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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3/04/29 03:02:29
Name 王天君
Subject [일반] 가까이 하기엔 너무 무서운 당신. 영화 <오디션>을 보고
이 영화를 보려고 계획하시는 분들은 바로 뒤로가기를 눌러주세요. 이 영화는 사전정보 없이 보는 게 가장 재미있습니다. 아예 무슨 장르인지도 모르고 "속고" 보는 것을 추천합니다.

이 영화를 보기 전까지 저는 제가 공포영화를, 정확히 말 하면 이런 오디션 같은 영화를 잘 보는 줄 알았습니다. 케이티 홈즈와 가이 피어스가 연기했던 Don't be afraid 를 극장에서 보면서 결정적 순간에 차마 보지 못하고 손으로 얼굴을 가려버릴 때에도 오랜만에 공포영화를 보니 적응이 잘 안 되는 정도로만 여겼을 뿐 제가 원래 공포라는 장르에 약한 줄은 몰랐습니다. 한 때는 공포영화에 꽂혀서 20세기 명작이라 불리는 공포영화들을 찾아 보기도 했고 어째서 한국에는 좀 멋들어진 호러 영화가 나오지 않는 것인지 통탄한 적도 있으니까요. 그러나 저에게 맞는 공포 영화는 아마 따로 있었나 봅니다. 스트레스를 날려버리기 위해서 보기에는 가려봐야 할 공포 영화가 있다는 것을, 저는 아직 모든 장르와 무서운 존재들을 초월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뒤늦게 안 것 같네요.

10년도 전에 나온 영화이고, 다른 공포 영화 명작들처럼 기승전결이 잘 짜여있거나 재기발랄한 연출이 눈에 띄는 영화는 절대 아닙니다. 오히려 이 영화는 어디까지 갈 수 있나 인간의 몹쓸 상상력을 극한까지 몰아붙인 감독의 변태적 기질이 뒤범벅 된 영화입니다. B급이라기에도 애매한, 컬트에 가까운 영화라고 볼 수 있겠네요. 따라서 무료한 삶에 자극을 원하는 사람들이 찾는 화끈한 스플래터나 숨막히는 스릴러를 기대하셨다면, 이 영화는 실망스러운 영화가 될 공산이 큽니다. 고어 영화라고 치기에는 후반부에 모든 것을 집약시켜 놓았기에 초중반이 지루할 것이고, 스릴러라고 치기에는 내러티브가 선명하지 않거든요.

처음부터 30~40분 사이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이 영화는 놀랄 정도로 잔잔하고 소박하게 이야기를 전개시킵니다. 주인공은 착실한 비디오 관련 사업자이고, 주변 인물과의 관계도 원만하며 여주인공을 만나는 동안에도 평범한 연애를 하려고 합니다. 아내가 죽은 후 재혼을 원하는 중년의 남자가 가짜 오디션을 통해 후보자 중에서 한 명을 골랐고, 그 상대방에게 결혼 경력과 아들이 있다는 것을 알리지 않았다는 것이 굳이 흠이라면 흠일까요. 지루하리만치 이어지는 한 중년남자의 구혼과정을 보고 있자면 이 영화가 진짜 공포영화인지 의심이 들 정도입니다. 정말이지 아무런 복선이 없으니까요.


그리고 어떤 여자인지 모르니 먼저 전화하지 말고 기다려보라는 친구의 조언이 나올 때부터 감독은 드디어 떡밥을 하나 던져 줍니다. 관객에게만 한정적으로 주어지는 정보는 여태까지의 소소한 일상과는 너무나도 그 간격이 큰 장면입니다. 여자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집에서 전화기만 향해 고개를 숙인 채 가만히 있고, 그 여자의 방에는 무언가가 담겨진 커다란 자루가 있습니다. 사람이 들어가 있을 만큼 커다란 자루, 그 안에 담겨 있는 것은 주인공의 친구가 이야기했던 '실종된 음악 감독'은 아닐까 하는 섬뜩함이 점점 무게를 갖추기 시작합니다.


이런 부분이 제가 이 영화에 빠져들었던 부분입니다. 이 영화는 조금씩 주어지는 단서조각들을 맞춰가며 실체에 도달해가는 추리를 요구하지 않습니다. 그저 기괴한 분위기로 불안감만을 증폭시킵니다. 얼핏 스치는 자극적인 장면들은 여주인공에 대해서 아무 것도 말해주지 않습니다. 그저 보통 여자는 아닐 것이다, 얽히면 뭔가 꼬일 것 같다는 찜찜한 의심이 연속될 뿐이죠. 극히 제한적인 정보와 뒤죽박죽인 교차편집 속에서 영화는 내내 보는 사람을 불쾌하게 만듭니다. 노르스름하게 깔린 노을 속에서 만난 정체를 알 수 없는 괴노인이나 부담스러울 정도로 자세하게 가게 주인의 살해를 설명해주는 남자 등, 파괴적인 이미지와 함께 암시를 시키는 장면들은 점점 주인공과 보는 사람을 압박합니다.

