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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3/10/24 14:15:24
Name 걸스데이
Subject [일반] 결국엔 평범한 직장인.
나의 초등학교 시절 장래희망은 축구선수였다.

어린시절 황선홍은 나의 우상이자 동경의 대상이었고 초등학교 시절 점심시간에 하던
축구는 나에게 있어 달콤하고 짜릿한 경험이었다.
해가 지는지도 모른채, 날 애타게 찾는 어머니의 부르짖음도 잊은채,
저녁을 먹는 것도 잊은채 축구공을 찼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온몸이 흙투성이가 되고 무릎이 다 까져서 피를 줄줄 흘려도,
울타리 너머 날아간 공을 주워오다가 발목의 인대가 끊어져도,
해가 완전히 저물어서 공이 안 보일 정도로 늦게까지 공을 차다가
집에 들어가면 부모님의 불호령이 떨어져도 좋았다.

반 대항 축구시합은 모든 아이들에게만큼이나 나에게 있어
가장 설레이고 흥분되는 기간이었다.

자랑인 것 같지만 초등학교 때 날 눈여겨보던 체육선생님이 당시에
많은 아이들에게 로망이었던 '차범근 축구교실' 에 친한 분이 계시니
그곳에 보내보라고 부모님을 설득할 정도로 나름 재능이 있었던 것 같다.



나의 중학교 시절 장래희망은 국사 선생님이었다.

국사는 내가 중학교 때 가장 좋아하던 과목이었다.
선생님이 재밌었던 이유도 있지만 유독 국사만 눈에도 귀에도
머리에도 잘 들어왔던 것 같다.
시대를 가리지 않고 국사의 내용들은 흥분 그 자체였다.
진도는 고구려 시대였지만 미리 신라, 백제, 고려, 조선을
모두 공부하고 싶다는 충동에 따로 국사선생님을 찾아가 가르침을
구하러 교무실을 찾아간 적도 있다.

국사선생님을 그런 나를 기특하게 생각하면서 미래에
좋은 국사 선생님이나 교수가 되라고 격려해주시곤 했다.
솔직히 공부를 잘하는 것도, 그것도 못하는 것도 아닌 어중간한
학생이었지만 중학교 3학년 때 미국으로 오게되었을 때
받은 중학교 성적표에서 유일하게 1, 2, 3학년 모두 '수' 를 받은 과목도

국사였다.



나의 고등학교 시절 장래희망은 수의사였다.

언제부턴가 심심풀이로 찾게된 동물관련 서적들을 달달 읽기 시작했고
개나 고양이 같은 사람들에게 친근하고 익숙한 동물들 뿐만 아니라
산과 바다와 초원과 밀림에 있는 동물들의 생태계에 대해서
매우 흥미로운 시간을 보낸 적이 있었다.

그 중에 나를 가장 자극했던 것은 멸종위기 동물들이었다.

지금도 어딘가에서 자연의 섭리로 혹은 사람의 영향으로 인해
멸종을 당하고 있는 동물들을 생각하노라면 가슴이 아팠다.

그들도 오랜시간 우리와 같은 행성에서 먹고 싸고 놀고 붕가붕가도 하고
금지옥엽 귀한 새끼들도 낳고 행복하게 보낸 시간들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다가 자연이라는 거대한 힘 앞에 섭리라는 이름으로 사라져간다고
생각하니 서글펐다. 그래서 내가 그 생명들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그들을 멸종으로부터 보호한다는 것은 스스로도 오만하다고 생각했다.
멸종이 자연의 섭리라면 그것을 거스르지 말아야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내가 내린 결론은 수의사가 되어,
그들을 조금의 시간이라도 벌어주어 멀리가는 길을 배웅해주는 것이었다.

웹툰 '죽음에 관하여' 에 등장하는 신처럼 그들의 옛 이야기들을 들어주고
너희들은 그동안 열심히 살았다고, 내가 너희들이 존재했었다는 것을 잊지 않겠으며
후손들에게도 너희들의 이야기를 전해주겠다고 약속하며 가는 길에 아쉬움이 남지 않도록 해주고 싶었다.

보통 수의사라고 하면 개나 고양이 같은 애완동물을 치료하는 의사들을
떠올리기 쉽지만 난 무언가 더 큰 의미로의 수의사가 되고 싶었던 것 같다.




지금의 나는 미국의 작은 생명공학 회사의 연구직원이다.

