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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4/07/14 23:57:30
Name yangjy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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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bject [일반] 칸트 vs 니체


진은영씨의 <순수이성비판, 이성을 법정에 세우다>에서 약간의 요약,수정을 가해 발췌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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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편을 드는 것은 필요하지도 않으며 바라지도 않는다. 그보다는 낯선 식물을 대할 때 갖게 되는 호기심과 비판적 저항, 이런 것들을 가지고 나를 평가하는 것이 가장 현명한 자세이다."



니체가 푹스(K. Fuchs)에게 보낸 편지에 쓴 이 구절은 그가 다른 철학자들을 대면할 때 항상 견지했던 원칙이기도 하다.





근대 철학의 정점으로 이해되는 칸트가 후일 탈근대철학의 선구자로 불리게 될 스물세 살의 니체에게는 얼마나 낯설고 신기한 식물이었을까?



니체는 금새 칸트에 매혹되었고 [칸트 이래의 목적론 혹은 유기적인 것의 개념에 대하여]로 박사학위논문을 준비하기도 한다.



이 계획은 실행에 옮겨지지 않았지만 니체는 그의 전 저작에 걸쳐 칸트와의 대결의식을 드러낸다.



니체의 가장 난폭한 발언 '신은 죽었다'는 어떤 의미에선 진부한 선포이다.



이미 근대의 시작과 더불어 자명해진 진리이기 때문이다.



니체의 선언이 있기 전에 신은 학문적 가판대에 진열할 수 없는 유통기한 지난 통조림이라는 것이 밝혀졌고



건전한 상식의 소유자라면 누구도 학문적 영양소를 섭취하기 위해 그 부패한 통조림을 먹으려 하지 않았다.



칸트는 니체가 신의 죽음을 선포하기 1세기 전쯤에 이미 '선험적 변증론'에서 늙은 하느님께 귀뜸했다.



"종교적이고 도덕적인 회랑을 벗어나면 위험하니까 교회 밖으로 나오시는건 절대 안 됩니다. 그러시기엔 하느님 몸이 너무 약해지셨거든요..."



이처럼 오래전에 상식이 된 주장을 가지고 니체가 새삼스럽게 놀라운 발견인 양 떠들고 다닌다면 우스운 일일 것이다.



사실 니체의 선포가 지닌 중요성은 새로운 니힐리즘의 도래를 고지했다는 것이다.



영원불멸의 신이나 이데아의 세계를 강조하여 항상 변화하는 현실세계의 허무함과 무가치함을 주장하는 방식이 이전의 니힐리즘이었다면



새로운 니힐리즘은 더 이상 신이나 천국, 피안의 세계에 호소하는 순진한 방식을 취하지 않는다.



니힐리즘은 근대의 풍토에 적응하기 위해 훨씬 교활해졌다.



종교가 아니라 과학을 통해 생기발랄한 세계를 부정하고 허무에 빠뜨리기 시작한 것이다.



이 때문에 니체는 신의 죽음을 선포한 후 곧바로 과학비판에 착수함으로써 새로운 니힐리즘의 위험을 경고한다.



근대철학과 더불어 근대학문 일반은 신의 죽음을 통해 열린 새로운 인간의 길, 과학의 대로를 걷기 시작한다.



근대인은 신이라는 제1원인을 제거하고 과학적 인과법칙을 선택한 것이다.



우리는 제1원인을 받아들이거나 아니면 과학적 인과성을 받아들여야 하는 배타적 선언의 상황에 서 있다.



둘 다 선택할 경우 모순에 빠져버리는 이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칸트는 일종의 식민지적 분할통치를 제시했다.



전통적인 종교의 논리, 철학적 제1원인의 법칙으로 도덕과 실천의 영역을 통치하고



인과의 법칙으로 과학과 근대학문의 영역을 통치하자는 협상으로 이율배반은 해소된 듯 보인다.



이 순간 니체는 "그러나!"라고 외친다.



