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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2/11/22 23:30:01
Name 눈시BBbr
Subject [일반] 전쟁 속의 한국 - 1. 보도연맹 학살 사건
후추통님, 제가 졌습니다 ㅠ_ㅠ)/ 용서해 주세요~
... 진지한 얘기 해야 되니 장난은 여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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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중에 몰아서 한대놓고 중간중간에 많이 애기했죠? 자... 이번 글에서 좀 파 보도록 합시다.

군인이 사람 죽이는거야 당연한 일입니다. 그걸 직업으로 하는 게 군인이니까요. 아예 군인이 직업으로 독립되지 않은 경우도 허다하죠. 하지만 옛부터 그런 군인들의 자유를 제한해 왔습니다. 그들의 목적은 나라를 지키고 치안을 유지하는 것이고, 죽여도 되는 사람을 최대한 정해온 것이죠. 서양의 기사, 동양의 무사처럼 전쟁만 도맡아 하는 직업이 만들어졌고, 민간인은 최대한 건드리면 안 된다는 것 역시 동서양 공통으로 정립돼 옵니다. 좀 비꼬면 국가를 유지하는 민간인이 많이 죽을수록 나라에서도 손해니까 이렇게 돼 갔다고 볼 수 있죠. 어찌됐든 많은 전쟁을 통해 많은 사람이 죽어간 경험에서 나온 것은 맞겠죠.

+) 흥미로운 에피소드가 있는데, 일본에서 유명한 미나모토노 요시츠네는 해전 중 적군 뱃사공을 공격했다고 욕 먹었습니다 - -a 전쟁은 소수의 직업군인들만의 싸움이 돼야 한다는 것이고, 이런 "소수"는 낭만의 대상이 돼 갔죠. 뭐 이런 소수의 전쟁이 전세계 공통인 건 또 아니구요. 한국 역사만 봐도 그렇죠.

근대로 오면서 국민개병제로 전쟁이 총력전으로 변해가고 화기의 발달로 민간인의 피해가 커지면서, 세계대전이라는 큰 피해를 겪으면서 이에 대한 문제의식 역시 커져 갔습니다. 이렇게 해서 나온 게 1949년의 제네바 조약이죠. 민간인은 물론 적의 포로에 대해서도 원칙을 정한 것이었습니다.

전쟁은 교전권을 가진 군인들만의 것이 돼야 하고, 군인들은 민간인은 물론 적군 포로도 함부로 대해서는 안 되며, 반면 교전권이 없는 민간인은 전투에 참가해서도 안 되며 그럴 경우 제네바 조약의 보호를 받을 수 없는 것, 이것이 현재까지 이어지는 방침입니다. 하지만 전쟁에서 이게 잘 되는 경우는 찾기 어렵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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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에서 민간인 범죄가 일어나는 원인은 여러 부분에서 분석할 수 있습니다. 뭐 그냥 지금 내 앞에 어떤 군인이 있다고 생각하고 얘기해 보죠.

첫째는 저 군인이 나를 향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특히 적에 대한 분노 면에서 말이죠. 국군일 경우 좌익에 대한 분노가 강하면 강할수록 (자기 가족이 죽었다든가) 반응이 둘로 나뉠 겁니다. 북한에 협조했다면 당연하고 그런 흔적이 있거나 빨치산 등의 작전범위에 있다면 방아쇠를 당겨야 되나 말아야 되나 생각하겠죠. 이걸 떠나서 아예 북한 점령지역에 남아 있었다는 것만으로 의심받고 실제 억울하게 처벌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반대로 적으로 생각되는 이들에겐 강경해도 확실한 아군이라 생각되는 민간인에 대해서는 자기 목숨을 걸고서 챙겨주는 경우도 많죠. 아니 오히려 이런 생각이 기본이라 봐야겠네요.

좀 더 복잡하게 생각하면 전쟁 중 그 군인이 어떤 걸 겪었는지도 관련됩니다. 좌익 자체에 큰 혐오는 없는 국군이거나 UN군의 경우죠. 미군은 민간인에 대해서는 별 생각 없었지만 전쟁 초기부터 민간인에게 많은 공격을 받습니다. 애들이 미군의 위치를 무전으로 알려주는가 하면 임산부가 갑자기 총을 쏘고 피난민 대열에서 갑자기 수류탄이 날아오고 하는 식이었죠. 이럴수록 민간인에 대해 경계하게 되고, 여유가 없을수록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됩니다.

