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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3/02/18 17:13:21
Name 글곰
Subject [일반] 첫 술자리의 기억
  십삼 년 전 이맘때쯤. 늦겨울 바람은 그 때도 지금처럼 쌀쌀했다. 입학식이 열리는 체육관까지는 까마득히 가파른 오르막길을 거의 삼십 분 가량 걸어야 했다. 그렇잖아도 보잘 것 없던 체력마저 수험기간 동안 늘어난 뱃살과 죄다 바꿔먹은 나는 초복날 황구마냥 헐떡거리며 간신히 언덕을 올랐다. 함께 서울까지 올라오신 어머니, 아아 그래. 그때는 아직 사십대셨던 데다 취미인 등산으로 평소 체력을 다져 오셨던 어머니는 이 한심해빠진 놈이 진짜 내 아들이냐는 표정으로 나를 노려보셨다. 그러나저러나 나는 가쁜 숨을 몰아쉬기에 여념이 없었다.

  수천 명이나 되는 신입생들이 하나같이 촌스러운 양복을 입은 채 하나같이 어벙한 표정으로 체육관 안을 서성이고 있었다. 언덕을 오른 고생이 무색할 정도로 입학식은 정신없이 진행되다 어느 순간 끝났다. 갈 곳을 잃고 방황하는 신입생들을 위해 어디선가 일단의 선배들이 나타나 단과대학별로 학생을 끌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도 거기에 휩쓸렸고, 정신을 차려 보니 나만큼이나 멍해 보이는 동기들과 함께 문과대학 앞 잔디밭에 앉아 있었다. 어디선가 막걸리병과 사발이 등장했고 우리들은 경애하는 하늘같은 선배께옵서 내리신 그 술을 소중히 받아 마시기 시작했다. 그때까지 나를 따라오신 어머니는 난생 처음 술을 마시는 아들의 모습을 먼발치에서 걱정스레 바라보셨다. 나는 어머니께 걱정 말고 내려가시라고, 당신의 아들은 끄떡없다고 호기롭게 외쳤다. 그리고 얼마 후 페이드아웃.

삽입컷(1) - 교문을 양손으로 부여잡고 추접하게 바닥에 피자를 만드는 중인 촌놈 1.
삽입컷(2) - 축 늘어진 촌놈1을 하숙집으로 끌고 들어오는 선배1과 선배2.

  나의 첫 번째 술자리는, 아마도 그날 대부분의 신입생들이 그러하였듯 그럭저럭 추접하고 꼴불견인 마무리로 끝났다. 그리고 나는 술을 싫어하게 되었다.

  이후 사발식이나 마라톤, 고연전 등 연이은 행사를 통해 몇 번 더 술을 마시게 되었지만 술을 마신다기보다는 위장에 들이붓는다는 느낌이었고, 단 한 번도 그 자리가 기꺼웠던 적은 없었다. 그리고 어정쩡하게 일 년이 지나고 나서 나는 선배들을 피하기 시작했다. 애당초 혼자 잘 노는 소위 ‘아싸’ 체질이었던 내게는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나는 파이어뱃을 본 저글링이 버로우하듯 지면 속으로 숨어들었고 스캔이 없었던 선배들은 나를 발견하지 못했다. 그리고 군대를 다녀온 후는 모든 게 완벽했다. 누구도 나를 신경 쓰지 않는 학교 생활.

  음. 글이 이쯤 전개되면 ‘군중 속의 외로움’이나 ‘타자와의 단절에서 비롯되는 고독’ 따위의 중2병적 감상이 등장할 것 같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다. 나는 지금도 그 때 대학 생활에 만족한다. 나는 술자리가 싫었다. 지금도 싫어한다. 술 자체는 그다지 꺼리지 않는다. 무더운 여름철에 에어컨이 빵빵하게 나오는 바에서 마시는 봄베이 토닉이나 잭 콕은 나처럼 주량이 형펀 없는 사람도 충분히 즐길 수 있는 술이다. 살짝 우울할 때 마시는 김릿이나 조니 워커 온더락스는 종종 마치 행복을 가져다주는 약처럼 느껴진다. 더운 여름날 체코에서 시장 골목을 헤매다 마신 필스너 우르켈은 최고라는 말밖에 할 수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술자리는 질색이다. 아니, 공정하게 말하자면 내가 좋아하는 술자리도 있긴 하다. ‘모르는 사람’이 없고, ‘술 강권하기’가 없고, ‘술잔 돌리기’가 없고, ‘주사 부리는 사람’이 없고, ‘2차’가 없는 술자리면 나도 나름대로 즐길 수 있다. 물론 이 조건을 모두 만족하는 자리가 거의 없다는 것이 사소하면서도 몹시 중요한 문제점 되겠다. 그런데도 사람을 사귀려면 술을 마실 줄 알아야 한다니 이 무슨 얼어죽을 소리인가.

