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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2/10/14 12:43:52
Name 눈시BBbr
Subject [일반]  북진 - 완. 최종 공세



10월 15일, 미국령 웨이크섬에서는 트루먼 대통령과 맥아더 원수의 회담이 열립니다. 맥아더로서는 2차대전 종결 후 처음으로 미국 땅을 밟은 것이었죠. 그 이전부터 트루먼은 맥아더를 여러 차례 불렀지만 전쟁을 지휘해야 된다는 이유로 거부했죠. 하와이도 안 된다고 하니 별 수 있나요. 맥아더의 상황을 존중하는 의미에서 트루먼이 700km나 떨어져 있는 웨이크섬으로 갑니다. 반면 맥아더가 이동한 거리는 300km 정도였죠. 뭐 어쨌든 그 먼 미국까지 왕복하는 것보단 이 쪽이 합리적이긴 합니다.


"누가 대통령이야?"
"아 그거야 댁이겠지."

이 때 맥아더의 차림도 영 대통령에 대한 예의가 없었습니다. 한국과 일본의 천황, 태평양의 카이사르로 불렸던 그의 위세가 하늘을 찌를 때였죠.

여기서 그 유명한 드립-_-이 나옵니다.

"추수감사절 안에 적의 공식적인 저항을 종식시킬 수 있다."

이어 중공군의 개입 가능성에 대해 맥아더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중공이 효과적으로 개입할 시기를 놓쳤다. 참전해 봐야 5~6만명 정도일 것이다."
"그들이 압록강을 건너온다면 막강한 공군력으로 최대의 살육전을 펼칠 것이다."

이 중 후자는 훗날 청문회 때 이런 말을 했다는 걸 부인했죠.


"패튼이나 이 놈이나 ㅡㅡ"

마지막으로 브래들리 합참의장이 미국을 제외한 다른 나라의 추가 파병이 필요하냐고 물었고, 맥아더는 이렇게 답합니다.

"그들은 군사적 견지에서 필요가 없다. 그들은 전투를 치러보지도 못할 것이다."

+) 이 때까지 영연방 27여단을 필두로 프랑스, 태국, 터키, 네덜란드, 캐나다, 호주에서 UN군이 계속 오고 있었습니다.

맥아더가 이렇게 호언장담하는 만큼 트루먼도 꼴 보기는 싫어도 좋아하며 돌아갔을 겁니다. 어쨌든 싸움은 잘 하는구나 했겠죠. 이후의 작전은 이렇게 전쟁의 조기 종결을 목표로 짰고, 특히 UN군의 철수를 생각하며 추가 병력과 보급을 제한하고 국군에게 맡기는 쪽으로 흘러갔죠.

이 때 또 눈여겨 봐야 될 것이 수복지역의 군정권 다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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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법으로는 지금도 북한은 미수복지역일 뿐입니다. 반면 국제사회에서는 북한 역시 동등한 나라일 뿐이죠. 충돌이 있을 수밖에 없었죠. 정부는 북한의 통치권은 당연히 대한민국 정부에 있다고 하며 12일부터 민정관을 파견합니다.

반면 그 날 UN은 이런결의를 통과시켰죠.

"UN은 한반도 전역을 합법적으로 통치할 수 있는 합법정부를 공식적으로 인정한 바 없다."

당시 UN은 3단계의 군정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1단계는 미국 정부와 UN군사령부 통제 하에 치안 확보, 2단계는 한반도 전역에서의 자유로운 선거, 3단계는 한반도 통일정부 수립 후 외국군 철수였죠.

대립은 격화됩니다. 17일에는 이북지역에 계엄령이 발표됐고, 22일에는 평양시장을 임명하며 UN 결의에 불복하겠다는 태도를 유지했죠. 맥아더는 이에 맞서 23일 정부가 북한에 파견한 관리들의 철수를 정식으로 요청하며 24일에 UN군에서 선정한 평양시 관리위원 12명을 취임시킵니다. 전쟁 자체가 빠르게 흘러가고 있는 상황에서 북한 주민들은 두 가지 행정기관이 생기면서 어느 쪽 말을 들어야 되는지 혼란에 빠졌죠.

그나마 맥아더도 '지엽적인 문제로 한국정부와 갈등하면 안 된다'면서 한 발 물러났고, 조병옥 내무장관도 'UN 결의내용의 세부 시행 문제는 정부간 협상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하면서 한 발 물러났죠. 양 쪽 다 흥분에서 조금씩 벗어나고 있었습니다.