제1원인과 과학적 인과법칙은 두 개의 극단적 지점인가?



니체는 그 둘의 은밀한 공모를 폭로한다.



중세인들이 세계의 영원한 창조주로서 신을 숭배하며 자연에서 신의 지문을 발견했다면



근대인들은 세계의 영원한 작동원리인 인과법칙을 숭배하며 과학적 인과성의 도장을 마구잡이로 찍어대는 것이다.



신의 지문이든 과학의 인과성 도장이든 이 단조롭과 천편일률적인 무늬로는 결코 자연의 활발한 생성과 운동을 포착할 수 없다.



근대인들은 중세인과 다를 바 없이 동일성의 철학을 신봉하는 것이다.



동일성의 철학 아래서 모든 사건과 사물을 인과법칙에 따라 재단하는 과학의 파시즘은 전례없이 무시무시한 방식으로 생성하는 세계를 파괴하게 될 것이라는 예견. 이것이 신의 죽음을 통한 니체의 전언이다.



니체가 칸트를 비판하는 가장 중요한 논점은 인과 개념이 일종의 실체성을 전제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풋사과를 먹고 아담이 배탈이 났다고 했을 때 흔히 우리는 풋사과의 덜익음이 배탈의 원인이며



배탈은 푸사과라는 원인에 의해 도출된 결과라고 말한다. 그러나 풋사과의 덜익음과 배탈은 서로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두 사건이 아니다.



아담이 배탈이 나기 전부터 풋사과가 나뭇가지에 덜익은 채로 매달려 있었으므로 독립적인 원인사물이 아닌가 하고 반문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때의 풋사과란 배탈의 원인이 아니다.



만일 그 풋사과를 원인이라고 말한다면 우리는 아담이 먹지 않은 풋사과가 아담이 앓은 배탈의 원인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처럼 우리는 원인과 결과를 상호배타적인 독립 존재로 규정할 수 없다.



풋사과가 아담의 시원치 않은 장과 만날 때에만 풋사과는 비로소 배탈의 원인이 된다.



원인과 결과를 분리해서 사유할 수 없고, 결과가 원인에 의존해서 생성될 뿐만 아니라 원인도 결과에 의존해 생성된다.



원인과 결과가 독립적으로 있다는 것은 착각이고,



니체가 보기엔 "언어상으로 우리는 인과라는 것에서 벗어날 수가 없을 뿐이기에 원인과 결과를 구분하는 것이다 (권력에의 의지 中)"



실제로 존재하는 것은 사건의 복합체이며 원인과 결과, 주체와 객체, 행위자와 행위 등 논리학상의 대립에서 얻어진 개념이 그 사건의 복합체 속으로 "잘못 꾸려 넣어진 것" 이다.



풋사과, 아담, 사과나무가 심어진 땅, 그 나무 사이를 지나가는 바람, 이런 것들은 사실상 세계 속에서 결코 구별되지 않는 사건이다.



단지 우리가  독립적 개별자가 있다, 그것들이 인과적 사건을 이룬다, 이렇게 인식하는 것뿐이다.



칸트가 니체의 이런 반박을 들었다면 아마 다음과 같이 대꾸할 것이다.



"이봐 영리한 젊은이, 바로 그걸세. 내가 판단형식을 통해 지성의 범주표를 도출한 이유도 우리의 경험이란 것이 인간의 언어적 틀 밖을 벗어나기 힘들다는 점에서였다네. 중요한 것은 언어적 범주가 설령 허구라 할지라도 우리의 경험은 그 허구를 벗어나 사물 자체와 직접적인 만남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이네. 경험의 인과성이 언어적 산물에 불과하다는 점은 이미 판단형식에서 내가 인과범주를 도출했기 때문에 나오는 필연적 귀결이지."



칸트는 많은 부분에서 니체의 지적에 동의할 것이다.



그러나 두 사람은 실체성에 대해 상이한 가치평가를 내리게 될 것이다.



