베풀 수 있는 건 아닐 겁니다. 누군가는 언짢아하거나 걱정을 앞서 하겠죠. 그러나 분명한 것은, 여자라서 불행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곧이 들을 여자는 없을 겁니다. 원하는 것이 무엇이고, 금하는 것이 무엇이건 그 누구라도 행복하고 싶을 거에요. 영화는 와즈다의 미소를 통해 마지막 질문을 던지는 듯 합니다. 이 소녀가 자전거를 타며 행복한 것처럼, 우리도 행복해도 되지 않겠냐고, 행복할 수는 없겠냐고 말입니다.

@ 이 영화가 개봉한 후 사우디아라비아에서는 여성들이 자전거 및 사륜차를 타는 것이 허용되었습니다.

@ 사우디아라비아 최초의 제작, 개봉 영화라는 정보가 있군요. 사우디아라비아는 법적으로 극장이 금지된 나라라고 합니다. DVD나 2차 매체를 통한 영화 감상은 가능하다고 합니다.

@ 보고 나서는 어쩐지 M.I.A 의 Bad Girls 가 생각나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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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sdqwe123
14/08/31 08:31
수정 아이콘
내용이 좋네요. 잘 읽었습니다!
DavidVilla
14/08/31 09:15
수정 아이콘
잘 읽었습니다. 몇 개월 전에 본 영화인데, 이 영화 정말 제 스타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얼마 전 스무 살의 사우디아라비아 여성과 대화를 나눌 기회가 있었는데, 그녀는 이 영화가 사실이 아니라고 말하며 자신은 이 영화를 싫어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남성들이 여성들을 보호해주고 있기 때문에 언뜻 우리 입장에서 보기에 불편하거나 불평등해 보이는 것들도 그들은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생각해보니 그녀들은 그런 상황을 벗어나고자 하는 의욕이 없어보였습니다. 그저 종교와 문화로써 그것들 또한 삶의 일부분이었던 거죠.

영화를 본 뒤, 그리고 위 여성과 대화를 나눈 뒤, 많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아직도 정리가 되진 않고 있지만, 충분히 볼 만한 영화였음에는 분명한 것 같습니다.
영원한초보
14/08/31 11:03
수정 아이콘
노예제도를 옹호하는 노예가 있듯이
사람마다 다른거겠죠
인도에서는 여성들이 몽둥이 들고 다니면서 남자들 혼내주는 일이 발생했는데 쩔쩔매는 남자 보니까 웃기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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