축구를 하기엔 발도 느리고, 체력도 저질이다.
국사를 다시 공부하려면 한국으로 돌아가야 하지만 미국에 계시는 부모님을 두고 갈 수가 없다.
수의사가 되려면 시험도 봐야하고 대학교 때 성적도 좋아야하는데,
시험공부를 하자니 하루에 허락되는 시간은 3시간 남짓이고,
대학교 때 성적은 대학원과의 거리가, 나와 여자의 거리만큼이나 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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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10/24 14:19
수정 아이콘
<국사를 다시 공부하려면 한국으로 돌아가야 하지만 부모님을 모셔야한다.>

이 문장을 통해 유추하건데 부모님께서도 미국에 계신가봅니다. 이민 1.5 세대신 듯 한데, 그들만의 애로가 많지요. 힘내세요.
걸스데이
13/10/24 14:20
수정 아이콘
맞습니다 흐흐 2003년에 영주권을 발급받고 온 가족이 함께 들어왔습니다. 외가쪽 가족들이 다 미국에 계셔서요.
FreeAsWind
13/10/25 01:19
수정 아이콘
와우 저도 2003년에 영주권 발급받았는데 같네요. 저도 친가 외가분들 대다수가 미국에 사십니다.
13/10/24 14:22
수정 아이콘
와우 날카로우시네요. 사스가 교수님.
yurilike
13/10/24 14:22
수정 아이콘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쉽지 않지만 용기내서 하고싶은 일을 하시는게 어떤지요? 길지 않은 인생입니다.
13/10/24 14:43
수정 아이콘
지금도 안늦었다고 생각해요.

저희 아버지의 이야기를 말씀드리자면,
-> 평범한 고졸(종합고등학교 원예과). 원예전문가가 되고 싶었지만 그당시에는 그런 개념도 없었고 일자리도 없었죠.
-> 막일 -> 세탁소 인수받아 운영 -> 결혼 -> 저 탄생 -> 세탁소 망함 -> 무직
의 우울한 시기를 보내시다가,
-> 서른 다섯에 병원 간호부(병원에서 베드 밀고다니는 아저씨)로 취직.. 요즘으로 말하면 비정규직이죠.
-> 불규칙한 근무시간에도 불구하고 38세부터 인근 전문대학 야간학과 다니고 졸업
-> 정형외과 석고사 (팔에 깁스 해주고 풀어주고 하는 아저씨..) 로 전직
하셨었죠. 여기까지만 해도 막일하는 아저씨에서 선생님 소리 듣는 정도 되었으니까 꽤 괜찮아졌습니다. 급여도 오르고 석고사 협회같은데에 들어가서 활동도 하시고요. 하지만 부족한게 있으셨나봅니다.

-> 석고사 하시면서 야간으로 4년제 3학년 편입 -> 마흔 둘에 다니시던 병원 사무직 공채 시험 쳐서 합격
-> 병원 원무과로 발령..

그런데 나이가 많다보니 상사들이 껄끄러워 해서 2~3년 간격으로 팀을 떠돌아다닙니다. 못견디면 나가라, 라는 의미도 있었겠죠.
그런데 그렇게 한팀 두팀 떠돌다가 온 팀을 다 돌고나니 이제는 못건드릴 사람이 되어버린겁니다.
-> 97년 IMF 때 아버지 또래 간부급이 다 짤려나가는 바람에 쾌속승진
-> 결국 비 선출직 최고 간부까지 진급 후 정년퇴임.. 간부 정년퇴임이 10년만에 있는 일이라 인사팀에서도 어떻게 해야될지를 몰라서 아버지께서 손수 행사 주관...
-> 퇴직 후 대학 시설관리팀에 재취직.. 학교 내에 수목원이 있는데 그거 관리하고 계십니다. 고등학교때 꾸었던 원예에 대한 꿈을 이제 이루신거죠.
취미로 집에서 난을 다수 키우시는데, 아직 집에서 난이 죽은 것도 못봤고 해마다 내려가면 난꽃이 집안 가득 피어 장관을 이루곤 합니다.
요즘은 제 월급보다 많은 연금과 월급을 받으시면서 편하게 하시고 싶은 일을 하실 수 있다고 좋아하십니다. 젊었을 때 원예 관련 일을 했다면 아마 삶에 치여서 싫어하게 되었을 수도 있지만 이젠 여유를 가지고 바라볼 수 있어서 좋다고 하시네요.