니체는 실체성이 우리의 삶에 생겨난 악성종양이라도 되듯이 이것을 혐오하고 어떻게든 제거하려고 애쓴다.



하지만 칸트는 실체성을 인정할 뿐만 아니라 기꺼이 그것을 사랑한다.



'선험적 변증론'에서 칸트는 이성이 자아, 세계, 신에 대한 피할 수 없는 환상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 환상이 우리의 과학적 경험세계를 침범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고 말함으로써 경험적 현상세계의 지위를 확고히 하는 듯 보였다.



하지만 칸트의 후배철학자들은 선험철학의 핵심이 '구성'에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다.



피히테는 대상에 대한 인식은 우리가 구성하는 것이며 인간의 창조적 산물이라고 한다. 현상세계 역시 우리의 불가피한 창조적 환상이라는 것이다.



쇼펜하우어 역시 '현상은 마야의 베일' 이라며 비슷한 결론을 내린다.



쇼펜하우어를 읽으며 칸트에 대한 관심을 키웠던 니체도 마찬가지였다. 경험세계는 우리가 생리적, 본능적, 사회적, 역사적 차원에서 구성해낸 일종의 전망이라는 것.



그러나 이와 같은 결론에 머물렀다면 니체는 칸트의 아류에 불과했을 것이다.



니체는 하나의 보편적이고 일반적 환상이 아니라 우리의 활동에 의해 무한히 증식하는 환상들의 생산이 가능하며 생의 고양을 위해 이런 생산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단언했다.



그러한 단언으로써 그는 칸트의 영토 밖으로 첫발을 내딛었다.



니체는 칸트의 환상에 반대한 것이 아니라 칸트의 환상이 빈곤한 것에 반대한다.



니체가 보기에 이 빈곤함은 칸트의 실체성 애호 취향에서 비롯된 것이다.



회의주의에 대한 공포에 떨며 인식의 확고한 지반을 찾는 데 관심을 가졌던 칸트로서는 그런 취향이 어쩔 수 없는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칸트에게는 사람들 사이에서 보편적으로 통용될 수 있는 단 하나의 환상이 필요했다.



니체가 칸트를 불임의 철학자라고 비난했던 이유는 그 때문이다.



무한히 창조적인 생산능력을 가진 우리가 왜 아이를 하나만 낳아야 하는가? 왜 하나의 환상만을 고수해야 하는가?



하나의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사유 형식은 하나의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언어형식이 전제될 때만 가능하다.



그러므로 공식적인 환상을 욕망하는 철학자는 필연적으로 공식적인 언어를 욕망하게 된다.



그런 철학자들은 우리에게 오직 한 가지 방식으로 말하고 생각하는 것을 자랑스러워 하라고 권유한다.



실체성 혐오자인 니체는 이러면 안된다는 것이다. 새로운 환상을 생산하기 위해 새로운 언어를 생산하라는 것이다.



의미의 실체성과 고정성을 파괴하고 풍부한 의미를 실어날라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칸트에 대한 니체의 평가는 너무 일방적이고 가혹하다.



칸트는 제3이율배반에서 선험적 자유를 거론했는데, 선험적 자유가 현상세계의 인과법칙에 일방적으로 규정되는 존재가 아니라



이 세계 속에 새로운 인과계열을 시작할 수 있는 자발적 존재를 가정한다면 칸트의 결론 역시 다양한 윤리적 실천을 통해 새로운



세계의 생산적인 창조에 가 닿을 수 있다.



칸트의 보수성을 넘어서는 칸트철학의 혁명적 이해 가능성은 후일 푸코와 들뢰즈 같은 철학자들을 통해 밝혀졌다.



그러나 니체는 현대철학자들처럼 칸트철학에 너그러울 수 있을 만큼 칸트의 영향력에서 안전거리가 확보된 시대에 살고 있지 않았다.



니체는 선험철학의 블랙홀에 빨려 들어가지 않기 위해 칸트를 맹렬히 공격할 뿐이었다.



