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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2/09/27 21:24:56
Name 눈시BBbr
Subject [일반]  인천상륙작전 - 1. 크로마이트, 1/5000의 작전

  6월 29일 전선을 시찰할 때 이미 맥아더의 머리 속에는 상륙작전이 구상돼 있었습니다. 그는 개전 일주일도 안 돼 참모장 알몬드에게 이런 명령을 내렸죠.

"서울의 적 병참선 중심부를 타격하기 위한 상륙작전계획을 고려하고 상륙지점을 연구하라"

이렇게 해서 나온 것이 블루 하트 작전이었습니다. 한국에 투입되는 24, 25사단은 남쪽에서 치고 올라가고 해병대와 육군이 인천에 상륙해 적을 포위한다는 것이었죠. 여기 동원되기로 한 것은 해병 5연대와 1 기병사단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작전은 북한군의 빠른 남진으로 이루어지지 못 합니다. 미 1 기병사단은 포항에 상륙해 방어전에 투입됐죠.


하지만 맥아더는 상륙작전을 계속 밀어붙입니다. 인천 외에도 여러 곳을 검토하라는 명령 하에 "크로마이트"라는 작전이 구상됩니다. 특별한 의미는 없습니다. 그냥 크롬이예요 -_-a 아 저게 아니라


요거요. 적을 기만해야 되기도 해서 이 가제목은 끝까지 유지됩니다.

합동전략기획 및 작전단에서는 최종적으로 3개의 상륙안을 제출합니다. 인천에 상륙하는 100-B, 군산에 상륙하는 100-C, 주문진에 상륙하는 100-D였죠. 하지만 군산과 주문진은 적의 후방을 끊지 못한다는 약점이 있었고 특히 주문진은 태백산맥을 넘어야 했죠. 군산은 계속 인천과 경쟁합니다만, 맥아더의 머리 속에는 인천밖에 없었습니다.

7월 23일, 맥아더는 해병대와 증원오기로 한 2사단을 상륙부대로 쓰겠다고 통보합니다. 하지만 이마저도 전세가 급박해지면서 모두 낙동강 방어선에 투입됩니다. 2사단은 큰 피해를 입은 24사단과 교대했고 해병대는 미리 도착해 전선이 어려울 때마다 예비대로 투입돼 정말 큰 역할을 했습니다.

맥아더는 마지막으로 아직 일본에 남아 있는 7사단을 쓰겠다고 통보합니다. 하지만 계획은 구멍투성이였습니다. 해병대는 아직 1개 연대밖에 없었고 7사단은 병력도 훈련도 부족했습니다. 나머지 병력은 "예비 병력"이라고만 했죠. 상륙한 병력도 준비 돼 있지 않았다는 겁니다.

8월 23일, 미 본토에서는 이 미친 계획을 막기 위해 거물들이 일본으로 향합니다. 이 날 17시에 도쿄에서 한반도의 운명을 결정할 회의가 열리게 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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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koreanwar60.tistory.com/272

그냥 이 만화를 보시는 게 편할 것 같네요. ^_^) 핵심도 다 들어 있거든요. 이걸로 충분하시면 아래의 ------- 에서부터 보시면 됩니다.

이 때 맥아더를 방문한 것은 미 육군 참모종장 콜린스 대장(온 김에 다부동도 보고 갑니다)과 해군 참모총장 셔먼, 미 극동해군사령관 조이 중장, 7함대사령관 스트러블 중장 등이었습니다. 이들은 배후의 상륙작전 자체를 반대하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인천은 힘들다는 주장을 했죠.

해군에서는 1시간에 걸친 설명 후에 이런 결론을 내립니다.

"인천상륙작전이 불가능하지는 않다. 그러나 나는 이를 건의할 수는 없다."

이어 콜린스는 대안으로 군산을 제시합니다. 셔먼 역시 이를 지지했죠. 인천은 절대 안 된다는 거센 반대, 맥아더는 오랫동안 준비한 연설을 합니다. 무려 45분짜리였습니다.

