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 라디오를 즐겨 듣는 편인데, 최근 조금은 놀라운 사실을 발견 했습니다. 봉만대 감독이 무려 두 프로에서 '고정'을 하고 있더라구요.
김현철이 진행하는 '오후의 발견'과 '컬투쇼'. 뒤져보니 '고정'이 아닌 게스트 출연도 잦았고 케이블 방송에 패널로 출연도 했습니다.
방송을 들어 보며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흡사 (방송에서 말투가 비슷하다고 지적 받기도 했던) 부활의 리더님과 같은 길을 막 떠날 차비를 하다고. '메이저'에서 생존한 유일한 에로 감독이라는 그야말로 독보적인 캐릭터인데 입담이 좋아서 (최신 유행에 대한 감은 좀 떨어져 보이지만 특수 분야의 전문 지식에 풍부한 유머감각이 있는데다 의외로 인문학적 소양이 상당합니다.) 예능 대세까지는 아니더라도 방송인으로 성공할 소질이 보입니다.
그러다 새삼 전부터 이상하게 생각했던 문제가 고개를 들었습니다. '저 사람이 과연 '에로거장'이라 불릴만할까.' 왜 그런 의문이 들었는지 간단히 써보겠습니다. 어찌보면 참 부질없는 짓이죠. 새벽에 뻘짓할 때나 해봄직한.
1. 한국에서 '에로 영화' 산업은 이미 수명이 다했다.
지금도 물론 (에로틱 멜로, 에로틱 코믹 따위가 아닌 순수한) 에로 영화가 만들어지긴 합니다. 하지만 비디오 대여점을 중심으로 전성기를 구가하며 한 달에 수십 편씩 신작이 나오던 시절은 오래 전에 끝났습니다. 인터넷의 범람으로 '무료 포르노'가 무한대로 공급되는 시대가 오면서. 이 시대에 '에로 거장'이라는 호칭은 허수아비에 씌워진 왕관에 불과합니다.
2. '전성기 시절'에 봉만대는 영화를 몇 편 밖에 찍지 않았다.
봉만대 감독이 명성을 날리고 심지어 업계 내부의 엄격한 카스트의 벽을 뚫고 메이저까지 나올 수 있었던건 물론 그가 찍었던 '에로 영화'들 덕분 입니다. 특히 국내 에로 영화치고는 파격적으로 본격적인 사회문제를 진지하게 다루면서 장르 본연의 역할? 또한 충실해서, 지리멸렬한 복제품에 질린 에로 매니아들부터 몇몇 메이저 영화인들까지 끌어당겼죠. 하지만 막상 그가 찍은 에로 영화 편 수는 한 손에 꼽을 정도 입니다. 메이저 상업 영화 감독이라면 중견 감독 소리 들을 만한 분량이지만 그 수십 분의 1 비용으로 1주일이면 뚝딱 찍어내어 매 주 신작이 쏟아졌던 시장에서 그는 굉장히 과작을 한 감독 입니다. 그렇다보니 당대에 열광적인 지지자들을 만드는 촉망받는 신예 정도였지 업계를 지배하고 이끄는 대가의 위치는 전혀 아니었습니다.
3. 메이저 데뷔 이후에도 '에로'는 거의 찍지 않았다.
이게 제일 중요한데, 메이저에서 그가 찍은 거의 모든 작품들은 물론 '에로'로 볼만한 요소가 있긴하지만 그렇다고 딱 에로라고 부르기는 애매한게 대부분 입니다.
영화 '아티스트 봉만대'에서 돈만 밝히는 제작자가, 메이저 데뷔작인 '맛있는 섹스...'와 그 8년 후에 찍은 케이블 드라마 'TV 방자전'을 잘 봤다고 너스레를 떠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런데 그 두 편이 다입니다. (사실 그 두 편도 에로신이 좀 많이 나오는 멜로라고 볼 수도 있죠.)
그밖에 뭐가 있느냐. 먼저 신세경 주연의 '신데렐라'. 15세 관람가인 정통 호러영화 입니다. 저도 당시 도지원의 연기에 기대를 가지고 극장에 갔는데 의외로 영화가 꽤 괜찮아서 놀랐던 기억이 있습니다. 이 영화가 잘됐더라면 봉만대 감독도 에로 전문 딱지 떼고 다른거 계속 찍을 수도 있었을텐데.
봉만대 감독의 작품세계에서 두드러진 특징은 '영화 찍는 영화'를 계속 찍는다는 겁니다. 영화를 만드는 감독과 그 주변 사람들 이야기는 그가 집요하게 반복하는 설정 입니다.