꿈이란 이런게 아닐까 싶습니다. 안된다고 하는 사람은 결국 안되고, 된다고 하는 사람은 결국 되는 것 같네요.
13/10/24 14:48
수정 아이콘
이야... 훌륭한 이야기입니다.
13/10/24 14:50
수정 아이콘
아마 아버지께서 꿈을 포기하시고 주저앉아 술에 절어 사셨다면, 망한 세탁소집 아들내미가 될뻔 했지요.
그렇게 힘들고 우울한 와중에도, 주변사람들이 간호부가 뭘 할려고 대학까지 다니냐고 손가락질 하는 와중에도,
처자식까지 딸린 상태에서 과연 지금 하고 있는게 정말 가치있는 일일까 수십번 고민하시는 와중에도 저렇게 삶을 끌고나가신 아버지가
지금 돌이켜보니 참 대단하신거 같습니다.
걸스데이
13/10/24 14:54
수정 아이콘
오... 아버지가 대단하신 분이네요 존경스럽습니다 ㅠㅠ 지금은 제 자신의 의지도 약한 상태인 것 같기도 합니다. 갚아야 할 학자금도 어마어마한데 아버지가 몸이 불편하셔서 어머니도 주방일을 하시고 저와 형이 직장 다니면서 모시고 있는 상황이라서요. 그래도 언젠가 저 스스로 기회를 만들 수 있도록 준비하고 있습니다. 기회라는건 오는 것도 있지만 스스로 만드는 것이니까요 흐흐.
13/10/24 15:15
수정 아이콘
네. 준비하고 있으면 기회는 언제든 잡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건승을 빕니다.
시지프스
13/10/24 14:57
수정 아이콘
정말 멋진 아버님이시군요..이건 책으로 내도 되겠다
Jaime Lerner
13/10/24 16:45
수정 아이콘
아버님께서 KBS의 강연 100˚C 무대에 서도 될 정도로 멋진 삶을 사셨네요.
Pluralist
13/10/24 17:10
수정 아이콘
아버님께서 정말 대단하신 분이시네요. 되풀이해서 다시 읽어봅니다.
언제 자유게시판에 한 번 제대로 아버님의 인생에 대해서 써보시면 좋을 것 같아요.
13/10/24 21:49
수정 아이콘
정말 대단하십니다. 방황하는 30대 초반의 저에게 큰 지표가 되는 분이네요. 부전자전 이라고 SCV님 역시 누군가에게 귀감이 되는 삶을 사실 것 같네요
13/10/24 22:19
수정 아이콘
이건 책으로 내셔야될거같아요. 굉장하십니다.
tannenbaum
13/10/25 04:08
수정 아이콘
너무너무 멋진 분이십니다.
얼마전 회사를 그만두어 현재 백수인 저에게 그 무엇보다 좋은 조언입니다.
아이유라유라
13/10/25 09:39
수정 아이콘
감동적인 이야기네요 정말.
스스로가 부끄러워집니다.
13/10/25 10:00
수정 아이콘
요즘 하고 있는 이런저런 고민에 너무 큰 도움이 되는 글입니다.
희망을 잃지 않게 힘을 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아버님 정말 멋지시네요. 존경스럽습니다.
13/10/25 13:29
수정 아이콘
우아..영화같은 삶을 사시고 계시네요..
멋지십니다.
어떤날
13/10/24 15:28
수정 아이콘
저도 현재는 어렸을 때의 꿈과 다른 직장인이지만.. 그리고 지금은 꿈을 이루고 싶은 소망도 특별히 없긴 하지만... 나이 들어서는 여유있는 상태에서 뭔가 내가 애착이 있고 즐거운 일을 하고 싶다라는 새로운 꿈이 생겼습니다. 그걸 위해서 열심히 살고 싶네요.

그러려면 낮 시간에 여기 있으면 안 되는데.. -_-;
13/10/25 10:02
수정 아이콘
어떤날은 가끔 그래도 됩니다?
13/10/25 10:52
수정 아이콘
미국 회사 연구원이면 평범하지는 않으신데요?
걸스데이
13/10/25 10:57
수정 아이콘
중국계 미국회사라고 하지만 사실은 회사 이름만 영어인 중국회사에 가깝습니다. 사장부터 간부들은 전부 중국인들이고, 연구원이라고 썼지만 사실 생산쪽이구요. 미국 내에서 생물학, 생물화학, 화학 전공으로 졸업한 대학생들이 대학원을 가지 않고 직업을 가질 때 일반적으로 많이 선택하는 직종입니다. 겉으로 보면 번지르르 해보이지만 사실 굉장히 평범합니다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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