이걸 떠나서 같은 편 민간인이라 하더라도 괴롭히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자기는 나라 지키니까 위대하고 니들은 이런 나에게 감사하고 도와야 된다는 거죠. 죽이지만 않을 뿐 괴롭히고 물건 뜯고 하는 경우가 많았죠. 아 그냥 이런 약탈을 싫다 했다고 죽인 경우도 있구요. 물론 보고는 빨갱이 척살.

두번째는 이들이 얼마나 훈련을 받았냐입니다. 오히려 첫번째보다 이게 중요해요. 아무리 약탈부터 온갖 짓을 저지르고 싶다 생각해도, 저놈들 빨갱이니까 다 죽여도 된다고 생각해도 위에서 대민피해를 주지 않는다는 방침을 확실히 정하고 그에 대한 군기가 잘 들어 있으면 민간인의 피해는 줄어듭니다. 반면 위에서 이런 걸 관용하면 피해는 늘어나죠. 그 일본군도 기본적으로 민간인 신경쓰지 말고 다 죽이라 하진 않았어요. 곳곳에서 허용해 줘서 그런 것이죠.

한국전쟁에서 예를 들자면 백골부대를 들 수 있습니다. 서북청년단으로 이루어졌고, 북한에 대한 증오는 최고라 해도 부족하지 않을 이들이죠. 개전 전에는 이들이 벌인 걸 어느 정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개전 후에는 이게 사라지다시피 합니다. (최소한 지금까진 못 찾았네요) 오히려 백골부대에 대한 악명이 가득 퍼졌는데 생각보다 착하더라는 식의 증언도 있는 편이죠. 낙동강에서부터 사단장이 이종찬이었는데, 여기서 그 이유를 어느 정도나마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싶네요.

마지막으로 그들에게 명령을 내리는 윗선의 방침입니다. 윗선에서 아무리 방침을 잘 내려도 맨 밑의 병사가 독단으로 사람을 죽이는 걸 아예 막을 순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윗선에서 아무리 잘 해도 병사들의 군기가 잘 안 잡혀 있으면 막을 수 없는 것들이 있죠. 하지만 이 둘의 경우 규모는 그래도 작아집니다. 병사 하나, 부대 하나가 저지를 수 있는 일은 그래도 제한돼 있거든요.

하지만 맨 윗선에서 마음대로 죽이라 하고 병사들을 풀어준다거나 그걸 넘어서 어떤 범위를 다 없애라고 한다면, 일선 병사들이 아무리 죽이기 싫어해도, 중간에서 이를 막고 일부라도 살려준다 해도 대규모 학살은 막을 수 없습니다. 나찌가 유대인을 증오했다 하더라도 일개 병사가 유대인 한 명 죽이는 거랑 히틀러가 명령을 내린 거랑은 비교할 수 없죠.

한국의 경우 UN군이 들어오면서, 북한의 경우 중공군이 들어오면서 민간인 피해는 크게 줄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여유"를 들 수 있겠습니다. 여유가 없을수록 극단적이 돼 가요. 그리고 이 여유가 없었다는 것은 곧 어디까지가 어쩔 수 없었는가로 연결됩니다. 한국 쪽은 후퇴하면서 보도연맹 사건을 저질렀고, 북한은 후퇴하면서 역시 학살을 저질렀죠. 미국의 노근리 학살 역시 이것과 연관디됩니다. 전쟁이 시작됐으니 이런 적대세력에 대한 처벌이야 이루어졌겠지만 여유가 있었다면 피해는 그보단 많이 줄었을 겁니다. 실제 전선이 안정되고 적대 세력은 그냥 감옥에 가두면 되면서 큰 사건은 (거창 말고는 -_-a) 안 일어났죠.

이 모든 것의 배경이 되는 것은 적을 확실히 정할 수 없었던 그 때의 환경이었습니다. 내전의 특성이기도 하죠. 같은 마을에서도 서로 편을 가르게 되고 증오했고, 때문에 대체 어디까지가 적이냐는 문제가 걸렸습니다. 여기다 남로당부터 북한의 게릴라 전술은 더 컸죠. 적이 확실하다면 피해는 오히려 줄어듭니다만, 그게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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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전 전, 난장판이었던 한국의 상황 속에서 온갖 사건들이 일어납니다. 대구에서, 제주에서, 여수와 순천에서였죠. 이들에 대해서도 각기 글을 썼었죠.