제가 볼 때 이 영화의 백미는 주인공이 술을 먹고 어지러워하면서 악몽 같은 망상을 체험할 때입니다. 그곳에는 여주인공의 불길한 과거 혹은 미래를 암시하는 단서들이 한데 뭉뚱그려져 지옥 같은 장면들이 주인공 눈 앞에 펼쳐집니다. 자루 속에 들어있던 것은 어떤 몰골의 남자였고, 그 남자의 기괴한 신음소리와 함께 카메라는 있어야 할 손가락, 혀, 귀가 없는 것을 보여줍니다. 여주인공이 왜 화상을 입었는지, 휠체어의 남자는 어떻게 되는지, 주인공 주변에 있던 여자들은 음란한 이미지와 섞이면서 환상임이 분명함에도 불안감과 혐오감을 고조시킵니다. 그리고 눈을 뜬 순간, 사라졌던 여주인공은 믿을 수 없는 집착과 증오로 악몽을 현실로 이끌어냅니다.


뒤따르는 장면과 여주인공의 연기는 상당히 끔찍합니다. 이제 더 이상 참을 것이 없다는 듯 이 영화는 본연의 광기를 마구 드러냅니다. 신체의 자유는 뺏었지만 감각은 그대로 놔둔 채, 남의 몸에 기다란 침을 꽂으며 미소를 짓는 여주인공은 제가 어느 영화에서 본 광인 캐릭터들보다도 비현실적이면서 생생한 공포였습니다. 인간에게서 미지의 공포를 느끼는 건 색다른 느낌이더군요. 아예 존재 자체가 비현실적인 제이슨이나 주온의 귀신이라면 이성으로 무시할 수가 있고, 또 너무 현실적인 존재라면 허구적인 공포가 잘 다가오지 않을 텐데, 오디션의 공포는 어떻게 외면을 해야 할 지 잘 모르겠더군요. 너무나 착하고 참한 인상의 여자에게서 불안의 조짐을 느끼다가, 갑작스레 온 몸이 마비된 상황에서 내 몸에 침을 꽂으며 "끼릭끼릭끼릭" 하고 즐거워하는 사이코의 모습이 진실이라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자신의 집착을 합리화시키는 이 여주인공의 모습에서 악의가 없는, 뭔가 순수한 광기 같은 것을 느꼈습니다.  


좀 이상하게 읽힐 수도 있겠지만, 오히려 주인공이 고문을 당하는 장면부터는 조금 편하게 볼 수 있었습니다. 그 때부터 오히려 타자화가 가능해져서, 얼마나 신체 훼손이 실감나게 나타날지 또 주인공들의 연기가 어떻게 나올지 느긋하게 감상할 수 있었습니다. 눈살을 찌푸리고 볼 수밖에는 없었지만 말이지요. 우연히 찾아온 아들에게 격퇴당하는 여주인공의 독백을 끝으로 이 영화는 마무리 됩니다. 그래서 이 영화는 더 무서운 걸지도 모릅니다. 일그러진 인간의 집착에 대해서 동정이나 원한 같은 인간적인 요소가 들어갈 틈을 주지 않고 끝내버리니까요. 거기에는 그 누구의 책임도, 어리석음도 없습니다. 그저 항간에 떠도는 도시전설처럼 누가 누구를 만났고 어떻게 됐더라 하며 절정에 다다른 공포가 다 진정되기도 전에 스텝 롤이 올라갑니다.


저는 정교하게 짜인 영화를 좋아하고 서사 속에서 상징과 은유가 나타나는 문학적 성향이 강하게 드러나는 영화를 좋아합니다. 그러나 절단된 신체와 선혈이 낭자한 이 영화를 보면서, 영화는 시각을 통해 정신을 장악하는 "영상예술"임을 다시 실감했습니다. 왜곡된 심상을 어떻게 화면에 담을 것인가, 이런 부분은 정말 공부와 경험으로는 얻을 수 없는 감독의 개성이자 재능이 아닐까 싶군요. 네 마음속 평화를 갈갈이 찢어놓겠다는 감독의 악의를 다른 분들은 어떻게 감당하셨을지 궁금하군요.

뱀다리 : 여배우가 어떻게 보면 정말 이쁜데 어떻게 보면 오나미씨가 떠올라서 이게 미인인지 추녀인지 헷갈립니다. 분명한 건 정말 묘한 얼굴이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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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4/29 05:34
수정 아이콘
영화가 그냥 아주 후덜덜덜...!!!! 그 자체라고 하길래 전 그냥 안보기로 이미 결정했습니다. 그래서 스포 당해도 상관없어서 들어왔지요. 재미있는 리뷰 잘 읽었습니다.
강아지랑놀자
13/04/29 05:37
수정 아이콘
전 이 영화 보지도 않았는데 그 ...끼릭끼릭을 알고 있어서 첫 사진 보고 소름 돋았어요.속이 답답하고 체한 느낌 ㅠㅠ
레지엔
13/04/29 08:15
수정 아이콘
소리가 아주 죽이죠. 일본 공포영화에서도 손꼽히는 수작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13/04/29 10:00
수정 아이콘
끼리끼리끼리....

p.s. 저 여자분 재일 교포라고 알고 있습니다.
레지엔
13/04/29 11:37
수정 아이콘
그러고보니 이름이 영희네요-_-;; 재일교포 3세라고 뜨는데 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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