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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3/04/03 23:28:50
Name par333k
Subject [일반] 영화'지슬'과 제주 4.3 항쟁

저는 아직 영화 '지슬'을 보지 않았지만, 제주 4.3항쟁을 배경으로 한 영화라는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평이 어떤가 네이버에서 검색을 하니, 아뿔싸. 여기서도 '이름을 불러서는 안될 이...일베!'들이 평점테러를 열심히 하고 있더군요.
그 모습을 보니 '영화가 상당히 멀쩡한 영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조만간 꼭 관람을 할 생각인데, 이에 앞서 '제주 4.3항쟁'에 대해 짤막한 소개를 해 보고자.. 글을 써 봅니다.


5.16 민주화 항쟁에 비해서 기본 공교육 차원에서나 시사적 시점에서나 '덜'다루어 지는 현대사의 슬픈 사건들이 있습니다. 부마항쟁, 여순사태(사실 여순 반란-사건 에 대해서는 제가 가지고 있는 생각은 반란이 아니라 그저 이승만 정부의 '반 이승만 세력 척결'의 빌미를 제공했다. 정도로 생각하는편입니다. '항쟁'이라고만 보기는 약간 모자란 감이 있을 수 있지만....) 그리고 제주 4.3 항쟁이 현대사의 커다란 비극들로 남겨져 있지만 그 사건의 크기에 비해 많이 알려지지 않고 전해지지 않는편이지요.


제주 4.3항쟁은 '남로당,서북청년단,제주도민' 으로 축약해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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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시작은 1947년 3월 1일부터 입니다.  이날 안세훈을 대회장으로 해서 1947년 3월 1일 제주읍 관덕정 마당에서 열린 3·1절 기념시위와 집회가 일어났습니다.


그러다 2시 45분에 관덕정 앞에서 어린아이가 경관이 탄 말에 채였습니다. 경관을 그대로 지나갔고, 관람중이던 군중들은 야유를 하며 몰려들었고 경관은 경찰서로 말을 몰았습니다. 그 때 경찰들이  군중들이 몰려오는걸 경찰서 습격으로 착각해 일제히 총을 쏴댔습니다. 민간인 6명이 죽었고 다른 6명은 중상을 입었습니다. 이 때 쏜건 실수로 일어난게 아닙니다. 제주도 4.3 진상 조사 보고서 109쪽에 따르면 "대부분 사망자는 경찰서에서 상당히 떨어진 식산은행 앞 노상이나 도립병원으로 가는 골목 모퉁에 쓰러져 있었다."고 나옵니다. 그중 5명은 등뒤에서 총에 맞았습니다.


이 사건에 분노로 3월 10일에 관공서, 통신기관, 운송업체, 공장 근론자, 각급 합교, 미국정청 통역단에 총파업이 일어났습니다. 토박이 경찰들 중심으로 현직 경관관들까지 동참하는 상황도 벌어졌고, 이 때 서청단 이내려와서 주민들을 무자비하게 검거하고 고문을 해대며 억압해서 주민들이 불만이 터졌습니다. 예를 들면 1948년 3월 경찰에 연행됐던 청년 3명은 고문으로 사망하는 사건도 있었죠. 조청중학원 2혁년 김용철과 양은하는 고문때문에 사망했고 박행구는 곤봉과 돌로 찍혀 초주검상태에서 끌려다가 총살당했습니다. 이런 끔찍한 폭력행위와 고문행위가 제주도에서 여러번 일어난겁니다.


1948년 1월에 쓴 미 24군 정보보고서를 보면 당시 제주도의 좌익들중 대부분은 공산주의자들이 아니며 반미도 안 했습니다. 또한 대부분의 지식인층 지도자와 대중들은 어느 한쪽을 치우치지 않았다합니다.  그런데 청년단에서 빨갱이 공포를 하며 좌익인사를 척결하며 섬을 장악하려했다고합니다.


1948년 4월 3일 남로당 무장대가 폭동을 벌이기전까지는 이런 배경이 있던겁니다.
물론 무장대의 폭동은 절대 옹호할 수가 없습니다. 경찰이나 서북청년단을 물론이고 관련 가족이나 우파계열 사람들까지 학살했기 때문입니다.
이에 맞서 서북청년회로 구성된 경찰들도 맞대응을 했고 역시 사람들이 희생당했습니다.
당시 무장대 병력은 경무부 공보실장은 약 500~600명은 추정된다고 했고, 경비대 9연대인 김익렬은 무장대가 300명이라 했습니다. 무장대의 숫자는 수백단위정도로 추정됩니다.