이후 만들어진 1차 빨치산 토벌, 이 과정에서도 각종 크고 작은 사건들이 있었습니다. 빨치산을 도왔다는 등의 이유로 좌익으로 몰아 즉결처형하거나 처벌하는 거였죠. 이 과정에서 개인의 원한관계에 따른 보복도 있었구요.

위의 조건들에 비춰보죠. 이 때 국군부터 경찰, 서북청년단 등에서는 북한과 좌익에 대한 증오가 극에 달했고, 그렇지 않은 이들도 있긴 했지만 전투력은 전자가 훨씬 강했습니다. 똑같이 훈련 안 돼 있을 경우 적을 증오하는 이들이 더 강할 수밖에 없으니까요. 거기다 이들은 훈련도 안 돼 있었죠. 관할 군경에 들어간 경우는 그나마 나았습니다. 아예 이들의 권한을 무시하고 날뛰는 경우가 많았던 게 더 큰 문제였죠. 그리고 군경들 역시 훈련을 받았더라도 일제의 방식, 그냥 강경하게 밀어붙이는 것만 잘 배웠을 뿐입니다.

그리고 그 윗선, 이승만 정부는 단호한 대응, 다시 말 해 이들을 쓸어버리는 것을 우선했구요. 남로당부터 북한의 방식은 언제나 게릴라전, 피아를 구분하기 힘든 상황에서 쓸어버리는 것은 수많은 희생자를 낳았죠. 모든 상황이 최악이었던 거죠.

전쟁이 시작되면서 더 큰 사건들이 생긴 건 예고된 수순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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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순 사건 후 정부에서는 "국민보도연맹"을 만듭니다. 1949년 4월 20일부터였죠.


지들 딴에는 그리 나쁘지 않았을 겁니다. 니들 죄 용서해줄테니까 이제 대한민국에 충성을 다하라 이런 식이었으니까요. 그래봐야 제대로 된 법규정도 없이 일제의 야마토쥬쿠, 대화숙을 모방한 것일 뿐이었죠.

가장 먼저 보도연맹에 소속된 건 당연히 여순 사건 등의 가담자입니다. 이 경우는 그나마 이해할 수 있죠. 반란군과 함께 행동했거나 빨치산 출신, 기타 간첩들이거든요. 문제는 그 수를 채우기 위해 이런저런 이들을 다 집어넣었다는 겁니다.

해방 후 남로당은 최대한 가입자를 늘리려 했습니다. 특히 탄압받기 시작하면서 당원을 1백만명까지 늘리려 시도했죠. 다른 당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만 -_-a. 원래의 친분이나 작은 보상 등으로 여기 가입했던 이들은 다 보도연맹에 들어갑니다. 종손을 따라 남로당에 다 가입한 가문이 있는가 하면 비료를 관리하는 면직원이 남로당 가입 안 하면 비료를 안 줘서 다 가입한 마을도 있었죠.

"공산당 골수분자도 있었지만 대부분이 어쩌다 한 때 잘못 판단하여 당원이 된 사람과 무지몽매한 탓으로 저들의 감언이설에 속아 입당한 사람들, 심지어는 무슨 배급을 준다기에 멋도 모르고 도장이나 지장을 찍어준 것이 알고 보니 공산당 입당원서였다는 웃지 못할 수렁으로 빠져 들어간 딱한 처지에 놓인 사람들이 부지기수였다." - 선우종원 보도연맹 중앙본부 최고지도위원

이들은 다 보도연맹에 가입하게 됩니다. 남로당부터 다른 좌익 단체들이 수를 늘리려 했던만큼 보도연맹의 수도 늘어났죠.

그 외에 특히 빨치산 활동구역에 있는 이들이 많이 걸렸습니다. 빨치산에 성냥 하나라도 줬으면 가입하는 수준이었죠. 거기다 각 지방에서는 빨치산의 수를 늘려서 보고해 왔습니다. 이에 맞춰 보도연맹 가입인원이 '할당'됐고 그 지방에서는 이 할당량에 맞추기 위해 억지로 더 끌어들여야 했습니다.