1. 불가능하기에 가능하다.
"북한군의 주력은 현재 미8군 방어선 주변에 투입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적은 인천에 대한 방어를 충분히 준비하지 못하고 있다고 확신합니다. 여러분이 불가능하다고 지적하신 사항들은 나에게는 오히려 기습의 성공을 확신시켜 주는 요소가 됩니다. 적 사령관도 이와같이 무모한 공격을 시도할 사람은 없을 것 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기습이야말로 전쟁에서 성공을 거둘 수 있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맥아더는 그러면서 1759년에 있었던 퀘벡 전투의 예를 듭니다. 영국과 프랑스가 캐나다를 두고 벌인 이 전투에서 프랑스군은 만사천명, 영국군은 구천명이었습니다. 수적으로 불리한데다 프랑스군의 강력한 방어에 영국군은 2개월이나 공격에 실패했죠. 이 때 영국군 사령관 울프는 절벽으로 부대를 상륙시켜 도시를 기습, 승리합니다. 날짜도 적절하게 9월 12일이군요.

북한군도 이건 마찬가지라는 것, 인천상륙이 힘든 만큼 북한군의 경계도 소홀할 것이라는 거였죠.

2. 해군에 대한 신뢰
"해군측에서 반대하는 바와 같이 인천항의 조수나 수로학적인 측량결과나, 지형이나 기타 물질적인 난점이 많다는 것은 시인하며, 이것은 깊이 고려되어야 할 문제라고 봅니다. 그러나 난점은 결코 극복할 수 없는 불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나는 해군을 전적으로 신뢰합니다. 나는 해군 자신이 신뢰하는 것보다 오히려 더 해군을 신뢰하고 있는 겁니다. 우리 해군이야말로 태평양 전쟁 당시 나의 지휘하에서 많은 상륙작전에 참가하였고, 풍부한 경험을 쌓고 위대한 전승을 거두었기 때문입니다. 거기다 대부분이 인천과 비슷한 난관을 극복하고 이루어진 것이었습니다. 이런승리를 거둔 해군의 능력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솔직히 언플이긴 합니다만 (...) 미 해군이라면 그런 어려움쯤은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이었죠. 태평양 전쟁 때 해군과 맥아더의 갈등은 참 유명하죠. 거기다 해병대도 맥아더를 좋아하진 않았습니다. 지들은 죽어라 고생했는데 자기만 스포트라이트를 받았으니까요. -_-a

3. 망치와 모루

"만일 여기에 상륙하여 적을 포위하려고 하여도 실제로 포위도 되지 않을 뿐 아니라 적의 병참선과 보급시설을 파괴할 수 없기 때문에 상륙작전은 의의가 없습니다. 결국 그것은 불충분한 포위가 될 것이며, (중략) 군산에 상륙한다는 것은 미8군에 병력을 조금 더 증원하여 현상유지를 돕는 결과밖에 안됩니다."

군산으로는 적을 포위할 수 없다는 것이죠. 여기서 맥아더가 주장한 것은 망치와 모루입니다. 쇠를 제대로 두들기려면 모루가 충분히 단단해야 하는 법, 군산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이죠. 인천에 상륙한 부대는 모루가 되고 낙동강의 주력은 적을 내리치는 망치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단지 38선까지 내리치는 망치가 아니라 평양부터 압록강까지 가는 강력한 망치질이었죠.

4. 적의 보급선을 끊자
"우리가 낙동강 방어선에서 직접 정면공격으로 적진을 돌파하여 밀고 올라가는 작전을 시도한다면 많은 희생자만 낼 것이고 결정적인 전과를 얻을 수가 없습니다. 적은 뒤로 후퇴하면서 병참선과 통신망을 조금씩 단축시키기만 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인천과 서울을 탈취한다면 적의 병참선을 절단할 수 있을 뿐 아니라, 한반도의 전 남쪽 전체를 차단할 수 있는 결과가 될 것입니다. 적의 약점은 병참선에 있습니다. 적은 남쪽으로 전진하면 할수록 병참선이 신장되고 약화되며, 그만큼 보급상태가 곤란해질 것입니다.

