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즈니의 작품이 유아용이라는 이야기는 이미 옛말이 되었습니다. 애니메이션 장르 자체가 전반적으로 성인 대상으로도 충분히 먹히는 장르가 되었고, 디즈니 역시 전작 라푼젤로 애니메이션 명가의 위력을 다시 한번 입증했죠. 이번 작품 ‘겨울왕국’ 역시도 심상치 않은 입소문과 함께 올 겨울 흥행의 핵으로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중입니다. 오죽하면 ‘변호인’의 흥행을 달가워하지 않는 측에서 이 영화를 대척점으로 써먹을려고 하겠습니까. ( 한 나라, 국민들의 마음을 얼어붙게 하는 능력만큼은 박근혜씨도 엘사와 맞먹으니 뭐…)

일단 겨울왕국을 통해 가장 직관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점은 디즈니의 기술력입니다. 이 정도의 화면과 시각적 아름다움은 애니메이션이라는 장르를 떠나서 경탄이 나오는 수준입니다. 인물들의 생생하고 매끄러운 움직임이야 기본이고, 배경이 되는 설산과 성, 특히나 엘사가 세운 궁전은 그 자체로 완벽한 이미지를 구현하고 있습니다. 얼음이 가진 투명함과 단단함을 유리처럼 표현해 리얼리티와 판타지를 동시에 그려내고 있죠. 이따금식 화면에 흩뿌려지는 눈과 그 결정의 디자인을 활용한 연출들은 상당히 인상적입니다.

이 작품의 특이점은 2인 히로인 체제로 이야기를 끌고 나가는 점입니다. 일반적으로 1인 공주 체제로 나가던 전통에서 두 명의 히로인을 배치해 각자의 특징과 속성을 대조적으로 분산시켜 놓았습니다. 먼저, 엘사는 다소 전통적인 여성상의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기품, 고귀함, 연약함, 비극의 주체, 수동성, 식물의 특성 등을 띄고 있죠. 그에 반해  안나는 디즈니가 혁신을 꾀하려는 부분의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활발함, 말괄량이, 강인함, 비극의 객체, 능동성, 동물의 특성 등을 띄고 있어요. 그래서 캐릭터들의 매력이 본 작품에서는 훨씬 풍성하게 느껴집니다. 또한 기존의 보수적 디즈니 팬들과 일반 팬들 모두를 만족시킬 수 있는 전략으로도 이 시도는 성공적이라 보입니다.

그러나 이 2인 체제는 겨울왕국의 완성도를 떨어트리는 가장 큰 흠이기도 합니다. 이 둘의 이야기가 균형있게 다루어지고 있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 이야기에 두 명의 주인공과 두 개의 퀘스트가 생기면서 스토리가 집중력을 잃은 느낌입니다. 하나는 엘사의 냉동능력 (…) 조절, 다른 하나는 안나의 연인 찾기라고 할 수 있겠죠. 시간상으로는 분명히 동시에 두 퀘스트를 해결하는 과정이 펼쳐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두 자매의 고민, 주제 자체부터가 그다지 연결점이 없으니 결국  두 개의 사건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지가 않는거죠.

엘사는 자신의 초능력으로 본의 아니게 다른 사람들과 왕국을 위험에 처하게 만듭니다. 이것이 무서워서 그녀는 고립된 채로 성장했고, 타인이 없는 외부로 도피하며, 스스로 고독을 선택하죠. 그리고 그런 그녀를 안나는 계속해서 찾아다니고 위기를 겪습니다. 이 일련의 과정을 보면 그녀의 능력과 갈등이 상징하는 바가  ‘관계’라 볼 수 있을 겁니다. 결국, 영화는 타인과의 관계에서 상처 입지는 않을까, 상처를 입히지는 않을까 하는 두려움을 어떻게 극복해야 할 지를 다루고 있습니다. 타인에게 용기 있게 다가가라, 나 자신과 타인의 미숙함을 이해하고 받아들여라 하는 결론을 담고 있는 이야기라 할 수 있겠죠.