"고성에 20~30대 대부분은 무조건 가입대상이었다." - 김00, 고성군 개천면 보도연맹 서기

실제 남로당원들이 잡혀봐야 얼마나 잡히겠습니까? 자수한 사람들 중에 진짜 좌익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그럴 거면 숨지 뭐하러 자수를 했을까요? 다 이런 식이었어요. 심지어는 우익 청년 단체 소속이면서 경찰에 밉보여 가입하게 된 케이스도 있어요. 구타, 협박으로 강제로 가입한 케이스가 있는가 하면 비료를 주니 버스비를 면제해 주니 머슴살이에서 벗어나게 해 주니 하면서 끌어들인 케이스도 있습니다.

이들은 반공 강연이나 시위 등에 동원됐고, 젊을 경우 군사훈련을 시켜 군경이나 우익단체에 넣으려고 시도하기도 했습니다. 비용 문제로 이건 안 된 듯 하네요. 그 외에 완전히 전향됐다 싶은 이들은 탈맹하게 해 줬구요. 이렇게 늘어나고 줄어드는 과정이 계속돼서 그 정확한 수를 파악하긴 어렵습니다.

서울의 경우 50년 6월 6일 연맹 행사에서 2만여명이 참가했다고 합니다. (이후 탈맹으로 개전 당시는 만오천명 정도로 잡더군요) 당시 서울 인구의 약 1.18%, 다른 지역들에서도 0.8%에서 2%를 넘는 등 약 1~2%대에서 그 수가 추측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전쟁이 시작됐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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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전 당일, 전국의 경찰은 우익 단체들과 함께 "요시찰인"들의 체포에 나섭니다. 27일에는 이승만 대통령의 특명이 내려졌죠. 실질적인 체포는 28일부터였던 모양입니다. 문제는 여기서부터입니다.

"6월 27일경 헌병사령부를 통해 대통령 특명으로 분대장급 이상 지휘관은 명령에 불복하는 부대원을 사형시키고 남로당 계열이나 보도연맹 관계자들을 처형하라는 무전지시를 직접 받았다." - 김00 6사단 헌병대 상사

이런 증언들을 통해 과거사위원회는 정부 차원에서 직접 "사살"하라는 명령이 내려진 것으로 판단합니다. 이런 사건들이 늘 그렇듯 이승만이 이걸 직접 지시했다는 증거는 없습니다. 다만 이런 건 있죠. 6월 28일 국무회의에서는 "비상사태하의 범죄처벌에 관한 특별조치령"이 내려집니다. 간단히 범죄 저지르는 놈은 바로 사형에 처해도 된다는 거였죠. 28일 본격적인 학살이 시작된 걸 보면 이것을 명분으로 직접 명령내렸다는 것으로 봐야 될 겁니다. 그 방식은 일선부대의 명령체계를 무시하고 직접 전담부대에 명령을 내리는 것이었죠.


이걸 주도한 것이 CIC(방첩대)입니다. 그리고 이를 맡은 것이 이승만의 수족이나 다름없던 김창룡이었죠. 자기보다 위라 하더라도 무시할 수 있는 위세를 가졌고, 명령체계를 떠나 그의 CIC가 경찰과 헌병들을 지휘했죠.

그 계기는 인천에서 군경이 철수하면서 보도연맹원들을 중심으로 한 좌익이 시청을 접수, 북한군을 맞이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허나 북한군은 좀 늦었고 경찰들이 다시 와서 처형하고 다시 후퇴했죠 =_=a

보도연맹원들은 갑을병이나 ABCD로 나뉩니다. 갑이나 AB는 중요인물들이었고 CD는 거기에 협조한 것으로 분류된 이들이었죠. 때문에 학살된 범위 역시 각기 다릅니다. 아예 CD는 풀어준 후 AB만 처형한 경우가 있고, 정말 극소수 몇명은 처형하고 나머지는 풀어준 경우도 있기 때문이죠. 물론 이렇게 풀어주는 것도 목숨을 걸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혐의로 처형된 이들도 있구요. 이에 대한 얘기는 조금 있다 하기로 하죠.

과거사위원회에서 밝혀낸 신원이 확인된 희생자는 4934명, 이 중 증언과 기록으로 밝혀낸 건 4722명이고 둘 중 하나만 있어 추정으로 넣은 건 212명이죠. 참고로 과거사위원회에서 발굴한 유해 중 보도연맹과 관련된 것으로 결정된 곳은 다음과 같습니다.

