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짤은 총기자동반납몸개그. 평어체 양해바랍니다)
때는 지난 일요일.
오랜만에 학교에 들러 빌렸던 책 반납도 하고 친구를 만나 농구도 한뒤 나는
언제나처럼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돌아오던 참이었다. 시간은 4시반쯤?
학교에서 마주치는 이들은 항상 바쁘다. 내 주변인들만 이런가?
한학기의 휴학기간 동안 평소 못 읽었던 각종 책과 게임과 사람만나기... 오락에 심취해 산 나로선 책을 읽어도
경제니 취직이니 재테크니 하는 책만 읽고, 평소엔 영어와 인턴을 고민하는 친구들을 볼때마다 초라해지는 나 자신을
발견하곤 우울해지기 마련이다. 그날도 그랬다.
더구나 아침에 학교로 가던 도중 돌연 목 오른쪽이 콱하고 굳어버려서 하루종일 근육이 아팠던지라
더욱 꿀꿀한 기분이었다. 날씨 또한 농구하기엔 다소 추웠고 몸은 한없이 둔하고 무거워서 농구도 그닥 재미가 없었다...
사람이 많지 않아 의자에 앉은 채 살짝 졸던 참이었는데, 별 생각 없이 내 바로 건너편을 보곤 화들짝 놀랐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25년의 내 인생을 살면서 이토록 내 이상형과 일치하는 여성을 만난 것은 처음이었다.
오오 매력있네 이쁘다가 아니라 딱 내 이상형 그 자체였다!
대학 1-2학년부터 멀리는 성숙한 중3-_-;까지도 볼 수 있는 동안이어서 도무지 나이를 짐작할 수 없다.
(나는 절대 로리콤이 아니다. 원더걸스에서도 소희나 선미보단 선예가 더 좋다)
잠시 내 눈을 의심했지만 봐도 봐도 끌리는 모습... 나이와 상관없이 외모나 스타일 면에서 의심할바없는 내 이상형이다.
생애 처음으로 생판 모르는 여자한테 말을 걸어볼까, 하는 생각마저도 들었다.
옷차림을 점검해본다. 평소에도 어지간히 신경 안쓴다 소리 듣는데 농구하고 온날이니 뭐... 후줄근하기 그지없다. 머리도 대충.
피부... 늘 그렇듯 안좋은데다 요즘 턱쪽의 아토피(알레르기?)가 심해져 허옇게 부실부실 일어나는 바람에 연고를 바르던 참이다.
더구나 그녀의 양쪽으로 친구가 둘이나 있다. 결정적으로 용기가 없다. 포기. 그래도
"드디어 나도 연애세포가 죽었구나...
라고 느끼던 요즈음이었는데 꽤나 의외였다. 심지어 그녀의 친구들이 모두 여성이라는데 일말의 안도감까지 느끼는
미친 상황이 계속되었다. 이 글을 쓰면서도 새삼 그 순간을 회상하니 가슴이 펑펑 뛴다.
소심하게 자는척하며 자연스럽게(과연?) 훔쳐보고 있는데,
갑자기 한 남자가 내 앞으로 다가와서 그녀를 시야에서 가려버렸다. 빈 의자도 많은데 왜 하필 내 앞에 서!
순간 짜증이 나서 슬쩍 올려다봤더니 키도 180은 넘어보이고 어깨는 왜소하지만 껌좀 씹은듯한 얼굴(나보단 어릴까?)이 보인다.
다만 그 녀석이 내려다보는 건 내가 아니었다. 내 오른편에서 성경을 열심히 읽고 계시던 할머니를 부른다.
"저기요, 저기요,"
그러나 할머니는 성경낭송에 빠져드셔서 듣지 못하신 듯 하다. 그 녀석은 피식 웃더니...
그녀(!!!)와 그녀의 친구들에게로 다가가 그 앞에 떡하니 버티고 섰다.
하필 친구들 사이에 앉아있는 그녀를 정통으로 가렸다. 젠장, 더 안보인다.
나는 저 녀석이 왜 할머니를 부르고, 또 뜬금없이 건너편에 가서 말을 걸고 있는지 궁금하여 잠을 접고
그 녀석의 행동을 지켜보기로 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뭐야 저 사람 장사나 선교라도 할셈인가, 이상의 생각은 아니었다.