김익렬 연대장은 어떻게든 평화롭게 잘 해결하기위해 평화협상을 하려했고 적의를 띈 ‘폭도’(무장대에서 선동했던 사람을 가르키는 듯 합니다)와 일반 민중 동조자를 분리하려했으며 경찰이 진압은 커녕 폭동을 조장하게 한다는 물적자료들을 제시했습니다.  그러자 조병옥은 김익렬 연대장을 공산주의자라 몰아세웠습니다.  다음날 연대장은 김익렬 중령에서 박진경 중령으로 교체됐고 김익렬 중령은 본토로 쫒겨났습니다. 그리고 빨치산 출몰지역은 무장대와 토벌대의 전투와 학살 때문에 난장판이 됐습니다.
이 때 까지는 둘다 그게 그거였고 무장대가 먼저 폭동을 일으킨거니 무장대를 탓한다해도 완전 틀린 말은 아닐지도 모릅니다.


문제는 11월부터 3월까지 진행한 초토화작전이였죠.


이 때 부터 토벌대는 모든 제주도민들을 목표로 해서 학살들을 해댔습니다.
모든 중산간마을을 태워버리고 미처 제대로 바닷가쪽으로 대피하지 못하거나 대피소식을 못 들은 도민들을 싹 죽였으며, 바닷가쪽으로 내려와도 가족중 청년이 없으면 그 가족들을 ‘대살’이라해서 모두 싹죽였였습니다. 청년들이 없는 이유는 무장대라 그런게 아니라 청년들을 무장대라 의심해 총살했기 때문에 도망갔으니 없던겁니다. 심지어는 임산부를 죽창으로 찔러 죽이기까지(물론 이런 잔인함은 무장대도 마찬가지였습니다.)했습니다. 이런 어정쩡한 상황 때문에 오고가도 못했던 많은 도민들도 토벌대에게 걸리면 학살당했습니다. 또한 무장대에게 조금이라도 협력한 사람들(이 협력이라는건 같이 폭력을 벌였다는게 아니라 집회 오라해서 갔거나 먹을거 달라고 해서 준 거나, 4.3 훨씬전에 시위 참가하는 사람들 같은 경우였습니다.)은 모두 자수하라고 권유해놓고 자수한 사람들을 모두 죽였습니다. 또한 토벌대는 무장대로 변장해서 마을로 찾아가는 함정작전도 폈습니다. 무장대가 무서워 그냥 협력했던 사람들은 마찬가지로 토벌대에게 학살당했습니다.



위에서 말했다시피 원래 무장대 숫자는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수백명이였죠. 당시 제주도민 숫자는 약 30만명입니다. 무장대를 1000명이라 쳐도 300분의 1밖에 안 되는 숫자입니다. 그런데 토벌대는 초토화작전 당시 모든 제주도민들을 목표로 작전을 펼쳤습니다.



제주도 4.3 사건 때문에 죽은 제주도민 수를 진상 보고서에선 약 2~3만명으로 추정합니다.
그리고 사망자중 신고자만 따지면 약 1만 4천명입니다. 이 때 대부분은 초토화작전 시기 때 죽은겁니다. 이중 10세 이하는 약 5%고 61세 이상은 5~6%입니다.  여기서 무장대에게 학살당한 사람은 약 10%, 토벌대에게 학살당한 사람은 약 80%입니다. 이 비율을 추정사망자 2~3만명에 대입하면 적어도 1~3만명 정도가  토벌대에게 죽은겁니다. 제주도민의 300분의 1도 안 되는 무장대를 죽이려고 제주도민의 30분의 1에서 10분 1정도를 죽였다는겁니다.
많은 제주도민들은 이 학살뒤로 무장대로 들어가서 상황은 더욱 나빠졌습니다.