- 대전시 동구 낭월동 - 34구
- 진주시 문산읍 상문리 - 약 100여구
- 경산 폐코발트 광산 - 323구
- 공주 왕촌리 - 약 300여구
- 충북 청원 분터골 - 118구

그 외에 신원은 밝혀지지 않았지만 자료와 증언의 교차 검증(자료-자료, 자료-증언, 증언-증언) 가능한 추정치를 냈는데, 다음과 같습니다.


미상 - 43 (너무 많군요 -_-a)
100명 미만 - 11 충남(천안, 논산) 경북(울진, 봉화, 영양) 경남(밀양, 사천, 남해) 전북(고창, 금산) 전남(나주)
100~200 - 18 충북(보은) 충남(당진, 태안, 홍성, 부여) 경북(군위, 예천) 경남(창녕, 의령) 전북(이리, 김제, 남원, 부안) 전남(영광, 영암, 완도, 여수, 순천)
200~300 - 12 충북(괴산) 충남(공주) 경북(경주, 고령, 의성) 경남(마산, 고성, 함안) 전북(무주) 전남(함평) 제주(북제주, 남제주)
300~500 - 9 충북(영동) 충남(연기) 경북(대구, 성주, 안동) 경남(하동) 전북(전주, 완주) 전남(장성)
500~1000 - 18 충북(청주, 청원, 옥천) 충남(서산) 경북(영천, 칠곡, 포항, 청도) 경남(부산, 동래, 울산, 김해, 양산, 통영, 거제, 동래) 전남(광산, 보성)
1000명 이상 - 충남(대전+대덕 최소 1400), 경북(경산)

참고해 볼 부분이 있습니다. 2공화국 때 국회에서 특위를 만들어 조사한 진상보고서죠. 영호남과 제주도에서 조사가 됐는데 다음과 같습니다.

경남 - 3085
경북 - 2200
전남 - 524
전북 - 1028
제주 - 1878

예전에 이를 살짝 다루면서 그 피해를 20~30만부터 100만이라 추정하는 건 지나친 과장이라고 얘기했었습니다. 지금도 그 생각은 같습니다. 저 추정치는 어디까지나 '최소'인 것은 맞을 겁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수배에서 수십배까지 할 수는 없거든요. 공식적으로 조사됐고, 가장 심층적으로 조사한 것이 과거사위원회의 조사고, 거기에 맞춰야 된다고 봅니다. 오히려 저 수치가 축소될 수도 있어요. 증언이라는 건 신빙성이 낮은 편이고, 더 정확한 증거가 없기 때문에 참고하는 것이니까요. 북한이 저지른 학살 역시 공식적으로 발표되는 건 12만 8936명이지만 얼마든지 더 많이 부르는 쪽이 있거든요. (가령 대전의 경우 충청도 전체의 희생자로 발표된 것보다 5천 명은 많은 1만 3천명으로 얘기돼 왔고, 과거사위원회의 권고로 바뀌었죠)

갈수록 더 어려워지겠지만 조사가 더 제대로, 국가 단위로 됐어야 했는데... 이 점이 참 싫죠. 정치권에서야 이용만 당했겠지만, 과거사위원회는 자기 역할을 충실히 했거든요. 국군과 미군 등의 전쟁범죄는 물론 북한과 빨치산이 저지른 것들 역시 계속 조사하고 있었거든요. 언제 다시 열 수 있을까요?

+) 그래도 아쉬운 건 역시 북한 측에 대해서는 그냥 이를 잊지 말자 정도로만 얘기했다는 점입니다. 국군이나 미군 측이 저지른 것에 대해서는 보상 얘기를 하면서요. 보상까지는 현실적으로 안 되더라도 전자에 대해 얘기하는 것만큼 북한의 사죄나 최소한 범죄 인정 정도는 다뤄줬으면 했는데요.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면 전자는, 아니면 일본에 대해서 요구하는 건 현실적이라서 하는 게 아니잖아요.

시간이 더 갈수록, 피해에 대한 구체적인 건 나오기 힘들겠죠. 짜증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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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정말 목숨을 걸고 이들의 목숨을 구해준 이들이 있습니다. 과거사위원회에서 조사한 것만 해도 이런 얘기들이 있죠.

- 함양군 유림면 지서장 : 다른 곳으로 피난 유도
"거기로 가면 안 된다."

- 합천군 가회면 조정주 지서주임, 허임상 면장 : 허면장이 조주임 설득 후 경찰들을 설득, 연맹원 366명을 피난시킴. 이후 이들의 공덕비가 세워짐
"보도연맹원들은 못 배워서 군중 심리에 가입한 것이니 풀어줘야 한다."