니체가 보기에 칸트는 그가 열렬히 찬양했던 선험적 자유를 마음껏 누릴 작은 용기조차 가지지 못했다.



실천이성에 의해 열리는 세계 창조의 가능성 앞에서 칸트는 두려움에 떠는 것처럼 보였던 것이다...



실천이성은 인과법칙에 반항하지만 그것은 단지 마음속에서 빛나고 있는 보편타당한 도덕법칙과 의무에 복종하기 위해서이니



그로써 어떤 초월적 권위에도 굴복하지 않겠다던 선험철학의 최초 기획은 무산된 것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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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철학에는 문외한이기도 하고 특히나 칸트의 저작은 어렵기로 악명이 높아 아무리 쉽게 씌여진 개론서라도 읽을 엄두를 못낼 형편이었습니다만

인터넷 서점사이트를 눈팅하던 중 저자의 말이 마음에 들어서 충동구매하게 되었습니다. 저자 왈,

"누군가 칸트를 읽을 수 없다면 그것은 단 한 가지 이유에서이다. 그는 이 철학자에게 호감이 부족한 것이다. 매혹된 영혼에게 저항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호감’은 그를 알고 싶은 의지를 불러일으키며, 그런 의지를 가진 이에게는 ‘어려운 사유’나 ‘복잡한 개념어’도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오히려 더욱 더 제대로 알고 싶어질 것이다. 마치 사랑에 빠진 사람이 연인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듯이."

검색해보니 진은영씨는 철학자가 아니라 시인이더군요. 2010년 현대문학상 수상 경력까지 있는.. 그래서 그런지 딱딱할것만 같은 칸트의 인생과 철학을 꽤나 낭만적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중 니체의 '신은 죽었다' 발언에 대한 언급이 있더군요. 유머사이트에서도 종종 중2병 관련 게시물로 올라오는 말이라 다른 분들께도 흥미가 일지 않을까 싶어 발췌해 보았습니다.

중간에 칸트가 '회의주의의 공포에 떨며' 라는 말이 나오는데요, 철학 좋아하시는 분들께야 상식이겠지만 저는 저게 무슨 말인가 하고 조금 알아보았습니다. 조중걸씨의 <아포리즘 철학>이라는 책에 그 맥락을 잘 설명해 놓았더라구요.

칸트보다 조금 앞서 흄이라는 철학자가 있었다는데요, 당시 유럽의 지식인들은 과학이 이룩한 업적에 한껏 들떠 있었다고 합니다.

그들은 형이상학적 독단과 종교적 횡포에 대한 혐오와 분노를 가지고 있었고, 흄은 마지막 남은 형이상학적 독단을 청소하기 위해 그의 철학을 전개하였습니다.

그는 기득권의 어리석음을 보편개념과 선험적 지식에 대한 신념이라고 여기고 우리의 지식은 단지 경험과 교육에 달려 있음을 보이기 위해 인식론적 경험론을 전개해 나갔습니다.

그런데 그는 이 탐구의 와중에 그의 애초 목적을 넘어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 논리의 귀결이 과학마저 청소의 대상에 포함시켰던 것입니다 ?!

그가 붕괴시킨 인과율은 과학에까지 영향을 미쳤던 것이죠.

과학적 판단은 보편성과 예측 가능성을 전제하고 있는데 흄의 탐구에 의하면 인과율은 기껏해야 우리의 습관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습관이 쓸모없다는 얘기가 아니고, 우리는 단지 상식적 삶이 가능할 뿐이지 우리의 지성은 필연적이고 절대적인 지식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이 흄의 주장이었죠.

인간은 동물과 크게 다르지 않다, 보편적 지식에 대한 강박증을 벗고 우리 삶을 좀더 현실적이고 즐겁게 살아가자~ 라고 권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측면에서 흄은 르네상스 인본주의에서 시작된 세속적 경향의 극단을 보였습니다.

인간의 지성에서 신만 죽인게 아니라 모든 신념을 죽여버렸죠.