--------네이버 영화 '지슬'과 관련된 리뷰에서 발췌. --------------------------


제주 4.3 항쟁의 배경은 결국, '서북청년단 및 빨갱이 공포증에 휩싸인', 그리고 '이승만 정권에 철저히 부합하기 위한' 학살이었습니다. 당시에는 시민사회의 개념 자체가 부족하기도 했고, 광복이 된 지 얼마 되지 않았기에 더욱 그런면도 있었습니다마는, 그것이 면죄부가 될 수는 없겠지요. 심지어 서북청년단이자 군인인 사람중에는 실제로 '장교'가 제주도민을 상대로 남성은 죽이고 여성은 겁탈하며 마약을 일삼는 자도 있었다고 합니다. 당시 제주도 상황은, 남로당원과 대화만 했어도 자수를 해야했고 잔뜩 겁을 줘서 상황판단을 못 하게 한뒤 마구잡이로 죽이고는 '이들중에 빨치산이 있었을테니 국가를 위해 미리 위험을 봉쇄하였다'고 하는 상황이었지요.


그러나 이 뒷면을 보면, 서북청년단만의 문제는 아니었습니다. 이 학살의 배경에는 '미군정' 또한 한 손 단단히 거들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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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략)총파업 사태가 심각해지자 미군정은 카스티어(casteel)대령이 인솔하는 조사단을 제주도에 파견하여 진상조사에 나섰으나 경찰의 발포에 대한 과오를 다스리기 보다 남로당의 선동을 분쇄하는 데만 주력하여 제주도 도지사를 비롯한 군정 수뇌부를 전원 외지인으로 교체하고, 경찰과 우익단체인 서북청년단 단원들을 대거 동원하였다. 당시 작성된 미군 보고서에 따르면 제주도를 ‘붉은섬(Red lsland)’로 규정하고 ‘제주도 인구의 70%가 좌익에 동조자’라고 기술하였다.



미군정에 의해 동원된 조병옥 경무부장을 중심으로 한 응원경찰과 신임 제주도 도지사 유해진의 호위병 역할을 하던 서북청년단 단원은 3·10 총파업 이후 이듬해 4·3사건이 발발하기 전까지 약 1년간 파업 주모자에 대한 검거작전을 전개하였다. 작전 개시 후 이틀 만에 200명이 연행된 것을 시작으로 2,500여명이 구금되고 고문이 자행되었다. 수세에 몰린 남로당 제주도당은 무장투쟁을 전개하기로 결정하고 1948년 4월 3일 새벽 2시에 350명의 무장대가 제주도내 12개 지서와 우익단체들을 공격하였다. 이들은 경찰과 서북청년단의 무자비한 탄압을 중지하고, 남한 단독선거와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고 통일정부를 수립할 것을 촉구하였다. 사태를 경찰력과 서북청년단의 힘으로 수습하지 못하고 상황이 더 악화되자 주한미군사령관 하지(Hodge)중장과 군정장관 딘(Dean)소장은 경비대에 진압작전 출동명령을 내렸다.


경비대 제9연대장 김익렬 중령과 무장대 측 김달삼 사이의 ‘4·28 협상’으로 경비대와 무장대는 한때 평화적으로 사태를 해결하는데 합의하기도 하였으나 우익청년단체가 일으킨 '오라리 방화사건'으로 무산되었다. 방화사건 직후 김익렬 연대장은 현장 조사를 벌인 끝에 우익청년들의 소행임을 밝혀 냈지만 미군정은 이를 무시한 채 지상과 공중에서 방화 현장을 입체적으로 촬영하여 《제주도의 메이데이 May Day on Cheju-do》라는 기록영화를 만들고, 이 사건을 무장대의 소행으로 조작하는데 이용하였다. 오라리 방화사건 이틀 후인 5월 3일 미군정은 무장대에 대한 총공격을 경비대에 명령하였고 경찰 중심의 진압작전은 경비대로 넘어가게 되었다. 미군정이 강경진압으로 선회한 것은 선거를 앞둔 상황에서 제주도 사태의 조기진압에 초점을 맞춘 주한미군사령관 하지(Hodge)중장의 결정 때문이었다. 하지만 1948년 5월 10일의 남한 단독선거에서 제주도는 투표수 과반수 미달로 무효처리 되었고 다음달 23일에 재선거를 실시하려는 미군정의 시도도 수포로 돌아갔다. 재선거가 무산되자 미군정은 브라운(Brown) 대령을 제주지구 사령관으로 임명하고 강경진압을 지속적으로 전개하였다. 이 과정에서 5월 20일 경비대원 41명이 탈영하여 무장대에 가담하였고, 6월 18일 경비대 박진경 연대장이 부하 대원에게 암살당하는 사건도 발생하였다


이후 잠시 소강 상태에 놓였으나 1948년 8월 15일 남한에 대한민국이 수립되고, 다음달 9일 북한에 공산주의 정권이 수립되면서 남한 이승만 정부는 제주도 문제를 정권의 정통성에 대한 도전으로 인식하였다. 이승만 정부는 그 해 10월11일 제주도경비사령부를 설치와 함께 본토의 군 병력을 증파하였고 11월 17일 제주도에 계엄령을 선포하였다. 이에 앞서 9연대 연대장 송요찬은 중산간지대를 통행하는 자는 폭도배로 간주하여 총살하겠다는 포고문을 발표하였고, 중산간마을에 대대적 진압작전이 벌어졌다.