- 합천군 초계지서 순경 최우영, 노호용 : 보도연맹원을 모아 훈련 중 후퇴할 경우 사살하라는 명령에 소집한 인원(50여명)들을 돌려보내 피난시킴
"오늘만 피해라, 수단껏 피해라, 가지마라 가면 죽는다."

- 김해군 이북면장 최대성 : 대한청년단장이던 동생 최대홍을 설득, 젊은 사람들은 모두 청년단에 가입시키고 나이든 사람들은 몰래 빼 줌.

- 양산 웅산면 지서장 오강환 : 보도연맹원 소집을 막았고 이 때문에 연행, 조사받았지만 일본군 때 동료였던 계엄사령관 김종원의 도움으로 풀려남 (김종원이 좋은 사람은 아니예요 -_-a)
"사람들 하나라도 끌고 가면 너는 나한테 죽는다."

- 영천 임고면 임태선 형사 : 따로 빼돌려 풀어줌

- 충북 괴산군 증편면 지서주임 안대용 : 연맹원들을 모아놓고 공포탄을 쏴 처형하는 척 하며 피난시킴 - 간부를 풀어줬다는 이유로 사살됨
- 경찰 정00 : 소집되지 않은 연맹원들에게는 총살을 알려주고 이미 모인 이들은 배추를 뽑아오라는 명령을 내려 도주의 기회를 줌

- 영동군 불정지서 주임 황대흥 : 미리 연행된 이들을 풀어줌. 나중에 모인 이들은 CIC에 의해 희생당함

- 영동군 용화 지서주임 이섭진 : 아내와의 상의로 보도연맹원들을 풀어줌. 공덕비가 세워지자 연행돼 조사를 받았지만 풀려남
"모든 사람들이 봄을 맞이하듯 집집마다 그의 덕을 기억하여 비록 길가에 세운 조각돌일지라도 영원히 잊지 말자" - 그의 공덕비 내용

- 청원군 북일면 오근장 파출소장 정원모 : 예비검속자 150여명을 풀어줌. 공덕비를 세우려 했지만 무산

- 청원군 강서지서장 남정식 경위 : 500여명의 보도연맹원을 풀어줌. 수복 후 그 보답으로 세 마차분량의 쌀을 받았지만 거부

- 천안시 김종대 서장 : 예비검속자들을 모았지만 후퇴시 전부 풀어줌. 이후 북한군 역시 후퇴과정에서 보답으로 우익 처형 없었음.

- 구례군 안종삼 서장 : 480여명의 연맹원 풀어줌
"과거 모든 죄과는 용서하기로 한 것입니다. 지금부터 여러분을 모두 방면합니다. 국가를 위해 다시 한 번 애국의 기회를 줄 테니 나라에 충성하십시오."

후... 이 정도 되는군요. 내용이 길어지니 뺄까 했지만 전부 넣었습니다. 이분들 모두가 사람을 살린 영웅들이니까요.

위에서 볼 수 있듯, 현지의 경찰과 면장 등이 먼저 이를 반대했습니다. 그 시대에 이런 직책을 맡은 이들 중 우익 아닌 이들이 어딨겠습니까? 빨치산이 움직일 경우 이들과 그 가족들이 첫 타겟이 될 거구요. 그럼에도 이들은 연맹원들을 풀어줬죠. 그 정도로 좌익이 아닌 억울하게 끌려온 사람들이 많다는 걸 안 거니까요. 그 외에 풀어줬다가 처벌받은 이들이 있다지만, 저 위의 사람들 중 처벌받은 건 고급 간부를 풀어준 단 한 명 뿐입니다. 나머지는 공덕비가 생길 정도죠. 뭐 그 외에 다수와 CIC, 헌병은 명령을 충실히 따랐지만요.

결국 가장 큰 문제는 이겁니다. 왜 선량한 사람들까지 증오심으로, 어림짐작으로, 고문으로, 인원수 맞추기 위해서 끼워넣었느냐는 것이죠. 미리 수감해 둔 인원이 아닌 이상 사람들은 모이라 해서 모였습니다. 서울의 1만 5천 보도연맹원들은 마지막까지 서울에 남으며 명령에 따랐고, 지방에서 모인 인원 역시 명령에 따라 모인 것이었죠. 이런 이들을 그저 빨갱이로 몰았냐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상대가 빨갱이라면 무조건 죽여도 되냐는 겁니다.