(설마 이 녀석도 그녀가 맘에 든 건가?! 라는 생각이 조금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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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 이야기하는 듯 한데, 녀석의 말소리는 도통 들리지 않았다. 게다가 그녀의 친구들(그녀는 보이지 않으니)의 눈이
동그랗게 떠지며 뭔가 녀석의 말에 경청을 하는 듯한 기색이다. 적어도 원래 알던 사이는 아닌 것 같다.
나는 그들을 관찰하는데 있어 일말의 질투심마저 느껴야했다. 몇분 정도 흐르는 것으로 보아
(실제론 그렇게 길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장사나 선교라기엔 목소리는 들리지도 않고 체재 시간은 제법 길었다.
저 녀석이 내 옆의 할머니에게 말을 걸지 않았거나 그녀에게 간 게 아니라면 그냥 관심끊었을 텐데... 하고 생각하던 중,
그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대단히 또렷하게,
"저기요, 죄송한데요, 여기 서계시지 말고 저쪽으로 가주시면 안될까요?"
약간의 분노마저 섞인 듯한 목소리. 잠시 멍때리고 있던 내가 다시금 주목하기에 충분한, 그런 목소리였다.
여전히 놈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아서 무슨 말을 하는지 도통 알수가 없었다. 저 소리로 지껄이는 것도 어찌 보면 능력이다.
나는 원체 목소리가 커서 낮게 말해도 주변이 웡웡 울리는데. 하긴 내 귀가 좀 어둡기도 하지. 그녀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손 주머니에 넣지 마세요!!"
아까의 감정은 분노였다면 이번엔 거기에 당혹감과... 두려움마저 실려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감정의 정도도 더했다.
그녀의 친구들 표정을 보니... 내가 느낀 두려움은 그녀만의 것은 아닌 것 같았다.
다만 그녀의 친구 바로 옆에 앉은 아주머니가
태연히 책을 보면서 별 표정이 없어서 좀 헷갈리는 상황이었다.
좀더 상황을 지켜보기로 했다. 드디어 놈의 목소리도 들리기 시작했다. 내 집중력이 올라갔나? 놈도 흥분한 것일까?
"내가 여기 서 있는 게 불편해요?"
"네, 불편하고요, 솔직히 좀 불쾌하기도 하거든요. 저쪽으로 가주세요."
"아니 왜요, 제가 여기 서 있다고 해서 무슨 피해 주는 거라도 있어요?"
슬슬 궁금함을 넘어 짜증이 나기 시작한다. 나는 기본적으로 지하철에서 소란을 피우는 사람을 매우 싫어한다.
(거리전교자, 매우 큰 소리로 떠드는 혹은 이어폰밖으로 무슨 노랜지 노랫말까지 다 들리는사람들(남녀노소),
매우 큰 소리의 혼잣말로 젊은이 불특정다수를 비난하는 노인분 등)
그래서 그런 사람이 있으면 나이대와 관계없이 한 소리 하는 편이다. 대부분의 경우 꿍시렁댈지언정 일단 조용해지기 마련이다.
지금은 소란의 원인인 남자에게 뭐라고 해야할 상황이겠지. 뭐라고 했길래 저런 반응이 나와?
그런데,
"아앗!! 손 넣지 말아요!"
이번은 경악과 공포였다! 난 눈을 부릅떴다. 놈이 사선으로 비껴서면서(건들대고 있다!) 그녀의 놀란 얼굴이 보인다.
눈동자는 또랑또랑하지만, 겁에 질려 있는 게 분명하다. 뭐야, 이거. 어떻게 되어가는 거지.
"어디서 내리세요?"
"이번 쌍문에서 내릴 거에요..."
"그래요? 나도 이번에 내리는데, 같이 내리죠."
"싫어요! 그럼 저흰 한 정거장 더 갈거에요!"
"왜요? 쌍문 산다면서요~"
슈슉!
"아악! 그러지 마세요!"
그녀가 놀라는 이유를 알았다. 왜인지는 몰라도 놈이 점퍼주머니에 손을 넣는척 할때마다 놀라고 있는 것이다.