1948년 11월부터 중산간마을에 대한 강경진압으로 마을의 95% 이상이 불에 타 없어지고 많은 인명이 희생되었다. 이로 인하여 삶의 터전을 잃은 중산간마을 주민 약 2만 명이 산으로 들어가 무장대의 일원이 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진압 군경은 가족 중에 한 명이라도 없는 경우에 도피자 가족으로 분류하여 부모와 형제자매를 대신 죽이는 이른바 '대살(代殺)'을 자행하기도 하였으며, 재판절차도 없이 주민들이 집단으로 사살되기도 하였다. 12월 말 진압부대가 9연대에서 함병선 연대장의 2연대로 교체 되었지만 강경진압은 계속되었다. 한 마을에서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400여명의 주민이 총살당한 ‘북촌사건’도 2연대에 의한 것이었다. 또한 세화·성읍·남원 등의 마을에서는 무장대의 습격으로 민가가 불타고 주민들이 희생되기도 하였다.


[출처] 제주4·3사건 |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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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정과 이승만의 합작품, 그리고 서북청년단과 중심권력을 노렸던 지방의 군부까지 합쳐진 이 비극은 2000년 진상조사위원회가 설립되며 결국 '정부에 의한 학살'임을 인정하고, 2003년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은 정식으로 4.3항쟁에 대하여 정부 차원의 사과문을 발표했습니다. 또 제주 4·3사건에 대한 공동체적 보상의 하나로 4·3평화공원조성사업이 진행되어 2008년 3월 28일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명림로 430(봉개동 237-2)에 4·3평화기념관, 위령제단 등을 갖춘 4·3평화공원을 개관하였습니다.


제주 4.3 사건 진상보고서 전문

http://www.jeju43.go.kr//sub/catalog.php?CatNo=46




본문에서 기술한 '미 군정 보고서'는 읽는 사람에 따라 의견이 갈리는 듯 하지만, 저는 저 익명의 리뷰어 쪽이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당시 미 군정 장교들은 공로가 필요했고 잡음은 없어야 했으며, '냉전'의 대표자들이었기 때문이죠. 즉, '남로당의 무장대'를 무죄라고 주장할 수는 없지만 '남로당의 무장대'와, '남로당이 반대한 남측단일정부'에 대해 우익세력 및 서북청년단으로 대표되는 자들의 '제주도민 전체'를 대상으로 한 '빨갱이 잡이'가 이 비극의 중심 포인트라는 생각이 듭니다.


좋은 영화가 개봉했기에, 배경이 되는 사건에 대해 조금이나마 알리고 싶어 이 글을 올립니다. 막상 워낙 좋은 자료들이 많아 제가 특별히 글을 더 붙일일이 없네요. 혹시 제주4.3항쟁에 대해 또 다른 의견이나 사실을 아시는 분은 기탄없이 댓글로 달아주시면 읽고 공부해보겠습니다.


아, 그리고 현재 네이버 '지슬'의 평점은 평론가들은 평균 8.5를 넘고 일반분들의 평점도 높은 편에 속하지만, 전체평점은 6점대입니다. 대부분 이것에 대해 '이..일베!'의 소행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은데, 개인적으로 평단에서 이 정도 평을 받는 작품이 6점대를 받는건 조작이 아니고서야 어렵지 않나 싶어서 별점신뢰도는 낮다는 생각이 듭니다. 조만간 다른 전문적인 분들의 영화리뷰를 기대해보며 이만 줄입니다.



P.S: 역시, 찾아보면 있겠거니 했습니다.

https://ppt21.com/?b=8&n=36413

https://ppt21.com/?b=8&n=36413

눈시BB님의 [오늘]시리즈, 제주 4.3 항쟁입니다. 길기는 한데, 4.3에 대해 알기에는 좋은 글이지 싶습니다.