"북쪽에서 내려오는 적의 주요 병참선은 모두가 일단 서울에 집결된 다음 다시 전방으로 수송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서울을 탈취한다면 우리는 적의 병참선 기능을 완전히 마비시킬 수 있습니다. 그 결과는 현재 미8군과 대치하고 있는 적부대의 전투력을 마비시킬 것입니다."

5. 10만의 목숨을 잃을 것이냐
"만약 나의 계획이 채택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더욱 많은 희생을 치르는 전쟁을 계속해야만 될 것이며, 낙동강 전선에서의 전투는 희망도 없이 무한정으로 전투를 계속하는 길밖에 없습니다. 우리 장병들은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와 마찬가지로 피비린내 나는 낙동강 전선에 그대로 묶어 놓는데 만족할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이와같은 비극에 대한 책임을 누가 질 것입니까?"

당시 미군은 낙동강에서의 북진시 아군의 피해를 10만에서 15만으로 봤습니다. 과대평가가 너무 크긴 했지만 어렵다는 건 맞았죠. 북한군이 선택할 수 있는 방어선은 38선까지만 해도 5개였습니다. 아군의 피해가 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죠. 실제 반격 작전 때 북한군은 일주일 가량 버팁니다. 북한군이 완전히 무너진 건 인천상륙작전의 결과가 확실히 알려졌을 때엿죠.

6. 자유 vs 공산
"지금이야말로 자유세계의 위신을 유지할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막다른 길목에 놓여 있는 것입니다. 전세계 사람들의 이목이 한반도를 주시하고 있습니다. 공산당이 세계 적화의 첫발로 아시아를 선택하였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입니다. 그 대결의 장소는 베를린도 아니고, 비엔나도 아니고, 런던도 아니고, 파리와 워싱턴도 또한 아닙니다. 바로 한국의 낙동강입니다. 우리는 그것 때문에 지금 그들과 서로 맞대어 싸우고 있는 것 아닙니까? 유럽에서의 대결은 다만 입씨름 정도에 불과하지만 우리는 여기에서 무기를 가지고 싸우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아시아에서 공산주의와의 싸움에서 패한다면 다음에는 유럽의 운명도 중대한 위기에 직면할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이긴다면 유럽에서의 전쟁을 모면할 것이며, 평화와 자유의 길이 보존될 것입니다. 그러나 만분의 일이라도 우리가 여기에서 주저하거나 치명적인 실수를 범하거나 그릇된 결정을 내린다면 그 다음은 파멸 뿐입니다."

스케일은 키우고 보는 법입니다. 이게 그냥 명분 싸움이 아닙니다. 미군부터 UN군에게는 자기의 목숨을 걸어야 되는 이유는 클수록 좋습니다. 그래야 보람이 있는 법이니까요. 맥아더가 물러난 후 왔던 리지웨이도 이걸 강조했고, 중공군 역시 북한을 돕는 것보다 아시아에서의 공산 혁명의 연장선이라는 걸 강조했죠. 그리고 틀린 말도 아니잖아요 -_-a 그 후에 우리가 자유로웠냐고 한다면 북한은 진짜 공산주의 했나요 (...)

"제가 이렇게 말하고 있는 순간에도 운명의 시계바늘은 계속해서 분초를 세고 있을 것이고, 그 소리가 지금 귀에 들리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이제야말로 과감하게 행동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만약 그렇지 않으면 자유세계는 죽음만이 기다리고 있을 따름입니다."

"만약 나의 판단이 잘못되어 인천에서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강력한 적의 저항에 직면하게 된다면, 나는 즉시 우리 부대가 피해를 입기전에 철수시킬 것입니다. 그러한 경우 우리의 손실은 나의 지휘관으로서의 명예 손실만이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인천상륙 작전은 실패하지 않을 것이며, 반드시 성공할 것입니다. 그리고 10만의 생명을 구하는 결과가 될 것입니다."