적어도 사정을 듣고 보니 내가 바보 혹은 사오정이었다... 라는 케이스는 절대!! 아닌 것 같고, 이번 것은 숫제 비명에 가까웠다.
내 인내심의 한계.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너무 오래 지켜본게 아니냐고 묻는다면, 난 원래 겁쟁이라서 어쩔 수 없다.
"이거 보세요, 왜 그러십니까? 무슨 일이에요?"
놈이 날 돌아보았다.
나는 놈의 오른쪽으로 돌아가 놈에게 비스듬하게 왼어깨를 앞으로 하고 서서 지그시 올려다보았다.
키는 176밖에 안되지만 운동부족이라 살이 꽤 두텁고, 선천적으로 어깨가 매우 넓게 벌어진 편에 속한다.
짧게 자른 머리 역시 선천적 돼지털이라 사방으로 곤두서있고 인상 또한 꽤 퉁명스럽다.
처진 안경 너머로 삐딱하니 두툼하게 올려다보는 자세를 취하면 날 잘 모르는 사람은 움찔할 정도는 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놈은 큰 키에 표정은 불량(?)했지만 적어도 덩치 있는 놈은 아니었다)
소심한 겁쟁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이런 자세가 필요하다. 대신 화나면 무섭다. 물주먹에 싸움은 못하지만 힘은 좀 있다.
살짝 시비거는 말투로,
"자리 때문에 그래요? 여기 서 있는 게 싫다잖아요. 어린 학생들 데리고 지금 뭐하는 겁니까?"
"아뇨, 뭐 별로..."
"자리 때문에 그래요? 여기 방금 제 자린데, 제가 일어날 테니 앉으세요. 저기 옆에도 빈 자리 많네."
"아뇨, 저 여기서 내릴 거예요."
"아 그러세요? 그럼 이쪽으로, 문앞에 좀 서시죠. 앞에 있으면 불안하다잖아요. 내리세요 그럼."
그리고 나는 내 자리로 돌아왔다(왜 돌아왔을까? 그냥 거기 서 있을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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놈은 잠시 문앞에서 쭈뼛대며 내 눈치를 살피더니(내가 보기엔 그랬다) 다음 역인 쌍문에서 내렸다.
고분고분한 놈에게 살짝 고맙기까지 했다. 솔직히 시비 붙으면 싸움할 각오는 되어있었지만, 겁은 많이 났던 게 사실이니까.
거울을 볼때면 슬퍼지는 내 모습도 쓸모가 있구나 하며 새삼 대견했다.
"아!..."
명백한 안도의 한숨. 그녀의 왼편에 앉아있던 친구가 날 건너다보며 고개를 꾸벅 숙인다.
그리고 그녀는... 왈칵, 하더니 얼굴이 새빨개지며 흑흑 울기 시작했다.
나는 나름 평온한 가운데 살짝 흥분한 어조로,
"엇... 아니, 무슨 일이에요 도대체?"
"Ssang놈이야 Ssang놈..."
태연하게 책을 읽던 그녀들 옆 아주머니의 즉각적인 반응으로 보건대 책은 딴청, 시늉이었음이 분명하다.
"감사합니다(그녀의 친구)."
"아 예, 무슨 일인가요? 울지 말아요~"
"아니, 저 사람이, 자기 주머니에 칼이 있다고, 자기한테 만원만 달라는 거예요."
뭐?!
"만원 안주면 꺼낼 거라면서요, 저희가 돈 없다고, 진짜 없으니까 저쪽으로 가달라고 그러는데도,
그래요? 알았어요~ 막 그러면서 피식피식 웃으면서 저희 앞에 서 있고, 그러면서 주머니에 손 넣었다 뺐다 그러고요~"
이유는 알았고, 화가 머리 끝까지 치솟았다. 이런 개쉐리를 봤나...
"너 진짜 대단하더라(친구가 그녀에게). 어떻게 그렇게 똑바로 눈 뜨고 덤비냐?"
"아냐 나도 무서웠어~ 흐흐흐흑. (목이 메어) 감사합니다."
아! 그녀가 펑펑 울고 있습니다. 저도 눈물이 나려고 합니다.