그러나 이 주제의식이 일관성 있게  다뤄지지는 않습니다. 안나의 러브스토리가 사족처럼 끼어있기 때문이죠. 안나의 로맨스는 그저 철저히 안나 개인의 이야기이고, 엘사의 성장 스토리와는 별 다른 관련이 없습니다. 오히려, 일종의 맥거핀으로 써먹히기까지 합니다. 그렇다고, 안나만의 개인 스토리로서 완성도를 갖추는 것도 아닙니다. 그녀가 사랑에 빠지고, 후회하고, 깨달음을 얻는 과정이 너무나 설득력이 없습니다. 그 모든 감정 전환이 너무나 갑작스럽고 계기가 불분명합니다. 거기에는 아무런 논리적 인과관계도, 로맨스의 긴장감도 전무합니다. 영화는 감정이 이미 이렇게 자라났다고 전제를 하고 그 이후의 이야기를 급급히 펼쳐가기에 바쁠 뿐이죠. 두명의 히로인에게 각각의 스토리를 배분하기 위해, 그리고 공주가 자신의 짝을 찾는 디즈니의 전통을 버릴 수 없기에 이런 결과물이 나온 것이겠지요.  

이런 부분에서 이 영화는 완성도가 아주 높다고 할 수는 없을 겁니다. 그러나 어떤 영화의 어떤 장면은 한 작품의 의미가 되버리기도 합니다. 엘사가 Let it go를 부르는 장면이 바로 그렇다고 할 수 있겠죠. 이 시퀀스는 시각적으로나 청각적으로나 가히 압도적입니다. 엘사에 의해 구축되는 궁전, 엘사의 진화된 아름다움은 보는 그 자체로도 엄청난 쾌락을 선사하기도 합니다.  또한, 이 부분은 ‘관계’라는 주제에서 대단히 의미심장한 장면이기도 합니다. 비록 희망차게 노래를 부르고 있지만, 모든 인간관계를 끊고, 어쩔 수 없이 고독을 선택해야 했던 엘사의 슬픔이 역설적으로 묻어나오는 장면이기도 하니까요. 엘사가 자신의 능력을 받아들이고 자유를 선포하는 장면으로서 성장 드라마로서도 대단히 중요한 의미와 감동을 가지고  있기도 합니다. 새로운 시작, 자아의 성장과 독립, 트라우마의 극복이 이만큼 극적으로 드러나는 장면은 역대 디즈니 작품들 중에서도 거의 없을 거에요.
  
이 시퀀스의 감동이 어찌나 큰지, 이후의 이야기들이 밍숭맹숭해질 정도입니다. 그리고 나머지 부분들을 모두 잊어버리더라도, Let it go 시퀀스 하나로도 이 영화는 다른 영화들이 담지 못하는 그 모든 감동과 전율을 담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다른 부분들이 허접하다는 말은 절대 아닙니다. 떠도는 소문만 믿고 엄청난 완성도를 섣불리 기대하거나 그에 동조하지 못하는 자신을 이상하게 여길 필요는 없다는 뜻이지요. 그리고 그 연결이 매끄럽지 않더라도, 장면 장면의 감동은 가볍게 볼 수준이 아닙니다. 웃음과 가슴 찡한 감동은 영화 곳곳에 녹아있거든요.

이 작품의 서사적 약점은 디즈니의 발전 가능성을 여전히 암시하고 있습니다. 이 약점을 극복한다면, 탄탄한 이야기와 더욱 더 진보한 기술은 어떤 결과물을 만들어내게 될까요? 이게 제가 이 작품에 경악하는 또 다른 이유입니다. 디즈니의 이 유구한 전통과 끝없는 혁신이 어떤 결과물을 만들어 낼려나요. 아무래도, 라이온킹의 영광을 재현할 날은 그리 멀지 않은 것만 같습니다. 어디까지 사랑스럽고 익살맞을 수 있을지, 그리고 그 와중에도 얼마나 눈물샘을 자극할 수 있을지, 제작사에 경외에 가까운 기대를 품게 만드는 작품, 그것이 ‘겨울왕국’입니다.


@ 아무래도 오디션 프로그램에 Let it go가 또 다른 베스트셀러로 떠오를 것 같군요.

@ 엘사는 대관식 할 때의 외모가 훨씬 이쁘지 않았나요? 물론 각성한 뒤의 모습이 이쁘지 않다는 것은 아니지만, 그 부분의 요염함은 이야기 상 조금 불필요하게 느껴집니다. 그런 매력을 작품 속에서 보여주는 것도 아니구요.

@롯데 시네마는 3d 안경을 따로 수거하지 않더군요. 조금 놀랐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