여기에는 맥아더의 명예욕도 끼어 있었습니다. 단지 성공하기만 하는 작전은 필요 없었습니다. 그가 한국을 지키고 세계를 지켰다고 주목받을 수 있는 거대한 작전이 필요했죠. 5천대 1의 도박이었지만 그의 의지는 확고했습니다. 잘 하면 전사에 길이 남을 명장이 될 것이고 실패하면 뭐 -_-a 희대의 삽질이 되겠죠.


"우리는 인천에 상륙할 것이며, 적을 분쇄할 것입니다."

이 45분간의 연설로 한 방에 설득이 됐으면 좋겠지만 현실은 드라마와는 다르죠. 다음 날 해군 참모총장 셔먼은 극동해군사령관 조이부터 상륙을 맡을 해병대사령관 셰퍼드부터 당사자인 해병 1사단장 스미스와 함께 다시 맥아더를 찾습니다. 그들은 인천 남쪽 포승면(아산만)으로 변경을 주장했지만 맥아더는 이 역시 거부합니다.

설득하러 왔다가 설득돼서 돌아간 콜린스와 셔먼은 존슨 국방장관과 트루먼에게 이 사실을 보고합니다. 존슨(-_-)은 맥아더를 지지했고, 트루먼도 이를 승인합니다.

8월 28일, 미 합동참모본부는 인천상륙작전을 승인합니다. 이 때까지는 군산도 계속 생각해보라는 단서가 붙은 상태였습니다.

맥아더는 이에 대해 30일에 인천상륙작전을 명령합니다. 상륙예정일은 9월 15일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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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중요한 것은 시간이었습니다. 시간이 너무 없었어요. 태평양 전쟁이나 노르망디 상륙작전에서는 최소 몇개월부터 아예 연 단위의 시간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인천상륙작전은 8월 말쯤 계획해 9월 중순에 한 것이었습니다. 정식 교리에서도 최소로 필요한 기간이 2~3개월이라고 하고 있다고 합니다.


특히 미 해병대에게는 발등에 불이 떨어집니다. 이미 5 해병연대가 1 임시해병여단이라는 이름으로 정말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었으니까요. 이들도 기존의 편제에서 절반 정도의 병력만 보유하고 있었을 뿐입니다. 본토에서는 예비역들까지 최대한 긁어모아서 일본으로 보내고 있었습니다. 이 때 한국에 투입되지도 않고 미국에서 이동 중이지도 않은, 상륙작전 준비에 몰두할 수 있었던 장교는 전체의 1/5 수준이었다고 합니다. -_-;

당시 미국은 공격을 전제로 하는 해병대의 폐지까지 논의되던 상황이었습니다. 안 그래도 찬밥 대접 받는 해병대인데 2차대전 종전 후 이제 좀 평화롭게 살자는 분위기에 해병이 좋은 대우를 받을 수는 없었죠. 예비군과 함께 대서양 쪽의 해병 2사단에서도 최대한 병력을 받아옵니다. 이렇게  1, 11 해병연대는 작전에 투입될 수 있었지만 동원하기로 한 7 해병연대는 도착하지 못 합니다. 그나마 11연대는 포병이었죠. 그 때문에 국군 해병대가 동원됐죠. 대대 규모였던 해병대는 제주도에서 3천명의 신병을 뽑아 순식간에 연대 규모로 성장합니다. 훈련이요? -_-; 글쎄요. 한국에 있던 미 해병 5연대 장교들은 상륙작전 준비는 물론 국군 해병대에 장비부터 훈련까지 도맡아 해야 했습니다.

이 때 한 해병대 신병의 일기를 소개합니다.

"해병대.
나는 이 세 글자에 홀려 나의 청춘을 바친다. 나는 사랑하는 고향의 갖가지 추억을 가슴속 깊이 간직한 채 포화의 사정권 내에 서 있는 것이다.
청년이기 때문에 반드시 죽어야 할 아무런 이유도 나에겐 없다. 다만 나로 하여금 싸움을 하게 하고, 사람을 죽이게 하는 것은 인간이라는 추악한 조건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적이면 또 공산당이라면 죽이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이것은 4·3사건이 준 뼈아픈 교훈이다. 아직도 인간다운 체험을 겪지 못한 애송이인 나로서 이 싸움은 치가 떨리도록 통쾌하다."