저는 이 글에대해 모두 동의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제주 4.3 항쟁에 대해 '있었던 사건'을 알기에 좋고, 생각해보기에도 좋은 글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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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4/03 23:46
수정 아이콘
평점 테러에도 불구하고 관객수 6만명을 돌파했다고 합니다.
한국영화 최초로 선대스 영화제에서 수상한 영화. 이번 주말에 봐야겠습니다.
Abrasax_ :D
13/04/04 03:12
수정 아이콘
저도 꼭 보러갈 생각입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tannenbaum
13/04/04 03:19
수정 아이콘
수십년이 지난 이제서야 하는 생각도 들지만 이제라도 아직 모르시는 많은 분들이 아셨으면 좋겠습니다
13/04/04 04:07
수정 아이콘
어제 보고 왔습니다. 그냥 막 눈물이 나버리더군요...

*영화 평점을 보러 'x이버'에만 들어가시나요? 자꾸 그 사이트만 언급하시니 '반x이버' 유저로서 무척 불편합니다. 영화정보를/리뷰를 제공하는 많은 사트들이 있습니다.
13/04/04 07:07
수정 아이콘
저는 영화에 크게 취미를 갖지 않는편이라 영화 정보 리뷰사이트를 알지도 못하는데다 네이버는 검색하면 자연스럽게 뜨더라구요. 그리고 반 네이버 유저가 네이버 언급이 무척 불편하시다고 해서 제가 그걸 바꾸지도 않을거고요.. 딱히 친 네이버 유저같은건 아니지만 이런종류의 불편하다는 것들을 저는 반대하는 편입니다.
억울하면,테란해!
13/04/04 09:40
수정 아이콘
이건 좀 아닌데요... par333k님이 수많은 영화 정보 사이트를 알고 있다는 보장도 없는데, 네이버가 싫고 park333k님이 그것'만' 언급했다 해서 불편해하시면 안 되죠.

그냥 다른 사이트들을 소개하고 왜 네이버를 반대하시는지 이유를 써서 '네이버를 언급 안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라는 의도를 넌지시 비추는 게 맞죠.

설사 그렇게 한 뒤에 par333k님이 또다시 네이버만 언급해도 어쩔 수 없는 겁니다. par333k님이 네이버를 피하고, 다른 사이트를 일부러 언급해야 할 의무는 없어요...
항즐이
13/04/04 11:17
수정 아이콘
맥주님이 반네이버를 하는 건 맥주님의 자유이고, 존중합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도 그래야 할 이유는 없죠.

제가 맥주 먹으면 속이 좀 안좋아지는 편이긴 한데.. 그렇다고 제 불편함이 타인에게 어떤 것을 강요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실제로는 맥주 좋아합니다.)
13/04/04 11:39
수정 아이콘
음 저는 강요를 받은 느낌은 아닙니다 크크 그냥 뭔가 안맞는 부분을 저렇게 표현해 주신거 같은데, 저런 부분에 대해 제가 '죄송하지만 바꿀수는 없습니다'하는 대답을 한 것 뿐...불편하시지만 거기까지는 제가 배려해 드릴 수 없는 부분이기도 하고, 그런 당위성도 제게는 잘 와닿지 않으니까요. 혹시 여기서 같은 내용으로 리플이 더 달릴까봐 흐흐.
꺄르르뭥미
13/04/04 12:31
수정 아이콘
저도 네이버를 그다지 좋게 생각하지 않는데, 영화 정보를 보기위해서는 들어갑니다. 일단, 불편함을 드려서 죄송하구요... 네이버만큼 많은 사람들이 평점을 매기는 사이트 있으면 꼭 알려주세요!
가나다라마법사
13/04/04 04:50
수정 아이콘
보고싶었던 영화라 같이볼사람이 없었지만 혼자 보고왔습니다.
지방이라 상영관이 없어 서면까지 갔다왔네요
눈시님이랑 보고싶었는데 아쉽네요 크크
기대 이상이었습니다. 오랜만에 영화관에서 울었네요.
아 그리고 네이버 별점은 무시하는게 좋습니다.
朋友君
13/04/04 08:43
수정 아이콘
꼭 봐야겠습니다.
파랑새
13/04/04 09:16
수정 아이콘
원래는 인디다큐페스티벌 2013때 보려고 했는대 3월 말에 시네코드 선재에서 봤습니다. 기회만 닿으면 또 보러 가고 싶어요.
억울하면,테란해!
13/04/04 09:41
수정 아이콘
저도 기회가 되면 보고 싶습니다. 글 참 잘 봤습니다.
13/04/04 12:39
수정 아이콘
4.3사건에 오기까지의 일련의 흐름엔 부패하고 무능한 공권력에 대한 항쟁의 요소가 있고,
4.3에 대한 정부의 심각한 과잉탄압은 진짜 말도 안되는 학살이었지만.
남로당이 일으킨 4.3사건 자체를 항쟁이라고 보긴 그렇지 않나요?

