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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4/04/23 01:41:06
Name The xian
Subject [일반] be unlucky
오늘도 피곤에 쩔어 비틀거리면서 겨우 지하철을 잡아 탔다. 으레 다들 지칠 시간이라 지하철 안은 조용했고, 나는 운 좋게 팔걸이가 있는 구석 자리를 잡았다. '적어도 환승역까지는 편하게 갈 수 있겠지' 라고 생각했지만, 그런 안일한 기대는 몇 역 못 가 한 무리의 사람들이 들어오면서 산산이 부서지고 말았다. 약주를 거하게 하셨는지 아니면 뭔가 불만이 있어서인지. 건장한 남성들이 들어오자 마자 빈 자리에 털푸덕 앉아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떠드는 모습은 정말이지 가관이었지만, 뭐 여기까지는 가끔 늦게 전철을 타다 보면 있는 일이다. 그래서 뭐라 떠들든 한귀로 듣고 한귀로 흘려 버리려 했는데. 듣기 싫어도 들을 수밖에 없는 말들이 들렸고, 들리는 말들의 내용이 더더욱 가관이었다. 요즘 전국을 떠도는 우울한 주제를 놓고 갑자기 '재수 없다'는 소리를 하기 시작한 것이다.

욕설 반 말 반의 소리라 정확하게 옮길 수도 없고 옮기기도 싫을 정도지만 요점만 말하자면 그 자들의 소음의 키 포인트는 한마디로 모든 게 그저 '재수 없다'는 것이다. 가령, 그 배에 탔다가 불귀의 객이 된 이들도 '재수가 없어서' 그런 거고, 국민을 미개하다고 한 어떤 정치인의 아들의 헛소리나 기념촬영 하다가 해임된 공무원이나 승객 80명 구했으니 대단한 것 아니냐고 말했다가 직위해제된 경찰간부도 '재수가 없어서' 그런 거란다. 그런 말을 듣다 보니 저런 작자들이 진도에 가서도 그런 식의 말을 할 수 있을까 싶어 참 황당하고 어이없었는데, 내 눈에 보인 다른 사람들의 얼굴이 내 심정을 대변해 주는 것 같았다. 물론, 나를 포함하여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저 눈살을 찌푸릴 뿐 가만히 있었다. 변명같지만 현실적인 문제 때문이다. 사람의 말이 아닌 말들을 쏟아내는 이들에게 한 소리 했다가 시비가 붙어 해꼬지라도 당하는 것은 피하고 싶기 때문이고, 그거야말로 정말 그 자들의 말처럼 '재수가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다행히 얼마 안 가 환승역에 도착했고, 내가 자리를 뜰 때까지도 그런 소리를 쉬지 않고 떠들어대는 그들을 지나쳐 가며 나 역시 다른 사람들을 따라 그냥 눈살을 찌푸린 다음 지하철을 갈아 탔기 때문에 그 망령된 '재수 없다'소리는 더 들을 수 없었다. 하필이면 이렇게 피곤에 지친 퇴근길에 그런 질 나쁜 술주정을 하는 자들을 만나다니. 정말 '재수가 없었다'고 생각하던 찰나. 나는 뭔가 꺼림칙한 기분이 들었다. 굳이 이런 일이 아니더라도, 누군가의 과실과 책임으로 인해 어떤 문제가 발생했을 때에 그것을 그냥 '재수 없다'거나 운이 나빴다고 넘겨버리는 일이 내 주위에 얼마나 많았던가 생각해 보니 뒷맛이 개운치 않았고, 이런 일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부끄러움을 모르는 이들이 얼마나 또 지금과 같은 '재수 없는' 망언을 되풀이하여 사람들의 가슴에 못을 박을지 생각하니 더더욱 꺼림칙한 기분이 들었다.

'재수 없는' 소리를 들은 덕에, 오늘 밤도 편히 자긴 글렀다.


- The xian -

P.S. 제목인 'be unlucky'는 이 글에서 많이 보인 '어떤 단어'를 포털사이트에 쳤을 때 나오는 어학사전 검색 결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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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luckyboy
14/04/23 01:45
수정 아이콘
정말 재수 없는 놈들이네요
모르는 넘이면 미친넘이네 하고 말지
아는 넘이 그래서 맨날 봐야되서 말을 안 섞어요...
14/04/23 02:08
수정 아이콘
글제목과 닉네임이 잘어울리시네요!?
14/04/23 01:48
수정 아이콘
우연이 겹치면 필연이 되는데, 그럼 재수 없는 사안이 겹치면 그건 뭐라고 해석해야 될지... 뭐, 그 분들이 이런 생각하기에도 너무 게으르지 않나, 그렇기에 그렇게 쉽게 말할 수 있는것이 아닌가 싶네요.
황 간사
14/04/23 04:05
수정 아이콘
정말 재수가 없는 사람들이군요.
그 사람들이 처음부터 그렇게 재수가 없지는 않았을 것이고.. 뭔가 재수 없는 일을 겪고난 후 모든 나쁜 일들은 단지 재수가 없어서 생긴 것이라고 정당화시키는 것일까요? 극단적 운명론자, 회의론자 같다는 생각도 들고요.
그 사람 개인적으로는 그런 식의 가치와 철학, 행동이 편할 수도 있겠지만, 저렇게 사람들에게 재수 없는 인간으로 찍힌다면 개인적으로도 손해가 될 수도 있겠네요.
사회적으로 저런 부류들이 많아지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고요.
뭔가 씁쓸해지네요. [m]
2막3장
14/04/23 07:26
수정 아이콘
이런 얘기를 들을 때마다 나오는 사람들에겐 인과관계가 뒤바뀐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재수 없는 사람들이 재수 없는 일을 유발하는 것 같은 거 말이죠. 그들의 인생에서는..
톼르키
14/04/23 10:51
수정 아이콘
아 정말 지하철에서 고래고래 소리지르는 작자들은;;;
술 탓 하기에도 너무 이상하지 않나요?
관상학적으로도 듣는이가 없는데 미친듯이 중얼거리거나 불만을 토해내면 자기 삶에 희망이 없어서 그런거라고는 하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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