"(한강 도하 후 수원의 기숙사를 빌렸을 때) 학생이 한명도 보이지 않는 게 궁금했던 터라 그것을 물어 보았다 "학생들은 다 어디로 갔소?" "인민군 환영하러 서울 갔지요." "인민군을 환영하러 갔다구요?" 부아가 확 치밀어 올랐다." - 정승화

"사변이 난 3일 후인 28일 서울은 지하의 빨갱이들로 구성된 보도연맹이라는 조직이 미쳐 피난을 못간 우익인사들을 색출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서울이 적의 수중에 들어가면서 눈치 빠른 보도연맹원들이 공산당으로 전향하여 그들의 앞잡이 노릇을 하는데서 문제가 발생되었다. 이들의 행동으로 인해 아직 아군지역인 한수 이남에 있던 보도연맹원들은 사상범으로 몰려 모두 체포되는 지경이 되었다." - 남기고 싶은 이야기

보도연맹 학살의 직접적인 이유는 아군이 후퇴할 때 이런 연맹원들과 수감자들을 후방까지 데리고 갈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적 편을 드는 걸 눈 뜨고 볼 수 없고, 그렇다고 이들을 데려갈 순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이었죠.

보도연맹원 중에서 북한 편을 든 이들은 분명 적지 않습니다. 인천에서 그랬고, 전국 곳곳에서 국군 패잔병과 우익 사냥에 뛰어들었죠. 일단 이해가 되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렇게 모진 고난을 겪고 겨우 살아났는데 그래도 한국 편을 들고 싶을까요? 억울해서라도 북한 편 들죠. 하지만 어찌 됐든 처음부터 북한 편을 든 이들 역시 적지 않겠죠.

그렇다 하더라도, 감옥에 갇혀 있는, 눈 앞에 모인 이들이 당연히 북한 편을 들 것이라고 무조건 죽여도 되는 걸까요?

네. 저도 그 상황에서 제가 총을 쥐고 있고, 눈 앞에 있는 이들을 풀어주거나 놔두고 가면 100% 내게 총을 겨눌 것인 상황이라면... 저도 주저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거기다 내 가족이 적들에게 죽은 상황이라면 더하겠죠?

그런데 말이죠.

그렇다면 왜 우리는 북한의 인민재판과 민간인 학살을 욕하는 걸까요?

이건 북한에게도 똑같이 해당되는 말입니다. 북한의 인민재판은 당연히 한국 편을 들 이들을 죽이는 것이었고, 이 중에 억울하게 죽은 이들 역시 적지 않을 겁니다. 예비검속 역시 한국과 똑같이 벌어졌죠. 후퇴하는 과정에서 당연히 한국 편을 들 이들을 죽이고 갔으며, 한국 편을 들어서 자기들이 패했다는 분풀이로 지역 단위의 학살을 벌인 경우도 많았습니다. 그리고 북한까지 후퇴한 뒤에도 미리 붙잡아뒀던 이들과 국군 미군 포로들을 학살했구요. 애초에 한국을, 우익을 증오할수록, 그들에게 탄압받을수록, 그들에게 자신의 인생과 가족을 잃을수록 그들의 보복 역시 더 컸겠죠.

이들 역시 당연히 한국 편을 들 거니까 죽였을 뿐이라는 겁니다.

어쩔 수 없는 부분은 분명 있을 겁니다. 국군 패잔병들이 총을 들고 자기들을 죽이러 오는 보도연맹원들을 죽인 경우는 그렇겠죠. 이런 것 역시 그리 적지는 않을 겁니다.

하지만 이런 사례가 있더라도, 아니 죽이고 "갈 수밖에" 없었더라도 그건 확실히 밝혀야 되고, 반성해야 되고, 추모해야 됩니다. 그것이 전쟁의 비극이라고, 우리의 잘못이라구요. 어쩔 수 없었다면 그런 일이 있을 수밖에 없기에 전쟁은 있으면 안 된다구요. 최소한 이런 얘기라도 할 수 있어야 그 때 억울하게 희생된 분들의 넋이라도 위로할 수 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이런 부분 때문에 과거사위원회가 없어진 것이 정말 화가 나는 거죠.