물론 현실은 냉정하기에 사회생활을 하면서부터는 대학교 시절처럼 술자리를 피해다니는 것이 불가능해졌고 이리저리 끌려다니지만, 그런 자리에서 꿔다 놓은 보릿자루마냥 앉아있는 나는 언제나처럼 같은 생각을 한다. 이 술자리는 언제쯤 끝나나, 하고. 아마 나 같은 사람이 한국에 수백만 명은 되지 않을까. 그런 사람들을 위해, 십삼 년 전 이맘때쯤 처음 체험해 보았던 위액과 막걸리와 과자 부스러기가 뒤섞인 시큼한 맛의 기억을 오늘 한번 공유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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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시원이
13/02/18 17:46
수정 아이콘
[‘모르는 사람’이 없고, ‘술 강권하기’가 없고, ‘술잔 돌리기’가 없고, ‘주사 부리는 사람’이 없고, ‘2차’가 없는 술자리] 다행이 저한테는 있네요. 고등학교 친구들인데요. 가끔 안부차 모이거나 결혼식, 돌 때 모입니다. 저희는 그냥 모여서 술에 안주 시키고 예기 하다가 들어가지요. 먹고 죽자, 너한번 죽어봐라 (가끔 장난으로 몰빵하는 경우는 있습니다. 여자 꼈을 때 게임하면서 몰아주기 같은...) 전혀 없이 사는 예기 도란도란 하고 대부분 1차에서 끝내고 집에 갑니다. 그러니 주사도 없지요. 다른 술자리도 이 친구들 처럼만 하면 얼마나 좋을까 싶습니다.
13/02/18 18:15
수정 아이콘
저도 고등학교 시절 친구들과는 그렇게 마십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고등학교 친구들이 정말 오래가고 좋더군요. 그리고 끼리끼리 논다고, 주량도 다 거기서 거기 수준입니다.^^
다음닉변경전까지취직
13/02/18 17:51
수정 아이콘
술을 한 번도 안마셔본 사람입니다.
말하자면 긴 개인적인 사유로 알콜이라는 것에 대한 무서움을 크게 느꼈고, 그 이후로는 평생 술을 마시지 않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사회생활 시작한지 이제 한두달 됐는데, 일이 많고 야근을 하는것은 견딜 수 있습니다.
하지만 왜 그렇게 술을 강권하며, 왜 회식이 끝나면 동기들과 어깨를 토닥이며 수고했다고 서로를 위로해야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도 저는 술을 먹지 않을 생각입니다. 술이 서서히 사람을 잡아먹는 것을 수년간 뜬눈으로 지켜봤거든요.

술 안마시는 것으로 저의 많은 부분이 쉽게 평가 되버린다는게 참 슬프고 힘든 요즘이네요.
거의 군대시절의 고문관이라도 된 것 처럼 온갖 눈총을 받고 살 고 있습니다.
언젠가는 윗 사람들도 술 안먹는 있는 그대로의 저를 인정해주겠죠. 국방부 시계도 흘러가지만, 사회의 시계도 흘러가니까요.
13/02/18 17:59
수정 아이콘
본문에 쓰려다가 사족이 될 것 같아 안 썼는데요.
우선 술 마시는 것도 능력이라는 사실은 인정하고 들어가셔야 합니다. 업무능력이 타고나는 것임에도 그걸로 회사에서 평가를 받듯, 술 마시는 것도 회사에서 평가의 기준이 됩니다. 그게 현실이지요. 그걸 인정한 후 1)엄청난 업무능력으로 극복하거나, 혹은 2)억지로라도 술과 친해지거나, 아니면 3)신경쓰지 않고 내 갈 길을 간다... 정도의 선택지가 있습니다. 저는 3번입니다.
다음닉변경전까지취직
13/02/19 09:46
수정 아이콘
저도 3번 라인을 타야겠네요 크크 감사합니다.
라인하르트
13/02/18 18:13
수정 아이콘
뻘소리지만 13년 전 이맘 때 입학하셨다면 글곰님 저랑 같은 학번이시군요 ;;; 드넓은 캠퍼스 어딘가에서는 만났었을지도 모르겠네요... 덩달아 저도 13년 전 이맘 때 겪었던 동일한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
13/02/18 18:18
수정 아이콘
하핫. 반갑습니다. 그런데 저는 거의 클로킹 상태로 캠퍼스를 배회했기 때문에 바로 옆을 지나가도 아마 잘 못보셨을 겁니다.
가나다라마법사
13/02/18 18:57
수정 아이콘
주량도 끼리끼리 .. 동감합니다.
고등학교 친구들 서넛 만나면 밤에 집에들어가본적이 없어요 ......ㅠ
그리고 아침에 매번가는 국밥집에서 해장술까지 상큼하게 하고나면 해가 중천이죠 ..
집에가서 자고 일어나면 밤낮이 뒤바껴버려서 .. 그다음 월요일엔 월요병이 제대로죠ㅠ
하카세
13/02/20 03:17
수정 아이콘
저는 이거때매 고민이 많네요 -_-.. 자꾸 아싸상태로 가다보니 술자리는 가기 싫고.. 학교까지 싫어지려 그러니 미치겠네요
풀빵군
13/02/20 22:57
수정 아이콘
안녕하세요 선배님!! 13학번입니다 흐흐
저는 이번에 [‘모르는 사람’이 없고, ‘술 강권하기’가 없고, ‘술잔 돌리기’가 없고, ‘주사 부리는 사람’이 없고, ‘2차’가 없는 술자리]를 새터에서 경험했어요. 종교적 이유 때문에 술을 아예 안 마시거든요. 그런데 별 문제 없이 어울릴 수 있었어요 흐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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