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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4/02/04 04:16:20
Name 王天君
File #1 lesson_of_the_evil_2012_58171374050060.jpg (59.8 KB), Download : 60
Subject [일반] 악의 교전 봤습니다.(스포일러 없습니다)



외모와 성격, 교사로서의 책임감과 지도력까지 모든 면에서 칭찬이 자자한 고등학교 영어교사 하스미는 사실 사이코패스입니다. 일견 그는 자신이 담당하는 학급을 잘 꾸려나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의 본성은 주위 사람들에게 조금씩 흘러나가기 시작합니다. 어찌저찌 자신만의 방법으로 입막음을 해오던 그는 마침내 그 동안의 악행이 모두 들통날 궁지에 몰리게 됩니다. 진실을 은폐하기 위해, 하스미는 사이코패스말고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결단을 내리고 그의 학생들은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지게 됩니다.

사실 이 영화는 곱씹을 거리가 그렇게 많진 않습니다. 플롯은 그저 우직하게, 충실하게 파국을 향해 달려나갈 뿐이죠. 그렇다고 이 영화가 펼치는 끔찍한 비극에 사회 비판이나 인간에 대한 탐구가 엿보이는 것도 아닙니다. 그렇다면, 고교생 한 학급이 몰살당하는 이 영화의 가치는 대체 뭘까요? 물론 많은 사람들이 주연 배우 이토 히데아키의 열연이나 슬래셔 무비로서의 장르적 완성도를 꼽을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이 영화는 원작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감독의, 감독에 의한, 감독을 위한 영화입니다. 그리고 그 감독은 바로 악명 높은 미이케 다카시지요. 한 마디로, 감독의 악취미와 그 추종자들을 위한 영화입니다

대충 제가 본 작품들만 헤아려보더라도, 악의 교전은 미이케 다카시가 추구하는 미학의 연장선상에 있는 작품입니다. 그는 인체훼손을 즐깁니다. 그리고 그 과정을 극단적으로 부풀리기 좋아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미쟝센으로 활용하는데 거리낌이 없습니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미이케만의 개성이 분출하는 부분입니다. 그는 절대로 유려하거나 우아함을 의도하지 않습니다. 우스꽝스럽고, 비현실적이면서 조잡한 시퀀스들을 통해 웃음과 잔혹함을 충돌시킵니다. 그리고 관객을 영화 자체에서 소외시키려는 듯, 철저히 B급 연출을 고집하죠. 사방 팔방 날아다니는 절단된 사지나 아프다고 징징대는 인간 군상들을 보면 미이케 감독은 '잔인하다'라고 느끼는 감정 그 자체를 조롱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 번 영화에서 이런 기질을 많이 억누르고 있는 듯 보이지만, 군데군데 미이케 스타일의 연출은 여기저기서 확인됩니다. 하스미가 과거를 회상할 때 프레임 밖에서 불쑥 튀어나오는 또 다른 살인자 체임버스의 등장이 바로 그 증거죠. 다소 엉성해 보이는 축제 준비의 현장은 그야말로 미이케를 위한 배경 그 자체입니다. 전구는 반짝반짝 거리고 구석에 몰려 죽은 학생들의 시체는 한 가득 쌓여있죠. 그리고 거기를 산탄총을 든 채로 무덤덤하게 거니는 무표정한 주인공까지. 전작들에서 익살기를 빼고 조금 힘을 줬을 뿐, 미이케가 벌이는 광란의 파티는 이 영화에서도 여전합니다. 잔인한 가운데에서도 천연덕스러워서 결국 괴기스러워 보이는 것들 말이죠.

이 영화의 백미는 학교에서 펼쳐지는 하스미의 살육 장면입니다. 자신의 학생들을 향해 신중하고 날렵하게 총알을 날리는 하스미의 모습은 공포를 넘어서 경악 그 자체에요. 롱 쇼트로 여과 없이 보여주는 이 살육 장면은 어떤 걸 상상해도 그 이상의 충격을 줍니다. 대부분의 감독이 쇼트, 프레임, 사운드로 상상력을 자극하는 장면에서 미이케는 아주 눈 앞에 들이미는 수준으로 학살 장면을 보여줍니다. 더 끔찍한 건, 이 장면에 그 어떤 휴머니즘도 녹아있지 않다는 사실이에요. 오로지 슬래셔 영화의 쾌감과 미이케 본인의 독특한 불쾌감만을 증폭시키기 위해 영화는 몇십명의 고교생을 학살합니다. 정말이지, 질리지 않을 수가 없는 장면이죠. 게다가 이 부분에서 약자는 아무런 저항도 못하고 강자에게 사정없이 유린당합니다. 등장인물간의 이 힘의 불균형 또한 보는 사람을 너무나 고통스럽게 만듭니다. 물론, 가해자에게 감정을 대입한다면, 치트키를 쓰고 슈팅 게임을 하는 듯한 쾌감을 느낄 수도 있겠지요.