삶은 이제 근엄하고 진지할 이유도 없고 삶에서 추구해야 할 성스러움도 없어졌습니다.

이 향락에는 좌절감과 쓸쓸함만 남아 있었습니다.

신념 없이 떠다니는 삶이 어떠한 궁극적 목표를 가질 수 있었을까요?

이러한 상황에서 보편적이고 필연적인 지식이 가능하다는 것을 입증하려고 시도한 사람이 바로 칸트였다고 하네요.

시대착오적인 관념론으로 돌아갈 필요는 없었지만, 최소한 인간 이성의 인식 능력과 자연과학의 법칙만은 구해야겠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조중걸씨는 이것을 "칸트의 영웅적인 분투" 였다고 표현하면서, 칸트가 간신히 통합시킨 인간 인식의 영토는 니체와 비트겐슈타인에 이르러 또다시 붕괴되고 만다고 하네요..

PGR에서도 철학은 이제 뇌과학이 대체한다는 식의 글들을 몇번 보기도 했는데.. 어떤 식으로 무너지는지 궁금하긴 한데 철학이라는게 저에게는 너무 어려운 분야라... 크 또 쉽고 친절하게 설명해주는 입문용 책들이나 기웃거려봐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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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7/15 01:01
수정 아이콘
요약도 감상문도 잘 읽었습니다.
진은영 선생님은 저에게도 니체와 현대미학의 세계를 열어주신 분이라 좋아합니다. PGR에서 이름을 보게 되니 반가운 마음이 듭니다.
조중걸씨가 니체와 비트겐슈타인을 어떠한 입장에서 평가하고 있는지 이 글만봐서는 잘 알수는 없습니다만, 니체를 가리켜 흔히들 "망치의 철학자"라고 합니다. 니체의 망치는 지금까지 확실하다고 믿어지는 것들을 향하면서, 그를 파괴하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새롭게 창조하는 것으로 향합니다. 제가 이해하고 있는 니체는 그러한 긍정의 철학이었습니다.
철학을 접근하는 것에 있어서 개론서들은 물론 도움이 됩니다만, 저는 결국 개론서는 개론서일 뿐 원텍스트(비록 번역이란 재창작을 거친 것이라 하더라도)를 마주대하는 것이 가장 주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가능하면 개론서도 이미 읽으셨으니 칸트나 니체의 글들을 도전해보시면 어떨까 합니다.

철학이 무엇을 하는 것인가에 대해 궁금함을 느끼신다면 칼 야스퍼스의 <철학입문>을 추천해 드립니다.
마스터충달
14/07/15 02:02
수정 아이콘
인식에 대한 회의는 꽤나 대중적이죠. <매트릭스> 같은 영화도 엄청 흥행하기도 했구요. 다소 엉성한 칸트의 철학 안에서도 인식론에 대한 부분은 비교적 틈이 없기도 하고요.

그에 반해 선험에 대한 비판은 대중적이지도 않고, 이해하기 쉽게 설명되지도 않는 편이죠. 칸트는 이 부분에서 신(神)을 불러오는 바람에 후대에게 심심하면 트집을 잡히게 되었구요. 인식의 주체에 대한 근거, 나아가 그 포지셔닝 덕분에 도덕의 논리적 근원이 되는 선험은 아직도 결론이 나지 않았다고 봅니다.

선험의 근거에 대해 칸트 이후 헤겔, 하이데거, 사르트르 등 '주류' 철학자들이 주장한 '무(無)'의 개념은 본질적으론 니체나 쇼펜하우어의 니힐리즘과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합니다. 선험의 근원을 무(無)로 상정하지만, 아이러니 하게도 이 모두는 의식과 의지의 주체, 즉 존재자의 본질에 대한 '인정'이 바탕이 되어야 하죠. 인식의 주체가 존재한다는 인정 말이죠.
(결국 '있는 것을 알기 위해 없는 것을 인식하는 있고있는 자의 근본은 결국 없는 것이다.' 같은 소리가 되는데... 하아.. 전 지금도 뭔 소린지 모르겠....)