"예, 요즘 세상이 흉흉하다보니 별 michin 놈이 다 있네. 울지 말아요~"
"감사합니다(다른 친구)."
(도대체 난 왜 자리로 돌아왔을까? 그냥 앞에 서 있을 것을... 이런 대화를 서울지하철의 넓은 통로를 사이에 두고 하다니!
위로랍시고 할말도 이런 거 밖에 없나?! 뭐하는 거야 지금...)
한 정거장은 순식간에 지났고, 열차는 창동역에 도착.
그녀들은 다같이 내게 "감사합니다~"라고 말하며 내렸다.
나는 멍하니 앉아 다음 역에 도착한 것도 미처 눈치를 못챘다가, 그들의 인사에 "아 예." 이외의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못했다.
그녀는 눈이 빨갛게 부어오른 채 친구들을 붙잡고 내렸다(다리가 후들거리는 것처럼 보였는데...내 눈이, 내 마음이 후들거렸나?).
그리고 나는 마음속 깊이 나 자신을 자책했다. 일생일대의 이상형을 만나서 한 말이 그래 "감사합니다. 아예 뭘요."
뿐이라니 이건 뭐... 그들이 당고개에라도 살았다면, 아니 나처럼 노원에서 갈아탔다면 말이라도 더 붙여볼 텐데...
그리고 말을 곱씹어보니 살짝 불안하기도 했다. 놈이 단순한 모방범죄자가 아닌 진짜 정신병자였다면...
지금 이 순간도 어딘가 가서 그렇게 껄쩍대고 있지는 않을까.
혹은... 쌍문역 근처를 배회하고 있는 건 아닐까. 그러다가 그녀들과 마주치면 어쩌지.
주머니를 집적거리는 행동은 보았으니 그 놈 주머니를 뒤집어볼걸 그랬나... 칼이라도 튀어나오면 겁먹고 뒷걸음질을 쳤으려나.
아냐, 이미 흥분해버린 거 그대로 덮쳐누르기라도 했을 거야. 칼은 멀리 차버리고. 다음 역에서 끌고 내려서 역무원이건
공익이건 부르고 경찰서로 끌고 갔겠지. 피해자(?)들과 가능하면 그 옆의 아주머니도 목격자로... 다음날 신문에 났으려나?
다소간의 걱정과 되도 않는 나 자신의 영웅적 활약에 대한 상상을 하며 나는 집으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길에 전차남이 생각났다. 실화다 사기다 말이 많은데... 뒷부분은 사기일수도 있으되
발단 부분은 주위에서 가끔 들리는 경우이다. 그리고 그 중 한번이 오늘 내 눈앞에서 벌어졌다. 피해자는 내 이상형의 극치.
그래, 난 오늘 좋은 일을 한 거야.
라고 새삼 되뇌어보지만, 그 뿌듯함은 안타까운 마음의 뒤켠으로 자꾸만 밀려난다.
대신 일을 확실히 마무리하지 못한 걱정과
'그녀'의 얼굴과
지금도 그녀를 떠올릴 때면 내게 닥쳐오는 가슴의 떨림이 그 자리를 채워버린다.
그렇게 내 인생의 처음이자 어쩌면 마지막일지도 모를 전차남의 기회는 사라지고 말았다.
박정현이 '상사병'에서 애타게 외치는 <기적같은 우연>은 나를 스치고 그렇게 내게서 멀어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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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색이 거의 들어가지 않은 실화입니다. 장르는 나름 수필입니다-_-;
이곳 회원은 아니겠지만, 대한민국 20대 남성이라면 혹시 이 곳에 들어와서 이 글을 볼 수도 있을 텐데...
너 다시 한번 만나면 진짜 밟아버린다.
그리고 역시 이곳 회원은 아니겠지만, 혹시 뭐 이곳 회원의 지인일 수도 있고...
집에 가서 "지하철에서 무서운 일 당했는데, 어떤 아저씨(!)가 구해줬어."
라고 말했을지도 모르지만... 그러셔도 되는데, 저 나이 스물다섯밖에 안먹었습니다.
혹시 이 글 보게 되신다면 쪽지 주세요...
저 나름 괜찮은 사람이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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