잔인한 영화는 그리 좋아하지 않지만, 미이케 다카시의 영화는 결국 어쩔 수 없이 챙겨보게 됩니다. 음침하지만 귀엽고, 소름 끼치지만 우스운 이야기를 다른 감독에게선 얻을 수 없을 테니까요. 한 마디로, 악의 교전은 메인 사운드 트랙 Mack the Knife 과 닮아있습니다. 흥겨운 멜로디에 섬뜩한 살인자의 스토리를 가사로 담고 있는 노래를 듣고 있자니 으스스해지는군요.

@ 사실 미이케의 감성이 닿아있는 곡은 Bobby Darin의 Mack the Knife보다는 "서푼짜리 오페라"에 쓰였던 오리지널 곡 'Die Moritat von Mackie Messer'일 것 같습니다. 이렇게 불쾌한 곡도 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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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louch Lamperouge
14/02/04 04:51
수정 아이콘
그래도 이 얘기 자체가 결말에 대한 스포일러만 없을뿐이지 어느정도 내용은 담고있다고 봅니다.
스포 있다고 표현해주시는게 좋을듯..
원작은 참 재밌게 읽었는데 영화는 어떨지 궁금하네요. 좋은 리뷰 잘 읽었습니다.
싸가지
14/02/04 04:57
수정 아이콘
스포 있다고 제목 바꾸셔야할듯요..
게임매니아
14/02/04 05:39
수정 아이콘
스포일러 없습니다만 줄거리와 백미인 장면 내용은 포함할 수 있습니다.
잔인한 걸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인체훼손을 즐기는 감독의 작품은 챙겨보고 있습니다.
王天君
14/02/04 12:25
수정 아이콘
Lelouch Lamperouge님//싸가지님//The HUSE님

이건 예고편에서도 아예 까발리고 있는 내용이라서요. 13일의 금요일에서 제이슨이 사람들을 죽인다는 내용과 별반 다를 게 없습니다.
제리드
14/02/04 05:59
수정 아이콘
책으로만 봤는데 어처구니 없었던 얘기였어요...
14/02/04 07:16
수정 아이콘
책으로는 사실 별 거 없는 얘기였는데 - 마지막 한 페이지 정도가 좀 인상적이었을까....
역시 미이케 다카시는 비범(?)하더군요.
The HUSE
14/02/04 08:23
수정 아이콘
일단 스포가 많네요.

뭐, 잘 만든 영화라는 느낌은 안들었지만,
나름 색깔있는 영화였던 것 같습니다.
SuiteMan
14/02/04 08:52
수정 아이콘
대놓고 인체 훼손은 좀 싫어용..
14/02/04 10:10
수정 아이콘
언제 개봉한건가요?

각종 국제영화에서 미이케 다카시, 사부의 영화는 무조건 챙겨보던 시절이 엊그제 같은데 요즘은 잘 안보게 되네요.
14/02/04 11:38
수정 아이콘
국내 정식 개봉은 작년에 했었는데, 몇개관에서만 했던 걸로 기억합니다.
작년 PiFan에서 미이케 다카시 감독의 영화가 두편 상영됐었는데,
<짚의 방패>와 <악의 교전>이었습니다.
14/02/04 11:59
수정 아이콘
역시 pifan...

답변감사합니다
허리부상
14/02/04 10:53
수정 아이콘
원작을 그대로 따라가면서 잔인한 장면을 영상으로 본다. 외에는 의미가 없어서 중간에 포기했습니다. 눈알 씹어먹는 장면까지 딱 봤네요...

원작은 아주 인상깊고 흥미롭게 봤습니다. 작가의 전작인 '신세계에서 ' 는 저의 인생의 책이라고 할 정도로 재미있었고요..
기시유스케 이 작가는 연출력이 좋아서 그런지 무슨 이야기를 해도 재미가 있습니다. 그냥 보험회사 직원이 업무를 보는 내용을 써내려가도 이상하게 몰입이 잘 되네요..
여러분 모두 '신세계에서' 를 보도록 합시다 정말 쵝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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