... 뭐 의미는 없었지만요 -_-;

저로서는 이 때 UN이 주도해서 북한의 치안을 잡았어야 했다고 봅니다. 아군은 평양-원산에서 압록-두만강으로 가는 레이스를 시작했고 북한군 패잔병들은 곳곳에 있었죠. 이런 상황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 지는 뭐... 패턴이죠 이제.


"후방을 철옹성같이 다져야 한다. 도피분자, 요언 전파 분자와 무자비하게 투쟁하며 밀정 및 파괴분자를 적발, 가차없이 숙청하고 반역자는 무자비하게 처단해야 한다."
"반동분자, 비협력분자, 도피분자를 적발하여 무자비하게 숙청하라."
"악질반동에 대해 복수하려는 것은 극히 정당한 일입니다."
- 김일성

북진하는 곳곳에서 북한군이 후퇴하면서 저지른 학살극이 발견됩니다. 평양에서만 6천여구의 시체가 발견됐고, 함흥에서는 1만 2천여명이나 됐다고 하죠. 이 수치가 대체 얼마나 과장됐을지 알 수 없습니다. 아마 영원히 밝혀질 수 없겠죠.

방식이야 크게 두 가지였죠. 보도연맹처럼 예비검속을 통해 감옥에 가둬 둔 이들을 학살하고 후퇴한 것과 그냥 흥분해서 마구 죽이고 간 것이요.

이런 학살글에 대한 항쟁이나 아군의 북진에 호응해 봉기한 경우도 있었습니다. 가장 유명한 게 신천이죠.

"황해도 재령 신천 지방에서는 애국자 정자환, 홍보식, 김화경씨 등 3인이 구상하고 계획한 바 반공의거를 실행할 목적으로 (중략) 비밀결사 광복동지회를 조직하여 많은 청년동지들을 규합하였다."

"국군과 UN군이 북진을 개시하자 공산당과 그 앞잡이들은 자기들과 같이 후퇴하지 않고 남아서 연합군을 환영할 이른바 반동들의 검거를 시작했다. 목사 신부를 위시한 기독교 신자들, 조만식 선생 영도하에 있던 조선민주당 당원들, 천도교 계통의 청우당 당원들, 공산당에 가맹하지 않았던 지식인들, 과거의 지주들... (중략) 이들에 대한 피의 숙청이 개시되었다는 정보가 전해지자 10월 13일 오후 4시를 기하여 공산당과 괴뢰군이 퇴각하기도 전에 용감하게도 민중은 궐기하였다."

이들은 아군이 들어오기도 전에 재령-신천 지방을 탈환합니다. 여기까지만 보면 장하다는 생각이 듭니다만...

"무장대원들은 접전 끝에 괴뢰기관들을 점령하고 태극기를 올렸다. (중략) 군중심리에 휩쓸린 민중의 의거는 드디어 폭동화하여 수많은 부역자의 가족을 닥치는대로 처단해 버렸다."

...

이후 북한군은 급히 신천에 진입해 이들을 몰아냈고, 사리원에 있던 UN군(영연방 27여단)에 급히 도움을 청해 재탈환에 성공합니다. 그리고...

"그러는 동안 많은 애국 청년들이 퇴각하던 괴뢰군에게 학살당했다. 안악중학교 강당 지하실에서는 육백여명의 애국자 시체를 발굴해냈다. 서하면의 청년들도 한꺼번에 72명이 붙들려 난도질 끝에 무참히 학살을 당했다."

그 다음은... 뭐 예상하시죠?

"구월산에서는 매일 밤 하산하여 부락을 습격하고 약탈방화하는 입산공빙과 연락하거나 또는 부역자로 체포된 자를 탈취 입산할 우려가 있고 처단당한 빨갱이의 자녀를 수용보육할 기관이 없음으로 인해 일단 부역자로 규정되면 전가족이 처단 당하는 예가 많았다. 일제에게 40년간 착취를 당하고도 해방 후 1인의 희생도 내지 않고 곱게 일본인을 돌려보낸 이 지구의 순박한 농민들이 붉은 치하 5년 후에 이다지도 끔찍하게 동족간의 혈투가 벌어지는 이유가 어디 있을 것인가? 두말할 것도 없이 공산정치가 과거 5년간 북한에 있어 얼마나 악하게 인민에게 반영되었는지를 여실히 증명한다."