아마 4.3 사건 때 우익 쪽이었던 것 같은데... 해방 후의 혼란이 한 청년에게 어떤 영향을 미친 건지 생각해 보게 되는 부분이죠. 이런 싸움을 "통쾌하다"고 했던 청년의 마음이 어떻게 변했는지는 이후에 다시 보여드리도록 하죠.

이 때 미 해병대는 인천에 상륙하는 것과는 별개로 최선을 다 합니다. 폐지 논의까지 나왔던 해병대를 살리기 위해서였죠. 한국 해병대 역시 최선을 다 했습니다. 자신들의 전투력을 인정받아야 했으니까요. 미국에게 한국을 인정받는 것, 이 때 그럴 방법은 피밖에 없었습니다.

이 때 또 다툼이 일어납니다. 낙동강 돌출부, 영산 방면이 위험해지면서 워커가 9월 2일에 해병 5연대를 투입했거든요. 스미스 해병 1 사단장은 5연대 없이는 상륙을 할 수 없다면서 버텼고 10군단장으로 임명된 알몬드는 어쩔 수 없다면서 차라리 7사단을 선봉으로 투입하면 되지 않느냐고 달랩니다. 스미스는 끝까지 버텼죠. 다음 날 맥아더는 해병 5연대를 상륙부대로 돌리라고 명령합니다.


"우리는 사생아 신세구만"

워커는 이렇게 낙동강 방어선을 맡으면서도 휘하 병력을 뺏기는 상황에 계속 처하게 됩니다. 낙동강을 지켜라, 근데 병력은 우리가 먼저다 이런 상황이죠. 이 정도면 워커가 국군에게 짜증냈던 것도 이해가 되긴 합니다. -_-;

스미스 해병 1 사단장이 7사단을 무시했던 이유도 이해 되긴 합니다. 일단 이 부대가 훈련을 제대로 못 한 상태였거든요. 그냥 일본의 치안 방어에 투입됐던 부대가 훈련을 하면 얼마나 했겠습니까. 이들이 제대로 된 병력을 확보할 시간은 부족했고, 8천 7백명이나 되는 카투사가 투입됩니다. 미군이 국군을 믿지 못 했던 만큼, 한국인이 다수 들어간 7사단을 믿기는 더 힘들었죠.

여기다 상륙작전 때 공수부대로 쓰려던 미 187 공수연대의 투입도 물건너 갑니다. 이 때문인지는 몰라도 국군 17연대가 동해안 전선이 안정된 후 급히 배를 타게 됩니다.

다음은 이 작전에 투입할 수 있는 선박, 이건 정말 미국식으로 해결합니다. -_-; 인천상륙작전에 동원된 선박은 무려 261척이었습니다. 지금 우리가 보는 입장에서는 여유가 남긴 해요. 북한군의 상황은 최악 오브 최악이었으니까요. 하지만 덕분에 낙동강에서 미군의 상황도 최악 오브 최악이 됩니다. 날씨 떄문에 공군의 부재 역시 큰 이유였지만 낙동강에서의 미군(물론 국군도 포함)은 유럽이나 태평양에서는 겪어보지도 못 한 최악의 상황에 직면하게 됩니다. 모든 보급이 상륙부대로 돌려졌으니까요.


"우리 사생아 맞대도"

반격 과정에서 다시 설명하겠습니다. -_-a

여기다 태풍이 두 번이나 들이닥칩니다. 9월 4일에 온 태풍 "제인"은 풍속이 50m나 됐고, 파도가 13m나 됐습니다. 36시간을 낭비했고 이에 대한 대책회의가 열렸죠. 맥아더는 이렇게 말 합니다.