+) 추가

잊을 뻔 했군요. 이들 보도연맹원들은 죽거나 피난가지 않은 이상 북한군에 의해 또 다시 고초를 당합니다. 배신한 대가는 피로 씻으라는 거였죠. 자의도 적지 않았겠지만 국군 패잔병들을 사냥하고 대다수는 의용군에 우선 배치됩니다. 남진 과정에서, 낙동강에서 수류탄 하나 들고 맨 앞에서 돌격한 이들이 바로 이들이었죠. (이 때 전사한 이들 역시 많기에 실제 피해는 더 알아내기 어려울 거라 보구요)

그리고 북한군이 패주할 때 고향으로 돌아온 순간, 부역자 처벌에 휘말렸죠.

이래저래... 불행한 이들이었습니다.

========================================================

보도연맹 하나만으로 길어졌고, 진이 다 빠졌네요. 에휴 -_-...
다음 편에는 노근리 사건과 거창 사건, 국민방위군 사건을 중심으로 얘기하도록 하죠. 길어지면 또 뒤로 늘리고...

그리고 한국전쟁 내내 주인공으로 뒀던 인물에 대한 얘기도 하도록 하겠습니다. 이 부분에서는 꼭 얘기해야 될 인물이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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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용불량자
12/11/22 23:47
수정 아이콘
훌륭한 글 잘 읽었습니다. 쓰시느라 수고하셨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진지하게 생각해 볼 좋은 내용들이네요.
그 중에서도 저런 시대상황 하에서도 무차별적인 학살을 막고 사람들을 구한 잘 알려지지 않은 분들 이야기가 감명깊었습니다.
아키아빠윌셔
12/11/23 00:07
수정 아이콘
동네처녀가 마음에 드는데 그 처녀 아버지가 결사반대한다고 요시찰 대상, 좌익으로 분류시켜서 명단에 올려버리고 결국 그 아버지는 살해당하고 처녀랑 강제로 결혼한 미친 파출소장 같은 케이스들도 있죠 -_-
tannenbaum
12/11/23 00:13
수정 아이콘
쉰들러리스트가 생각납니다 다르긴 합니다만....
혼란스런 상황에서 그런 판단하기가 쉽지 않았을텐데 존경스럽습니다 보도연맹 사건에서 이런분들이 계셨다는건 처음 알게되었습니다
솜털같이 가볍고 얇은 지식이 부끄러워집니다
늘 그렇지만 좋은글 감사드립니다
아이군
12/11/23 02:44
수정 아이콘
일단 전체적으로 말하자면 아마도 북한의 학살이 더 많았을 겁니다. 현재의 우리들은 인민재판이라는 단어를 기억하지 보도연맹이라는 단어를 기억하지는 않으니깐요. 간접증거이긴해도... 북한의 학살은 알려지지 않은 부분이 더 많습니다.(특히나 이북에서 벌어졌을 학살은 아예 흔적도 찾기 힘들죠.)

하지만 그것이 보도연맹이나 국민방위군이 덮여지는 건 아니죠. 노무현이 보도연맹을 사과하자 배신자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고 하니 뭐...
후추통
12/11/23 09:08
수정 아이콘
이러한 양민 학살의 경우, 과거에도 흔했죠...특히나 한 지역을 함락할 경우 공을 세운 병사들을 치하하기 위해서 성벽에 가장 먼저 올라간 병사나 부대, 또는 성벽을 먼저 연 부대 등에게는 약탈의 우선권이 주어졌습니다. 뭐....약탈만 하겠습니까....당연히 살인, 강간등이 마구 이루어졌죠..

이러한 민간인 학살은 손권이 이술을 죽이고 그 일가와 그 아래 관리들과 그 일족들을 모두 도륙하고 환성 일대의 사람들을 이주시킨것도 있지만...진짜 미친짓은 사마의의 행동이죠...

사마의는 양평성을 함락한 직후 포로들 중 15세 이상 7천명을 죽여 그 해골로 경관이라는 전승비를 세우고 바로 성내의 사람들마저 가리지 않고 다 죽여버렸죠... 나중에 동진의 황제인 명제 사마소가 이 기록들을 보고 서진은 망해도 싸다고 할 정도였죠...
구밀복검
12/11/23 09:55
수정 아이콘
임철우의 작품 중에도 625 당시의 학살을 다룬 게 좀 있죠. 인민군이 진주해 오기에 살기 위해 인민빠 코스프레를 했더니 알고보니 옥석을 골라내기 위한 한국군의 위장이었다더라..와 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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