'맛섹사' 이후에 찍은 케이블 드라마 '동상이몽'은 네 편의 에피소드로 구성되어 있는데, 에로틱 사극을 찍는 영화인들의 연애 이야기가 주요 스토리 입니다. (한 편은 그 영화 속의 영화가 통으로 직접 나옵니다.) 초짜 여성감독과 연상의 남성 촬영감독 사이의 갈등을 그린 2편의 리얼함은 다큐를 보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 입니다. 결국 둘 사이에 연애가 싹트지만 그 여감독은 벗기는 커녕 키스조차 안합니다. (비록 이 드라마에서 가장 화제가 된건 노출 많이한 여성 음향 감독이긴 했지만요.) 더구나 이 드라마는 시점이 계속 바뀌고 시간이 역전되며 환상과 현실이 뒤섞이는 등 예술 영화에 나올법한 난해한 기법들이 출몰 합니다. 봉만대의 명성이 아니었다면 케이블 드라마에서 이런걸 하게 놔두었을까 싶을 정도 입니다.
영화 '섹스, 거짓말 그리고 비디오 테이프'는 일종의 시대극인데, 바로 에로영화 전성기를 배경으로 합니다. 그 시대는 동시에 응칠의 시대, 건축학 개론의 시대이기도 하죠. 손을 털고 싶어하는 불법 포르노 감독과 '스너프 필름'을 만들어 한몫 챙기려는 흑막 격의 '형수'라는 여자가 주인공으로, '청계천 공구상가에서는 원자폭탄도 만들 수 있다'는 오랜 농담을 차용해 만든 일종의 블랙 코메디 영화 입니다. 이 영화에서도 어김없이 여배우가 벗긴 하지만 분량이 ('에로'라기엔) 턱없이 적고 다른 요소들 - 독특한 캐릭터가 살아있는 여러 조연들과 당대 청계천 일각을 재현한 세트, 맛깔난 대사들, 변칙적인 템포의 농담들, 빠른 전개, 그리고 이 모든게 아까울 정도로 조악하고 불친절한 플롯 등-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어 별로 눈이 가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를 재평가하게한 최신작 '아티스트 봉만대'. 종종 여러 영화에 단역으로 출연한 경력이 있는 '연기자' 봉만대가 당당히 주연으로 데뷔한 이 유쾌한 페이크 다큐 영화를 '에로'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하지만 안 본 사람이 훨씬 더 많으니 다 그런건 아니겠죠.
영화 속에서 그는 "사람들이 나를 '에로거장'이라 부른다.", "니들이 에로를 알아?" 같은 대사를 내뱉지만, 제목부터 시작해서 아이러니하고 코믹한 자기비하가 주요 흐름인지라 이를 진지하게 받아들인 사람 또한 없을 겁니다. 영화를 봤다면. 하지만 이런 대사를 카피로만 접한 사람들이 훨씬 많으니 또 다 그런건 아니겠죠.
봉만대 감독은 에로에 대한 나름의 미학과 소신, 열정이 있으면서 고지식한 작가주의 감독이기도 합니다. 자부심과 열등감이 공존하는 것처럼 보이구요. 그런데 한편으로는, 극단적으로 말해 그는 히트곡 하나로 십 수년을 돌아다니며 노인들 쌈짓돈을 끄집어내는 트로트 가수처럼 보입니다. 더이상 에로는 찍지 않으면서 왕년에 에로 몇 편 찍은 경험담 자체를 거듭 재탕하는. 판이 붕괴된데다 새로운 판에서의 입지가 좁아서 그에게 선택의 여지가 많지 않았다는게 변명이 될 수 있겠지만요.
아무튼 감독으로서건 (예비) 방송인으로서건 흥미로운 캐릭터 입니다. 다음 영화 기대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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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개인적으로 애로거장이라 함은 스킵을 하면서 보다가 멈추고 끝까지 몰입하게 만드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데, 봉만대 감독은 [맛있는 섹스 그리고 사랑] 이후엔 그런 작품이 없었던것 같네요.
그리고 개인적인 취향인지 모르겠지만 애로영화 볼때 가슴성형 하거나 여기저기 뜯어 고친 사람들 나오면 분위기 확 깨서 그만보게 되더라구요. 작으면 작은대로, 처지면 처진대로 매력이 있는데 말이죠. 그런면에서 정말 틴토 브라스가 정말 명감독이 아닌가 싶습니다.하하하..한국 애로영화에서 볼 수 없는 영상미가.....!!
최근에 몰입하면서 봤던 작품이 제작년 말에 개봉했던 [롤 플레이]인데, 이정도만 되어도 참 훌륭하다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