"치안대원들은 공산당을 잔인할 정도로 처단하는 것은 그들이 배워주고 갔으니 그대로 복수할 따름이라고 말하고 심지어 기독교인들도 공산당을 죽이는 것은 사탄을 죽이는 것이니 십계명의 살인죄에 해당되지 않는다는 해석을 내렸다. 이 전율할 피의 복수의 조류가 미친듯이 전 북한을 휩쓸었으나 그 중에도 구월산 지구가 가장 심하였는데 전 인구의 1할 내지 2할이 부역자로 몰려 처단되었다."

- 구월산, 당시 유격대장 김종벽

북한은 이것을 미군이 저지른 학살로 규정하며 아예 박물관을 만들어 홍보하고 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피카소도 한국에서의 학살이라는 그림을 그렸죠. 하지만 답은 이미 나와 있습니다. 미군은 이 지역을 지나가지도 않았고, 나중에 이 곳에 주둔한 이들 역시 영연방이었습니다. 이들은 오히려 잔인한 복수극에 놀라서 이를 막으려고 했죠.

정말 무서운 것은 신천 관련 자료에서는 이런 복수극을 여과 없이 보여주고 있다는 점입니다. 남북 어디든 자기들의 학살은 최대한 은폐하려고 하지만, 이들은 당연한 복수라면서 당당히 얘기하고 있다는 것이죠. 위의 김종벽의 경우 그 문제를 강하게 지적하는 쪽이긴 합니다만...

후...

예전에 빨치산에 대한 글을 쓴 적이 있었죠. 이들 역시 그 빨치산과 다를 바 없습니다. 북한의 압제에 고통받았고, 한국을 지지하며 음지에서 한국의 승리를 빌었으며, 북진 대 아군에 호응해 일어났습니다. 공산주의를 지지하거나 억울하게 가족이 죽은 것에 대한 복수로 일어났던 빨치산처럼, 이들은 공산주의에 반대하거나 북한의 학살에 대응해 일어났죠. 이 때 살아남고 월남한 이들은 아직까지도 이 "신천 의거"를 기념하고 있으며, 반공의 선두에 서 있습니다.

이들과 빨치산을 비교해보면 어떨까요?

김종벽은 이 사건에 대해 수복 후 한국이 바로 통치했으면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거라고 하며 이를 방임하고 증오에 가득 찬 현지인들에게 치안을 맡긴 것이 문제라고 지적합니다. 틀린 말은 아닙니다. 하지만 전 오히려 UN이 북한을 확실히 맡았으면 합니다. 증오는 한국 정부 역시 마찬가지였으니까요. 신천이 가장 대표적일 뿐 이건 북한 전역에서 일어났을 겁니다. 북한군은 학살하고 도주, 그에 대한 복수극, 북진만 생각했던 아군은 이걸 신경쓰지 못 한 것... 이렇게요.

시간이 부족하긴 했습니다. 이건 확실합니다. 하지만 그래도... 조금이라도 이걸 신경 써 줬으면 하죠. 수복 후의 군정은 성공도 실패도 아니었습니다. 아예 시작도 못 했으니까요. 하지만 이런 걸 보면 결코 좋게 됐을 것 같진 않네요.

아무튼... 북한이 이걸 미군의 학살이라고 대대적으로 홍보하는 것도 이해가 됩니다. 북한 내에서 일어난 봉기니까요. 김일성 정권에 대한 반대가 어땠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구요. 마침 죽은 사람도 많겠다, 북한 주민들이 자기에 반대해서 일어난 게 아니라 그저 미군이 북한 주민을 죽인 거로 하고 싶은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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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17일, UN군사령부는 작전명령 4호를 하달합니다. 기존에 정했던 북진 한계선을 끌어올리는 것이었죠. 정주-함흥선에서 선천-성진 선으로요. 한만 국경까지 48~64km 거리였죠. 서쪽으로는 미 8군이, 동쪽으로는 미 10군단이 맡게 됩니다. 이를 위해 원산을 점령한 국군 1군단은 미 10군단의 지휘를 받게 됐죠.

이 북쪽으로는 국군만 진격하게 했으며, 이를 위해 미군의 부담도 줄이고 국군도 늘릴겸 해서 미군에 포함된 한국인들을 국군으로 돌리기 시작합니다. 3군단이 만들어졌고 2, 5, 9, 11사단이 들어갔죠. 2사단은 나중에 들어가긴 합니다만 -_-a

이렇게 북진과정에서 급하게 국군을 재편했고, 중공군이 들어왔을 때 혼란의 이유 중 하나가 됐을 겁니다.