개인적으로 이 글은 왠지 4.3에 있어서의 남로당의 무장봉기에 대해서는 약간 축소시키려하는거 같아서 좀 그렇고
이 글에 링크된 눈시BB님의 글이 균형잡히게 잘 쓰여진거 같습니다.
13/04/04 12:54
수정 아이콘
저는 4.3 항쟁을 당시 4.3일, 남로당의 무장봉기만을 가지고 말한다면 항쟁을 붙이기 어려운 부분도 있다고 봅니다.
하지만 광주 민주화 항쟁처럼, 4월 3일부터 거의 5~6년간 이어진 제주도민의 항쟁을 통틀어 '제주 4.3 사건'으로 본다면 항쟁의 말을 써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이 5월 18일 하루의 사건이 아니듯, 제주 4.3 항쟁도 '4월 3일 남로당 무장봉기 사건'이 아니라 48년부터 54년까지 제주도의 사건 전체를 바라보아야 한다고 봅니다. 그런면에서 저는 4.3사건에 대해 항쟁이라는 말을 쓰게 되었습니다.
13/04/04 13:02
수정 아이콘
제가 아는 정보로는 1980년 광주의 경우야 첨부터 끝까지 민주화운동 내지 는 항쟁에 부합한다고 봅니다.
특히 대대적인 움직임이 5.18에 일어났으니 5.18민주화운동내지는 항쟁이라는 이름이 적합하겠죠.

문제는 1940년대 후반 제주도의 경우, 솔직히 4.3 무장봉기만 빼고;; 나머지가 항쟁에 부합하다고 느껴지는 복잡한 사건인데
4.3항쟁이라고 불리우는게 좀 갸우뚱거려지더군요.
이렇게 불리우니 마치 남로당의 4.3봉기가 항쟁의 중심인 것처럼 비춰지는 감이 있거든요.

이게 명칭이 애매한거 같아요

제주도의항쟁/4.3남로당무장봉기/정부의과잉탄압과학살
이렇게 항목을 나눠야 하는지;;
13/04/04 1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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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하 감사합니다 진짜 얼굴이 시뻘개지네요; 무슨생각을하면서 5.16이라고 써놨지... 얼른 수정했습니다.

제주도는 사실 4.3이라는 임팩트가 커서 그렇지, 부마항쟁처럼 그냥 '제주 항쟁'으로 쓰는게 더 나을거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결국 님과 저도 '같은 사건을 같게 판단하지만 어느쪽에 중심을 둔 표현'인가의 차이인데, 이게 꽤 의미없는 에너지 소모거든요. 결국 본질은 둘 다 4.3을 비롯한 제주도민의 비극 자체가 항쟁으로 취급되어야 한다는건데, 남로당의 무장봉기가 사건의 중심인가 아닌가를 가지고 4.3 사건을 '사태/항쟁'으로 나눠부르게 되는거니까요. 하지만 제주도민의 비극은 4.3이 본격적인 시작이었으나 끝도, 중심도 아니었던 것이죠. 훨씬 더 긴 시간 고통을 받아야했으니.. 그런면에서 4.3항쟁 이라고 하기도 애매하고, 4.3 사건이라고 하기도 애매하다고 보는데 공식적인 부분은 4.3 사건 으로 명칭을 다루고 있지요. 저는 제 자의대로 항쟁을 붙이고는 있습니다만.
13/04/04 13:13
수정 아이콘
제주항쟁내지는 4.3사건 정도가 무난할거 같긴한대
암튼 참 이게 적절한 명칭을 어찌할지 난감한면이 있네요

분명히 제주도의 일련의 항쟁의 흐름에, 4.3무장봉기를 계기로, 정부가 빨갱이 공포로 말도 안된 과잉탄압과 학살을 한 사건이니
4.3이 중요하긴 한대.. 4.3에 너무 중점을 두면 항쟁적인면이 가려질수가 있으니까요