하지만 본문의 지적처럼 신경학(뇌과학)의 발달로 인식의 주체에 대한 회의가 나타나게 됩니다.
간단한 예시로 뱀에 대한 반응을 들 수 있는데,
기존의 인식론이 ( 인간이 뱀을 본다 → 두렵다 → 동공확대, 호흡이 빨라짐, 식은땀 )의 과정이었다면
신경학에 의한 관찰 결과는 ( 인간이 뱀을 본다 → 동공확대, 호흡이 빨라짐, 식은땀 → 신체변화를 인지하여 두려움이란 감정을 파악함 )이었습니다.
이것은 선험에 대해 고민하는 철학자들의 공리를 깨뜨린 것과 같습니다. 인식의 주체에게 의지가 없기 때문이죠.
이러한 모순은 결국 칸트를 넘어 더 옛날 분의 철학부터 깨뜨려야 합니다. 바로 데카르트 형님이죠.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제1 명제가 틀렸다는 말이니까요.
생각이 인식에 대한 반응이 아닌 반응에 대한 또 다른 반응 작용에 불과하다면 그것은 존재의 증거가 되지 못하니까요.
인간이 복잡하게 프로그래밍 된 단백질 로봇에 불과하다는 수준까지 내려 갈 수 있는 철학의 대위기라고 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선험을 논하기 전에 코기토에 대한 비판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고 봅니다.
사고를 수행하는 영혼의 존재가 결국 몸에 대한 반응에 불과하다면 영혼과 몸을 분리해서 생각하면 안되는 것이죠.
결론적으로 우리에게 존재 자체이자, 존재의 근거로 남은 유일한 개체는 결국 몸 뿐입니다.
여기에서 프랑스 현상학자 퐁티의 몸의 철학을 들고 올 수 있죠.
선험적 근거로서 몸을 상정하고, 본질은 무(無)가 아닌 몸으로 채워져 있다는 그의 생각은
어쩌면 주류 철학에 대한 반작용으로 나온 것일 수도 있습니다.
허나 일원론적인 시각과 본질을 몸으로 둔 그의 센스는
신경학의 발달로 인해 드러나는 인식의 실체에 매우 적절히 부합한다고 봅니다.

선험의 근거를 무(無)로 상정하는 주류 철학은 니힐리즘에 대한 뚜렷한 해법을 제시하지 못했습니다.
뭐 사실 근본이 무(無)인데 허무주의를 극복한다는게 좀 억지라고 보여지는게 저 같은 아마추어의 입장이긴 합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렸다시피 선험은 그 포지셔닝으로 인해 선(善)의 근거가 되는데, 이를 방기하였고
덕분에 20세기는 도덕의 대 실종을 맞이하게 되었죠. 식민지배와 홀로코스트가 판을 쳤던게 이상한게 아니죠.
심지어 그 행위들이 변형된 국가주의들 속에서 다수의 환호를 받았다는 점은... 정말 소름돋는 일이죠.
그런데 몸을 선험적 근거로 삼는 것은 이러한 혼란을 극복하는 데에 충분히 도움이 됩니다.
몸, 즉 생명을 최고의 가치로 놓는다면 이러한 비 윤리적 행동들을 제재하는 데 확실한 명분이 생기거든요.
2차 세계대전 이후 인간이라는 종 전체의 생명을 잃을 수도 있다는 두려움이 현재의 미적지근한 평화를 이어온다는 점에서
지금의 사람들의 생각을 설명할 수 있다고도 생각되구요.

얼마전에 <그녀에게>에 대한 리뷰를 쓰면서 비슷한 이야기를 했었는데요.
기회가 되신다면 이 영화도 꼭 보셨으면 합니다.
몽키.D.루피
14/07/15 02:21
수정 아이콘
니체는 이상하게 정이 안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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