"휘하의 전 부대를 동원해 최대한의 속도로 국경선까지 진격하라!"



10월 24일, 맥아더는 새로운 명령을 내립니다. 기존의 북진제한선, 이른바 맥아더선을 깨뜨리는 것이었죠. UN군도 모두 북진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이전에 설정한 제한선은 북한이 항복할 경우에만 효용성이 있는 것이지 항복하지 않는 이상 필요 없다는 것이었죠. 트루먼이 내렸던 9.27 훈령을 어기는 것이었지만 현지 지휘관의 재량이라며 무시합니다.


"북한의 정규병력은 이미 격파되었다. 현 상황은 추격의 최종단계다."

워커와 알몬드는 이 명령을 받은 후 각기 미 8군과 10군단에 총공격을 명령합니다. 마지막 공세, 그들 앞에는 그 어느 때보다도 승리가 보였을 겁니다.

평양-원산을 향한 레이스는 이제 압록-두만강으로 향합니다. 조금만 더 고생하면 된다. 조금만 더 고생하면 이긴다. 조금만 더 고생하면 통일이 된다.

그 어느 때보다 힘이 더 났겠죠. 그리고 자신이 그 누구보다 먼저 압록-두만강에 가고 싶었을 겁니다.

그리고 그만큼 아군의 진격은 서로 연결도 되지 않고, 그저 미친 듯이 달리는 데만 집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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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사단의 목표는 수풍리, 24일에 안주에 도착해 청천강을 도하해 운산으로 향합니다. 이 때 영변을 6사단이 먼저 점령해서 편히 왔고, 다시 북진을 개시합니다. 이 때 장병들은 "평양! 평양!" 했던 것처럼 "압록강! 압록강!" 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미 24사단은 구성-신의주로 진격합니다. 여기서 북한군 17사단을 만나 격파하고 진격했죠. 이어 국경선은 최대한 국군에게 맡기라는 워커의 작전에 따라 예비였던 국군 7사단이 이들을 초월, 신의주를 향해 갑니다.

그 동안 6사단은 순천에서 개천으로 진격, 북한군이 버리고 간 150여대의 차량을 노획해 빠르게 진격합니다. 이 때 선두에 선 7연대 3대대는 이런 명령을 받습니다.

"인민군의 중앙을 돌진하여 개천으로 직행하라. 적이 사격하지 않으면 사격을 하지 말고 무조건 전진하라!"

국군이 탄 모든 차에 전조등이 환하게 밝혀졌고, "전쟁은 끝났다. 총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가라!"는 말이 곳곳에서 나옵니다. 북한군은 여기에 눌러 도주했고, 교전 한 번 없이 개천을 점령했죠. 이 때 국군이 온 걸 몰랐던 기차를 발견해 동계복장을 노획합니다. 이때부터 6사단은 인민군에게 보급을 받는다는 말이 나왔죠.

23일, 6사단은 압록강의 초산으로 진격합니다. 오른쪽에는 8사단이 함께 진격하고 있었죠. 이 대 사단장 김종오는 차량 사고로 부상당했지만, 후송을 거부하고 계속 작전을 지휘하고 있었습니다.


한편 동해안에서도 미 10군단이 진격을 시작합니다.

10월 17일, 수도사단은 함흥을 공격했고 18일에 점령에 성공합니다. 20일에는 함흥 북방 40km까지 진출하면서 본격적으로 두만강을 향해 달렸죠. 아직 원산 상륙이 끝나지 않은 상태라서 진격은 그정도에서 일단 멈춥니다. 26일 해병대가 상륙했고, 27일에는 7사단이, 11월 4일에는 3사단이 상륙하면서 본격적인 작전이 내려왔죠. 26일에 내려온 알몬드의 작전은 이랬습니다.

국군 1군단은 동해안을 따라 북동 국경지대로 진격, 미 1해병사단은 후방을 경계하면서 장진호를 향해 진격, 7사단은 북청-혜산진을 공격, 3사단은 대기였죠.

미 8군보다야 늦었지만, 이들 역시 전쟁이 끝날 것이라는 것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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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군이 걱정했던 청천강에서의 전투는 없었습니다. 북한군은 도망가기에 급급했고, 아군은 그저 달렸죠. 보급상황은 최악이었습니다. 아무리 끌어모아도 차량이 부족했고, 장병들은 하계 전투복만 입고 달렸죠. 6사단의 경우 북한군 걸 노획해서 그나마 나았지만 동해안 쪽의 1군단의 상황은 최악이었습니다. 그래도 달렸죠. 조금만, 한 번만 더 밀면 끝이 난다는 생각으로요.