"전지휘관은 탑재하는데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 예정된 날짜에는 탑재가 끝나건 말건 출항하라"

... -_-;

13일에는 "케지아"호가 일본에 옵니다. 미군은 이게 오기 전에 미리 출발합니다. 항구보다 바다 위가 낫다는 것이었죠. 덕분에 화물들이 떠내려가고 병사들은 배멀미로 고생했습니다. 맥아더도 13일에 기함에 타려 했지만 태풍 때문에 밤이 돼서야 탈 수 있었고 110기의 항공기를 싣고 투입되기로 했던 항모 복사(Boxar)호도 14일 저녁에야 겨우 인천으로 향할 수 있었습니다.

태평양 전쟁 때 홀시가 태풍 때문에 많은 배를 잃었다는 것은 예전에 쓴 적이 있었죠. 안 그래도 민감할 때 미 수뇌부는 이 때문에 더 큰 걱정을 하게 됩니다. 맥아더는 위에서 적었듯 다 못 싣더라도 최대한 빨리 출항하라고 했고, 다행히 큰 피해를 막을 수 있었으며 상륙작전을 제 시간에 할 수 있었습니다.

... 이러고도 어쨌든 제 시간에 도착한 걸 보면 역시 미국은 미국입니다 -_-;

이런 태풍의 위험과 영천에서의 상황으로 미 합참은 작전 연기부터 New Korea 계획까지를 맥아더에게 통보합니다. 맥아더는 워커를 믿었고, 워커는 국군을 믿... 은 건 같진 않지만 어쨌든 국군에 맡겼습니다. 국군은 영천에서 승리했고, 낙동강은 안정됐으며, 맥아더는 상륙작전을 실행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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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중요한 건 북한군이 인천에 상륙할 것이다는 것을 예상하지 못 하는 것이었습니다. 안 그래도 북한군을 과대평가하고 있었던 상황, 그 중요한 서울에 많은 병력이 모여 있고 상륙을 예상했다면 결과는 장담할 수 없으니까요.

실제 해병대는 이 작전을 자조적으로 "공개된 작전"이라고 불렀습니다. 한국 코 앞 일본에서 준비하는데 아예 모를 수가 없었죠. 거기다 은밀히 준비하는 것도 아니고 시간을 맞추기 위해 미친 듯이 급하게 준비하는 것이었습니다.

이후 1951년 5월 15일에는 재일교포 18명이 체포됩니다. 이들은 인천상륙작전을 담은 기밀문서를 9월 8일에 이미 접수한 상태였습니다. 이것 말고도 북한은 상륙작전 2주일 전, 그러니까 9월 공세가 시작될 때 이미 인천으로의 상륙 기도를 알고 있었다고 평가됩니다.


그것만이 아니었습니다. 모택동은 9월 공세 직전 김일성에게 이런 조언을 합니다.

- 낙동강의 전선이 교착상태에 빠진 것은 적이 아군을 막아낼 능력이 있고 새로운 작전을 구상한다는 것이다.
- 그 작전은 상륙작전이 될 것이며 인천 아니면 남포가 될 것이다.
- 이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전선을 뒤로 물리고 치고 들어오는 적을 각개격파해야 한다.

무서울 정도로 정확한 판단이었습니다. 하지만, 김일성은 이걸 귀담아 듣지도 않았고, 이런 말이 나왔다는 것을 알리는 것도 금지합니다.

김일성이라고 서울을 소홀히 하려 한 건 아니었습니다. 인천부터 서울 사이에 18사단이 신편을 완료한 채 대기했고 인천에는 9사단 87연대와 849대전차포연대가 있었습니다. 철원에서는 25여단이 신편 후 훈련 중이었죠. 그 외에 평양과 사리원에서 새로운 부대가 훈련중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18사단은 9월 공세에서 낙동강으로 투입, 상륙작전 당시 서울에 남아 있던 건 1개 연대 뿐이었습니다. 9사단 87연대 역시 출발해서 김천에 있었죠. 상륙작전의 요충지인 월미도를 방어하던 병력은 불과 400, 인천 시내를 방어하던 병력은 2천 정도였습니다. 여기에 7만 5천이나 되는 상륙부대가 들이닥쳤죠.