근데 아직 수정 덜 되었어요 흐흐
13/04/04 13:16
수정 아이콘
억 으아 크크크크 눈이 리신이고 손이 잭스네요 아..
눈시BBbr
13/04/04 1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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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늦게 참가합니다만, 제 글에 적었듯 항쟁은 부적절하다고 봅니다. 4.3의 배경인 미군정과 정부의 실정, 탄압과 그 과정에서 나온 파업 등은 항쟁으로 볼 수 있지만 4.3은 무장대의 봉기로 시작됐으니까요. 4.3 사건에서 중점적으로 거론되는 것 역시 본문에서 쓰신 것처럼 맞서다가 탄압받은 게 아닌 사건이 격화되면서 맞서든 안 맞서든 왜 죽어야 되는지도 모른 채 죽어간 많은 분들이구요. 배경이 아무리 중요하다 해도 그런 대학살의 계기는 무장대의 봉기였죠.
전쟁 동안 일어났던 사건들, 보도연맹 사건 등에 희생된 이들도 이런 배경이 있었고 탄압에 맞서다 낙인 찍힌 이들이 있었지만 역시 중심은 전쟁 중에 빨갱이라 해서 마음대로 죽이고 그들과 협력했다느니 수를 채워야 되느니 하면서 죽인 것이죠. 보도연맹 항쟁이라고 하진 않잖아요.
신천군 의거라 불리던 게 신천군 사건으로 바뀌고 있는 것 역시 같은 맥락이라고 봅니다. 이 경우는 북한의 탄압에 맞서고 남한을 지지하면서 일어났음에도 그렇죠. 아예 희생자의 수를 차선으로 두고 4.3 때의 무장대나 신천군에서 일어선 우익의 정당성을 생각한다면 항쟁 문제를 다시 얘기할 수 있겠지만 (이럴 땐 희생된 분들을 그냥 무기로 쓰나 하는 느낌의 글도 봤습니다) 사건을 얘기할 때 중심이 되는 건 그게 아니니까요.
13/04/04 1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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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글에서도 읽었었지만 그런걸 감안하고서라도 저는 항쟁이라고 붙이고 싶습니다. 물론 정식 명칭은 '사건'이고 저도 그것에 동의하고 눈시bb님 말이 정론이라고 생각하는데, 저는 제주 사건 자체가 4.3의 무장봉기는 가스통에 붙은 점화의 순간이지 제주 사건 전체가 4.3 항쟁과 남로당 봉기를 가장 중심으로 판단 할 수 있는가에 대해 회의적이고, '계기'라는 것에 대해서도 무장대의 무장봉기에 대한 계기를, 거기에 대한 계기를 따지자면 결국 원죄논란이 일어나는거고 저는 제주 4.3 사건을 비롯해 일어난 참극들이 이념적인 정당성을 떠나서 남로당과 서북청년단, 우익과 좌익에 가려진 제주도민의 '항쟁'이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다만 제주 항쟁을 이를때 4.3사건으로 공식적으로 이르는 것 처럼, 4.3 항쟁이라고 썼지만 제가 가장 좋아하는 표현은 제주 항쟁입니다. 4.3 을 중심으로 본다면 '사건'이라고 축약할 수 있다는데에 동의하고요.
눈시BBbr
13/04/04 1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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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슬... 휴... 좋은 글 감사합니다. 이런 영화들이 계속 나왔으면 하는 마음만 드네요. 화려한 휴가부터 작은 연못 같은 영화들이요.
제 글 링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__);
작년에 인천상륙작전 쓸 때 눈에 들어왔던 게 제주도 출신의 한 해병인데요. 일기에서 4.3 사건이 자기에게 가져다 준 건 빨갱이를 다 죽여야 된다는 것이었다고 적고 있었죠. 우익 쪽이었던 모양입니다만 (그래서 제주도에서 해병대가 많았던 게 꼭 좌익으로 몰린 이들만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어쨌든 4.3이 결정적이었던 건 같겠습니다만) 적을 죽이면서 참 통쾌하다는 식의 내용이 많았죠. 그러던 그도 전쟁이 계속되니 적에 대한 연민도 보이고 그저 전쟁은 지옥이다는 쪽으로 바뀌더군요.
... 4.3이 그들에게 준 것이 무엇이었을지... 그저 슬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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