10월 26일 07, 6사단은 마지막 진격을 시작합니다. 압록강까지 남은 거리는 30km, 하지만 전부대가 차량화 됐기에 빠르게 갈 수 있었습니다. 북한군은 초산 남쪽 6km에서 마지막 저항을 했지만 이것도 밀어붙이고 진격합니다.


이 날 14시 15분, 6사단은 마침내 압록강에 도달합니다.

춘천에서의 혈전과 지연전 동안 겪었던 고생, 낙동강에서 나라가 무너지는가 했던 순간, 반격 과정에서의 환희, 평양은 못 갔지만 압록강에 가장 먼저 도착한 부대라는 영광, 그것이 6사단을 뒤덮고 있었을 겁니다. 전쟁의 끝, 우리의 승리... 모든 게 손에 잡힐 듯 다가온 것 같았죠.

하지만 그 모든 건 신기루일 뿐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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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불개타該不該打. 전쟁을 해야 하는가, 말아야하는가?
북조선인민의 적은 바로 중국인민의 적이다. 북조선을 지원하는 것은 조국과 세계 평화의 수호와 일치한다. 미국의 침략에 항거하는 북조선을 지원하는 것은 정의로운 전쟁이다.


팽덕회와 김일성

원불원타愿不愿打. 싸움을 원하는가 원치 않는가?
1839년 미 해군의 침입부터 과거 청 정부를 협박해 체결한 불평등 조약, 최근에는 항일전쟁 승리 이후 미국이 장개석을 지지하면서 내전을 일으켰다. 미국은 지금 일본의 전철을 그대로 밟고 있다. 미 제국주의자들은 이미 중국에 도전하고 중국 인민들에게 전쟁을 강요하고 있다.



능불능타能不能打. 싸울 수 있는가 없는가?
미군은 정의롭지 못한 전쟁을 하고 있으며 비록 무기에서는 우세하지만 병력이 부족하고 사기가 부진하다. 아군은 비록 무기 장비에서 열세하지만 전쟁의 승패 결정 요인은 무기 장비가 아니라 사람이다. 우리는 수량과 물량 면에서 우세이고, 중국과 북조선인민들의 전폭적인 지원과 평화를 사랑하는 전 세계 인민들의 지지를 받고 있다. 게다가 우리는 이제까지 계속 열악한 장비를 가지고 우수한 장비로 무장한 적을 물리쳤다. 일본군을 무찔렀듯이 미군도 무찌를 수 있다.


모택동과 주덕

항미원조 抗美援朝 보가위국 保家衛國
미국에 대항하고 조선을 도와 국가를 보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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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멋진날
12/10/14 13:02
수정 아이콘
좋은 글 잘 읽고 있습니다. 이제 정말 재앙이 시작되는군요. 어렸을 적이나 받았던 교육도 그렇고 대체로 6.25의 중공군하면 물량 공세만 떠올리기 마련인데 알고보면 이들이 숫적으로 그렇게 유리했던 것도 아니고 나름 전술적인 능력도 갖췄기에 미군을 그렇게 곤란하게 만들었더군요.
사티레브
12/10/14 13:11
수정 아이콘
역사상 최대의 참사 가 역사상 최대의 실수 를 보게되는건가요
매카써 크크크
쌀이없어요
12/10/14 13:28
수정 아이콘
흑... 씐나던 북진은 끝나고 이제 또 후퇴가.... ㅠㅡㅠ
12/10/14 13:32
수정 아이콘
지금까지는 신나고 재미있었는데
울화통 터질 분량만 남았군요...
Je ne sais quoi
12/10/14 14:51
수정 아이콘
(그나마) 재미있는 얘긴 끝이고 다시 괴로운 얘기로 돌아가는군요. 뭐 하긴 우리나라 역사에서 재미있는 일 자체가 거의 없긴 하지만 -_-;
blue wave
12/10/15 15:11
수정 아이콘
중공군이 우리보다 결코 많았던 것은 아닌데, 우리군이 제대로 된 보급과 제대로 된 방어진이 없었기 때문에 각개격파 당한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지금도 추운데 하복을 입고 압록강까지 갔다는 점에서 보듯 제대로된 보급과 진격이 뒷받침 안되었던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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