맥아더의 의도대로 김일성은 아군이 상륙작전을 할 거라는 생각은 했지만 이 정도로 대규모로, 다른 곳도 아닌 인천으로 향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도 못 한 것이었습니다.

"멀지않아 우리는 인천에 상륙하게 된다. 인천의 상륙은 곧 서울의 입성을 말하는것이며 이에 앞서 우리는 놀란 만한 작전을 하게 될 것이다. 이번 전개될 작전은 UN군과 우리 해군과 해병대는 결코 기대에 어긋나지 않을 것이다. 현재 우리 해군은 서해에 있어서 2중 3중으로 해안을 봉쇄하고 있으며 적의 해상 출몰은 상상도 못할 실정이다"

손원일은 8월 중순 기자들 앞에서 이렇게 말 합니다. 이는 8월 18일 부산일보에 실렸죠. 상륙장소를 다 말 해준 거나 다름 없었습니다. 헌데 나중의 증언에 따르면 상륙작전을 위해 배에 탈 때까지도 어디로 갈 지는 정말 몰랐다고 합니다. -_-; 치명적인 문제가 될 수 있었는데, 오히려 이게 훌륭한 뻥카가 돼 버렸죠.

맥아더와 미 해군이 상륙작전 직전가지도 최대한 공을 들인 것은 기만책이었습니다.

9월 12일에는 미 육군 코만도와 영국 해병 코만도가 군산에 상륙해 위력수색을 실시했고
13일에는 미영의 전함들이 진남포, 삼척, 원산 일대에 포격을 실시합니다. 인천상륙작전의 포격 역시 13일에 시작됐고, 규모가 똑같았죠.
14일에는 군산 해안의 주민들에게 해안에서 물러날 것을 종용하는 전단이 살포됩니다. 이와 함께 군산 주변 50km 일대까지 항공 폭격을 감행했죠. 여기에 동해안의 장사동에 한국 해병대가 투입됩니다. 잘 됐으면 반격 과정에서 양동이 될 수 있었겠지만 그것까진 못 가고 많은 피해를 입었죠.
부산에 있던 미 해병 5연대는 군산을 모형으로 한 예행연습을 합니다. 이건 반공개적으로 진행됐고, 적은 물론 아군에게도 "군산에 상륙한다"는 인상을 심어줬습니다.

상륙 당시, 수원에서 부평, 인천까지 가는 도로에는 마치 개전 당시 국군이 그랬던 것처럼 적의 보급품이 널려 있었습니다. 적이 이것을 눈치챘다면 병력은 못 해도 보급품이라도 안정된 장소에 숨겼거나 일선에 투입했을 겁니다.

인천의 만조에 맞추기 위해서는 9월 중순을 지나면 10월 중순이 제일 알맞았습니다. 미군 스스로도 반대했듯 상륙작전에는 많은 시간이 소모되는 것이고, 미군은 10월에 대규모 상륙작전이 있을 거라느니 하는 말을 반공개적으로 내뱉습니다. 이 역시 아군은 물론 적도 속이는 게 되었죠.

인천상륙작전은 기습이 아닌 압도적인 화력으로 밀어붙인 작전일 뿐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말씀드렸듯, 적은 아군이 상륙할 장소도 시간도 파악하지 못 했죠. 대은은 거시은이라고 했죠. 많은 정보가 그들에게 갔지만, 그들은 이것 중 진실을 가려내지 못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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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중요한 문제 하나가 남았죠. 상륙의 목표가 되는 인천의 환경이 어떤지 미군은 모르고 있었습니다.

맥아더는 인천상륙작전에 사인을 하자마자 전화를 겁니다. 8월 13일이었죠.


그 대상은 해군 참모총장 손원일이었습니다. 미군의 어떤 장교보다 먼저 손원일을 찾은 이유는 간단했습니다. 인천과 서울의 정보를 얻어내는 것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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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리바바 사르쟈
12/09/27 2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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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시작되는 군요. 앞으로가 더욱 기대됩니다.
풀빵군
12/09/27 21:47
수정 아이콘
잘 읽고 있습니다! 인천 상륙작전이 노르망디의 약 1.4배 규모로 역사상 최대 규모의 상륙작전이라죠....그것보다도 모르고 있었는데 양동작전이 꽤 다양했네요.
Darwin4078
12/09/27 21:49
수정 아이콘
매트릭스 OST를 듣고 있어서 깜짝 놀랐지 말입니다.

제가 추천해드린 브금이 언제 나올까 항상 지켜보고 있습니다.

언제나 좋은 글 감사드립니다.
HealingRain
12/09/28 0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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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우~ 글만 읽었는데도 뭔가 짜릿짜릿한 기분입니다. 브금이 새삼 적절하게 느껴지네요. 으흐흐...
사티레브
12/09/28 0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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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래야 전쟁답지! ... 흐으
blue wave
12/09/28 0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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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와와와 인천상륙작전에 대해서 이렇게 깔끔하게 정리된 글은 처음입니다. 근데 미군이 대 독일전에 비해서 한반도에 투입한 병력이 적은 것 같은데... 왜 그런가 싶네요.
눈시BBbr
12/09/28 0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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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 감사합니다.
둘은 아예 다르죠. 전자는 모든 것을 쏟아붓는 세계대전이니까요.
일단 시간이 없었습니다. 거의 다 미군으로 채우려다가 예비역까지 총동원해도 안 돼서 국군을 다수 불러야 했고, 7해병연대나 187공수연대는 도착 못 했죠. 진짜 미친듯이 급하게 세운 작전인데 성공한 겁니다.
거기다 미국 내에서는 총동원령도 없었어요. 그 상태에서 미군은 투입할 수 있는 "모든" 병력을 한국에 투입한 거였죠. 하지만 중공군이 오니 미군이 병력 부족에 시달리는 일이 벌어집니다. -_-; 현장에서는 병력 좀 더 달라고 하지만 미 본토에서는 그럴 수 없었죠. 모든 걸 전시체제로 바꾼다는 건 미국의 국운을 한반도에 거는 거나 다름 없었거든요.

문제는 단지 한국이 아니었죠. 압록-두만강까지 진출한다 한들 중국과 국경을 맞대게 되고 소련과도 맞대게 됩니다. 중국은 포기하지 않을 거고 대체 어디까지 들어가야 전쟁이 끝나냐의 문제가 생기죠. 베이징? 난징? 여기다 소련이 정식으로 참전하게 된다면? 그건 세계대전이죠. 2차대전 때 추축국들은 서로 떨어져 있기라도 했지 그게 끝난 지 얼마 안 된 상황에서 더 거대할지도 모르는 적과 세계대전을 다시 벌여야 되는 상황에 처하게 된 거죠.

이건 적 쪽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모택동 역시 이대로 미군을 내쫓고 한반도 전체의 적화가 가능하다는 꿈을 꿨습니다. 정신 차린 아군의 화해(火海)전술에 밀려 정신차리게 됐지만요. 어느 쪽도 상대를 확실히 내몰 수 없다. 스케일을 더 키우면 정말 세계대전이다. 한국/북한을 지키는 데 최선을 다해야 하지만 통일까지 시켜줄 필요는 없다.

이렇게 된 거죠. 땅따먹기는 해야 되고 우리 진영이 잘 나가야 되는데 상대를 너무 건들면 세계대전이 되고... 한국전쟁의 성격이 복잡하긴 하지만 이쯤 되면 대리전이죠 -_-;
blue wave
12/09/28 1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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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감사합니다. 의문이 이렇게 잘 풀렸네요~~~ 2차 세계대전 이후 확전이 될까봐 두려워했던 거군요. 한반도는 분단을 피할 수 없는 국운이었던 것일까요... 슬픕니다.
Je ne sais quoi
12/09/28 1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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굉장하군요. 맥아더의 연설도 그 후의 과정도 모두 다 대단합니다.
12/09/28 1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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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건 정독이 제맛.
생각이
17/01/31 0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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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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